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육아와 북유럽 육아 사이에서



1. 프랑스 부모처럼

뚱뚱한 아빠다 보니 뷔페를 좋아한다. 아이도 아빠를 닮아 뷔페를 좋아하는데 이유는 조금 다르다. 많이 먹을 수 있어서라기보다는 음식을 접시에 담고, 마음대로 이곳 저곳을 다녀도 되는 자유로운 분위기 때문이다. 하지만 갈 때마다 난처한 일이 생긴다. 먹지 않을 음식까지 접시에 담다가 종업원에게 야단을 맞거나, 식당을 뛰어 다니다 다른 손님과 부딪히는 일은 태반이다. 아이를 다그쳐 봐도 그 때 뿐이다.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식당을 뛰어 다니기 시작한다. 프랑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프랑스 아이들이라면 부모의 말에 순종적으로 행동했을 것이다. 프랑스 아이들은 공공장소에서 요란스럽게 장난을 치는 일도 없다고 한다. 실제로 내가 본 파리의 풍경도 그랬다. 일요일은 조용했고, 거리에서 만난 아이들은 차분했다. 식당에서 포크를 떨어뜨리고 물을 쏟고 음식 투정을 하는 아이는 내 아이 뿐이었다.

프랑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고 한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애쓰기 때문에, 프랑스 아이들의 유아기는 ‘끝없는 기다림의 시기’라 한다. 아빠가 사주지 않는 장난감을 할아버지에게 졸라 얻고마는 우리 아이의 인내심과는 차이가 클 것이다. 내 아이는 기다림을 모른다. 아빠와 엄마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조차도 자신의 말은 들어주지 않는다고 때를 쓴다. 아빠, 엄마는 뭐든지 마음대로면서 자신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며 화를 낸다. 일전에는 아이와 함께 딱지치기를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자 나를 때리려 까지 했다. 내 아이가 프랑스 아이처럼 되지 않은 것은 나 자신이 ‘프랑스 부모처럼’ 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프랑스 부모들은 신생아를 혼자 재울 정도로 엄격하게, 단호하게, ‘부모 중심’으로 육아하는데 반해 우리 집 부부 침실은 아이가 차지한지 벌써 6년째다.

2. 북유럽 아빠처럼

아이의 어린이집 친구가 얼마 전에 백화점에서 열리는 사생대회에서 대상을 탔다고 한 후로부터 아이도 상을 받고 싶어 안달이 났다. 어린이집에 가보니 아이들이 적어 놓은 글귀와 그림들이 한쪽 벽면에 가득했다. ‘우리 아이보다’ 글자 모양이 더 예쁜 아이가 많다. 그림 실력도 내 아이는 좋지 않은 것 같다. 놀이터에서 아이의 친구들을 데리고 축구를 했다. 헛발질에, 공이 날아오면 무서워 피하는 내 아이는 축구도 별로인 것 같다. 제법 근사하게 공을 차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아이들을 축구교실까지 보내는 것이 이해가 되었다.

덴마크 학교에서는 9학년이 될 때까지는 등수를 매기는 시험은 일체 치지 않는다고 하는데, 아이는 상을 받겠다고, 아빠인 나는 아이가 어떤 것이라도 뒤처질까 벌써부터 마음은 걱정으로 가득하다. 핀란드 부모들은 아이들이 자연에서 마음껏 놀 수 있게 해서 독립적인 아이로 키운다고 하는데, 나는 블록인형을 제대로 조립하지 못하고 있는 아이에게 인내심이 별로 작동하지 않아 내가 만들어 버리기 일쑤다. 얼마 전에는 비정상회담에 출연 중인 니콜라이 욘센을 만날 일이 있었다. 니콜라이는 노르웨이 사람인데, 어머니께서는 니콜라이에게 어떤 일을 하면 좋겠다고 말씀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아이가 운동 선수가 되기 보다 음악을 했으면 좋겠고, 공부도 기왕이면 잘했으면 좋겠다. 스칸디 대디, ‘북유럽 아빠처럼’ 아이의 친구가 되고 싶었는데 어느새 아이의 감독이 되어 버린 것 같다.

3. 프랑스 육아와 북유럽 육아 사이의 한국 아빠

나는 아이를 잘못 키어 온 것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는 프랑스 육아와 북유럽 육아 어느 기준으로 봐도 좋은 육아를 했다고 할 수 없다. 제대로 엄격하지도, 제대로 친구 같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쪽을 선택하지 않았던 것에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프랑스 육아와 북유럽 육아의 가치가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한쪽을 선택할 수 없었던 것이다. 프랑스 육아가 아이에게 규율을 제공하고 엄격하게 따르게 하는 것에 초점을 두는 반면에, 북유럽 육아는 아이들의 자율성에 보다 더 초점을 두는 육아로 이해할 때 어느 한 쪽을 믿고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내게는 위험하게 느껴졌다.

나는 프랑스 육아 옹호자들이 아이들에게 엄격한 규율 속에서 자율을 허락한다는 말이 어딘가 모르게 불충분하다고 생각해왔다. ‘규율 속에서의 자율’은 이상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부모의 욕망과 가치관 속에서만 허락되는 자유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즉 부모의 규율이 부모의 가치관과 편의에 따라 정해져 버린 채 아이에게 일방적으로 따르게 한다면 그 때의 자율을 자율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쉽게 말해 프랑스와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목표가 다르다. 중산층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외국어 하나와 다룰 줄 아는 악기 하나, 특별한 맛을 내는 요리 하나가 있는지로 판단하는 사회, 대학이 평준화되어 있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상대적으로 적게 의식하는 프랑스 사회라면 부모의 가치관과 결합된 규율이 아이의 자유를 위협할만큼 위험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부채 없는 30평 이상의 아파트 소유, 월급여 500만원 이상, 예금 잔고 1억원이 중산층의 조건이고, 엄격한 대학 간 서열이 존재하고,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은 우리 사회에서 좋은 대학을 보내고 성공하도록 만들겠다는 부모의 욕망이 아이에 대한 규율과 결합하면 아이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될 수도 있다.

북유럽 육아 옹호자들이 말하는 부모의 권위를 내려 놓고 아이들의 자율을 존중해주는 육아라는 것도 내가 보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어떤 직업을 가지더라도 급여 수준이 비슷하고, 또 직업을 가지지 않더라도 한 달에 300만원 내외를 지원 받는 덴마크의 경우라면 아이에게 등수는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덴마크를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은 의사와 같은 전문직도 고소득직업군이 아니고, 평생을 웨이터로 살면서도 높은 직업적 자존감을 가질 정도로 전체 사회가 매우 강력하게 ‘평등’을 지향한다. 이런 사회에서라면 부모가 아이들에게 어떤 직업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점차 격차 사회가 되어 가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부모가 북유럽 국가의 부모들처럼 오직 아이의 자율성만을 존중해주기란 특별한 결단이 아니고서는 쉽지 않은 일일 수밖에 없다.

4. 다른 사회, 다른 육아
규율을 너무 강조하면 아이가 창의성과 자존감을 잃지 않을까, 자율성만을 강조하면 우리 아이만 이 사회에서 도태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어느 쪽도 일관되게 밀어 붙이지 못했다. 사실 내가 처한 이 ‘육아의 곤경’은 우리 사회가 프랑스와 북유럽 사회와는 다른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경험하는 육아의 곤경은 우리 사회가 곤경에 처해 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북유럽의 경우 강력한 사회적 연대와 복지 시스템으로 어떤 경우에도, 그 누구라도 현실에서 도태되는 것을 막는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해 놓았다. 이렇게 잘 구축된 사회적 질서가 자율성 존중을 최우선으로 하는 북유럽 육아를 만들어 낸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실 프랑스의 ‘부모 중심’ 육아는 프랑스 사회의 가족 형태의 변화가 만들어 낸 것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는 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출산 장려 정책을 펼친 국가인데 그 과정에서 전통적으로 아버지의 역할로 여겨지던 보육과 교육 비용을 정부가 책임지게 되었다. 그 결과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경제적 부양 책임이 없어졌다 해도 좋을만큼 줄어들면서 ‘아이 중심’으로 움직이던 가족이 ‘부모 중심’으로, 특별히 어머니를 중심으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정신분석학자인 시몬느 코르프-소스는 <아버지들에 대한 찬사>라는 책에서 오늘날 프랑스 사회의 아버지들이 기능 부전의 존재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 역시 이러한 변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프랑스 육아의 엄격함은 가정 내에 아버지의 부재가 가져온 결과는 아닐지 추론해 볼 수 있다. 가부장제에서 권위를 행사하던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가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면서 엄격한 육아가 자리잡게 된 것으로 말이다. 물론 프랑스 사정을 잘 모르는 나로서는 어디까지나 가설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렇게 보자면 한 사회의 육아는 그 사회가 만들어내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복잡하고 정답이 없는 육아는 복잡하고 정답이 없는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프랑스와 북유럽 육아를 만든 사회는 우리 사회와 아주 다르다. 프랑스 부모처럼, 북유럽 아빠처럼 아이를 키우지 못한 것에 대한 변명일 수 있겠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프랑스 육아와 북유럽 육아가 우리 육아 현실에 대한 정답이 될 수 없는 것이다.

