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머니와 산다
한기호 지음 / 어른의시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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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휴가는 빠르게 지나갔다. 5일에다 징검다리 근무을 거쳐 2일을 보태 7일간 여유로운 시간을 가졌다.  휴가 전 A4에다 일정을 적었다. 그 계획을 거의 대부분 실행했다. 영화를 두 편 봤고, 글을 세 편 썼고, 물놀이를 갔고, 아이와 놀아주고, 그리고 양가 부모님과 식사를 했다. 어디 먼 곳으로 여름 휴가를 떠나지 못한 아쉬움을 빼곤, 평소 바쁘다는 핑계로 못한 일을 원껏 한 것이다. 근무 강도가 주기적으로 바뀌는 회사 시스템 탓에 요즘 난 여유가 없다.  회사 집, 다시 집 회사 생활을 한게 몇 개월 째였다. 그 와중에 찾아온 여름휴가는 말그대로 꿀맛이었다.

휴가 때 가장 잘 한 일을 꼽으라면, 엄마와 함께 보낸 시간이다.  전화를 하고 밥을 먹은게 몇주 만이다. 이,삼일에 한번 꼴로 안부 전화를 하던 내가 몇주간 연락을 끊었다. 남편과 아들 역할을 동시에 잘 해내기란 쉽지 않다. 세상 모든 아들들의 고민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가족이란 무엇인가. 남과 가족이 다른 건, 소원했던 관계도 회복이 쉽다는 것이다. 엄마와 연락을 끊었던 기간의 침묵과 그 무관심이 내겐 너무 힘들었다. 그 즈음 짧지만 고통스런 시간을 보듬아 준 책이 있었다.  출판평론가 한기호의 <나는 어머니와 산다>(어른의 시간,2015)이다.

이 책의 프롤로그는 "2009년 3월 28일 어머니는 내게 오셨다"로 시작된다. 그 시간 이후, 저자는 블로그에 간병일기을 써 올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급격히 쇠약해 지셨고, 치매 초기 증상을 보이기까지 했다.  장남인 저자는 어머니를 모실 각오를 하고 어머니와 살림을 합쳤다.  장남으로서 부모 부양이란 당위로 시작된 어머니와 동거는 그렇게 7년 시간이 흘렀다. 세상 그 누구에게나 평범하지 않을 시간속 상념들이 이 책에 담겨 있다. 누군가의 일기를 훔쳐보는 듯한 호기심, 고통을 담 넘어 지켜보는 안도감,  하지만 누구에게나 닥쳐올수도 있는 현실이란 불안감이 독자에게 깊은 공감과 울림을 준다.

7년간의 간병일기는 다른 듯 하면서 비슷하다.  삶은 습관이고 반복이라 하질 않던가. 잇몸이 닳아 음식을 씹을 수 없는 어머니를 위해, 저자는 매일 국을 끓인다.  국 한가지로 자주 싫증을 내시는 어머니를 위해, 국거리 재료를 달리해 국을 끓여내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는 고백은 고통에 대한 공감보다는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라는 의문을 불러일으킬 지경이다.  휴일에 어머니와 온종일 시간을 보내는 일, 드라마를 함께 보고 말 벗이 되어 드리는 일, 아침 출근길마다 깊은 포옹과 입맞춤을 나누는 일,  저자가 담담히 기록하는 어머니와 일상의 풍경이다. 그러나, 저자는 보살피고 부양하는 자로서의 아들이나 투정부리고 사랑받기만을 바라는 어머니의 단선적인 모습만을 그리지 않는다.

어머니와 함께 산 7년 간, 어떤 변화가 그 둘 사이에 일어났을까.  이 책이 한 효자의 지극정성 간병기로 읽히지 않는 이유를 여기서 찾아야 한다.  치매 초기 증상과 쇠약한 기력으로 거동이 불편했던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아침마다 목발을 짚고 밥을 짓는다. 드라마 내용을 일일이 아들에게 들려줄 정도로 기억력을 회복해 나간다.  아들도 달라졌다. 주변 사람들을 어머니 대하듯 하니 인간관계가 좋아졌다. 무슨 일이 생겨도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버릇이 생겼다. 하여, 저자는 "어머니는 나에게 침묵으로 올바른 인간관계를 가르쳐주신 큰 스승"이라고 적었다.

나이들어 아들의 부양을 받는 부모는 짐이 아니라 생을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들을 보살피고 가르치는 사람이었다. 저자는 어머니와 함께 보낸 7년간 성치 못한 정신과 몸을 갖고도 자신을 묵묵히 챙겨주시는 어머니를 수없이 목격했다.  술에 취해 들어와 컴퓨터 앞에 잠들어 있는 아들의 모습에 안쓰러워 하다, 조용히 컴퓨터 모니터의 푸른 버튼을 대신 누른다.  밤새 지팡이를 짚고 몇 번이나 거실에 나와 집을 살피고,  방에 들어가 잠을 청하는 아들의 몸에 이불을 덮어 주시고 창문을 닫으신다. 낮에는 하루 종일 아들의 귀가를 기다리는 것이다. 저자의 경혐담은 부양의 개념을 `시혜'라는 일방향에서 사랑이라는 쌍방향으로 바꾸고 있다.

"나는 언제부턴가 나보고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라고 하는 이는 되도록 만나지 않고 피하려는 습관이 생겼다. 저마다 사정이 있겠지만 `요양원에 모시니 편하더라, 요양원도 요즘 괜찮다'는 이야기를 쉽게 내뱉는 사람에게는 인간미가 아닌 두려움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인간에는 인간만의 늙어가는 방식'과 `살아가는 방식'이 저마다 있겠지만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의 모성 본능을 자극해 어머니가 인간의 자존심을 최대한 끝까지 지키도록 해 드리고 싶다."   146쪽, 한기호 <나는 어머니와 산다>

다산 정약용의 글에 심취했던 시절, 알듯 모를 듯한 문장과 마주한 적이 있다.  다산은 학문에 뜻을 두어야 독서를 할 수 있다고 했다.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독서하는 사람은 반드시 근본부터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그 근본은 "효도과 공경"이라고 단정지었다.  독서와 효도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독서와 공경은 또 어떤가.  책을 읽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공하기 위해서인가.  한 때 자기계발서들이 겁없이 내걸고 나온것이 독서 성공론이다. 하지만, 물질 사회적 성공에 앞서 인간에 대한 도리를 알지 못한다면?  사람에게 부모만큼 가까운 존재는 없다. 그 부모에게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 인간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인생에서 성공에 이를 수 있을까.

