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육아와 북유럽 육아 사이에서
뚱뚱한 아빠다 보니 뷔페를 좋아한다. 아이도 아빠를 닮아 뷔페를 좋아하는데 이유는 조금 다르다. 많이 먹을 수 있어서라기보다는 음식을 접시에 담고, 마음대로 이곳 저곳을 다녀도 되는 자유로운 분위기 때문이다. 하지만 갈 때마다 난처한 일이 생긴다. 먹지 않을 음식까지 접시에 담다가 종업원에게 야단을 맞거나, 식당을 뛰어 다니다 다른 손님과 부딪히는 일은 태반이다. 아이를 다그쳐 봐도 그 때 뿐이다.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식당을 뛰어 다니기 시작한다. 프랑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프랑스 아이들이라면 부모의 말에 순종적으로 행동했을 것이다. 프랑스 아이들은 공공장소에서 요란스럽게 장난을 치는 일도 없다고 한다. 실제로 내가 본 파리의 풍경도 그랬다. 일요일은 조용했고, 거리에서 만난 아이들은 차분했다. 식당에서 포크를 떨어뜨리고 물을 쏟고 음식 투정을 하는 아이는 내 아이 뿐이었다.
프랑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고 한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애쓰기 때문에, 프랑스 아이들의 유아기는 ‘끝없는 기다림의 시기’라 한다. 아빠가 사주지 않는 장난감을 할아버지에게 졸라 얻고마는 우리 아이의 인내심과는 차이가 클 것이다. 내 아이는 기다림을 모른다. 아빠와 엄마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조차도 자신의 말은 들어주지 않는다고 때를 쓴다. 아빠, 엄마는 뭐든지 마음대로면서 자신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며 화를 낸다. 일전에는 아이와 함께 딱지치기를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자 나를 때리려 까지 했다. 내 아이가 프랑스 아이처럼 되지 않은 것은 나 자신이 ‘프랑스 부모처럼’ 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프랑스 부모들은 신생아를 혼자 재울 정도로 엄격하게, 단호하게, ‘부모 중심’으로 육아하는데 반해 우리 집 부부 침실은 아이가 차지한지 벌써 6년째다.
아이의 어린이집 친구가 얼마 전에 백화점에서 열리는 사생대회에서 대상을 탔다고 한 후로부터 아이도 상을 받고 싶어 안달이 났다. 어린이집에 가보니 아이들이 적어 놓은 글귀와 그림들이 한쪽 벽면에 가득했다. ‘우리 아이보다’ 글자 모양이 더 예쁜 아이가 많다. 그림 실력도 내 아이는 좋지 않은 것 같다. 놀이터에서 아이의 친구들을 데리고 축구를 했다. 헛발질에, 공이 날아오면 무서워 피하는 내 아이는 축구도 별로인 것 같다. 제법 근사하게 공을 차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아이들을 축구교실까지 보내는 것이 이해가 되었다.
덴마크 학교에서는 9학년이 될 때까지는 등수를 매기는 시험은 일체 치지 않는다고 하는데, 아이는 상을 받겠다고, 아빠인 나는 아이가 어떤 것이라도 뒤처질까 벌써부터 마음은 걱정으로 가득하다. 핀란드 부모들은 아이들이 자연에서 마음껏 놀 수 있게 해서 독립적인 아이로 키운다고 하는데, 나는 블록인형을 제대로 조립하지 못하고 있는 아이에게 인내심이 별로 작동하지 않아 내가 만들어 버리기 일쑤다. 얼마 전에는 비정상회담에 출연 중인 니콜라이 욘센을 만날 일이 있었다. 니콜라이는 노르웨이 사람인데, 어머니께서는 니콜라이에게 어떤 일을 하면 좋겠다고 말씀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아이가 운동 선수가 되기 보다 음악을 했으면 좋겠고, 공부도 기왕이면 잘했으면 좋겠다. 스칸디 대디, ‘북유럽 아빠처럼’ 아이의 친구가 되고 싶었는데 어느새 아이의 감독이 되어 버린 것 같다.