5. 정답이 없는 육아

천재 경제학자로 알려진 스티븐 레빗도 육아하는 아빠다. 그가 쓴 <괴짜경제학>이라는 책을 보면 “육아법 만큼이나 유행이 빨리 바뀌고 전문가들 간의 견해가 상충되는 분야는 없다”는 불평이 나온다. 아이 키우기와 관련해서는 신체 발달과 관련된 영역을 제외하고는 의견 일치를 이루는 부분을 찾는 것이 그렇지 않은 부분을 찾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티븐 레빗의 불평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육아란 ‘인간’을 다루기 때문이다. 인간은 경제학자들이 다루는 어떤 통계보다도 더 복잡하다. 프랑스 육아와 북유럽 육아의 차이가 빚어지는 이유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두 육아의 차이는 사회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서로 다른 두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프랑스 육아를 규율을 강조하는 육아, 북유럽 육아를 자율을 강조하는 육아라고 한다면, 철학에서는 이 문제가 결정론과 자유의지의 관계 혹은 구조와 자유의 관계라는 주제 등으로 폭넓게 다뤄져 왔다. 따라서 프랑스 육아와 북유럽 육아가 유행한 것은 오래되지 않은 일이지만 육아에 있어서, 인간에게 있어서 규율과 자율 중 무엇이 더 강조되어야 하는지는 아주 오래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앤 핼버트가 쓴 <미국의 자녀 양육:전문가와 부모, 그리고 자녀 양육 조언의 1세기 역사>라는 책을 보면 1세기 동안 미국의 양육 전문가들이 끊임 없이 서로 모순되는 말을 하거나 자기 모순을 범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모순들 역시 육아에서 규율과 자율 중 어느 쪽을 강조하는지에 따라 생겨난 것들이다. 한 예로 게리 애조의 <베이비 와이즈>라는 책에는 어린 시절부터 아이를 혼자 재워야 한다고 하는데 이유는 아이가 부모로 인해 수면 부족에 시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개리는 수면 부족이 ‘유아의 중추 신경계 발달에 부정적 영향’을 주고 학습 장애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개리가 규율 육아를 강조하는 프랑스 육아와 비슷한 견해라면 ‘부모와 함께 자는 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자율성을 강조하는 북유럽 육아와 비슷한 견해다. 혼자 자는 것은 아이의 정신 건강에 해로울 수 있으므로 아이를 ‘가족 침대’로 데려와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 강연에서 있었던 일이다. 강연을 마쳐야 할 시간이 5분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서 한 엄마가 수줍게 손을 드셨다. 강연 내내 냉정하고 어두운 표정을 하고 계셨지만 진지하게 강의를 들어주셨던 분이셨다. 25개월된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였다. 어린이집에서는 잘 지낸다는 아이가 집에만 오면 고집을 부려 감당하기 힘들다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질문을 주셨다. 다행스럽게도 아빠가 아이를 잘 도닥여주는 편이지만 유독 자신에게만 고집을 부리는 아이를 보며 차라리 자신이 없으면 나을 것만 같아 집을 나가고 싶을 때도 많았다고 하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리고 “불안합니다... 너무 불안합니다” 하고서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문 밖에서 강연을 마쳐 달라는 스탭의 신호가 이어졌다. 나는 이 엄마의 질문에 어떤 대답을 했었어야 할까. 질문을 한 엄마는 고민의 무게 만큼이나 여러 강연을 다니며 전문가 선생님들을 찾아가 상담도 받았고, 육아서도 챙겨 가며 읽었다고 했다. 어떤 조언도, 어떤 견해도 통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그 날 강의의 주제와 연결해서 나는 짧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네, 저도 불안합니다. 어머님, 그래도 아이를 잘 관찰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아이 엄마가 되묻고 간 질문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아이를 관찰하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선생님, 도대체 어떻게 관찰하란 말인가요?”

나는 가장 좋은 육아는 불안을 떨쳐버리는 ‘믿음의 육아’가 아니라 끊임 없이 고민하고 생각하는 ‘불안의 육아’라고 믿는다.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만으로 이미 자신이 좋은 엄마와 아빠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먼저 그 사실에 안심하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부모라면 누구라도 육아의 정답이 무엇인지를 찾지만, 아이가 다르고 부모가 다르고 사회도 다르기 때문에 프랑스 육아도, 북유럽 육아도 그 자체로는 답이 될 수 없고, 규율과 자율 둘 중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도 정답이 될 수 없다. 애초부터 육아에 정답이란 없는 것이다.

6. 믿음의 육아, 불안의 육아

불안할 때, 어떠한 육아서의 조언도 통하지 않을 때, 어떤 전문가의 말도 와 닿지 않을 때, 바로 그 때가 우리가 인문서를 읽어야 할 때이다. 인문서는 지금 내가 읽는 이 육아서가 염두에 두고 있는 아이는 어떤 아이인지, 어떤 사회적 맥락에서 쓰여졌는지, 어떤 철학과 가치관을 배경으로 인간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며 읽도록 도와준다. 즉 인문서는 육아서를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비평의 대상으로 읽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인문서는 세계를 보는 방법을 찾도록 도움을 준다. ‘보는 것’은 쉬워도 ‘제대로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인문서는 내 아이를 관찰할 수 있는 방법을 훈련시켜준다. 무엇보다 인문서는 우리에게는 ‘정답’이 아니라 상황과 때에 맞는 ‘지혜’를 준다. 정답은 규율 아니면 자율, 프랑스 육아 아니면 북유럽 육아이겠지만 지혜는 지금 내 아이에게 프랑스 부모처럼 엄격하게 하는 것이 필요한지, 북유럽 아빠처럼 친구가 되는 것이 필요한 때인지를 판단할 수 있게 해준다. 규율만이 필요한 아이도 없고, 허용만이 필요한 아이도 없다. 또 어떤 사회도 고정적이지 않고, 어떤 아이도 자라지 않고 그대로 있지 않기 때문에 육아서를 그대로 믿어 버리기 보다는 지금 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는 ‘생각하는 힘’이 부모에게 필요하다. 생각하는 힘이 결여된 채 프랑스 육아가 요구하는 대로 따른다면, 부모의 권위를 앞세워 부모의 편의에 따른 규율만 엄격하게 적용하는 상황으로 전락하기 쉽고, 북유럽 육아가 요구하는 대로 따르기만 한다면 북유럽에 살고 있는 이름 모를 아빠와 내 남편을 비교하면서 육아 휴직은 꿈도 꾸지 못하는 아빠와 싸움으로 이어지는 일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아이를 잘 키운다는 것은 무엇일까? 플라톤의 <국가>는 한글 번역으로 700페이지가 넘는 책이지만 전체의 주제는 하나다. “올바름이란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무엇이 좋음인지, 무엇이 옳음인지 그만큼 말하기 어렵기에 아이를 ‘잘 키운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하나의 정답이 존재할 수 없고 끊임 없이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생각할 때 프랑스 육아보다, 북유럽 육아보다 나은 ‘나의 육아’에 따라 아이를 키울 수 있을 것이다.

나와 아이를 새롭게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인문서 5권

1. 호모 루덴스, 요한 호위징하

호모 루덴스는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이 책은 인간을 ‘놀이하는 존재’로 이해합니다. 인간 행위의 기본적인 구조가 모두 놀이 구조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입니다. 이 책은 부모 자신 뿐만 아니라 부모가 아이를 바라보는 방식을 변화시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이를 ‘학습하는 인간’, 성인이 되면 ‘일을 하는 인간’으로 고정적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아이들의 삶에서 놀이가 왜 필수적인지, 그것이 왜 창조와 상상력의 원천이 되는지에 대한 명료한 이해를 줍니다. 무엇보다 규율과 자율을 모두 존중하는 육아는 정말로 어렵지만, 아이들은 놀이 속에서 자연스럽게 규율을 따르는 것을 배우고, 스스로 규율을 만들어 가면서 자율을 배운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줍니다. 육아의 비밀은 놀이에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2. 철학자와 늑대

제가 쓴 <철학자 아빠의 인문 육아>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는 원래 제목을 이 책을 따라 <철학도와 아이>로 붙이려고 했습니다만 애석하게도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이 책은 동물권에 대한 옹호자이자 미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철학자인 작가가 우연히 늑대를 집에서 키우게 되면서 겪게 된 에피스도와 철학적 성찰로 이뤄져 있습니다. 브레닌은 야성이 남아 있고, 길들여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쩌면 말이 통하지 않는 24개월 이하의 아이와 닮아 있습니다. 늑대를 보면서 사람을 이해하게 되는 독특한 책입니다. 저자는 늑대 브레닌이 개와는 달리 품위가 있고 자존심이 강했다고 합니다. 내 아이를 브레닌으로 키우는 지혜를 줄 수 있는 책입니다.