저자는 한국을 대표하는 출판평론가로 살아왔다. 간병 일기의 사이사이 그는 치열하게 읽고 쓰는 삶의 단면을 엿보인다.  혼자된 몸으로 어머니를 챙기고,  하루에 두 세 시간 쪽잠을 자며 쌓여가는 책을 먹어 치우고,  밀려드는 청탁과 강연 일정을 소화하는 중년 남성의 일상을 담아낸 이 책에서 독자들은 따라하기조차 엄두가 나지 않는 `초인'의 모습을 발견한다.  어떻게든 책을 읽지 못하는 핑계거리를 찾아온 독자들의 낯을 부끄럽게 한다.  독서는 지하철에서 졸음 쫓으며 하는 것이며 생각은 뛰다 멈춰서 하는게 아니라 뛰면서 하는 거라던 김미경의 이야기가 뇌리를 스친다.

"누군가와 함께 걸으며 코스모스나 가을 국화에 탄성을 내지르고 싶다. 그러나 일정을 소화하기도 쉽지 않다. 어머니를 모시는 주부의 역할, 두 회사의 경영자, 한기호 개인의 글 공장주 등의 역할을 하다 보니 죽지 않고 살아서 뛰어다니는 것도 벅차다."  248쪽

저자는 젊은 시절 대학에서 배운 것이 없다고 고백한다.  유신 치하의 대학생활이라서가 아니다. 오늘 우리의 대학이라고 다를게 있을까. 그나마 배우고 싶은 교수의 강의는 늘 서론 몇 장을 훑다 끝났고, 그는 배움의 갈증을 책으로 풀어야했다.  가난해서 책을 살 수 없어 서점에 들러 읽고 싶은 책을 쓰다듬다 오곤 했고, 술에 취해 외상으로 책을 잔뜩 사 와선 책값 갚느라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자신의 오늘을 만든 것은 바로 그 시절부터 읽어왔던 책이라고 단정짓는다.  일평생 책을 읽어 부자가 된 것도 아니요, 큰 권력을 휘두르는 것도 아닐테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도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어려운 법이다. 그에게 책은 올곧게 살아가는 근본을 가르쳐준 도구 아니었을까.

책에 빠져사는 한 남자는, 치매 앓는 어머니와 단둘이 산다. 그리고 그 둘은 어머니와 아들로서 점차 서로를 알아간다.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 가장 큰 상처를 받는다는 말이 있듯이, 어머니와 아들도 한지붕 아래 부대끼며 상처를 주고 받는다. 그 가운데, 아들은 깨닫는다. "내가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것 중의 하나는 어머니를 모시겠다고 자원한 일이다".(266쪽)  그는 병든 어머니를 수발하며 사람을 인내하고 사랑하는 법을 다시 배웠다.  아들의 관심과 사랑이 어머니의 건강을 호전시켰고, 자존감을 길러주었다.  곧 닥쳐올 고령화 사회의 표준모델은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에 대한 애정과 관심에 바탕 두어야 함을 이 책은 증거한다. 

여름 휴가에 때맞춰 읽은 책 한 권을 통해, 나는 엄마와 짧은 냉전을 끝냈다.  가정과 사회에서 여러 역할을 소화해내야 하는 한국의 성인 남성들은 괴롭다. 때로 인간 관계가 외줄타기와 같은 상황임을 직감한다. 그럼에도, 그 모두를 조율하며 사랑해야 할 것이다.  다산이 독서의 근본을 효와 공경에 두었듯, 인문학 공부의 근본 또한 그곳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서 소외의 영역으로 내몰리는 것은 사회적 약자들이다.  나이들어 부모를 지극 정성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한 출판평론가의 간병일기에서, 부모와 관계짓는 방법을 다시 배웠다.  책과 어머니라는 큰 스승을 모시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저자의 삶은 독서에 뜻을 둔 이들의 삶에 비추는 서광(曙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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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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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여름은 한 권의 소설로 기억된다.  정유정의 신작 <28>이었다.  개로부터 시작된 인수공통전염병에 관한 이야기였다. 작가는 <28>의 모티프를 그 몇 해 전 있었던 가축살처분에서 따왔다고 했다.  가축전염병 때문에 돼지와 닭과 오리를 산채로 매장해야 하는 풍경은 익숙했다.  포크레인은 땅을 팠고 살아 있는 동물들은 구덩이에 묻혔다.  동원된 공무원들 몇은 과로사 했다.  그 때 죽은 동물들이 수백만 마리는 될 것이다.  작가는 여기서 받은 충격이 상당했던가보다.  소설 <28>에서 작가는 동물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는 인간을 묵시록적으로 묘사한다.  개에서 시작된 전염병은 사람으로 옮겨가고 개를 살처분했던 군인이 한 도시를 봉쇄하고 인간을 살처분하려 한다.


2년이 지난 여름의 초입, 우리는 소설 <28>의 어떤 풍경들을 현실에서 목격했다.  중동 낙타에서 시작됐다는 메르스의 습격이었다. 메르스 사태는 국가방역 시스템의 총체적 구멍에서 기원했다.   무서웠던 건, 소설과 같은 방향으로 흐르는 사태의 흐름이었다.  공기 감염이 의심되고, 지역 전파의 우려까지 돌았을 때, 거리에선 사람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소설의 풍경 그대로였다.  현실이 영화나 소설과 닮아갈 때의 공포는 적지 않다.  정유정의 소설 <7년의 밤>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2011년에 쓰여진 책은 2014년의 어떤 사건의 기시감을 불렀다.   <7년의 밤>은 세령호라는 댐과 그 인근 저지대 마을의 수몰 사고를 미스터리 형식으로 다룬 작품이다. 


세령호에 살해된 채 수장된 `세령'이라는 12살 소녀의 이야기는 2014년 4월 진도 앞바다에서 세월호와 함께 희생된 어린 학생들의 기억을 되살렸다.  소설속 지명과 설정 때문이었을까.  책을 읽다가 출간년도를 다시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간호대학을 나와 문학상 공모에 당선된 이력이 전부인 정유정은 마치 기성 작가들에게 한 수 가르치듯 소설을 쓴다.  <28>에서 보여준 탁월한 문장과 질서 있는 플롯, 거침없는 묘사와 속도감, 서사안에 담긴 상징과 현실 은유에 독자들은 하루키에게서나 맛보았던 소설 읽기의 재미와 흥분을 경험했을 듯하다.  


2년만에 다시 만난 정유정의 작품 <7년의 밤>은 <28>보다 2년 앞서 발표된 소설이다. 작품의 완성도와 주제의식, 문장과 짜임새를 놓고보자면 우열을 가르기 힘든 수작이다.  <7년의 밤>은 `인연과 운명'에 관한 소설이다. 옷깃 정도 스칠 인연이었을 사람이 알 수 없는 운명의 힘에 빨려들어가 엮인다. 작가는 누군가의 삶에 등장할지 모를 이런 순간을 `운명이 변화구를 던진 날 밤'이란 말로 압축한다.  이 소설은 오영제와 최현수의 이야기다.  그들은 세령이란 딸과 서원이란 아들을 두고 있다.  세령은 오영제의 폭력과 최현수의 교통사고와 이어진 살인으로 세령호에 수장 된다.  어린 소녀의 죽음이 인연없는 두 인물의 합작 결과다. 


