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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화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무겁다고 깊이가 있는 건 아니다. 가볍고 쉬운 글 속에 깊이를 담을 수 있어야 한다." 시인 오규원의 말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이 그렇다. 문장은 짧고 평이하다. 화려한 수식과 비유도 섞여 있지 않다. 그처럼 글을 써 소설가가 될 수 있다면, 누구들 도전해 보고 싶다. 문장에서 독자를 주눅들게 하지 않으니 맘편히 이야기에 몰입한다. 서사는 늘어지지 않는다. 속도감이 페이지를 타고 과속하기 일수다. 독자는 어느덧 앉은 자리에서 책을 다 훑고 만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특기는 이것뿐이 아니다. 그는 추리소설과 미스터리 서사를 통해 재미만을 추구하지 않는 작가다. 그의 작품들에는 평범하지 않는 가르침이 담겨있다. 그 교훈들은 사회와 개인의 문제의식으로 동의할 수 있는 깊이를 추구한다. 10년간 작가의 손을 통해 개작의 과정을 거쳐 완성된 <몽환화>(비채,2014)는 이 모든 장점들이 응집돼 있는 소설이다.
이 작품은 보기드물게 두 개의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프롤로그 1과 프롤로그 2는 별개의 이야기로 독립성이 있다. 각개의 프롤로그는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전혀 다른 목적지로 향할 수 있는 동력이 충분하다. 첫번째는 잔혹한 살인극이고 두번째는 사춘기 소년의 실패한 짝사랑이다. 작가는 이 두가지 다른 이야기를 갖고 하나의 미스터리 소설를 엮어내는 마법을 보여줄 것이다. 이 별개의 서사가 씨줄과 날줄로 `어떻게' 엮이는지, `얼마나'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흘러가는지, 그런 과정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려 하는지를 독자는 주시해야 한다. 속임수와 우연, 비논리적인 전개는 통하지 않는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 모든 난관을 제거하고 독자의 미소와 다시 만나게 될까.
프롤로그를 넘은 소설은 숨돌릴 겨를도 없이 하나의 `죽음'을 서술한다.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주요 인물중 하나인 전직 국가대표 여자 수영선수 `아키야마 리노'의 사촌 도리이 나오토의 자살 사건이 그것이다. 나오토는 아마추어 밴드를 결성하고 천재성을 발휘하며 음악적으로 성장하던 가운데, 유서 한장 남기지 않고 아파트 창문에서 뛰어 내린다. 리노는 장례식장에서 오랜만에 할아버지 슈지와 재회한다. 슈지는 유전자를 조작해 세상에 없던 꽃을 만드는 바이오테크놀러지를 연구하는 학자다. 그날 이후, 슈지의 집에 자주 드나들던 손녀 리노는 할아버지가 다양한 꽃을 키운다는 사실을 알고, 그에게 꽃 블로그를 만들어 선물하려 한다. 그런데, 슈지는 블로그에 `노란 나팔꽃' 만은 싣지 말것을 당부한다. 그리고, 얼마 후 슈지는 강도살인 사건의 피해자로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사실 그것은 특수한 꽃입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자연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식물입니다.'" 114쪽
나오토의 자살, 할아버지 슈지의 죽음, 그리고 노란 나팔꽃 ! 미스터리를 엮을 재료는 모두 등장했다. 이제, 그 재료를 요리할 인물이 나올 차례다. 소설의 초반, 일사분란하게 등장한 죽음이 미스터리의 추동엔진으로서 극의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소설의 주요 인물인 리노와 소타는 비슷한 또래의 일본 젊은이다. 전직 수영선수였던 리노는 올림픽 대표에 오를 정도로 기량이 뛰어난 선수였다. 그런데, 갑작스레 발병한 공황장애로 심리적인 난관에 봉착하고 난 후 자신의 재능을 의심하고 꿈을 버린다. 프롤로그에서 짝사랑의 주인공이었던 소타는 일본에서 전도유망한 학과였던 원자력 공학과 학생이지만, 311 후쿠시마 대지진 이후 쇠퇴기로 접어든 원자력 발전의 밝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방황한다. 리노와 소타는 꿈을 잃어버린 젊은이들이다. 그들은 국경을 넘어 사회,경제적 난관에 봉착한 우리 시대의 청년들을 대표한다.
