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노래
박경숙 지음 / 문이당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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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인생유전엔 나름의 사연이 있다. 떠돌이로 살다 정착을 꿈꾼다. 한 평생 떠돌며 살아갈 수는 없다. 정착지에 머문다해서 떠돌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정착하는 순간부터 진짜 인생 유전이 시작된다. 그리움과 슬픔이 우릴 다시 추동하는 것이다. 떠나온 곳은 이상하게 `그립다'.  우릴 불편하게 하고 슬프게 만들었던 곳이라지만 다시 한번은 꼭 가보고 싶다. 마치 범인이 현장에 다시 출몰하는 것처럼, 우릴 기억속의 공간으로 이끄는 힘은 기묘하다.


소설가 박경숙은 독보적이다. 그의 소설은 특별하다. 미국에 적을 두고 있는 작가지만 그는 한국 문단에 소설을 발표하고 있다. 많은 작품은 아니지만 꾸준히 쓰고 있다. 이 소설작업은 1992년 미국 이민 후, 계속 돼 왔다. 띄엄띄엄 발표하는 느린 작업속에 탄생한 작품들이지만 상복을 타고 났다.  2005년 소설집 <안개의 칼날>로 제11회 가산문학상(미주)을,  2007년 장편 <약방집 예배당>으론 제24회 기독교출판문학상을,  2011년 단편 <돌아오지 않는 친구>로 제2회 두만강 문학상을 그리고 2013년엔 소설집 <빛나는 눈물>로 통영문학상을 거머쥐었다. 그는 한국내 작가들이 닿지 않는 영역에서 특유의 문장과 시선으로 소설을 직조한다.


소설집 <빛나는 눈물>에는 이민자의 곤궁함이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변주되는 것이 목격된다. 고향을 버린 자와 떠난 자들은 결코 홀가분하지 않다. 그들은 먼 이국땅에서 고향땅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과 환멸을 동시에 품고 살아간다. 이 역설적인 감정들이 단편들을 점령하며 이민자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과 질문으로 이어진다. 신작 장편 <바람의 노래>(문이당,2015)는 이 근본적인 부유(浮游)의 불안감을 미주 이민 1세대인 하와이 사탕수수 조선인 노동자들의 처절한 뿌리내림의 기록과 버무렸다. 


1905년까지 한말 조선인들은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로 이주했다. 그들의 수는 무려 5천명에 달했고 하와이 농장 노동자로선 일본인 다음으로 많았다. 소설의 주인공 이갑진의 아비는 구식군인으로 임오군란 때 희생당했다. 우유부단하고 요령이 없던 아비를 닮은 그는 선착장에서 짐꾼일을 하다, 어머니의 권유로 사탕수수 노동자로 이주하게 된다.  갑진의 처로 훗날 사진 신부가 되어 하와이를 찾는 수향은 퇴기의 딸이다. 그녀는 비록 비천한 신분이었지만 어미의 극진한 보호 아래, 양반 자손으로 대접받고 자란다. 그와 함께 하와이에 동행한 월례란 인물은 수향의 몸종으로 컸지만 하와이에선 정치적인 인물로 성장하게 된다.


소설은 이 세 주인공의 비슷한 듯 다른 삶을 따라가며 한인 이민사의 속살로 파고든다.  갑진과 수향은 이국땅에서 차별과 멸시를 받고 고된 노동과 가난한 삶을 꾸리지만 끝내 결별의 수순을 밟는다. 먼 타향땅에서 화합하지 못하는 이 부부에겐 다른 세계의 정치제도와 사회에 적응할 수 없었던 근본 한계가 있다.  갑진은 아비의 우유부단함을 닮아,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사탕수수 노동자의 신분을 벗지 못한다. 수향은 태평양을 건너 그 먼 길을 왔건만 여전히 양반집 규수로서의 삶의 잔재가 남아 있다. 갑진은 이혼 후, 조선 땅에 도달하지만 3.1 만세 운동에 우연하게 개입 돼, 거리에서 객사한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갑진의 우연한 죽음 이후, 하와이에 남겨진 수향과 월례의 삶에 맞추어져 있다.  수향은 갑진의 아이 `삼일'을 낳고 월례는 이승만의 기숙학교에서 실력을 쌓아나간다. 수향은 일평생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그리며 살던 퇴기 어미의 삶을 반복한다.  두번째 남편 한장수의 아이, `크리스틴'과 `삼일'을 돌보며 이민 한인의 삶에 섞여든다. 수향이 역사안의 평범한 소시민의 삶을 꿈꾸었다면, 몸종 월례는 한인 독립단체 동지회에서 적극 활동하며 해방 후, 이승만을 보좌하는 길로 나아간다. 이 소설은 두 여인이 하와이 이주민으로서 삶을 다지는 과정과 조선독립 투쟁과 2차 세계 대전에 휩쓸린 이민 세대의 희생과 슬픔을 형상화 한다.