3. 무지한 스승

배운다는 것과 아이를 가르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처음부터 생각해보도록 도와줍니다. 이 책에는 네델란드어를 모르는 프랑스어 교사가 학생들에게 프랑스어의 기본적인 내용도 가르쳐주지 않고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결과 놀랍게도 학생들의 프랑스어 구사 수준은 작가 수준에 도달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무지한 스승이 때로는 학생들의 지적 발달에 더 큰 기여를 한 것입니다. 학생들이 고유한 지능을 쓰도록 하자 교사가 모르는 것을 교사가 가르칠 수 있게 됩니다. 이 책은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것보다 어쩌면 무지한 부모가 되는 것이 아이의 고유한 지능을 발휘하도록 하는데 더 나을 지도 모른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부모의 좁은 생각이 아이의 생각을 좁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부모인 우리가 아이를 해방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먼저 해방되어야 합니다.

4. 보다

김영하 소설가의 산문집입니다.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진심을 담아 전하기만 하면 상대에게 전달되리라는 믿음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지만 진심은 그렇게 전달되지 않고 ‘잘 설계된 우회로’를 통해 전달된다고 합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아이를 사랑한다는 진심만으로는 아이에 대한 사랑이 잘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에게 진심을 전하는 방법을 이 책을 통해서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또한 이 책은 김영하 작가가 본 책과 영화에 대한 글로 이뤄져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것은 김영하의 독서법을 배우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책을 읽는다면 우리도 김영하처럼 육아책을 읽고, 내 아이도 관찰할 수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5. 사람 장소 환대

육아는 사람마다 다르고, 또 사회마다 다릅니다. 우리가 처한 온갖 ‘육아의 곤경’의 많은 부분은 우리 사회가 육아하기 어려운 사회이기 때문에 생겨난 것들입니다. 육아하기 좋은 사회는 이 책의 제목을 이용해 말해보자면 ‘사람을 환대하는 장소’여야 합니다. 북유럽 육아의 힘은 어떤 사람도 문전박대하지 않는 사회의 힘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누구라도 환대해주는 사회이기 때문에 아이들은 누구의 바램이 아니라 자신의 바램에 따라 학업과 진로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더 좋은 육아는 혼자 고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 좋은 육아는 여러 사람이 모여 함께 육아하기 더 좋은 사회를 만들 때 이뤄지는 것 같습니다.


- 이 글은 <맘앤앙팡> 2016년 2월호에 특집기사로 실렸습니다.

맘앤앙팡, 프랑스육아, 북유럽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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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관한 일기 대신 책 – 팻(돈 쿨릭과 앤 메넬리 엮음)
몸, 특히 뚱보에 관한 문화인류학적 보고서

매주 금요일 교통방송에 나가서 책을 소개한다. <팻>은 내가 17번째로 소개한 책이다. 지금 서경식 선생님은 아주 날씬해지셨지만 10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덩치가 크고 머리도 아주 짧게 자르시고, 중절모에 검은 코트를 입고 다니셨는데, 서경식 선생님을 내게 소개시켜 주셨던 사학과 I 교수는 내게 "따뜻하고 다정한 분이시지만 실제 만나뵈면 야쿠자처럼 보일 수도 있다"고 하셨다. 서울에 선생님께서 계실 때 선생님께 비만인권리투쟁협회, 비투협을 만들어야 한다고 농담을 했었는데 선생님께서는 그저 웃기만 하셨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가끔 비투협에 대해 언급하셨다. 나는 정말 그런 협회가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비만인권리협회가 미국에서 소수이지만 현재 활동을 하고 있고, 이 책에 소개된 내용을 보면 활동이나 철학이 아주 섬세하다. 예를 들어 협회 소속원들이 다이어트를 하는 것은 모순적일까, 우리의 주장이 청소년들에게 전달되는 것은 과연 바람직할까 등등의 진지한 고민, 그리고 길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뚱뚱하다고 생각하세요?"라고 묻는 등의 캠페인은 섬세하게 계산하지 않았다면 이뤄지기 어려웠을 활동이다.

특히 기억에 남는 내용은 뚱보 인권운동가에게 "사이즈가 얼마냐?"고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이다. 사이즈는 달라진다고 한다. 브랜드마다 다른 사이즈를 입고, 셔츠와 코트와 바지를 살 때도 같은 사이즈가 아니고, 시기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그리고 그들은 비만인들에게 맞는 옷 사이즈가 제공되지 않는 브랜드 매장 앞에서 공격적 시위를 하기도 한다. 나만 해도 이 정도 몸집이 되면 어지간한 브랜드에는 사이즈가 없을 때가 많다. 나는 폴 스미스에서 만든 옷을 예쁘다고 생각해 왔는데 여태 단 한번도 사입어 본 적이 없다. 사이즈가 없어서 둘러보다 그냥 나오기 민망해 머플러를 하나 산 것이 전부다. 랄프로렌은 예민한 디자인 감각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선호할 만한 브랜드가 아닐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폴로가 없다면 기성복 라인에서 내 몸에 맞는 남방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20대 초반에는 제일모직에서 나온 푸부라는 브랜드가 있었는데, 지금은 잘 찾아보기 힘들고 내 나이대에 걸맞는 디자인도 아니다. 백화점 점원들은 내가 너무 커서 맞는 옷을 팔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 하지만 시장 상인들은 나와 눈을 마주치면 "사이즈 없어요"라고 물을 기회도 주지 않는다. 심지어 제주에 어떤 시장에서는 사이즈를 볼 수 있냐고 물으니 상인이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아무 말 없이 다시 보던 TV를 보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살을 가장 빼고 싶은 이유를 들자면 폴로 말고 다른 옷을 입어 봤으면 하는 것이다!

이 책의 가장 강렬한 메시지는 다이어트는 항상 실패한다는 것이다.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의 76%는 다이어트를 시작한지 3년 뒤에 다이어트 이전보다 살이 더 찌며, 5년 뒤에는 95%나 살이 더 찐다”는 통계를 마주하면 내가 저 통계 안에 들어간다는 사실에 뭔가 모를 안도감이 생긴다. 나는 95%니까 요요가 온 것은 내 절제력의 부족이 아니라 보통의 인간에게는 당연한 것이라 생각에 말이다. 저자들은 다이어트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매번 실패할 수밖에 없는 다이어트의 제단에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것의 합리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온갖 병과 낮은 자존감, 불편의 원인이 비만인 줄 알면서도 살을 빼지 못하는 것일까?