3. 프랑스 육아와 북유럽 육아 사이의 한국 아빠
나는 아이를 잘못 키어 온 것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는 프랑스 육아와 북유럽 육아 어느 기준으로 봐도 좋은 육아를 했다고 할 수 없다. 제대로 엄격하지도, 제대로 친구 같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쪽을 선택하지 않았던 것에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프랑스 육아와 북유럽 육아의 가치가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한쪽을 선택할 수 없었던 것이다. 프랑스 육아가 아이에게 규율을 제공하고 엄격하게 따르게 하는 것에 초점을 두는 반면에, 북유럽 육아는 아이들의 자율성에 보다 더 초점을 두는 육아로 이해할 때 어느 한 쪽을 믿고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내게는 위험하게 느껴졌다.
나는 프랑스 육아 옹호자들이 아이들에게 엄격한 규율 속에서 자율을 허락한다는 말이 어딘가 모르게 불충분하다고 생각해왔다. ‘규율 속에서의 자율’은 이상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부모의 욕망과 가치관 속에서만 허락되는 자유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즉 부모의 규율이 부모의 가치관과 편의에 따라 정해져 버린 채 아이에게 일방적으로 따르게 한다면 그 때의 자율을 자율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쉽게 말해 프랑스와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목표가 다르다. 중산층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외국어 하나와 다룰 줄 아는 악기 하나, 특별한 맛을 내는 요리 하나가 있는지로 판단하는 사회, 대학이 평준화되어 있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상대적으로 적게 의식하는 프랑스 사회라면 부모의 가치관과 결합된 규율이 아이의 자유를 위협할만큼 위험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부채 없는 30평 이상의 아파트 소유, 월급여 500만원 이상, 예금 잔고 1억원이 중산층의 조건이고, 엄격한 대학 간 서열이 존재하고,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은 우리 사회에서 좋은 대학을 보내고 성공하도록 만들겠다는 부모의 욕망이 아이에 대한 규율과 결합하면 아이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될 수도 있다.
북유럽 육아 옹호자들이 말하는 부모의 권위를 내려 놓고 아이들의 자율을 존중해주는 육아라는 것도 내가 보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어떤 직업을 가지더라도 급여 수준이 비슷하고, 또 직업을 가지지 않더라도 한 달에 300만원 내외를 지원 받는 덴마크의 경우라면 아이에게 등수는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덴마크를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은 의사와 같은 전문직도 고소득직업군이 아니고, 평생을 웨이터로 살면서도 높은 직업적 자존감을 가질 정도로 전체 사회가 매우 강력하게 ‘평등’을 지향한다. 이런 사회에서라면 부모가 아이들에게 어떤 직업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점차 격차 사회가 되어 가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부모가 북유럽 국가의 부모들처럼 오직 아이의 자율성만을 존중해주기란 특별한 결단이 아니고서는 쉽지 않은 일일 수밖에 없다.
