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버트란드 러셀 지음 / 사회평론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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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고 있는 세 명의 무신론자가 있다.  첫째, <코스모스>의 저자이자 대중과학자 칼 세이건이다.  둘째, <만들어진 신>의 저자이자 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다.  그리고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이다. 이들 저서를 일독하며 내 마음은 제각각이었다. 종교적 열정에 심취했을 때 읽은 도킨스의 저서에는 거부감이 가득했다.  종교와 멀어졌을 때 만난 세이건과 러셀의 논리에는 공감할 구석이 많다고 생각했다. 지난 반생을 되돌아보니 나는 종교와 반종교 사이를 오갔다.  지금 내 종교적 정체성은 불가지론이다.   불가지론(不可知論)이란 사물의 실재인 절대자나 신은 인간의 지식으론 파악할 수 없다는 견해다. 하여 신이 없다고 확신하거나 있다고 주장하는 쪽과는 성질이 다르다.

 

이런 상태는 보기에 따라 양다리 걸치기나 줏대 없는 세계관 쯤으로 폄하할 수 있다.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들의 심리 때문이다.  나는 여러 종교에 호감을 품었다.  교회에 다닌적도 있고 불교적 세계관에 끌린 시절도 있었다. 그 생각은 발전해서 모든 종교가 그 나름 가르침이 있고 배울점이 있으며 다양한 종교는 형식만 다를 뿐, 하나의 진리를 향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종교 사이의 분쟁과 모순을 피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진리는 하나가 분명한데, 그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세계관이 진리라고 주장한다.  싸움은 피할길 없고 역사가 보여주듯이 인류는 종교적 차이로 전쟁과 살육을 반복해 왔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개신교는 같은 뿌리였던 천주교를 비난하고, 이슬람은 기독교와 2천년간 대립해 왔으며, 불교는 석가모니가 죽자 그의 사상을 따르지 않고, 우상과 분파를 세웠다.

 

모든 종교는 평화와 사랑 같은 보편적인 가치를 가르친다.  그런데도 인류 역사를 되돌아보면 종교인들은 언제나 서로 싸우고 피흘렸을 뿐이다.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짧은 글 한 편은 1927년 3월 6일 영국 비종교인협회 런던지부의 배터시 읍공회당에서 강연한 내용을 담아내고 있다.  러셀은 이 강연에서 자신의 종교관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  2천년간 기독교인들이 지배한 유럽 땅에서 비록 그 열광이 조금은 식어버린 이후라지만 비기독교적 종교관을 드러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비난과 논쟁이 평생 러셀을 따라 다녔지만 그는 결코 종교인들의 신념에 굴복하지 않고, 종교없이 세계와 인간을 이해하고자 했던 합리주의 세계관을 지켜냈다.  이 책,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사회평론, 2005년)는 러셀이 평생 연설과 기고를 통해 반종교적 가치관을 드러낸 글을 엮었다. 

 

세상은 시초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누가 날 만들었는가'란 질문의 종착지엔 반드시 신이 설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신학이 내세우는 제1원인론의 실상이다. 러셀은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을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에도 똑같이 답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절대자이기에 원인없이 존재할 수 있다면, 세상도 마찬가지로 원인없이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러셀은 `사물에는 시초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야말로 우리 상상력의 빈곤'이라 말하며 제 1 원인론의 비논리적 결말을 지적한다. 대중 과학자 칼 세이건도 <코스모스>에서 비슷한 말을 했다.  칼 세이건이 러셀을 읽었는지는 모르지만,  제1원인론이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존재의 근원에 대한 사색을 논리로 시작해 신학으로 마무리 짓고 있어서다. 

 

"신이 무(無)에서 우주를 창조했다는 답은 임시변통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근원을 묻는 이 질문에 정면으로 대결하려면 당연히 `그렇다면 그 창조주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을 해결해야 한다.  만일 이 질문에는 답이 없다는 식의 결론밖에 내리지 못한다면, 차라리 우주의 기원 문제에는 답이 없다 하고 한 단계 단축하는 것이 어떨까?  또 한편으로, 신은 항시 존재했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역시 한 단계 줄여, 우주가 항시 존재했다고 하면 어떻겠는가"  <코스모스>, 칼 세이건

 

러셀은 사람들이 종교를 갖게 되는 과정상의 문제도 지적한다.   절대자를 향한 확실한 증거나 이론 때문에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극소수 예외가 있긴 하지만 어떤 사람이 받아들이는 종교는 그 사람이 살고 있는 공동체의 종교이기 마련이다."(19쪽)  인간에게 종교는 환경적 영향의 부산물과 같다. 이란에 태어난 사람이 이슬람교를, 캄보디아에 태어난 사람은 소승불교를, 러시아에 태어난 사람은 그리스 정교를, 이탈리아에 태어난 사람은 로마카톨릭의 신자가 될 확률이 분명히 높다.  러셀은 불교,힌두교,기독교,이슬람교 이 모든 종교가 주장하는 진리가 제각각이니 논리적으로 봐도, 하나만 빼고는 진실일 수 없음이 자명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가 20세기 수학과 논리철학의 귀재임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들은 안정에 대한 욕구,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종교 생활에 전념한다고도 말한다.  오늘날 많은 종교인들이 주술적 의미의 `기복신앙'에 빠져든 것만으로도 이는 분명하다.  러셀은 이것을 `나를 돌봐줄 큰 형님이 계시는 것 같은 느낌에 대한 갈망'이라 표현한다.  러셀은 예수의 도덕적 성격에 중대한 결함이 한가지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예수가 지옥을 믿고 있었다는 점 때문이다. "나는 누구든 진정으로 깊은 자비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영원한 형벌 따위를 믿을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34쪽)  비신자들도 성경 혹은 경전을 권위에 압도당해 읽기 마련이다. 우리도 분명 그런 생각을 했을 테지만 그냥 넘기고 말았을 것이다. 러셀은 경전을 읽을 때도 자신의 합리주의적 관점을 적용한다.  그것이 옳고 그르냐를 떠나 지식인은 진정 어떤 태도로 세계를 검토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듯하다. 