사건을 도맡은 형사 `하야세'는 아내와 이혼한 상태로 혼자 살아간다. 다른 여성과 바람을 피우는 바람에 아내와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버림을 받았다. 수년만에 아들은 하야세에게 전화를 걸어와 아버지가 사건 해결의 주체가 되어주길 소망한다. 편의점에서 도둑으로 몰릴 뻔한 하야세의 아들은 몇 해 전 슈지의 증언으로 누명을 벗었다. 사건 해결이 소원한 아들과 아버지의 재회로 연결되도록 이야기를 엮은 작가의 뜻깊은 의도가 읽히는 부분이다. 가족애와 의리를 드러내는 설정은 소타의 어머니와 배다른 형, 요스케의 배려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몽환화에 얽힌 고통스런 과거를 갖고 있는 소타의 어머니(프롤로그 살인 사건의 유일한 생존 아기)와 형 요스케는 어떻게든, 가족의 불행하고 아픈 과거가 막내 소타에게까지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도록 노력한다. 보편적인 가족애과 동시대의 청년들의 좌절과 희망을 드러내는 이야기는, 이 미스터리 소설을 차별화 한다.
" 아티스트에게 벽이란 없어. 그렇게 느낀다면 그만두는 편이 나아. 진화 같은 거 안 해도 괜찮아. 즐기면 되는 거야. 나도 말이야. 수십 년이나 같은 일을 하고 있어.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어. 하지만 그걸로도 괜찮다고 생각해. 내 관객은 만족해주니까. " 371쪽
일본 에도시대는 흔히 강호시대(江戶時代)라고도 불린다. 정권의 본거지가 오늘날 도쿄인데 그곳의 옛 이름이 `강호'였기 때문이다. 에도 시대는 무사 계급의 최고 지위에 있던 쇼군이 권력을 잡고 전국을 통일 지배하던 시기였다. 도쿠카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은 1603년부터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가 해체되고 국왕 체제로 전환한 1867년까지 260년 간의 봉건시대를 가리킨다. 에도 시대에 노란 나팔꽃은 흔했다. 사람들은 다양한 나팔꽃을 재배했다. 더불어 나팔꽃 씨앗을 먹는 유행이 번졌다. 노란 나팔꽃에는 환각 작용을 일으키는 성분이 있었고, 그것이 사회문제로 불거질 위험에 처하지 막부 정권은 노란 나팔꽃의 유통을 적극적으로 막아섰다. 차츰 시장에서 노란 나팔꽃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런데 막부의 관리하에 몽환화라 알려진 이 꽃은 은밀히 재배 된다. 그후, 마취약으로 쓰이기도 하고 현대에 들어선 범죄 자백 보조제로 쓰이기도 했다. 이 소설은 이같은 몽환화로 알려진 노란 나팔꽃의 위험성을 소재로 삼았다.