규율을 너무 강조하면 아이가 창의성과 자존감을 잃지 않을까, 자율성만을 강조하면 우리 아이만 이 사회에서 도태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어느 쪽도 일관되게 밀어 붙이지 못했다. 사실 내가 처한 이 ‘육아의 곤경’은 우리 사회가 프랑스와 북유럽 사회와는 다른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경험하는 육아의 곤경은 우리 사회가 곤경에 처해 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북유럽의 경우 강력한 사회적 연대와 복지 시스템으로 어떤 경우에도, 그 누구라도 현실에서 도태되는 것을 막는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해 놓았다. 이렇게 잘 구축된 사회적 질서가 자율성 존중을 최우선으로 하는 북유럽 육아를 만들어 낸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실 프랑스의 ‘부모 중심’ 육아는 프랑스 사회의 가족 형태의 변화가 만들어 낸 것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는 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출산 장려 정책을 펼친 국가인데 그 과정에서 전통적으로 아버지의 역할로 여겨지던 보육과 교육 비용을 정부가 책임지게 되었다. 그 결과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경제적 부양 책임이 없어졌다 해도 좋을만큼 줄어들면서 ‘아이 중심’으로 움직이던 가족이 ‘부모 중심’으로, 특별히 어머니를 중심으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정신분석학자인 시몬느 코르프-소스는 <아버지들에 대한 찬사>라는 책에서 오늘날 프랑스 사회의 아버지들이 기능 부전의 존재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 역시 이러한 변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프랑스 육아의 엄격함은 가정 내에 아버지의 부재가 가져온 결과는 아닐지 추론해 볼 수 있다. 가부장제에서 권위를 행사하던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가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면서 엄격한 육아가 자리잡게 된 것으로 말이다. 물론 프랑스 사정을 잘 모르는 나로서는 어디까지나 가설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렇게 보자면 한 사회의 육아는 그 사회가 만들어내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복잡하고 정답이 없는 육아는 복잡하고 정답이 없는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프랑스와 북유럽 육아를 만든 사회는 우리 사회와 아주 다르다. 프랑스 부모처럼, 북유럽 아빠처럼 아이를 키우지 못한 것에 대한 변명일 수 있겠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프랑스 육아와 북유럽 육아가 우리 육아 현실에 대한 정답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천재 경제학자로 알려진 스티븐 레빗도 육아하는 아빠다. 그가 쓴 <괴짜경제학>이라는 책을 보면 “육아법 만큼이나 유행이 빨리 바뀌고 전문가들 간의 견해가 상충되는 분야는 없다”는 불평이 나온다. 아이 키우기와 관련해서는 신체 발달과 관련된 영역을 제외하고는 의견 일치를 이루는 부분을 찾는 것이 그렇지 않은 부분을 찾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티븐 레빗의 불평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육아란 ‘인간’을 다루기 때문이다. 인간은 경제학자들이 다루는 어떤 통계보다도 더 복잡하다. 프랑스 육아와 북유럽 육아의 차이가 빚어지는 이유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두 육아의 차이는 사회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서로 다른 두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프랑스 육아를 규율을 강조하는 육아, 북유럽 육아를 자율을 강조하는 육아라고 한다면, 철학에서는 이 문제가 결정론과 자유의지의 관계 혹은 구조와 자유의 관계라는 주제 등으로 폭넓게 다뤄져 왔다. 따라서 프랑스 육아와 북유럽 육아가 유행한 것은 오래되지 않은 일이지만 육아에 있어서, 인간에게 있어서 규율과 자율 중 무엇이 더 강조되어야 하는지는 아주 오래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앤 핼버트가 쓴 <미국의 자녀 양육:전문가와 부모, 그리고 자녀 양육 조언의 1세기 역사>라는 책을 보면 1세기 동안 미국의 양육 전문가들이 끊임 없이 서로 모순되는 말을 하거나 자기 모순을 범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모순들 역시 육아에서 규율과 자율 중 어느 쪽을 강조하는지에 따라 생겨난 것들이다. 한 예로 게리 애조의 <베이비 와이즈>라는 책에는 어린 시절부터 아이를 혼자 재워야 한다고 하는데 이유는 아이가 부모로 인해 수면 부족에 시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개리는 수면 부족이 ‘유아의 중추 신경계 발달에 부정적 영향’을 주고 학습 장애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개리가 규율 육아를 강조하는 프랑스 육아와 비슷한 견해라면 ‘부모와 함께 자는 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자율성을 강조하는 북유럽 육아와 비슷한 견해다. 혼자 자는 것은 아이의 정신 건강에 해로울 수 있으므로 아이를 ‘가족 침대’로 데려와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 강연에서 있었던 일이다. 강연을 마쳐야 할 시간이 5분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서 한 엄마가 수줍게 손을 드셨다. 강연 내내 냉정하고 어두운 표정을 하고 계셨지만 진지하게 강의를 들어주셨던 분이셨다. 25개월된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였다. 어린이집에서는 잘 지낸다는 아이가 집에만 오면 고집을 부려 감당하기 힘들다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질문을 주셨다. 다행스럽게도 아빠가 아이를 잘 도닥여주는 편이지만 유독 자신에게만 고집을 부리는 아이를 보며 차라리 자신이 없으면 나을 것만 같아 집을 나가고 싶을 때도 많았다고 하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리고 “불안합니다... 너무 불안합니다” 하고서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문 밖에서 강연을 마쳐 달라는 스탭의 신호가 이어졌다. 나는 이 엄마의 질문에 어떤 대답을 했었어야 할까. 질문을 한 엄마는 고민의 무게 만큼이나 여러 강연을 다니며 전문가 선생님들을 찾아가 상담도 받았고, 육아서도 챙겨 가며 읽었다고 했다. 어떤 조언도, 어떤 견해도 통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그 날 강의의 주제와 연결해서 나는 짧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네, 저도 불안합니다. 어머님, 그래도 아이를 잘 관찰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아이 엄마가 되묻고 간 질문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아이를 관찰하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선생님, 도대체 어떻게 관찰하란 말인가요?”
