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관한 일기(1) - 러닝머신을 타고
금욕에서 향락의 세계로
나는 나 스스로를 꽤나 금욕적인 사람으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맥주를 두세달에 한 캔 정도 마시는 것이 전부일 뿐 살아오면서 취할 정도로 술을 마셔본 일은 없다. 예전에 어떤 음악가와 술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는데, 내가 술에 취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고 하자 그 사람은 내게 "당신은 내 친구가 될 자격이 없다"고 했다.(사실 나는 그 음악가와 친구가 되고 싶었지만 결국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 그 음악가와 함께 했던 술자리 이야기가 나오니까 생각나는 일이 또 있는데, 사실 그 술집은 일종의 세미-룸살롱이었다. 10만원을 내면 젊은 여성 접대원들이 남자 손님의 옆에서 술을 따라줬다. 서른 중반이 될 때까지 그런 경험이 한번도 없었던 나에게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술은 조금도 입에 대지 않은 채 서비스로 나와 있는 캔 옥수수차만 몇 병을 마셨다. 음악가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며, 10만원은 자신이 낼테니 내 옆에 앉을 '아가씨'를 데려오라고 마담처럼 보이는 여자에게 이야기했다. 내가 좋은 술이 있는 자리의 분위기를 망친다는 것이었다. 나는 여러 차례 사양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 접대원이 들어와서 내 옆에 앉아 옥수수차를 채운 잔이 빌 때마다 채워주었다. 그 여자분도, 나도 서로 어색했다.
늘 이런 식인 나를 두고 금욕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금욕'이라는 말이 지닌 깊이를 모욕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금욕이라는 것은 어떤 것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마음껏 술도 마시고 마음에 드는 상대와 섹스도 즐기고, 하루에도 몇 갑씩 거리낌 없이 담배를 피우더라도 얼마든지 금욕적일 수 있다. 사실은 나보다 그 음악가가 더 금욕적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취할 만큼 술을 마시고 싶고, 답답한 일이 생기면 담배 한 대면 괜찮지 않을까 하기도 하고, TV에 매력적인 여자가 나오면 성적 공상이 나도 모르게 펼쳐지기도 한다. 한 때 나가던 교회에서 훈련 받았던 규칙이 교회를 나가지 않는 지금까지도 관성적으로 위태롭게 지탱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술에 취하고, 담배를 마시고, 섹스에 탐닉하는 일은 어쨌든 신에게 '죄'가 되는 일이다. 굳이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나는 아주 얕은 수준의 금욕적인 사람일 수도 있겠다.
이제 내가 하려고 하는 이야기, 음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현재 심각한 비만이고, 몸이 별로 좋지 않다. 특히 상체가 비대해서 조금 걸었다 싶으면 무릎 관절이 아려온다. 나는 어릴 적부터 거의 항상 뚱뚱했다. 국민학교를 다닐 때 한 친구는(이름이 재선이었다) 나를 드럼통이라고 불렀다. 중학교를 다닐 때에는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나더러 복도를 가린다고 면박을 주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학생 주임이었던 국어 선생은 나더러 배둘레햄이라 불렀다. 나는 실제로 뚱뚱했지만 그런 말들이 듣기 싫었다. 아니, 나는 정말 뚱뚱했기 때문에 그런 말들이 더 없이 모욕적으로 느껴졌다. 처음의 다이어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느 여자 아이를 좋아하게 되면서 시작했다. 당시 나는 110킬로그램 정도였는데 살을 빼겠다는 일념 하에 오전에 우유팩 하나를 마시고 나서는 종일 굶다시피 했다. 우유를 마시고 나면 어김 없이 설사로 오전 내내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그리고 복부의 지방을 분해하려면 뱃살을 주물러야 한다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수업을 듣는 내내 뱃살을 주물렀다. 눈물이 날 정도로 아팠다. 몇 달이 지나자 체중은 눈에 띄게 줄었다. 그리고 수능 시험을 칠 때는 몸무게가 80킬로그램도 나가지 않았다. 어린 아이 하나가 몸에서 나간 셈이었다. (아마도 내 인생에 다시 없을 체중이지 않을까) 여자 아이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살을 빼긴 했지만 불행하게도 그 여자 아이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 아이의 눈에는 80킬로그램으로 살이 빠진 내가 여전히 110킬로그램으로 보였을 것이다. 군에서 제대할 때까지는 80킬로그램 정도로 몸무게가 유지되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군복무를 마치고 나서 다시 체중이 불기 시작했다.