‘스팸’을 다룬 장에서 한가지 대답을 찾을 수 있다. 하와이는 미국에서도 스팸 소비가 가장 많은 지역이고, 스팸과 관련된 축제도 열릴 정도로 이 고기 통조림을 좋아한다. 물론 하와이 사람들도 스팸이 건강에는 좋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스팸을 왜 좋아하는 걸까? 스팸은 통조림 제품이라 2차 대전 당시에 미군들에게 식량으로 보급되었는데, 진주만 공습 후 하와이에 미군이 증강되면서 군인 뿐만 아니라 스팸이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또 진주만 피습 후에 미국 정부가 근해 어업을 금지하면서 하와이 사람들의 주식인 생선이 귀해진 반면에 스팸은 구하기 쉽고 저렴했다. 하와이에서는 전쟁의 힘든 시기를 성공적으로 이겨낸 것을 연상시키는 ‘그리운’ 음식이 되었고, 해를 거듭하면서 전통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내게 빗대자면 일종의 “만두” 같은 거다. 아버지께서 늘 사다주시던 중국 사람이 운영하는 가게의 군만두 같은 것 말이다.
살을 빼지 못하는 것은 이런 문화적인 이유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이유도 있다. 라틴랩의 거장인 ‘빅 펀’은 사망 당시 몸무게가 698파운드, 그러니까 316킬로그램이었다. 어렸을 때는 뚱뚱하지 않았지만 섭식장애를 앓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헤로인 중독자였고, 양아버지는 아주 폭력적이었는데 거기에 대한 분노와 좌절감으로 빅펀은 벽에 구멍을 내서 벽돌 부스러기를 먹곤 했다. 부모의 방치나 학대로 이식증이 생긴 것이다. 빅펀은 돈이 생기고 나서부터는 식욕을 채우는데 집착했고, 체중이 급격하게 불어났다. 그리고 결국은 28살의 나이에 심장병으로 죽었다. 빅펀이 살을 빼지 않은/못한 것은 빅펀의 마음 속에는 ‘학대 받아 배고픈 자아’와 ‘뚱보 자아’가 모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미국의 힙합 문화에서는 ‘크기’를 ‘힘’으로 여기는 문화가 있었다. 마치 큰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것이 권력을 상징하는 것처럼 큰 몸집은 힘과 성공을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힙합 가수들은 헐렁한 옷을 입고 신체를 더 크게 보이도록 만든다. 유럽의 귀족들도 큰 덩치를 권력으로 여겼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빅펀은 살을 빼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책은 다이어트가 항상 실패인 이유를 직접 말하지는 않지만 이 외에도 ‘비만’을 읽는 다양한 비평적 관점을 제시해 준다.
방송에서는 하지 못한 이야기가 많은데, 특히 뚱보 포르노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할 수 없어서 아쉽다. 뚱보 포르노에는 뚱보 여성이 성관계하는 모습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저 가슴과 배를 드러내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생크림을 숟가락으로 떠먹는 모습을 비춰 준다는 것인데, 저자는 말년에 푸코가 가학/피학 성애에 대해 말을 많이 했다는 것을 가져와서 아마 푸코도 뚱보 포르노에 열광했을 것이라 예상한다. 푸코의 관점에서 이런 '변태 성향'은 남근 중심의 성적 욕망이 재배치된 결과이다. 보통 포르노 영상은 금지되고, 소수적인 취향을 미세하게 반영한다. 엄청나게 뚱뚱한 여자가 마음껏 음식을 먹는 것을 보는 것은 '금지'에 대한 도전이라는 점에서 별 차이가 없다. 뚱보 포르노에서 '비대한 살'은 역겹거나 혐오스러운 것이 아니라 사랑스럽고 욕망의 대상이 된다. 성기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과 비슷하게 말이다. 뚱뚱한 여자가 나오는 포르노가 성적으로 매력적일 것이라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지만 깡마른 여자보다는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이 책은 '뚱뚱하다는 것'을 철학적으로, 문화사회학적으로, 인류학적으로 해명하는 여태 보지 못했던 책이다. 마지막으로, 솔직히 말해 잘 읽히지는 않는다. 그래도 팻에 대해서만큼은 팻하게 담고 있는 아주 내실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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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 팻, 비만과 집착의 문화인류학
돈 쿨릭.앤 메넬리 엮음, 김명희 옮김 / 소동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방송에서는 하지 못한 이야기.
교통방송에서 17번째로 소개한 책이다. <팻>. 지금 서경식 선생님은 아주 날씬해지셨지만 10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덩치가 크고 머리도 아주 짧게 자르시고, 중절모에 검은 코트를 입고 다니셨는데, 서경식 선생님을 내게 소개시켜 주셨던 사학과 I 교수는 내게 "따뜻하고 다정한 분이시지만 실제 만나뵈면 야쿠자처럼 보일 수도 있다"고 하셨다. 서울에 선생님께서 계실 때 선생님께 비만인권리투쟁협회, 비투협을 만들어야 한다고 농담을 했었는데 선생님께서는 그저 웃기만 하셨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가끔 비투협에 대해 언급하셨다. 나는 정말 그런 협회가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비만인권리협회가 미국에서 소수이지만 현재 활동을 하고 있고, 이 책에 소개된 내용을 보면 활동이나 철학이 아주 섬세하다. 예를 들어 협회 소속원들이 다이어트를 하는 것은 모순적일까, 우리의 주장이 청소년들에게 전달되는 것은 과연 바람직할까 등등의 진지한 고민, 그리고 길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뚱뚱하다고 생각하세요?"라고 묻는 등의 캠페인은 섬세하게 계산하지 않았다면 이뤄지기 어려웠을 활동이다. 특히 기억에 남는 내용은 뚱보 인권운동가에게 "사이즈가 얼마냐?"고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이다. 사이즈는 달라진다고 한다. 브랜드마다 다른 사이즈를 입고, 셔츠와 코트와 바지를 살 때도 같은 사이즈가 아니고, 시기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그리고 그들은 비만인들에게 맞는 옷 사이즈가 제공되지 않는 브랜드 매장 앞에서 공격적 시위를 하기도 한다. 나만 해도 이 정도 몸집이 되면 어지간한 브랜드에는 사이즈가 없을 때가 많다. 나는 폴 스미스에서 만든 옷을 예쁘다고 생각해 왔는데 여태 단 한번도 사입어 본 적이 없다. 사이즈가 없어서 둘러보다 그냥 나오기 민망해 머플러를 하나 산 것이 전부다. 랄프로렌은 예민한 디자인 감각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선호할 만한 브랜드가 아닐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폴로가 없다면 기성복 라인에서 내 몸에 맞는 남방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20대 초반에는 제일모직에서 나온 푸부라는 브랜드가 있었는데, 지금은 잘 찾아보기 힘들고 내 나이대에 걸맞는 디자인도 아니다. 백화점 점원들은 내가 너무 커서 맞는 옷을 팔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 하지만 시장 상인들은 나와 눈을 마주치면 "사이즈 없어요"라고 물을 기회도 주지 않는다. 심지어 제주에 어떤 시장에서는 사이즈를 볼 수 있냐고 물으니 상인이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아무 말 없이 다시 보던 TV를 보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살을 가장 빼고 싶은 이유를 들자면 폴로 말고 다른 옷을 입어 봤으면 하는 것이다!
방송에서는 하지 못한 이야기가 많은데, 특히 뚱보 포르노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할 수 없어서 아쉽다. 뚱보 포르노에는 뚱보 여성이 성관계하는 모습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저 가슴과 배를 드러내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생크림을 숟가락으로 떠먹는 모습을 비춰 준다는 것인데, 저자는 말년에 푸코가 가학/피학 성애에 대해 말을 많이 했다는 것을 가져와서 아마 푸코도 뚱보 포르노에 열광했을 것이라 예상한다. 푸코의 관점에서 이런 '변태 성향'은 남근 중심의 성적 욕망이 재배치된 결과이다. 보통 포르노 영상은 금지되고, 소수적인 취향을 미세하게 반영한다. 엄청나게 뚱뚱한 여자가 마음껏 음식을 먹는 것을 보는 것은 '금지'에 대한 도전이라는 점에서 별 차이가 없다. 뚱보 포르노에서 '비대한 살'은 역겹거나 혐오스러운 것이 아니라 사랑스럽고 욕망의 대상이 된다. 성기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과 비슷하게 말이다. 아무튼 이 책은 '뚱뚱하다는 것'을 철학적으로, 문화사회학적으로, 인류학적으로 해명하는 여태 보지 못했던 책이다. 솔직히 말해 잘 읽히지는 않는다. 그래도 팻에 대해서만큼은 팻하게 담고 있는 아주 내실 있는 책이다.

<팻>
비만과 집착의 문화인류학

1.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떤 책을 소개해주시겠어요?

벌써 2016년도 두 달이 지나 벌써 3월이 되었는데요, 새해에 세우셨던 계획과 다짐이 지금까지 잘 지켜지고 있으세요? 저는 새해 다짐은 세울 때마다 지키는 것을 실패하는 편이라 잘 세우지 않는 편인데요, 그래도 해마다 다짐하는 것이 있다면 “올해는 정말 살 한번 빼보고 싶다”는 겁니다. 청취자들은 저를 보신 적이 없으실테니까 모르시겠지만 사실 저는 상당히 뚱뚱하거든요. 그래서 연초에 피트니스 센터를 등록하긴 하는데요, 사실은 몇 번 가지 않고 그만둔 적이 많습니다.

2. 그런 분들이 많으시죠. 피트니스 센터를 등록하고 나서 운동은 하지 않으시고 거기서 목욕만 하고 오시는 분들도 많으시더라구요.

저도 그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헬스, 건강, 외국어 공부하기와 관련된 상품이 연초에 많이 팔리는데요 이런 것을 ‘결심산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결심과 다짐을 이용해서 장사를 하는 것인데요, 저도 매번 결심만 하고 있고, 벌써 살을 좀 빼보겠다는 연초 다짐은 물건너간지 오래인데요, 오늘 소개해드릴 책은 제가 그런 고민 끝에 찾아 읽게 된 <팻>이라는 책입니다. 출판사 소동에서 만들고 돈 쿨릭과 앤 메넬리가 쓴 책입니다. 그리고 책 속에서 어느 정도 답을 찾았는데요, 결국 다이어트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이 책에 따르면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의 76%는 다이어트를 시작한지 3년 뒤에 다이어트 이전보다 살이 더 찌며, 5년 뒤에는 95%나 살이 더 찐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차피 살을 뺐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다시 돌아가게 된다는 거죠. 제 경험에 비춰봐도 정말 맞는 이야기였구요, 유명한 아나운서인 이금희씨와 같은 분이나 오프라 윈프리 경우에도 정확하게 이 통계와 일치하는 사례입니다. 결심산업 같은 것이 되는 이유가 사실은 다이어트를 사람들이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이어트의 효과가 별로 없기 때문인거죠.