" 제이미! 이건 내 아들의 깃발이야! 이렇게 바람에 늘 나부끼고 있잖아. 이건 내 아들이 숨 쉬며 살아 있다는 의미야. 이 하와이에 바람이 멎는다면, 바다에 파도가 멎고 세상이 끝났다는 의미 아니겠어?  세상이 끝나지 않는 한, 이 깃발은 계속 나부끼고 있을 거야. 여기에 너의 별을 그려 넣을게.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 한, 너는 분명 살아 돌아올 거야."   300쪽, 박경숙 <바람의 노래>


이 소설은 정치와 역사에 덜 휘둘린다. 그것이 어떤 면에서 단점이 될 수 있다. 이야기가 수향 위주로 흘러가면서, 서사의 큰 축을 이뤄야 할 갑진의 삶이 비중을 덜한 것은 아쉽다.  수향과 갑진의 관계가 무척 단조롭게 표현된 것도 문제다.  한인 이주민의 독립운동과 2차 대전이란 큰 역사적 소재를 이야기에 엮는 기회를 만들지 못한다.  역사성과 정치성이 소홀히 취급되면서, 소설적 무게감은 가벼워졌다. 이갑진 이후 한장수와의 로맨스가 깊게 묘사되거나 20여년 전 무의식속에 한번 스치듯 지나친, 약방집 아들과의 인연이 소설 전반을 잇는 고리 역할을 하는 것은 연애 소설로 읽히는 착시효과를 낸다.  하지만, 소설이 가진 단점에도 이 작품의 가치는 독보적이다. 


무엇보다 이민자 문학의 본령에 충실하다. 작가는 다양한 정신적, 물리적 토양을 밑바탕에 두고 글을 쓰는 사람이다. 박경숙 작가는 미국 이민자로서 자신이 무엇에 집중하고, 무엇을 잘 하는지 알고 있다. 그는 한국문학의 블루오션을 이민자 문학으로 개척해 나간다. 소설을 읽어갈수록 입에 착착 감겨오는 유려한 문체, 척박한 환경을 딛고 문장 하나하나를 내면으로부터 건져 올리는 작가의 투지는 본 받을만 하다. 그는 이 원고를 들고 미국 스타벅스 카페, 도서관, 한국의 여러 창작실을 전전했고 결국 20세기 초 하와이 이주민의 살아 있는 세계를 복원시켰다.  무엇이 그를 이 고초와 인내의 시간속으로 인도했을까.  그것은 글을 쓰지 않으면 버텨낼 수 없는 모든 존재들의 거처와 그곳에서 파생하는 슬픔의 기원 때문이다.


우린 왜 글을 쓰는가.  삶이 주는 불확정성 때문이다.  박경숙 작가는 타국에서의 삶에서 글을 쓰게 된 동기를 이처럼 밝힌다. "사우스캘리포니아의 북쪽 도시에서 남쪽 끝 도시까지를 옮겨 가며 살아온 지난 20년 동안, 나는 주변에서 흔들리는 불안한 기운을 잡아 자꾸만 글을 썼다."(5쪽, 작가의 말)  삶 한 가운데를 강타하는 `불안과 흔들림'은 존재의 거처를 바꾸어도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내면을 비울 때 만이 일소되는 것이다. 그 슬픔의 기운은 그대로 한인 1세대 이주민의 삶에 성공적으로 투사되었고 책장을 덮고도 그 여운에 취하게 한다.