소설은 인물과 신분의 대비를 드러낸다.  오영제는 부자로서 권력자다.  그는 아내와 딸을 폭력으로 지배한다.  최현수는 가난하다. 전직 야구선수로 살다 부상으로 은퇴해 겨우 식구를 먹여 살린다.  하지만, 아들 서원에 대한 사랑은 대단하다. 그는 능력이 없지만 악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해를 끼칠 사람은 아니었다.  세령댐 보안팀장으로 부임해 오던 날 밤, 그는 오영제의 폭력에 도망치다 자신의 차에 치여 부상당한 소녀 세령을 두려움에 목졸라 살해하고, 세령호에 던져 넣는다. 평범한 가장이자 소시민이었던 그가 어느 날 밤, 살인범으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그를 죽인것은 진정 최현수일까.  보여지는 객관적 사실이 모든 진실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운명이 난데없이 변화구를 던진 밤에는, 안개가 짙고 비가 내리는 금요일 밤에는, 인적이 없고 어두운 호숫가에서는, 죽은 줄 알았던 아이가 눈을 뜨고, `아빠'라고 속삭여 올 때에는,  자기를 찾는 전화벨이 심장을 두들기는 순간에는, 흔히들 무의식이라 부르는 `혼돈' 속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지. 좀 보여줄까?"   122쪽, 정유정 <7년의 밤> 


이 소설이 인물간 설정한 구도와 사건의 얼개는 치밀하고 촘촘해서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세령이라는 소녀의 죽음은 등장인물들의 세가지 포지션을 낳는다.  먼저 죽음을 유발한 자다. 폭군 아빠 오영제일 것이다.  두번째, 죽음의 실행자다.  교통사고를 내고 우발적으로 목을 조른 최현수다. 세번째, 우연히 죽음을 목격한 자다. 소설가 지망생 승환이다.  그는 출입금지구역 세령호에 다이빙을 나갔다 유기된 소녀의 시신을 목격한다. 소설의 초반, 이 세 인물의 동선과 심리를 파고드는 작가의 문장은 소설의 압권이다. 이야기는 이제 오영제의 명분없는 복수와 평범한 소시민이자 남편, 아버지였던 최현수의 어이없는 몰락, 소설가 지망생 승환의 진실에 대한 추적과 탐구로 들어선다.


최현수는 교수형을 당한다. 그의 죄명은 세령을 죽이고, 아내와 세령호 저지대 마을 사람들을 수장시킨 것이다. 사건이 나고, 7년간 최현수의 아들 서원은 세상에 정주하지 못한다. 살인자의 아버지를 둔 아들을 세상은 가만두질 않았다. 능력없는 남편이라고 엄마에게 구박받던 아빠였지만 아들 서원은 세상에서 그를 가장 존경하고 사랑했다.  왜 아버지는 살인마가 되어야 했을까. `7년의 밤'은 아버지를 증오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만약 진실의 조각 하나가 왜곡돼 있다면, 세상에 공표된 사실의 일부가 착각이라면?  그것은 정말 `난데없이 운명이 변화구를 던졌고 그것을 잘 받아치지 못했던 아빠의 사소한 실책'에 지나지 않을 테다.


폭군 오영제는 세령의 실종과 죽음 이후 당당히 정의의 심판자로 나선다.  자신의 딸을 죽인 자를 찾아 똑같이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불탄다. 그러나, 딸의 영혼은 최현수의 교통사고와 목졸림이라는 물리적 사건에 앞서 이미 `살해되었다.'  그것은 최현수의 물리적 살인보다 어쩌면 더 엄중하고 실제적인 살인일 수도 있다.  작가가 이 작품속에서 적극적으로 문제삼고자 하는 맥락이 여기에 있다.  세월호의 침몰과 승객의 죽음은 누구 탓일까.  정의로운 법은 힘없는 일부분만 처벌했다.  메르스 사태의 책임은 어디에 있을까.  바이러스를 들여온 환자 책임이라는 얘기가 돌았지만 그 말은 개그다. 


"스스로 부른 운명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겠다.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너는 아비 목에 수없이 밧줄을 건 놈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있다. 그러므로 내가 풀어야 한다고. 살인범이 아닌 `최현수'라는 불행한 인간의 목에서, 우물에 갇힌 채 죽어간 덩치 큰 남자의 삶에서, 내게 승부구를 요구한 포수의 손에서, 내 아버지의 가슴에서."  515쪽, 에필로그


소설은 다큐가 될 수 없다. 다큐는 사실에 치중해야 한다.  소설은 사실의 빈틈을 다뤄야 한다. 이야기되지 못한 진실의 목소리를 찾아내고 집중해야 한다. 설명될 수 없지만 설명해야 하는 것, 게을러서 착각하고, 손쉽게 망각되기 쉬운 진실의 파편들을 수집해야 한다.  이같은 소설의 본령에 충실한 작품이 바로 <7년의 밤>이다.  정유정은 세상 사람들의 편리한 착각과 망각속에는 결코 간단치 않은 진실이 숨어 있다는 것을 고발한다. 세상은 소수의 오영제가 던지는 변화구를 다수의 최현수가 받는 시스템이다.  그곳에서 권력있는 자는 언제나 진실의 옷을 걸치고 화려한 스폿라이트를 받으며 거짓을 진실로 포장하는데 능숙하다. 


<7년의 밤>속 평범한 가장 최현수의 몰락은 권력의 언어에 길들여진 사람들과 사회에 대한 은유다. 저항하지 않는 사람들, 부당함을 그저 인내하고 노예의 삶을 수락한 사람들에게 객관적 실체 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안위다.  끝까지 `왜'를 추구하지 않는 사회에서 부정의는 시간과 함께 잊혀지며 불편부당을 이야기는 하는 사람은 그저 `불편한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최현수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진실을 안고 교수대에 오른다. 하지만, 그것은 아들을 살리는 것이 아니었고 아들의 존재를 위협하고 있었다. 오영제는 죽지 않았고 7년이란 침묵속에서 서원은 새로운 희생양으로 등극한다.  아들을 구원하는 이가 끝까지 사건의 실체를 추적하고 탐색했던 승환이란 설정은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  진실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결국 그들의 운명을 좌우한다.


정유정은 곧 한국 문단의 대표주자가 될 것이다. 그의 작품은 장편 두 편을 섭렵한 것이 전부지만, 나는 이렇게 단언하겠다.  한국 독자들이 괜히 하루키에 열광하는게 아니다.  하루키는 사소한 소재를 흥미롭게 풀어내는 재주가 남다르다.  매 작품마다 이야기의 구체성이 담보되고 인물들이 생동한다.  하루키의 작품속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다. 이야기속에서 인물과 사건은 하루키 특유의 독창적이고 풍부한 내러티브로 창조된다.  위트있고 감성적인 문장은 덤이다. 이 모든 하루키의 장점을 가진 한국 작가를 찾으라 한다면, 나는 두말없이 정유정을 꼽겠다.