3. <팻>이라고 하면, ‘뚱뚱함’이라는 말인거죠? 그러면 제목이 우리 말로 ‘뚱뚱함’ 인거네요.

맞습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뚱뚱한 것, 그러니까 비만에 대해서 쓴 책인데요, 영어인 팻은 사실 ‘뚱뚱하다’는 뜻 외에도 여러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에요. ‘기름’을 의미하기도 하구요, 어떤 경우에는 부유하고 풍요롭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리고 ‘살찐’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냥 ‘살’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책의 번역자가 ‘팻’이라는 제목을 그대로 사용한 건데요, 이 책은 이렇게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팻’의 다양한 측면을 재밌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책 속에 흥미로운 내용이 정말 많은데요, 니제르 사람들이 뚱뚱한 여성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이유, 뚱보 포르노 영화가 만들어지는 이유, 하와이 사람들이 스팸 통조림을 좋아하는 이유가 소개되기도 하구요, 토스카나 지역에서 올리브유가 갖는 의미 등 한 마디로 ‘뚱뚱함’에 대한 정말 다양한 정보와 다각도의 시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통 비만과 관련된 책이 다루는 살을 빼는 방법이나 살을 빼야 하는 건강상의 이유 같은 것은 전혀 다루지 않습니다. 이 책은 다이어트에 관심을 갖는 독자들이 ‘지방’에 대해서, ‘뚱뚱함’이나 우리 몸의 체형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를 주려고 합니다. 책의 부제가 ‘비만과 집착의 문화인류학’인데요, 문화인류학적 방법으로 ‘뚱뚱하다는 것’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을 주는 책이죠. 딱 저 같은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진 책인거죠.

4. 그렇네요. 우리는 흔히들 비만은 무조건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이 책은 다른 관점을 보여주는 책인거네요.

네, 이 책도 비만이 건강에 해가 된다는 명백한 과학적인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비만은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을 책의 초반부터 이야기해두고 시작합니다. 책의 한 부분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뚱뚱함을 걱정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최근 <이코노미스트>는 비만 특집호에서 비만의 몇 가지 문제점을 이렇게 요약했다. “뚱뚱하다고 해서 죽는 것은 아니지만, 비만한 사람은 여러 질병에 걸려 일찍 죽게 될 위험성이 높다. 과체중인 여성은 표준 체주의 여성보다 제2형 당뇨병에 걸릴 확률이 다섯 배 높고, 고도 비만인 여성은 50배나 더 높다. 비만은 암과도 관련이 있다. 최근 미국의 한 연구에 따르면, 암으로 사망하는 남자의 14%와 여자의 20%는 비만에 원인이 있다. 또한 과체중은 전쟁, 말라리아, 에이즈를 제외하고 전세계 인류의 최고 사망원인인 심장병의 주요 발병 요인이기도 하다”. (중략) 이런 식으로 논박의 여지가 없는 증거를 앞에 두고도, 사람들은 어떻게 자신을 살이 찌도록 놔두는 걸까? 아마도 현실의 삶은 훨씬 더 복잡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 맞는 이야기죠? 사실 저도 비만이 이런 건강에는 정말 좋지 않다는 것을 몰라서 살을 빼지 못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리고 아시다시피 비만이 건강에만 좋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우리나라와 같은 문화에서는 ‘뚱뚱하다’는 것은 자신의 신체를 가꿀만한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해서 빈곤을 표시하기도 하고, 또 ‘게으르고 둔하다’는 이미지도 있으니까 이런 온갖 것을 생각해보면 이렇게 부정적인 것이 많은데 사람들이 살을 빼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이상한 일이죠. 이 책에서는 인간과 현실이 아주 복잡하기 때문이라고 하는 거죠.

5.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요. 비만에서 벗어나야 할 이렇게나 많은 이유가 있는데 왜 살을 빼지 못하는 걸까요?

이 책에 ‘스팸’을 다룬 챕터가 있는데요, 스팸이라는 통조림 제품 잘 아시죠? 짭짜름한 맛을 내는 고기 통조림인데요, 이걸 하와이 사람들이 아주 좋아한다고 해요. 미국에서 스팸 소비가 가장 많은 지역이고, 스팸과 관련된 축제도 열리는데, 여기에서 스팸 만리장성 쌓기, 기네스북에 올리기 위한 세게에서 가장 긴 약 99미터의 스팸 무스비 만들기 만들기 대회 같은 것을 열 정도로요. 그런데 하와이 사람들도 스팸이 건강에는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스팸을 즐겨 먹는데 그 이유는 아주 복잡한데요, 스팸이 휴대가 편하고 오래 보관할 수 있으니까 2차 대전 당시에 미군들에게 식량으로 보급되었다고 해요. 그런데, 진주만 공습이 있고 하와이에 미군이 증강되면서 군인 뿐만 아니라 스팸도 밀려 들어온 거죠. 그러니까 2차 세계 대전 때 하와이 주민의 식단에서 중요한 위치가 된 건데, 그렇게 된 것은 진주만 피습 후에 미국 정부가 근해 어업을 금지하면서 하와이 사람들의 주식인 생선이 귀해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스팸은 구하기 쉽고 저렴했기 때문인거죠. 맛은 있지만 몸에는 별로라고 생각하는 음식이 하와이에서는 전쟁의 힘든 시기를 성공적으로 이겨낸 것을 연상시키는 ‘그리운’ 음식이 되었고, 해를 거듭하면서 전통으로 자리잡게 된 겁니다.




6. 아, 그러니까 사회 문화적인 배경이 있는 거네요. 살을 빼고 찌우는 것이 단지 개인의 의지나 건강상의 요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의 측면도 있다는 거군요.

네, 사실 이 밖에도 흥미로운 다른 요인이 많은데요, 책의 저자들은 노동자들이 달고 기름진 음식을 좋아하게 된 것은 문화와 경제, 정치적인 힘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합니다. 영국의 경우에는 19세기에 설탕이 엄청난 인기를 얻었는데요, 그게 노동자들의 에너지를 보충해주고 배고픔의 고통을 덜어주는 효과가 있어서 공장주들에게 이득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책을 보면 살을 빼지 못하는 이유가 개인의 심리적인 상처 혹은 트라우마와도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라틴랩의 거장인 ‘빅 펀’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그래미상 후보가 될 정도로 90년대 후반에 날렸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빅펀이라는 가수의 몸무게가 698파운드, 그러니까 316킬로그램이나 나갔습니다. 어렸을 때는 뚱뚱하지 않았지만 섭식장애가 있었다고 해요. 어머니는 마약 중독자였고, 양아버지는 아주 폭력적이었는데 거기에 대한 분노와 좌절감으로 빅펀은 벽에 구멍을 내서 벽돌 부스러기를 먹곤 했다고 합니다. 영양분이 없는 물질을 계속 먹는 것을 이식증이라고도 하는데요, 주로 영양 결핍이 있거나 부모의 방치나 학대가 있으면 생긴다고 합니다. 빅펀은 어릴 때 당했던 사고에 관한 소송으로 50만 달러를 받게 되는데요, 돈이 생기자 식욕을 채우기 시작했고 체중이 급격하게 불어났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28살의 나이에 심장병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빅펀의 경우는 하와이 사람들과는 다르게 어릴 적 경험이 비만의 요인이 되기도 했고, 힙합 세계라는 문화적 요인도 한 몫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럽의 귀족은 몸무게가 무거운 것을 힘이나 권력과 연결시켜서 생각을 했고, 힙합 가수들이 덩치가 크고 헐렁한 옷을 입는 것도 백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감을 과시하는 방법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뚱뚱하다는 것은 명예고, 금전적 성공을 의미하는 거죠. 힙합 문화가 주류 문화에 대한 저항을 노래하잖아요? 힙합 랩퍼들은 뚱뚱하면 역겹고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미국인의 주류적인 시각에 저항을 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7. 같은 미국인이라고 해도 백인계 미국인과 흑인계 미국인이 뚱뚱함을 바라보는 시각에 차이가 난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네, 미국에 가보면 백인보다는 흑인 중에 뚱뚱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요, 거기에는 흑인들이 단지 가난하기 때문에 패스트푸드를 많이 먹어서가 아니라 흑인들이 백인들보다 뚱뚱하게 된다는 것에 거부감이 별로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대체로 흑인들은 백인과는 다른 아름다움에 대한 이상을 갖는 경우가 많고, 음식을 조절하는 것을 ‘쿨하게 생각하지 않는 문화’가 있는 거죠.
실제로 이 책에 나오는 니제르의 경우는 여성들이 마른 여성을 엄격하고 남자 같아 보여서 싫어한다고 해요. 심지어 이 사람들은 살이 쪄서 생기게 되는 ‘튼살 자국’을 좋아한다고 해요. 노래 중에도 “튼살 자국이 있는 허리”가 있는데 이게 사랑 노래구요, 젊은 여자들은 하나 같이 팔이나 다리에 튼살 자국이 생기기를 소망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체중을 잴 때마다 조금이라도 덜 나가게 하려고 신발도 벗고, 외투도 벗고 재잖아요? 니제르 여자들은 편안하게 모든 것을 갖추고 올라가는 거죠. 그 이유는 니제르의 아랍 상류층 여자들에게 움직일 수 없을만큼 찐 살은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될 능력을 나타내는 거라고 합니다. 또 이 사람들에게 건강한 몸은 차가움과 뜨거움이 조화를 이룬 상태인데 살이 쪄야 몸에 있는 구멍들이 막혀 따뜻해 지게 된다고 생각한다고 해요. 우리와 몸에 대한 관념 자체가 완전히 다른 거죠.