나는 가장 좋은 육아는 불안을 떨쳐버리는 ‘믿음의 육아’가 아니라 끊임 없이 고민하고 생각하는 ‘불안의 육아’라고 믿는다.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만으로 이미 자신이 좋은 엄마와 아빠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먼저 그 사실에 안심하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부모라면 누구라도 육아의 정답이 무엇인지를 찾지만, 아이가 다르고 부모가 다르고 사회도 다르기 때문에 프랑스 육아도, 북유럽 육아도 그 자체로는 답이 될 수 없고, 규율과 자율 둘 중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도 정답이 될 수 없다. 애초부터 육아에 정답이란 없는 것이다.
불안할 때, 어떠한 육아서의 조언도 통하지 않을 때, 어떤 전문가의 말도 와 닿지 않을 때, 바로 그 때가 우리가 인문서를 읽어야 할 때이다. 인문서는 지금 내가 읽는 이 육아서가 염두에 두고 있는 아이는 어떤 아이인지, 어떤 사회적 맥락에서 쓰여졌는지, 어떤 철학과 가치관을 배경으로 인간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며 읽도록 도와준다. 즉 인문서는 육아서를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비평의 대상으로 읽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인문서는 세계를 보는 방법을 찾도록 도움을 준다. ‘보는 것’은 쉬워도 ‘제대로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인문서는 내 아이를 관찰할 수 있는 방법을 훈련시켜준다. 무엇보다 인문서는 우리에게는 ‘정답’이 아니라 상황과 때에 맞는 ‘지혜’를 준다. 정답은 규율 아니면 자율, 프랑스 육아 아니면 북유럽 육아이겠지만 지혜는 지금 내 아이에게 프랑스 부모처럼 엄격하게 하는 것이 필요한지, 북유럽 아빠처럼 친구가 되는 것이 필요한 때인지를 판단할 수 있게 해준다. 규율만이 필요한 아이도 없고, 허용만이 필요한 아이도 없다. 또 어떤 사회도 고정적이지 않고, 어떤 아이도 자라지 않고 그대로 있지 않기 때문에 육아서를 그대로 믿어 버리기 보다는 지금 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는 ‘생각하는 힘’이 부모에게 필요하다. 생각하는 힘이 결여된 채 프랑스 육아가 요구하는 대로 따른다면, 부모의 권위를 앞세워 부모의 편의에 따른 규율만 엄격하게 적용하는 상황으로 전락하기 쉽고, 북유럽 육아가 요구하는 대로 따르기만 한다면 북유럽에 살고 있는 이름 모를 아빠와 내 남편을 비교하면서 육아 휴직은 꿈도 꾸지 못하는 아빠와 싸움으로 이어지는 일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아이를 잘 키운다는 것은 무엇일까? 플라톤의 <국가>는 한글 번역으로 700페이지가 넘는 책이지만 전체의 주제는 하나다. “올바름이란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무엇이 좋음인지, 무엇이 옳음인지 그만큼 말하기 어렵기에 아이를 ‘잘 키운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하나의 정답이 존재할 수 없고 끊임 없이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생각할 때 프랑스 육아보다, 북유럽 육아보다 나은 ‘나의 육아’에 따라 아이를 키울 수 있을 것이다.