아직 정유정의 문장이 하루키만큼 독자를 매혹시키진 못한다.  하지만, 서사의 역동성과 흡인력과 인물은 하루키에 필적하며 오히려 압도한다. 그가 문장의 감수성이란 단 하나 남은 고지를 넘어설수만 있다면, 그는 세계 독자의 눈높이에 다가설 것이다.  그의 후속작이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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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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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귀한 시대다. 존경하고 가르침을 받을만한 스승이 없고, 의심하지 않고 지지할만한 정치인이 없다. 돈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경제인이 없고, 표절하지 않고 진정성을 지켜내는 문학인이 없다. 세상이 엉망인 것은 사람이 귀해서고 그런 사람을 찾지 못해서이며, 또 그 사람을 적재적소에 등용하지 못해서다. 사람을 공부 주제로 놓는 인문학에 대한 오랜 무관심과 그 위치가 이를 뒷바침 한다. 교양인의 액세서리가 되어버린 인문학은 깊이가 없고 성찰이 없다.  체계없고 파편적인 독서도 마찬가지다.  우린 독서하지만 문자해독에 그치며 생각하고 있지만 사유하진 못한다. 


초심을 지켜내며 사람과 사회와 세계를 그 근본에서부터 고민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럼에도, 이 세계에는 빼어난 스승이 있고 진정성 있는 정치인이 있으며, 존경할만한 경제인과 문학에 대한 열정을 품은 정직한 작가들이 있다.  사람을 발견하는 기쁨이 가장 크다.  신영복은 우리 시대 몇 되지 않는 참 스승이자 선생이다. 그는 대학 강단에서 은퇴 후 <인문학 특강> 형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쳐왔다. 자신이 적을 둔 성공회 대학교에서였다. 이제 그의 나이 여든이 멀지 않았다.  `여러가지 사정으로 더 이상 강의를 하지 못한 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강의 녹취록을 책으로 묶었다. <담론: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돌베개, 2015)다. 


그는 최고 명문 대학을 나온 엘리트로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군사정부 시절, 육사 교관으로 일했다. 그의 인생행로가 뒤틀린 것은 1968년 통일 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고서다. 군사재판에 회부 돼 사형을 선고 받았고 감형 돼 무기수로 20년동안 옥살이를 했다. 망령된 독재정권은 전도유망한 젊은 학자의 삶을 파괴했다. 10여년 전 읽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준 감동은 적지 않았다. 20년간 가족에게 보낸 편지글을 엮은 그 책에서 놀란 것은 그 단정한 문체에 있었다. 희망없는 감옥살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훗날, 그것이 검열을 통과하기 위한 기교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10년 후 다시 만난 그의 강의는 나의 독서와 공부에 대한 가벼운 인식을 조각내고 말았다. 


책이 가장 잘 읽혔던 때가 있었다.  군대와 얽힌 시기다.  책읽기와 글쓰기의 세계를 발견한 것도 그 즈음일 것이다. 왜였을까. 삶의 불확실성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가 그때였기 때문이다. 신영복의 20년 20일 감옥 생활은 남한산성 육군 교도소의 임사체험에서 시작된다.  그는 2심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국가보안법 1조 2항, 반국가 단체 구성과 지도적 임무를 맡은 혐의를 받은 그는 사형이 거의 확정적이었다. 그가 수용된 감방에선 매일 동료 사형수들이 하나 둘씩, 사형이 집행되어 떠나갔다.  총살형이었다.  대법원 파기환송을 거쳐, 재심에서 무기형으로 감형된 후 그는 일반교도소로 건너와 20년 징역을 살았다.  뿌리깊은 먹물성과 관념성에서 벗어나 진정한 세계와 인간에 대해 깨달음을 쌓아간 `20년 대학수업'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 책은 `고전에서 읽은 세계 인식'과 `인간 이해와 자기 성찰'이란 2부로 구성 돼 있다. 특별한 점은 고전과 인간에 대한 강의가 감옥에서 겪은 일과 사람들의 관찰과 사색에 뿌리 내리고 있는 것이다.  많은 책을 반입할 수 없고 책을 보관할 수도 없었던 감옥은 그에게 얇지만 깊이있는 동양고전을 독파할 기회를 주었다.  공부란 살아가는 그 자체이며 그때의 공부가 의미하는 것은 `세계와 나 자신에 대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과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키우는 것이 공부라 그는 정의한다.  공부의 최종 목적지는 `머리에서 가슴을 지나 발까지'라는 소신이 의미하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공부는 세계인식과 인간 성찰에서 끝나면 관념이 된다.  세계와 자기를 변화와 실천으로 인도할 때, 공부는 삶과 유리되지 않는다고 그는 역설한다. 


고전을 통해 세계인식에 이르는 공부 방법이 제시된다.  인문학의 트로이카, 문사철(文史哲)은 추상력을 기르는 도구다. 복잡한 것을 간단하게 개념과 논리로 압축하는 것이자 문제의 핵심을 집어낼 수 있는 능력이다.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상상력을 키워야 한다.  사소한 문제 속에 담겨 있는 엄청난 의미를 읽어내는 능력이다.  시서화(詩書畵)는 상상력을 유연하게 구사하고 적절히 조화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준다. 신영복에게 20년 대학공부는 이 추상력과 상상력을 적절히 배합하여 구사할 수 있는 유연함에 닿는 일이었다.  


공자와 <논어>에서 `군자는 원래 궁하다'는 인간 성찰과 존엄에 대한 고결한 자부심을 배우고, <주역>에서 `겸손'의 관계론을 익힌다. <노자>에선 다투지 않고 낮은 곳으로 흘러드는 물이 결국 바다를 이루는 하방연대의 교훈을 얻는다. <장자>를 통해 기계보다는 인간을 중시하는 장자의 인간학이자 그의 반기계론을 읽는다. 장자의 체계에서 노동은 자본주의의 흔한 생산요소가 아닌 생명 그 자체이다.  춘추전국시대의 고전담론은 고대국가 건설 담론이었고 그 중심은 관계를 짓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신영복은 관계를 짓는 조직의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양심이라고 표현한다. 세계인식에 대한 공부가 인간이해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돌이켜보면 제자백가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상앙, 이사와 같이 천하 통일을 이끈 사람들의 삶도 결국 비극으로 끝납니다.  우리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룬 것이 많을 수 없습니다. 꼬리를 적신 어린 여우들입니다. 그 실패 때문에 끊임없이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자위합니다. 한비자의 졸성(拙誠)이 그런 것이라 하겠습니다. 졸렬하지만 성실한 삶, 그것은 언젠가는 피는 꽃입니다. 빅토르 위고가 <레미제라블>에서 한 말입니다. `땅을 갈고 파헤치면 모든 땅들은 상처받고 아파한다. 그 씨앗이 싹을 튀우고 꽃 피우는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200쪽, 신영복 <담론>