8. 아, 재밌는 이야기들이 정말 많네요. 이제 정리를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청취자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시는 이유를 한번 정리해주세요.

이 책에는 비만인권운동가가 나옵니다. 이 사람들은 섹시한 옷을 입을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체형인정협회와 연대합니다. 저만 해도 제 사이즈에 맞는 옷을 사면 기분이 나빠질 때가 많습니다. 사이즈가 없어서요. 비만인권운동가들은 여성들에게 날씬할 것을 강요하는 사회와 싸우고, 뚱뚱하다는 것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생각들에도 저항합니다. 뚱뚱하고도 행복할 수 있고, 뚱뚱하고 자랑스러울 수 있다는 거죠. 앞서 제가 말씀 드렸던 내용처럼 뚱뚱하다는 것이 문화적 정체성을 나타내기도 하고, 힘과 권력을 상징하기도 하는데 우리는 너무 일방적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체형을 부정하도록 만드는 문화에서 살고 있습니다. 여성분들 100퍼센트가 다이어트를 한다는 농담도 있는데, 사실 다이어트의 효과가 별로 없다는 것은 입증된 것이라 다이어트가 오히려 대사를 망치고 사람을 더 살찌게 할 수도 있습니다.

비만은 건강에 나쁜 것은 분명하지만, 이 책은 우리가 비만이라는 현상에 대해 정말 다양한 관점을 갖게 도와줍니다. 비만하고 뚱뚱한 것을 바라보는 여러 관점을 읽어가다보면, 인간이 정말 단순하지 않고 깊이를 지닌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올해 다이어트 계획을 세웠다고 실패하신 분들에게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자책하시기 전에 이 책을 한번 읽어보시면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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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관한 일기(2) - 비만이 의미하는 것들

                            뚱보자아는 잘 죽지 않는다. 


 나는 상체 비만이 유독 심하다. 배가 많이 나와서 소위 배바지로 부르는 형태로 바지를 입는다면 허리 사이즈가 족히 45인치는 되어야 할 것이다. 파트너는 내 가슴이 크다며 놀라워 하는데, 인정하기는 싫지만 어쩌면 유방증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얼마 전 내가 가르쳤던 학생에게 안부 전화가 왔는데 간단한 수술을 했다고 전해왔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어떤 수술인가 물었지만 "별 것 아니에요"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말하기 어려워 한다는 생각에 더 묻지는 않았는데, 다른 학생을 통해 그 친구가 남성 유방증 수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놀랍기도 했지만 우선 호기심이 생겼다. 남성에게 여성과 같은 유방이 있어서 이것을 축소시킬 수 있는 방법도 있다는 생각은 그 이전에는 단 한번도 한 적이 없었고, 나는 그저 살을 빼면 자연스럽게 빠지게 된다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 샤워를 하며 내 가슴을 보며 이게 살인지, 유방인지 쳐다 봤다. 내 가슴이 그저 살이든, 유방이든 어느 경우라도 부끄럽게 여겨졌다. 그리고 군 복무 시절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자대에 배치 받은지 얼마되지 않았던 신병 시절에 같은 내무실은 아니었지만 한 건물을 쓰는 운항대에 A라는 상병이 있었다. 내가 있던 부대에서는 후임들을 괴롭히는 악독한 선임들을 '꼽창'이라고 불렀는데 A는 꼽창 중의 꼽창이었다. 껌을 씹지 않아도 껌을 씹는 듯이 말을 했고 억양이 강하고 아주 불량스럽게 부산 사투리를 썼는데, A의 가장 악질적인 면모는 후임들을 자신의 성적인 노리개 정도로 취급했다는 것에 있다. 이미 썼던 것처럼 나는 군복무 시절에는 그래도 "표준적인 체형"보다 약간 더 몸무게가 나가는 정도였지만 내 동기 중에는 100킬로그램이 넘게 나가는 녀석이 있었다. 운이 나쁘게도 그 녀석은 A와 한 내무실을 쓰게 되었는데, 밤마다 괴롭힘을 당했다. 나는 그 괴롭힘을 성적 유린이라고 쓰더라도 조금도 지나친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A는 내 동기생의 침구 옆에 자기 침구를 깔아두고서 그의 옷으로 손을 집어 넣어 가슴을 밤새 주물렀고, 그렇게 잠이 들었다. 동기 녀석은 거의 잠을 잘 수 없었다. 잠이 들만 하면 주물러 대기 시작했으니까. A는 겉으로는 그 친구를 위해주는 척 다른 선임들이 그 친구에게 청소를 시키거나 심부름을 시키는 것을 못하도록 했다. 내 동기는 A의 보호 아래 내무반 사역이 있어도 항상 열외였다. 그리고는 밤에 가슴만 내어주면 되는 것이었다. 내가 군대라는 곳을 저주하고, 될 수 있는 한 병역을 기피하라고 권하는 것은 이런 기억 때문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비만은 단지 '뚱뚱하다'는 것만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웃옷을 벗은 채로 거울을 바라보며 느끼는 자기 혐오감, 다른 사람에게 놀림감이나 노리개가 되는 모욕감까지도 포함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A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고, 어디선가 우연하게라도 만난다면 죽이고 싶다. 내 동기생은 일병 휴가를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부대 복귀 하루 전 날 자살했다. 


 지금 뚱뚱하지 않다고 해도 한 때 잠시라도 뚱뚱한 적이 있었던 사람은 마음 속의 '뚱보 자아'가 살아간다. 개그콘서트에서 비만인 개그맨들이 다이어트를 하는 과정이 코너로 만들어졌던 적이 있었는데 23킬로그램을 감량했다는 이희경씨나 65킬로그램이나 뺀 김수영씨나 지금은 날씬한 몸매를 가지게 되었지만 그들도 마음 속에는 사람들에게 놀림 받고, 모욕당하고, 자기를 비하하며 상처 받은 '뚱보 자아'가 여전히 살고 있을 것이다. 내가 지나치게 속이 좁은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여섯살 짜리 아이 친구들이 친구의 아빠인 나를 더러 "야, 돼지 아빠다"라고 하고 외치면 기분이 나쁘다. 아이들이니까 하고 그냥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싶다가도 아이 친구 엄마들의 키득거림, 또래 아이들의 "와" 하는 웃음 소리, 거기에 마냥 따라 웃을 수 없는 내 아이의 뻘쭘함까지 생각하면 사실 속이 끓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아이에게는 지금까지도 마음이 열리지 않는다. 명절 날 큰 댁에 가고 싶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다. 사람들은 내가 살이 더 찐 것은 아닌지 관심이 지나치게 많다. 고종 형님은 지난 10년 간 명절 첫 인사가 단 한번도 바뀐 적이 없다. "야, 너 살 더 쪘네. 이 돼지 봐라". 또 다른 삼촌도 마찬가지다. "왜 자꾸 살이 더 쪄?". 


 이런 말은 단지 내가 살이 쪘다는 단순한 사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조롱이 담겨 있다. 내 마음 속에 사는 '뚱보 자아'는 지금껏 팽생 이런 모욕에 가까운 평가와 조롱을 들으며 살아왔다. 살을 빼더라도 뚱보 자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살을 빼면 더 이상 뚱보 자아가 상처를 받을 일은 없겠지만 그 전에 겪었던 일들로 인해 트라우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야 한다고 하는데, 뚱보 자아는 죽여도 잘 죽지 않는다. 오히려 뚱보 자아가 사람을 죽인다. 내 동기생을 결국 죽게 만든 것도 A에게 상처 받은 뚱보 자아다. 