나와 아이를 새롭게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인문서 5권
호모 루덴스는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이 책은 인간을 ‘놀이하는 존재’로 이해합니다. 인간 행위의 기본적인 구조가 모두 놀이 구조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입니다. 이 책은 부모 자신 뿐만 아니라 부모가 아이를 바라보는 방식을 변화시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이를 ‘학습하는 인간’, 성인이 되면 ‘일을 하는 인간’으로 고정적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아이들의 삶에서 놀이가 왜 필수적인지, 그것이 왜 창조와 상상력의 원천이 되는지에 대한 명료한 이해를 줍니다. 무엇보다 규율과 자율을 모두 존중하는 육아는 정말로 어렵지만, 아이들은 놀이 속에서 자연스럽게 규율을 따르는 것을 배우고, 스스로 규율을 만들어 가면서 자율을 배운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줍니다. 육아의 비밀은 놀이에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제가 쓴 <철학자 아빠의 인문 육아>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는 원래 제목을 이 책을 따라 <철학도와 아이>로 붙이려고 했습니다만 애석하게도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이 책은 동물권에 대한 옹호자이자 미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철학자인 작가가 우연히 늑대를 집에서 키우게 되면서 겪게 된 에피스도와 철학적 성찰로 이뤄져 있습니다. 브레닌은 야성이 남아 있고, 길들여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쩌면 말이 통하지 않는 24개월 이하의 아이와 닮아 있습니다. 늑대를 보면서 사람을 이해하게 되는 독특한 책입니다. 저자는 늑대 브레닌이 개와는 달리 품위가 있고 자존심이 강했다고 합니다. 내 아이를 브레닌으로 키우는 지혜를 줄 수 있는 책입니다.
배운다는 것과 아이를 가르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처음부터 생각해보도록 도와줍니다. 이 책에는 네델란드어를 모르는 프랑스어 교사가 학생들에게 프랑스어의 기본적인 내용도 가르쳐주지 않고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결과 놀랍게도 학생들의 프랑스어 구사 수준은 작가 수준에 도달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무지한 스승이 때로는 학생들의 지적 발달에 더 큰 기여를 한 것입니다. 학생들이 고유한 지능을 쓰도록 하자 교사가 모르는 것을 교사가 가르칠 수 있게 됩니다. 이 책은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것보다 어쩌면 무지한 부모가 되는 것이 아이의 고유한 지능을 발휘하도록 하는데 더 나을 지도 모른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부모의 좁은 생각이 아이의 생각을 좁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부모인 우리가 아이를 해방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먼저 해방되어야 합니다.
김영하 소설가의 산문집입니다.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진심을 담아 전하기만 하면 상대에게 전달되리라는 믿음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지만 진심은 그렇게 전달되지 않고 ‘잘 설계된 우회로’를 통해 전달된다고 합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아이를 사랑한다는 진심만으로는 아이에 대한 사랑이 잘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에게 진심을 전하는 방법을 이 책을 통해서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또한 이 책은 김영하 작가가 본 책과 영화에 대한 글로 이뤄져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것은 김영하의 독서법을 배우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책을 읽는다면 우리도 김영하처럼 육아책을 읽고, 내 아이도 관찰할 수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육아는 사람마다 다르고, 또 사회마다 다릅니다. 우리가 처한 온갖 ‘육아의 곤경’의 많은 부분은 우리 사회가 육아하기 어려운 사회이기 때문에 생겨난 것들입니다. 육아하기 좋은 사회는 이 책의 제목을 이용해 말해보자면 ‘사람을 환대하는 장소’여야 합니다. 북유럽 육아의 힘은 어떤 사람도 문전박대하지 않는 사회의 힘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누구라도 환대해주는 사회이기 때문에 아이들은 누구의 바램이 아니라 자신의 바램에 따라 학업과 진로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더 좋은 육아는 혼자 고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 좋은 육아는 여러 사람이 모여 함께 육아하기 더 좋은 사회를 만들 때 이뤄지는 것 같습니다.
- 이 글은 <맘앤앙팡> 2016년 2월호에 특집기사로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