인간을 이해하는데 `감옥'은 최적의 장소였다. 신영복은 20년 수형 생활을 통해 수많은 범죄자들을 만났다. 스치듯 가벼운 만남이 아니다. 매일 함께 의식주를 함께 하며, 타인이지만 혈육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된다. 하여,  인간 이해에 있어 감옥은 대학 그 자체였다. 이 책의 2부를 구성하는 `인간이해와 자기성찰'의 장은 인문학을 근본에서부터 다시 생각케 하는 진중하고 정교한 상념들이 가득하다. 지식과 지혜로 무장한 제자백가들이 결국 역사속에서 실패한 이유는 사람 때문이었다. 다종다양한 인간군상들과 마주침을 통해 그는 인간을 쉽게 가르치려해서도, 동정심과 편견으로 이해하려 해서도 안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가 징역살이에서 터득한 인간학은 모든 사람을 주인공의 자리에 앉히는 것이다. 그 후, 그 사람의 인생사를 경청하는 것을 최고의 독서로 삼는다. 한 사람 한 사람은 독파해야 할 교본 자체였다. 쉬운 교본만 있는게 아니다. 그렇다고 포기해선 안 된다. 몇번을 경청하고 독서해야 한다. 이 장에서 신영복이 들려주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고담준론이 아니라 자신이 보고 겪은 일 그 자체다.  흔한 잡범, 총살형에서 되살아난 사형수, 무관심한 교도관, 전기고문 전문가, 징역 10년째에 자살한 무기수, 괴롭힘에 동료들을 쏴죽이고 자살한 군인, 처세술에 능한 재소자, 이들과 쌓은 인연에 얽힌 이야기는 어떤 이론보다 정교한 인간학 최고봉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내가 자살하지 않은 이유가 햇볕이라고 한다면,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하루하루의 깨달음과 공부였습니다. 햇볕이 `죽지 않은' 이유였다면, 깨달음과 공부는 `살아가는' 이유였습니다."  425쪽


신영복의 강의록은 모든 독서인과 교양인의 어깨를 내리치는 죽비였다. 가벼운 독서, 인간에 대한 무지, 가슴과 발에 이르지 못하는 인문학, 우리들의 공부는 경량화되고 목적을 잃었고 자기만족에 머물고 있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니, 우리에겐 신영복이 대학이라 칭한 `감옥체험'이 없었다.  그 불확실성과 죽음에 맞닥뜨린 절망이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에게 절망은 세계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의 발견이 될 수 있다. 신영복의 20년 징역살이가 딱 그랬다. 그는 그곳에서 세계인식을 위한 고전과 자기성찰을 돕는 인간을 공부했다. 


인문학은 무엇인가. 사람을 아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이것으로 통한다. 인간은 문명을 만들었고 문명은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칸트는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하란 말을 남겼다. 신영복은 사람이 다른 가치의 하위 개념이 아닌 `끝'이라고 단언한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단어인 석과불식(碩果不食)은 <주역>에서 인용된 단어로, `큰 씨 과실은 먹지 않는다' 는 뜻이다. 그는 이 단어를 최고의 인문학이라 칭한다.  절망과 역경을 사람을 키워내는 것으로 극복하는 것, 올바른 사람을 키우는 일은 그 사회를 인간적인 사회로 만드는 지름길에 다름 아니다. 


<담론>의 마지막 페이지엔 우화 한 편이 소개 돼 있다.  네덜란드 의사이며 작가인 반 에덴의 동화 <어린 요한>에서 따온 버섯이야기다.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나간 산책로에서 버섯 군락지를 발견한다. 아버지는 그 버섯 중 하나를 지팡이로 가리키며 `얘야, 이건 독버섯이야'하고 가르쳐 준다. 독버섯이라 지목된 버섯이 충격을 받고 쓰러진다. 옆에 있던 친구가 그를 위로하며 최후로 내뱉는 말은 이런 것이다. `그건 사람들이 하는 말이야!'  독버섯은 사람들의 식탁 논리일 뿐, 모름지기 버섯은 `버섯의 이유'로서 판단해야 한다. 신영복은 이 우화를 통해,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이유'를 갖고 있는 자부심과 존엄성을 부여받은 존재라 가르친다. 


신영복의 철학은 자기 저서의 제목으로 대변된다. `더불어 숲'이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모두가 공존에 이르는 길이다. `더불어 숲'의 전제 조건은 개별적 인간의 각성과 자기존엄성의 확신에 있다. 사람 모두가 세상 무대의 조연 아닌 주연이란 각성이다.  신영복의 인문학은 인간을 한낱 자기열락의 수단으로 애용했던 독재정권의 감옥 속에서 피어난 꽃이다. 다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인권과 사회 정의가 위축되며, 남북 대치의 퇴행기가 찾아왔다.  그의 인문학은 정치, 사회적 퇴행을 사람을 길러 내는 것으로 극복하자고 가르친다.  사람을 목적으로 삼는 희망의 인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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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노래
박경숙 지음 / 문이당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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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인생유전엔 나름의 사연이 있다. 떠돌이로 살다 정착을 꿈꾼다. 한 평생 떠돌며 살아갈 수는 없다. 정착지에 머문다해서 떠돌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정착하는 순간부터 진짜 인생 유전이 시작된다. 그리움과 슬픔이 우릴 다시 추동하는 것이다. 떠나온 곳은 이상하게 `그립다'.  우릴 불편하게 하고 슬프게 만들었던 곳이라지만 다시 한번은 꼭 가보고 싶다. 마치 범인이 현장에 다시 출몰하는 것처럼, 우릴 기억속의 공간으로 이끄는 힘은 기묘하다.


소설가 박경숙은 독보적이다. 그의 소설은 특별하다. 미국에 적을 두고 있는 작가지만 그는 한국 문단에 소설을 발표하고 있다. 많은 작품은 아니지만 꾸준히 쓰고 있다. 이 소설작업은 1992년 미국 이민 후, 계속 돼 왔다. 띄엄띄엄 발표하는 느린 작업속에 탄생한 작품들이지만 상복을 타고 났다.  2005년 소설집 <안개의 칼날>로 제11회 가산문학상(미주)을,  2007년 장편 <약방집 예배당>으론 제24회 기독교출판문학상을,  2011년 단편 <돌아오지 않는 친구>로 제2회 두만강 문학상을 그리고 2013년엔 소설집 <빛나는 눈물>로 통영문학상을 거머쥐었다. 그는 한국내 작가들이 닿지 않는 영역에서 특유의 문장과 시선으로 소설을 직조한다.


소설집 <빛나는 눈물>에는 이민자의 곤궁함이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변주되는 것이 목격된다. 고향을 버린 자와 떠난 자들은 결코 홀가분하지 않다. 그들은 먼 이국땅에서 고향땅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과 환멸을 동시에 품고 살아간다. 이 역설적인 감정들이 단편들을 점령하며 이민자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과 질문으로 이어진다. 신작 장편 <바람의 노래>(문이당,2015)는 이 근본적인 부유(浮游)의 불안감을 미주 이민 1세대인 하와이 사탕수수 조선인 노동자들의 처절한 뿌리내림의 기록과 버무렸다. 