 아직 살을 빼지도 못한 주제에 너무 이른 예단일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살'을 뺀다고 해도 별로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건강이 더 나빠지는 것은 아닌지 하는 막연한 불안감은 사라지겠지만 내 속에 살아가고 있는 나의 또 다른 뚱보 자아가 받은 상처는 그대로일 것이다. 뚱보 자아에게 상처를 준 어느 누구도 용서를 구한 적이 없다. 그들은 뚱뚱한 사람에게 '뚱뚱하다'고 말하는 것에 어떤 잘못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예민하게 굴면 덩치를 운운하면서 속이 좁다느니, 히스테릭한 뚱보라며 놀려댄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단지 비만이 단지 뚱뚱한 체형을 갖게 되었다거나 건강에 좋지 않다는 사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유방증을 걱정하고, 다른 남자가 내 가슴을 만지려 하는 것에 불쾌감을 느끼고, 명절 때마다 내 몸에 대한 품평을 들어야 하는 모욕감과 같은 정서적 충격까지도 포함한다. 이제 뚱뚱하면서 건강까지 나빠지게 되니 주변 사람들까지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어머니는 건강식품을 사다 놓기 바쁘시고, 아이는 아빠 덕에 간이 된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해 투덜대고, 파트너는 걱정을 애써 감추고 아닌 척 용기를 주려 한다. 비만으로 건강까지 나빠지면 존재 자체가 '민폐'가 된다. 비만이 의미하는 이 무수한 것들 중에 단 하나라도 덜어야지 하는 마음에 밤 11시에 나가 동네를 걸었다. 퍼스널트레이닝을 전문적으로 하는 짐 앞에는 PT에 성공을 한 30대 중반의 양모씨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런 사진은 비포-애프터가 되어야 하는 법, 상의를 탈의한 양씨의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비포의 가슴은 내 가슴보다도 훨씬 컸다. 거기에 비하면 나는 유방증일리 없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살이 빠지면 가슴도 빠질테니 수술도 필요 없다. 그래서일까? 1시간의 산책에 발걸음 유난히 가벼웠다.


2016년 3월 10일. 늦은 아침을 먹었다. 현미밥과 쇠고기를 넣은 미역국, 무채 나물을 먹었다. 돼지감자가루는 맛도 별로지만 이름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빠는 돼지라서 돼지감자가루를 먹냐고 묻는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니었다면 때렸을 수도 있다. 점심은 선식을 먹었다. 오후에 집에 돌아오는 길에 뭔가 맛이 있는 것을 먹고 싶었는데 주변 식당을 둘러 봐도 들어갈만한 곳이 없었다. 결국 집에서 현미밥에 된장찌게와 나또, 쌈을 저녁으로 먹었다. 어제 좀 과하게 운동을 한 탓인지 허벅지 안쪽이 무척 아팠다. 몸을 풀기 위해 늦은 밤에 동네를 한바퀴 돌았다. 걷는 내내 소설가 김영하가 읽어주는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 예찬>을 들었는데, 그는 걷는다는 것은 세계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고, 혼자 걸을 때의 침묵이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도록 만들고 또 새로운 생각을 가져다준다고 쓰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미문을 따라 침묵의 가치를 생각해보다가 도시의 11시 밤 공기를 가득 채운 돼지고기 굽는 냄새가 내 생각과 마음을 온통 사로 잡았다. 그리고 걷기는 브르통의 말대로 내게 새로운 생각을 주었다.  여기  '육박사'라는 고기집에서 언젠가 반드시 육박사가 손질한 돼지고기를 숯불에 굽고 싶다는 생각 말이다. 뚱보 자아는 상처도 잘 받지만, 잘 죽지도 않고, 욕망은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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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관한 일기(1) - 러닝머신을 타고

                            금욕에서 향락의 세계로


 나는 나 스스로를 꽤나 금욕적인 사람으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맥주를 두세달에 한 캔 정도 마시는 것이 전부일 뿐 살아오면서 취할 정도로 술을 마셔본 일은 없다. 예전에 어떤 음악가와 술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는데, 내가 술에 취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고 하자 그 사람은 내게 "당신은 내 친구가 될 자격이 없다"고 했다.(사실 나는 그 음악가와 친구가 되고 싶었지만 결국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 그 음악가와 함께 했던 술자리 이야기가 나오니까 생각나는 일이 또 있는데, 사실 그 술집은 일종의 세미-룸살롱이었다. 10만원을 내면 젊은 여성 접대원들이 남자 손님의 옆에서 술을 따라줬다. 서른 중반이 될 때까지 그런 경험이 한번도 없었던 나에게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술은 조금도 입에 대지 않은 채 서비스로 나와 있는 캔 옥수수차만 몇 병을 마셨다. 음악가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며, 10만원은 자신이 낼테니 내 옆에 앉을 '아가씨'를 데려오라고 마담처럼 보이는 여자에게 이야기했다. 내가 좋은 술이 있는 자리의 분위기를 망친다는 것이었다. 나는 여러 차례 사양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 접대원이 들어와서 내 옆에 앉아 옥수수차를 채운 잔이 빌 때마다 채워주었다. 그 여자분도, 나도 서로 어색했다. 


 늘 이런 식인 나를 두고 금욕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금욕'이라는 말이 지닌 깊이를 모욕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금욕이라는 것은 어떤 것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마음껏 술도 마시고 마음에 드는 상대와 섹스도 즐기고, 하루에도 몇 갑씩 거리낌 없이 담배를 피우더라도 얼마든지 금욕적일 수 있다. 사실은 나보다 그 음악가가 더 금욕적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취할 만큼 술을 마시고 싶고, 답답한 일이 생기면 담배 한 대면 괜찮지 않을까 하기도 하고, TV에 매력적인 여자가 나오면 성적 공상이 나도 모르게 펼쳐지기도 한다. 한 때 나가던 교회에서 훈련 받았던 규칙이 교회를 나가지 않는 지금까지도 관성적으로 위태롭게 지탱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술에 취하고, 담배를 마시고, 섹스에 탐닉하는 일은 어쨌든 신에게 '죄'가 되는 일이다. 굳이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나는 아주 얕은 수준의 금욕적인 사람일 수도 있겠다.


 이제 내가 하려고 하는 이야기, 음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현재 심각한 비만이고, 몸이 별로 좋지 않다. 특히 상체가 비대해서 조금 걸었다 싶으면  무릎 관절이 아려온다. 나는 어릴 적부터 거의 항상 뚱뚱했다. 국민학교를 다닐 때 한 친구는(이름이 재선이었다) 나를 드럼통이라고 불렀다. 중학교를 다닐 때에는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나더러 복도를 가린다고 면박을 주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학생 주임이었던 국어 선생은 나더러 배둘레햄이라 불렀다. 나는 실제로 뚱뚱했지만 그런 말들이 듣기 싫었다. 아니, 나는 정말 뚱뚱했기 때문에 그런 말들이 더 없이 모욕적으로 느껴졌다. 처음의 다이어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느 여자 아이를 좋아하게 되면서 시작했다. 당시 나는 110킬로그램 정도였는데 살을 빼겠다는 일념 하에 오전에 우유팩 하나를 마시고 나서는 종일 굶다시피 했다. 우유를 마시고 나면 어김 없이 설사로 오전 내내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그리고 복부의 지방을 분해하려면 뱃살을 주물러야 한다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수업을 듣는 내내 뱃살을 주물렀다. 눈물이 날 정도로 아팠다. 몇 달이 지나자 체중은 눈에 띄게 줄었다. 그리고 수능 시험을 칠 때는 몸무게가 80킬로그램도 나가지 않았다. 어린 아이 하나가 몸에서 나간 셈이었다. (아마도 내 인생에 다시 없을 체중이지 않을까) 여자 아이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살을 빼긴 했지만 불행하게도 그 여자 아이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 아이의 눈에는 80킬로그램으로 살이 빠진 내가 여전히 110킬로그램으로 보였을 것이다. 군에서 제대할 때까지는 80킬로그램 정도로 몸무게가 유지되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군복무를 마치고 나서 다시 체중이 불기 시작했다.