 

중세가 종교심판소의 고문과 마녀들의 화형을 실행했을 정도로 잔인했던 이유를 러셀은 신약성서 속에 나타난 예수의 언행에 일정 부분 책임을 돌린다.  예수는 자신을 따르려거든 부모,형제, 자매를 버릴 각오를 하라 했고 제철이 아닌 무화과 나무에 열매가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화과를 영원히 열매 맺지 못하게 했으며, 성령을 욕되게 말하는 자는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저주의 말을 남겼다.  러셀은 신약성서가 기록하고 있는 예수의 언행의 상당 부분이 훗날 기독교의 무관용과 잘못된 근본주의 종교관의 제1인 원인이라 지적한다.  인류역사에서 이런 무관용은 대개 종교적 차이로 발생했다. 역사는 중세 십자군이 예루살렘에서 이교도에게 벌인 살육을 `한바탕 축제'에 비유하곤 한다.  

 

"내 생각으로는 진실로 자비로운 성품을 지닌 사람이라면 결코 그와 같은 두려움과 공포를 이 세상에 심어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35쪽

 

러셀이 기독교 자체를 비판한 것, 종교에 거부감을 갖게 된 것은 역사와 상식, 즉 합리주의에 기반한 철학적 태도 덕분이다.  하여 러셀은 역사상 인류는 종교를 통해 행복해졌는가, 그들의 삶이 더 나아졌는가 묻고 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더이상 시를 쓸 수 없을 거라던" 1,2 세계대전을 겪은 러셀이다.  그곳에서 종교는 어떤 일을 했는가.  히틀러가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내 집단 학살한 것은 종교에서 시작된 차별 관념 때문이다.  중세 종교재판소의 고문과 마녀들에 대한 화형식은 기독교 교리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역사였다.  그는 "인간의 정서적 발전, 형법의 개선, 전쟁의 감소, 유색 인종에 대한 처우 개선, 노예제도의 완화를 포함해 이 세계에서 단 한 걸음이라도 도덕적 발전이 이뤄질 때마다 조직화된 교회 세력의 끈덕진 반대에 부딪히지 않았던 경우가 한번도 없었다"고 주장한다.  교회가 인류의 진보를 막아왔고 삶을 획일적으로 규정하고 억압해 왔음을 러셀은 폭로한다.  

 

독자는 러셀의 극단적인 반기독교적 논리를 모두 수긍할 순 없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알 수 없는 경우에 우리는 그것을 지적인 문제로 다루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심리학자 칼 구스타브 융의 논리가 떠오른다.  인간의 인식능력엔 한계가 있고 생각은 바뀔 수 있다.  전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은 평생 무신론자로 살았지만 일흔이 넘어 신실한 종교인으로 돌아왔다.   종교를 갖지 않고도 사람은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는가, 라는 보다 실질적인 문제에 주목해보자.   러셀은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이단아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가 생각하는 훌륭한 삶은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이었다.  그것은 결코 반종교적인 삶이 아니다.  그는 평생 많은 독자와 시민들의 존경을 받을만큼 다양한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활발한 사회참여를 보여주었던 지식인이었다. 그는 종교에 예속된 인간이 아니었지만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학자였다.

 

그가 훌륭한 삶의 조건으로 내건 "사랑과 지식"은 늘려갈수록 좋은 것이다.  종교인이란 울타리 안에서 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그 두가지를 키워갈 수 있다.  러셀의 전체 종교에 대한 부정과 비난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지만, 그가 종교의 대안으로 내건 `사랑과 지식'이란 명제에는 적극적으로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인이라고 해서 올바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이라크를 침략해 수많은 민간인을 살해한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테러와 보복전은 민족보다 종교라는 이질성으로 범죄를 합리화 하는 측면이 강하다. 이슬람 세계의 수니파와 시아파는 천년 넘게 사소한 교리상의 차이 하나로 인종청소에 맞먹는 범죄를 상대에게 저질러왔다.

 

이 세계에는 다양한 종교가 있고, 그들 종교는 대립한다.  종교인들은 종교적 가르침에 맞는 삶을 살고 있지도 않다. 그러면서,  종교간 대립과 반목을 부추긴다.   과학은 우주의 기원이란 의문을 풀지 못했다. 첨단 과학이 도달하지 못한 지점에 종교는 분명한 설명을 내놓는다. 하지만, 종교도 역사를 거치며 자신의 오류를 수정해왔다.   그들이 비난한 과학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교만하지 말아야 할 것은 과학만이 아니라, 종교 자체이기도 하지 않을까.  무엇이 진실인지 인간으로선 알 수 없다.  종교적 가르침을 믿는 것은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저 `믿는 것이다.'  내겐 종교가 없다.  무엇이 진리인지 확신할 수 없다.  그것이 지금 내가 도달한 임시적인 결말이다. 무지(無知)는 불가지론의 중요한 결말이지만 내 생각엔 불완전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결론이란 생각도 든다.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공부해야 하고 겸손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을 나는 러셀이 표현한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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