1905년까지 한말 조선인들은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로 이주했다. 그들의 수는 무려 5천명에 달했고 하와이 농장 노동자로선 일본인 다음으로 많았다. 소설의 주인공 이갑진의 아비는 구식군인으로 임오군란 때 희생당했다. 우유부단하고 요령이 없던 아비를 닮은 그는 선착장에서 짐꾼일을 하다, 어머니의 권유로 사탕수수 노동자로 이주하게 된다.  갑진의 처로 훗날 사진 신부가 되어 하와이를 찾는 수향은 퇴기의 딸이다. 그녀는 비록 비천한 신분이었지만 어미의 극진한 보호 아래, 양반 자손으로 대접받고 자란다. 그와 함께 하와이에 동행한 월례란 인물은 수향의 몸종으로 컸지만 하와이에선 정치적인 인물로 성장하게 된다.


소설은 이 세 주인공의 비슷한 듯 다른 삶을 따라가며 한인 이민사의 속살로 파고든다.  갑진과 수향은 이국땅에서 차별과 멸시를 받고 고된 노동과 가난한 삶을 꾸리지만 끝내 결별의 수순을 밟는다. 먼 타향땅에서 화합하지 못하는 이 부부에겐 다른 세계의 정치제도와 사회에 적응할 수 없었던 근본 한계가 있다.  갑진은 아비의 우유부단함을 닮아,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사탕수수 노동자의 신분을 벗지 못한다. 수향은 태평양을 건너 그 먼 길을 왔건만 여전히 양반집 규수로서의 삶의 잔재가 남아 있다. 갑진은 이혼 후, 조선 땅에 도달하지만 3.1 만세 운동에 우연하게 개입 돼, 거리에서 객사한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갑진의 우연한 죽음 이후, 하와이에 남겨진 수향과 월례의 삶에 맞추어져 있다.  수향은 갑진의 아이 `삼일'을 낳고 월례는 이승만의 기숙학교에서 실력을 쌓아나간다. 수향은 일평생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그리며 살던 퇴기 어미의 삶을 반복한다.  두번째 남편 한장수의 아이, `크리스틴'과 `삼일'을 돌보며 이민 한인의 삶에 섞여든다. 수향이 역사안의 평범한 소시민의 삶을 꿈꾸었다면, 몸종 월례는 한인 독립단체 동지회에서 적극 활동하며 해방 후, 이승만을 보좌하는 길로 나아간다. 이 소설은 두 여인이 하와이 이주민으로서 삶을 다지는 과정과 조선독립 투쟁과 2차 세계 대전에 휩쓸린 이민 세대의 희생과 슬픔을 형상화 한다.


" 제이미! 이건 내 아들의 깃발이야! 이렇게 바람에 늘 나부끼고 있잖아. 이건 내 아들이 숨 쉬며 살아 있다는 의미야. 이 하와이에 바람이 멎는다면, 바다에 파도가 멎고 세상이 끝났다는 의미 아니겠어?  세상이 끝나지 않는 한, 이 깃발은 계속 나부끼고 있을 거야. 여기에 너의 별을 그려 넣을게.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 한, 너는 분명 살아 돌아올 거야."   300쪽, 박경숙 <바람의 노래>


이 소설은 정치와 역사에 덜 휘둘린다. 그것이 어떤 면에서 단점이 될 수 있다. 이야기가 수향 위주로 흘러가면서, 서사의 큰 축을 이뤄야 할 갑진의 삶이 비중을 덜한 것은 아쉽다.  수향과 갑진의 관계가 무척 단조롭게 표현된 것도 문제다.  한인 이주민의 독립운동과 2차 대전이란 큰 역사적 소재를 이야기에 엮는 기회를 만들지 못한다.  역사성과 정치성이 소홀히 취급되면서, 소설적 무게감은 가벼워졌다. 이갑진 이후 한장수와의 로맨스가 깊게 묘사되거나 20여년 전 무의식속에 한번 스치듯 지나친, 약방집 아들과의 인연이 소설 전반을 잇는 고리 역할을 하는 것은 연애 소설로 읽히는 착시효과를 낸다.  하지만, 소설이 가진 단점에도 이 작품의 가치는 독보적이다. 


무엇보다 이민자 문학의 본령에 충실하다. 작가는 다양한 정신적, 물리적 토양을 밑바탕에 두고 글을 쓰는 사람이다. 박경숙 작가는 미국 이민자로서 자신이 무엇에 집중하고, 무엇을 잘 하는지 알고 있다. 그는 한국문학의 블루오션을 이민자 문학으로 개척해 나간다. 소설을 읽어갈수록 입에 착착 감겨오는 유려한 문체, 척박한 환경을 딛고 문장 하나하나를 내면으로부터 건져 올리는 작가의 투지는 본 받을만 하다. 그는 이 원고를 들고 미국 스타벅스 카페, 도서관, 한국의 여러 창작실을 전전했고 결국 20세기 초 하와이 이주민의 살아 있는 세계를 복원시켰다.  무엇이 그를 이 고초와 인내의 시간속으로 인도했을까.  그것은 글을 쓰지 않으면 버텨낼 수 없는 모든 존재들의 거처와 그곳에서 파생하는 슬픔의 기원 때문이다.


우린 왜 글을 쓰는가.  삶이 주는 불확정성 때문이다.  박경숙 작가는 타국에서의 삶에서 글을 쓰게 된 동기를 이처럼 밝힌다. "사우스캘리포니아의 북쪽 도시에서 남쪽 끝 도시까지를 옮겨 가며 살아온 지난 20년 동안, 나는 주변에서 흔들리는 불안한 기운을 잡아 자꾸만 글을 썼다."(5쪽, 작가의 말)  삶 한 가운데를 강타하는 `불안과 흔들림'은 존재의 거처를 바꾸어도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내면을 비울 때 만이 일소되는 것이다. 그 슬픔의 기운은 그대로 한인 1세대 이주민의 삶에 성공적으로 투사되었고 책장을 덮고도 그 여운에 취하게 한다.


" 그래, 불편하지만 그리운 곳이 바로 우리들의 고향이지. 여긴 사철 꽃이 피고 추운 날도 없지만, 마음속엔 늘  찬 바람을 일으키는 곳이지. 나만 그런 건 아닐거야. 오래 살아온 사람일수록 모두 우리와 비슷한 마음일 거야. 하지만 여기에 태어난 아이들이야 그렇겠니. 여긴 그 애들의 고향이지. 우리 크리스틴과 베티의 고향인 거야. 나는 아이들의 고향을 지켜야 해. 에와 농장 후미진 곳에 묻힌 내 아기. 호놀룰루 국립묘지에 묻힌 삼일이! 내가 지켜야지"  333쪽


나의 독서는 문학에서 시작됐다. 독서일기의 카테고리에 담은 리뷰 수가 그걸 증명한다. 여러 장르를 배회하다 항상 돌아오는 것은 문학이었고 소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 소설 읽기가 멈춤한 것은 왜였을까.  한동안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소설과 멀어지자 내가 쓰는 문장이 시시해졌다.  문학은 인생에 대한 깊은 맛을 느끼게 해주는 표현과 서사를 제공하며, 독서와 글쓰기를 풍성하게 한다. 오직 눈만 뜨면 경제만을 생각하는 물신주의에서 눈돌릴 시간과 여유를 선물한다.  오랜만에 펴든 박경숙 작가의 소설 한 편은 슬프고 아름다운 서사로 지친 마음에 위로를 건네주었다.