 그 이후에도 다시 살이 쪘다가 빠졌다가 하는 일을 몇 번 반복했는데, 앞으로 쓰게 되는 글에 거기에 대해서도 쓸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해 다이어트는 단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성공을 했다가도 항상 끝은 실패였고, 나는 지금 여전히 뚱뚱하다. 그리고 예전에는 뚱뚱하기만 했는데 지금은 건강 상태까지 좋지 않다. <팻>이란 문화인류학 책에서 돈 쿨릭과 앤 매넬리는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의 76퍼센트는 다이어트를 시작한지 3년 뒤에 다이어트 이전보다 살이 더 찌며, 5년 뒤에는 95퍼센트나 살이 더 찐다"고 한다. 나는 정확히 그 76퍼센트와 95퍼센트에 해당한다. 이렇게 길게 쓴 이유는 내가 특별히 음식을 무절제하게 좋아하거나 게으르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말했던 대로 나는 "얕은 수준의 금욕주의자"다. 내 파트너도, 내 어머니도, 나와 함께 밥을 먹는 그 어느 누구도 식탁에서 내가 일반의 경우에 비해 과식한다고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어김 없이 해내기 위해 노력한다. 자주 원고 마감을 어기지만, 써야 할 원고를 쓰고, 강의를 하고, 아이를 돌보고, 남편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자식으로서 해야 할 일도 하고자 애를 쓴다. 나는 집에 앉아 있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라 산책을 하자고 먼저 말을 건네는 쪽은 파트너가 아니라 항상 내 쪽이다. 내가 무절제한 점이 있다면, 즉 금욕적이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글쓰기'와 관련한 것이다. 글을 쓰는 것과 같은 생산적인 일은 주로 밤에 한다. 황현산 선생은 자기 책에 <밤이 선생이다>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밤은 좋은 생각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을 늦게 잔다. 빠르면 새벽 2시, 늦으면 4시 정도가 일반적이다. 이런 이야기를 같은 대학 체대를 다녔던 친구에게 말하니 약간 비웃음띤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럴리가 없다. 살 찌는 것은 단순하다. 먹는 것만큼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지". 한마디로 내가 너무 많이 먹던가, 너무 게으르다는 건데 그 이야기를 듣고서 정말 그런가 하고 잠시 멍해졌다. 그리고는 "도대체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열심히 산단 말인가" 하는 물음이 떠올랐던 기억이 난다. 나는 더 열심히 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것도 아니라면 "다른 사람들은 생산성의 많은 부분은 포기하고 그저 보잘 것 없는 '몸'을 위해 저녁 시간 종일을 보내고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도 함께 말이다.


 어쩌면 친구의 대답이 아니라 내 질문에 내가 살을 빼지 못하는 한가지 이유가 담겨 있다. '보잘 것 없는 몸'을 위해 '생산성'을 포기하는 것을 어리석은 일로 여기는 자에게 몸이 주는 대답은 몸을 비대하게 만들고, 건강을 앗아가는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보잘 것 없는 몸을 위해서 아무 것도 투자하고 싶지 않았다. 건강 관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고, 음식을 가려 먹어야 한다는 생각도 다이어트 시기를 제외하고는 한 적이 없다. 심지어 다이어트를 하는 시기에도 나는 내 몸을 '가혹하게' 다뤘다. 평상시에는 음식을 가려 먹는 것이 쿨하지 않게 느껴졌고, 다이어트 시기에는 뭔가를 먹는 것이 쿨하지 않게 느껴졌다. 소설가 김영하가 피트니스 센터는 결심 산업이라고 부르던 것이 기억난다. 나 역시 수십번의 결심으로 피트니스 센터를 끊어 놓고, 두 주를 가고 나면 더 이상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러닝머신은 너무 지루하다. 러닝머신 앞의 TV를 보며 운동하는 것은 내게 뭔가 모르게 모욕적으로 느껴진다. 마치 머리 앞에 나무 장대로 음식을 매달고 그것을 먹겠다고 따라가는 멍청한 동물처럼 TV를 켜놓고 걷고 있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멍청해 보인다. 그렇다고 TV를 꺼놓고 걷자니, 러닝머신에는 보통의 걷기라면 없을 수 없는 '풍경'이 없어서 걷기 자체가 몸의 단련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 의미도 없고, 그래서인지 어떠한 사유도 일어나지 않는다. 걸으며 철학했다는 칸트도, 하이데거도, 니시다 기타로도 러닝머신 위에서는 '사유'하지 못했을 것이다. 단지 러닝 머신 위에서는 나 자신이 '강제되고' 있다는 불쾌한 기분 외에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가끔 바로 옆 러닝 머신을 타고 있는 사람의 걸음 속도를 힐끗 보거나, 늘씬하고 건강미 넘치는 여자의 경쾌한 발놀임을 감상하는 것 정도가 전부인 '건조한' 경험이다. 


 건강이 나빠졌다는 감각이 이제서야 생기고 나니 그 건조한 경험도 가치 있는 활동일 수 있다는 자각이 생긴다. 최근 나는 온갖 병이 내게 다 달라 붙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늘 손목이 아프고, 무릎 관절이 좋지 않고, 혈당도 비교적 높고, 혈압이 높고, 편도가 커서 열이 자주 나고, 심한 알러지에 자주 감기에 걸린다. 강의를 하고 나면 예전과 다르다는 것이 느껴진다. 강의 후 20분이라도 잠깐 자두지 않으면 다음 강의에 영향이 생긴다. 


 그러니까 나는 '살'에 신경을 쓰는 동안 '몸'에 무관심했다. 저 여자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를 생각하고,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매장에서 내게 맞는 사이즈가 없다고 할 때 느끼는 불쾌감을 생각하는 것의 단 절반만큼이라도, 살 대신 몸에 집중했다면 더 좋았을텐데,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먹고, 불규칙하게 생활하고, 적당하게 몸을 움직이는 일에도 무관심했다. 즉 '뚱뚱함'에 대한 저항이 역설적으로 '몸'의 존재를 은폐시켰다. 나는 단지 뚱뚱해 보이지 않길 바랬을 뿐이지, 뚱뚱함이 내 존재의 물질적 기반을 심각하게 훼손시키고 있다고는 그동안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날씬해질 수 있다면 보잘 것 없는 몸이야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식의 생각을 한 것이다. 내가 몸에 관한 일기를 쓰기 시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살에 관한 일기가 아닌, 다이어트에 관한 일기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는 나에 대한 일기가 아닌, 나의 가장 내밀한 부분인 나의 물질적 기반에 대한 일기를 쓰는 이유 말이다.


 나는 얕은 수준의 금욕주의자다. 소위 '죄'라고 하는, 알고보면 별 것 아닌 것을 스스로 금지하면서 살아간다는 점에서 나는 금욕적이지만, 나는 생산성을 높여야겠다는 욕망과 다른 사람에게 더 낫게 보이고 싶다는 욕망에서 단 한번도 놓여난 적이 없다는 점에서 내 금욕은 얕다. 이 일기를 오늘 밤에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고백하자면, 이런 일기라도 써서 글로 남겨 두지 않는다면 보잘 것 없는 몸을 위해 보내는 내 시간과 노력이 아깝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음식을 세심하게 조절하고, 시간에 맞춰 운동을 하고, 때에 맞춰 잠을 자는 것, 다시 생각해봐도 별로 쿨하지 않은데 원래 '먹고 사는 일'이라는 것은 항상 쿨하지 않은 법이다. 어떻게 보면 찌질하다. 직장에서 모욕을 당해도 그만두지 못하고, 밥을 먹으면 똥을 싸야 하고, 죽는 줄 알면서도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면 살아가는 것은 결코 쿨하지만은 않다. 영혼으로 물질적 삶을 초월해 있다는 거짓된 종교적 관념의 끝, 실제는 어떻든 간에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자기 기만의 끝은 늙어감과는 다른 몸의 부서짐이다.


 2016년 3월 9일. 오늘은 오전에 현미에 무채가 들어간 무침, 호박전을 먹었다. 아침 식사가 늦어 점심에는 커피를 한잔하는 것이 전부였다. 오늘은 아이 생일이라 아이가 원하는 스시 뷔페에 갔다. 스테이크를 먹었고, 스시의 밥을 거의 다 덜어내고 먹었다. 방울 토마토가 오늘따라 맛이 좋아 30개는 족히 먹은 것 같다. 뷔페에 가니 본전 생각이 나 토마토라도 많이 먹자는 생각에 좀 과하게 먹었다. 토해낼까 하다가 말았다. 아이 생일날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돼지감자와 여주차를 먹고 있는데 돼지감자가루는 맛이 없다. 저녁에는 러닝머신을 40분을 타면서 라디오를 들었다. 지루했다. 그리고 다리 근력 운동을 종류대로 두세트씩 스무번했다. 진정한 향락주의자는 향락이 몸을 상하게 하기 때문에 오히려 향락을 위해서 몸을 지킨다. 사이비 금욕주의자의 세계에서 진정한 향락주의자의 세계로 가보고 싶다. 삐걱대는 러닝머신을 타고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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