때로는 예술가의 영감의 재료로 사용되며 위대한 작품을 낳는 일을 하지만, 어떤 이들에겐 환각 작용을 일으켜 살인 등 강력범죄를 부추기는 위험 물질이 되기에 이른다. 에도 시대에 번성했던 노란 나팔꽃이 왜 지금엔 모두 자취를 감추었는가. 이 하나의 모티프에서 히가시노 게이고는 311 동일본 대지진의 방사능 오염 사고와의 연계점을 찾았을 것이다. 관상용으로도 매력 만점이자 의료,수사에 도움이 되는 몽환화라지만 사람들의 무절제함에 노출되면 광폭한 살인과 폭력을 낳는 몽환화. 막부 정권의 통제에도 여전히 은밀히 유통되는 마약적 성질. 오늘날 원자력과 방사능은 판도라의 상자에 비유되곤 한다. 신화 속 판도라처럼 인간들은 원자력이라는 금단의 상자를 열고 말았다. 소설 속 살인 사건은 역사속 잊혀진 것으로 알려진 노란 나팔꽃의 위험한 등장을 경고한다. 원자력과 몽환화, 여러모로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 `세상에는 빚이라는 유산도 있어. 소타 군.' 다카미는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모른 체해서 없어지는 거라면 그대로 두면 되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는 이어받아야 하잖아? 노란 나팔꽃의 씨앗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확신할 수 있을 때까지 누군가 감시를 계속해야 해. 그것이 마성의 식물을 확산시켜버린 사람의 피를 물려받은 인간의 의무라고 생각해. 도망칠 수 없지.'" 409쪽
1986년 4월 26일 새벽 1시경 우크라이나 공화국 수도 키예프시 남방 130km 지점에 위치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총 4기 원자로 가운데 마지막 4호 원자로가 폭발했다. 당시 직,간접 피해 인구는 300만명, 그 가운데 어린이는 100만명에 육박했다. 체르노빌 원전 반경 30km 주변 인근 100개 마을이 거주 불능 및 사용 불가능 지역으로 선포됐다. 인근 12개 주 2천개 마을이 방사능 피해를 입었고 방사능 구름대는 전 유럽으로 번져나갔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북부 지방을 관통한 대규모 지진과 쓰나미로 인해 후쿠시마 현에 위치해 있던 원자력 발전소의 방사능이 유출됐다. 3년이 지났지만 후쿠시마 원전은 여전히 수습되지 못하고 방사능을 해양과 공기중으로 내보내고 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 수기인 자신의 책 <체르노빌의 목소리>을 이렇게 자평했다. "나는 과거에 대한 책을 썼지만 그것은 미래를 닮았다."
이제, 한국을 보자. 설계수명 30년을 훌쩍 넘긴 노후한 고리 핵발전소 1호기는 어찌된 영문인지 2017년까지 재가동 승인을 받았다. 이 좁은 한반도에만 23개의 핵발전소가 운용중이다. `원전마피아'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한국 원전은 잦은 고장, 부품비리, 사고 은폐로 얼룩져 있다. 그럼에도 얼마 전 한수원 공사 사장은 언론인터뷰에서 "전문가들이 정밀 점검을 통해 안전하다고 결론을 냈다면, 이를 믿고 경제성을 따져 더욱 안전하게 운영하면 된다" 고 기염을 토했다. 그 `경제성'이란 약방의 감초인가보다. 대통령은 얼마전 세월호 참사 사과 담화를 발표하며 오전엔 하염없이 눈물을 짓더니, 오후엔 중동에 한국 기술로 짓는 원자로 설치행사에 참여한다며 바삐 비행기에 올랐다. 같은날 언론은 "대통령 중동 원전 세일즈 시작"이라며 떠벌렸다. 한반도에서 원전 사고가 난다면 그 피해는 상상불가다. 원전은 인류에게 판도라의 상자가 분명하며, 절대로 건드리지 말아야 할 `몽환화, 그 노란 나팔꽃' 이 아니었겠는가.
책장을 덮으면 비로소 히가시노 게이고의 촘촘한 플롯의 정체가 드러난다. 모든 사건과 인물, 그리고 소품 하나까지 `몽환화'와 연결 돼 있다. 좋은 소설이란 강이 바다로 흘러 하나되듯 부분과 전체가 따로 놀지 않는다.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에 적합한 상찬일 듯 하다. 소설의 모든 요소가 혼연일체를 이뤄 핵심 사건을 해결하고 거대한 주제의식의 표출로 행진한다. 청년 문제, 가족애, 그리고 다시 그들이 꿈을 찾고 회복되는 과정이 살인 사건으로 움츠러진 마음에 따뜻한 온기를 공급한다. 더불어, 미스터리 물에서 시대를 비판하고 감시하려는 의지를 읽어내는 것은 흐뭇한 일이다. <몽환화>는 미스터리로 끌리고 잃어 버린 꿈을 북돋으며 잘못된 한 시대를 날카롭게 은유하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