문학은 이렇듯 독자를 뜻밖에 위로하는 순기능이 있다. 그 어떤 반듯한 지식과 철학이 건넬 수 없는 것이 문학의 위안과 격려다. 최근에 터진 신경숙 작가의 표절 사태는 그래서 참담하다. 20여 년 전 신경숙의 <외딴방>을 만났을 때, 나는 그의 문장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그가 문학을 대하는 태도는 공감하고 지지했다.  언제나 그의 진지하고 고뇌섞인 표정만큼이나 그의 작품의 세심한 결이 마음에 들었다. <엄마를 부탁해>가 세계적인 이목을 모았다지만 나는 그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가 더 좋았다. 그 작품을 통해, 신경숙의 문체에 적응했고 그의 미려한 문장에 반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시점에선 그런 문장들까지도 `의심'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표절 사태가 문학권력과 주례사비평이란 다른 영역까지 나아갔다. 한국 문학이 곪아터진 이유가 곧 밝혀질 것이니 논의를 지켜볼 일이다. 대형 출판사들의 전횡과 전속 비평가들의 칭찬 일색의 영혼없는 비평이 물론 작가들의 도덕 붕괴를 불러오는데 일정 부분 기여했을 것이다.  하지만 본말이 전도되선 안 된다.  문제의 핵심은 작가의 불량한 양심이다. 사과 인터뷰가 등장한 <경향신문>기사 말미에 역시 신경숙 다운 고백이 등장한다.  " 절필 선언은 할 수 없다. 내게 문학은 목숨이어서 글쓰기를 멈추면 살아도 살아가는게 아니다."  이 말이 왜 감동이나 공감을 불러오지 않는지, 누구보다 신경숙 본인이 잘 알 것이다.  그는 일시적 절필이라도 해야 한다. 그게 자신의 문학을 읽어온 독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이 판국에 글을 계속 쓰겠다는 것은 그저 작가의 사심 아니겠는가.  


사회를 탁하게 만드는 것은 누구인가.  구성원이다.  정치 혐오는 누구 책임인가.  유권자다.  표절 작가의 탄생에 기여하는 이는 누구인가.  바로 게으른 독자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 소설을 읽지 않는 독자들, 작품을 날카롭게 톺아볼 시간과 여력이 없는 그 독자들 사이에서 표절 작가는 탄생한다.  문학 창작물은 독자에게 위로의 선물이지만 가장 먼저 위로와 격려를 받는 것은 작가 자신이다.  작가는 독자보다 먼저 격려받아야 할 존재다.  단, 그들의 창작물이 뛰어나지 않더라도 진실과 열의로 만들어진 작품이라면 말이다.  모든 이들의 삶이 소중한 것처럼, 이 세상에 가치없는 작품은 없다.  정직하게 글을 쓰는 모든 작가들은 문학권력이 아닌 독자들의 관심속에서 커 가야 한다. 하여, 나는 앞으로도 계속 문학과 소설의 독자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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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글쓰기 특강 - 생각 정리의 기술
김민영.황선애 지음 / 북바이북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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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서평을 쓴지 20여 년이 가까워 온다.  서평 쓰기를 시작한 것은 책읽기에 빠지고서였다.  책읽기는 신세계와 같았다.  문자를 해독할 수 있다는 것은 세상 모든 책의 잠정적 주인이 될 자격을 갖춘 것이다. 고전 위주로 독서한 것은 검증된 책들을 만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이 시간이 넉넉했던 시간들이 있었고 책 한 권 한 권을 정복하고자 하는 욕망이 타올랐다. 누군가 독서법을 가르쳐준 사람도 없었고 책을 고르는 기준을 알려준 이도 없었다.  그런데, 얼마 후 다른 욕망이 자라기 시작했다. 그것은 의문이자 불만이었다. 왜 나는 작가들처럼 글을 잘 쓰지 못할까. 


20년 전 서평쓰는 일에 첫발을 딛게 된 것은 바로 이 질문에 맞닥뜨리고서다. 책읽기처럼 서평쓰기도 자발적인 것이었고 어떤 지식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시작했다. 어린시절 독후감을 쓴 기억을 되살렸겠지만 막막했다. 한 권의 책을 읽을 땐, 볼펜과 플라스틱 자가 필수적이었다. 책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반듯하게 밑줄을 그었다. 책을 접는 일은 감히 하지 못했고 메모조차 하지 않았다. 지금도 20년 전에 읽은 책을 펼쳐보면 반듯한 밑줄들을 볼 수 있다.  서평 쓰기를 시작하면서부터 책읽기가 더 재밌어졌다. 그것은 책을 읽는 목적이 되었다. 


비록 작가가 되지 못했지만 나는 책을 읽으면서 작가들을 동경했고 그들의 글쓰기를 흠모했다. 군입대, 대학졸업, 취업 등 세상사에 얽히다보니 서평쓰기는 계속되지 못했다. 내 서평경력은 겨우 10여 년 남짓이다.  직장생활을 하고서부터 10년간 한해도 거르지않고 서평을 써왔다. 그렇게 써온 서평이 한 달 서너편이다.  내 서평 쓰기는 제대로 된 공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식없이 미로를 찾아가는 일이었다. 그간 글쓰기 책이나 서평집을 읽은 기억은 있지만 서평만을 다룬 책은 읽은 적이 없다. 그런 책도 흔하지 않다.  현역 서평 글쓰기 강사로 활동하는 두 저자가 서평 강의록을 묶어낸 책의 출간은 그래서 반갑다.  <서평 글쓰기 특강: 생각정리의 기술>(북바이북,2015)이다. 