" 그래, 불편하지만 그리운 곳이 바로 우리들의 고향이지. 여긴 사철 꽃이 피고 추운 날도 없지만, 마음속엔 늘  찬 바람을 일으키는 곳이지. 나만 그런 건 아닐거야. 오래 살아온 사람일수록 모두 우리와 비슷한 마음일 거야. 하지만 여기에 태어난 아이들이야 그렇겠니. 여긴 그 애들의 고향이지. 우리 크리스틴과 베티의 고향인 거야. 나는 아이들의 고향을 지켜야 해. 에와 농장 후미진 곳에 묻힌 내 아기. 호놀룰루 국립묘지에 묻힌 삼일이! 내가 지켜야지"  333쪽


나의 독서는 문학에서 시작됐다. 독서일기의 카테고리에 담은 리뷰 수가 그걸 증명한다. 여러 장르를 배회하다 항상 돌아오는 것은 문학이었고 소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 소설 읽기가 멈춤한 것은 왜였을까.  한동안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소설과 멀어지자 내가 쓰는 문장이 시시해졌다.  문학은 인생에 대한 깊은 맛을 느끼게 해주는 표현과 서사를 제공하며, 독서와 글쓰기를 풍성하게 한다. 오직 눈만 뜨면 경제만을 생각하는 물신주의에서 눈돌릴 시간과 여유를 선물한다.  오랜만에 펴든 박경숙 작가의 소설 한 편은 슬프고 아름다운 서사로 지친 마음에 위로를 건네주었다.


문학은 이렇듯 독자를 뜻밖에 위로하는 순기능이 있다. 그 어떤 반듯한 지식과 철학이 건넬 수 없는 것이 문학의 위안과 격려다. 최근에 터진 신경숙 작가의 표절 사태는 그래서 참담하다. 20여 년 전 신경숙의 <외딴방>을 만났을 때, 나는 그의 문장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그가 문학을 대하는 태도는 공감하고 지지했다.  언제나 그의 진지하고 고뇌섞인 표정만큼이나 그의 작품의 세심한 결이 마음에 들었다. <엄마를 부탁해>가 세계적인 이목을 모았다지만 나는 그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가 더 좋았다. 그 작품을 통해, 신경숙의 문체에 적응했고 그의 미려한 문장에 반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시점에선 그런 문장들까지도 `의심'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표절 사태가 문학권력과 주례사비평이란 다른 영역까지 나아갔다. 한국 문학이 곪아터진 이유가 곧 밝혀질 것이니 논의를 지켜볼 일이다. 대형 출판사들의 전횡과 전속 비평가들의 칭찬 일색의 영혼없는 비평이 물론 작가들의 도덕 붕괴를 불러오는데 일정 부분 기여했을 것이다.  하지만 본말이 전도되선 안 된다.  문제의 핵심은 작가의 불량한 양심이다. 사과 인터뷰가 등장한 <경향신문>기사 말미에 역시 신경숙 다운 고백이 등장한다.  " 절필 선언은 할 수 없다. 내게 문학은 목숨이어서 글쓰기를 멈추면 살아도 살아가는게 아니다."  이 말이 왜 감동이나 공감을 불러오지 않는지, 누구보다 신경숙 본인이 잘 알 것이다.  그는 일시적 절필이라도 해야 한다. 그게 자신의 문학을 읽어온 독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이 판국에 글을 계속 쓰겠다는 것은 그저 작가의 사심 아니겠는가.  


사회를 탁하게 만드는 것은 누구인가.  구성원이다.  정치 혐오는 누구 책임인가.  유권자다.  표절 작가의 탄생에 기여하는 이는 누구인가.  바로 게으른 독자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 소설을 읽지 않는 독자들, 작품을 날카롭게 톺아볼 시간과 여력이 없는 그 독자들 사이에서 표절 작가는 탄생한다.  문학 창작물은 독자에게 위로의 선물이지만 가장 먼저 위로와 격려를 받는 것은 작가 자신이다.  작가는 독자보다 먼저 격려받아야 할 존재다.  단, 그들의 창작물이 뛰어나지 않더라도 진실과 열의로 만들어진 작품이라면 말이다.  모든 이들의 삶이 소중한 것처럼, 이 세상에 가치없는 작품은 없다.  정직하게 글을 쓰는 모든 작가들은 문학권력이 아닌 독자들의 관심속에서 커 가야 한다. 하여, 나는 앞으로도 계속 문학과 소설의 독자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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