서평 한 편을 제대로 써내기 위해 실용적인 방법과 기술들을 잘 풀이한 이 책은 `서평은 독서의 종착역'이란 말로 시작된다. 상당수의 독자들은 책을 읽는 것에서 독서행위를 멈춘다. 독서는 수동적이고 글쓰기는 언제나 능동적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책을 읽는 일보다 글을 쓰는 것은 몇배의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이 고달픈 세계에 자발적으로 발을 딛는 사람은 몇 없다. 그럼에도, 서평 한 꼭지를 완성해 본 사람은 그 즐거움이 독서에 비할 바 아님을 안다.  서평을 잘 쓰기 위한 간단한 방법은 무엇일까.  너무 잘 쓰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어깨에 힘을 빼고, 가볍게 읽은 것을 정리한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저자들은 강조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찾아갈 수 있다면 성공한 삶입니다. 돈이나 명예보다 중요한 것은 `재미와 의미'입니다.  (중략..) 나를 지키는 비평습관, 자기 입장을 드러내는 습관은 글쓰기를 넘어 삶의 태도로 이어지는 문제입니다. 누구나 자기 생각과 감정이 있는데, 그걸 표현하지 못한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아니, 행복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무력한 나날을 보낼 뿐입니다." 121쪽, <서평 글쓰기 특강>


김민영은 방송작가, 영화평론가, 출판기자를 거친 현역 필자이자 `서평이야말로 책을 가장 잘 읽는 방법이며 효과적인 글쓰기'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는 현재 서평 쓰기 커리큘럼을 만들어 8년째 강의하고 있다.  공동저자 황선애는 대학에서 독일문학을 전공하고 대학 강의를 했고,  현재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서평 입문'을 가르치고 있다. 다양한 학생들을 가르치며 얻은 경험을 잘 녹여낸 이 책에서 저자들은 좋은 서평의 요건과 서평 쓰기의 실제를 다음과 같이 몇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 서평이란 책의 후기를 `정리'하는 일이다. 어떻게 하면 정리를 잘하게 될까?  그것은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까란 질문과 상통한다. 평소 담백하고 힘있는 글을 쓰는 기자들에게 물었다. 그 답은 의외다. "매일 쓰면 됩니다."  기자들이란 글밥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매일 글을 요약하고 정리하는 것이 그들의 업이다. 글을 다루는 시간이 많을수록 글은 좋아진다. 일반 독자들이 기자들만큼 글과 씨름할 시간은 없다. 이것을 대체하는 것은 꾸준히 쓰기가 될 듯하다.  "글은 머리가 아닌 엉덩이로 쓴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하나의 완성된 글은 들인 시간만큼 좋아진다는 것이야말로 동서고금의 진리다. 


둘째, 서평쓰는 일에도 일정한 패턴과 공식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독후감이 일정한 형식없이 소감과 느낌을 여과없이 표현하는 것이라면, 서평은 책 내용을 요약하는 것과 필자 자신의 비평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그 둘 모두를 담고 있어야 제대로 된 서평이다. 그 비율을 어떻게 맞출것이냐 하는 것은 글쓰는 사람의 취향과 능력에 따르면 된다. 능숙한 서평가라면 책의 내용을 몇줄로 요약하고, 서평의 대부분을 자신의 견해를 표출하는데 맞출 수도 있다. 


셋째, 서평의 목적은 자기 관점을 표현하는 것에 있다. 관점은 곧 비평의 논거를 말한다. 서평이 잘 풀릴 때는 뚜렷한 관점이 있는 경우다. 반대로 서평을 쓰면서 관점이 정리되는 경우나 글을 끝마치고 나서도 관점을 끝내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독서후의 관점은 독해력에 기반한다. 좋은 서평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책에 대한 이해가 필수다. 또, 독자 수준에 알맞는 책의 선택이 좋은 서평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 독해력은 하루 아침에 길러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정한 단계를 밟아가야 하고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그외 이 책에선 서평 쓰기를 바로 적용할 수 있도록 분야별 서평 쓰기 로드맵이 알기 쉽게 설명돼 있다. 발췌, 메모, 개요, 초고, 퇴고의 수순으로 진행되는 이 과정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과정을 `퇴고'라고 적시한 것은 새길만 하다. 모든 위대한 작품들은 퇴고의 과정을 거쳤다.  유명한 작가들은 퇴고의 비중을 가장 높게 둔다.  안도현 시인은 `퇴고는 처음이면서 중간이면서 마지막이면서 그 모든 것이다'란 말로 퇴고의 가치를 역설했다. 베스트셀러 작가 한비야는 `퇴고부터가 진짜 글쓰기의 시작'이라 했다. 책의 말미엔 별도의 장을 만들어 여섯 서평가들이 서평을 바라보는 시선을 담아내 서평교재로서 충실성을 높였다.


" 그만큼 좋은 글, 최고의 글이란 어쩌면 하나의 이상이며, 우리는 그 이상을 좇아 최대한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을 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 이상이라는 것은 안목이 없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글이 좋은 글인지를 아는 것이 안목이 될 텐데, 결국 안목을 기르는 방법은 글을 많이 접하는 것입니다. 좋은 글을 많이  읽고 필사도 해보면서 글의 감각을 기르다 보면 좋은 문장, 아름다운 글을 볼 줄 아는 눈을 갖게 됩니다."  183쪽


내게 서평 쓰기는 중요한 일상이 됐다. 20년 전 책을 읽고 글을 쓰던 시절엔 시간이 많았다. 책 한 권을 반나절이면 읽을 수 있었다. 긴 글을 쓰는 것도 쉬운 일이었다. 지금은 그 반대다. 자투리 시간을 쪼깨쓰지 않으면 인생 전체가 먹고 사는 일로 모두 소진될 지경이다. 내게 서평은 삶 전체를 `먹고사니즘'에 투항시키지 않겠다는 마지노선이다. 그렇게 격렬한 전투를 10년간 치르고서도 여전히 나는 서평 쓰기가 서툴고 어렵다. 책을 즐겁게 읽고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모니터의 앞에 앉으면 깜박이는 커서를 보며 주눅들기 일쑤다. 서평 쓰기를 체계적으로 공부해보지 않아서다.


<서평 글쓰기 특강>은 서평 쓰기에 막 입문하고자 하는 예비 서평가들의 시간낭비와 시행착오를 줄여줄 것이다. 왜 서평을 써야 하는지, 그 목적에서부터 서평을 쉽고 빠르게 쓸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이 정리 돼 있다.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다고 생각한 서평이 막연한 감상과 책에 대한 호불호밖에 담지 못했던 이유를 독자들을 깨닫게 될 터다. 소설가 장정일은 20년이 넘게 개성 넘치는 서평을 독서일기라는 포맵에 담아 발표하고 있다. 체계를 잡은 후에 필요한 것은 꾸준함이다.  좋은 서평이 자라나는 토양은 지속적인 독서와 글쓰기다. 


잘 쓰여진 서평이 그 어떤 책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 서평의 힘은 가볍지 않다. 책의 운명을 바꾸기 전에 독자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다. 책 한 권 읽기에도 벅찬 시절, 서평을 쓰는 일은 에너지와 열정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세상 모든 지식과 지혜는 일차적으로 책 속에 있다. 그 지식과 지혜를 정리하고 숙고하는 일이 서평 쓰기다. 책읽고 글쓰는 행위는 달리 `어떻게 살 것인가'란 철학적 물음에 답하는 일이다. 누가 대신 자신의 인생을 살아주지 않는다. 길을 알려주지도 않는다. 궁극적으로 서평쓰기는 삶의 숙제에 제대로 답하기 위한 끊임없는 연습이다.  하여, 서평 쓰기는 자발적 고행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보낸 일생은 결코 외롭거나 어리석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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