그 이후에도 다시 살이 쪘다가 빠졌다가 하는 일을 몇 번 반복했는데, 앞으로 쓰게 되는 글에 거기에 대해서도 쓸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해 다이어트는 단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성공을 했다가도 항상 끝은 실패였고, 나는 지금 여전히 뚱뚱하다. 그리고 예전에는 뚱뚱하기만 했는데 지금은 건강 상태까지 좋지 않다. <팻>이란 문화인류학 책에서 돈 쿨릭과 앤 매넬리는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의 76퍼센트는 다이어트를 시작한지 3년 뒤에 다이어트 이전보다 살이 더 찌며, 5년 뒤에는 95퍼센트나 살이 더 찐다"고 한다. 나는 정확히 그 76퍼센트와 95퍼센트에 해당한다. 이렇게 길게 쓴 이유는 내가 특별히 음식을 무절제하게 좋아하거나 게으르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말했던 대로 나는 "얕은 수준의 금욕주의자"다. 내 파트너도, 내 어머니도, 나와 함께 밥을 먹는 그 어느 누구도 식탁에서 내가 일반의 경우에 비해 과식한다고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어김 없이 해내기 위해 노력한다. 자주 원고 마감을 어기지만, 써야 할 원고를 쓰고, 강의를 하고, 아이를 돌보고, 남편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자식으로서 해야 할 일도 하고자 애를 쓴다. 나는 집에 앉아 있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라 산책을 하자고 먼저 말을 건네는 쪽은 파트너가 아니라 항상 내 쪽이다. 내가 무절제한 점이 있다면, 즉 금욕적이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글쓰기'와 관련한 것이다. 글을 쓰는 것과 같은 생산적인 일은 주로 밤에 한다. 황현산 선생은 자기 책에 <밤이 선생이다>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밤은 좋은 생각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을 늦게 잔다. 빠르면 새벽 2시, 늦으면 4시 정도가 일반적이다. 이런 이야기를 같은 대학 체대를 다녔던 친구에게 말하니 약간 비웃음띤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럴리가 없다. 살 찌는 것은 단순하다. 먹는 것만큼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지". 한마디로 내가 너무 많이 먹던가, 너무 게으르다는 건데 그 이야기를 듣고서 정말 그런가 하고 잠시 멍해졌다. 그리고는 "도대체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열심히 산단 말인가" 하는 물음이 떠올랐던 기억이 난다. 나는 더 열심히 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것도 아니라면 "다른 사람들은 생산성의 많은 부분은 포기하고 그저 보잘 것 없는 '몸'을 위해 저녁 시간 종일을 보내고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도 함께 말이다.
어쩌면 친구의 대답이 아니라 내 질문에 내가 살을 빼지 못하는 한가지 이유가 담겨 있다. '보잘 것 없는 몸'을 위해 '생산성'을 포기하는 것을 어리석은 일로 여기는 자에게 몸이 주는 대답은 몸을 비대하게 만들고, 건강을 앗아가는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보잘 것 없는 몸을 위해서 아무 것도 투자하고 싶지 않았다. 건강 관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고, 음식을 가려 먹어야 한다는 생각도 다이어트 시기를 제외하고는 한 적이 없다. 심지어 다이어트를 하는 시기에도 나는 내 몸을 '가혹하게' 다뤘다. 평상시에는 음식을 가려 먹는 것이 쿨하지 않게 느껴졌고, 다이어트 시기에는 뭔가를 먹는 것이 쿨하지 않게 느껴졌다. 소설가 김영하가 피트니스 센터는 결심 산업이라고 부르던 것이 기억난다. 나 역시 수십번의 결심으로 피트니스 센터를 끊어 놓고, 두 주를 가고 나면 더 이상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러닝머신은 너무 지루하다. 러닝머신 앞의 TV를 보며 운동하는 것은 내게 뭔가 모르게 모욕적으로 느껴진다. 마치 머리 앞에 나무 장대로 음식을 매달고 그것을 먹겠다고 따라가는 멍청한 동물처럼 TV를 켜놓고 걷고 있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멍청해 보인다. 그렇다고 TV를 꺼놓고 걷자니, 러닝머신에는 보통의 걷기라면 없을 수 없는 '풍경'이 없어서 걷기 자체가 몸의 단련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 의미도 없고, 그래서인지 어떠한 사유도 일어나지 않는다. 걸으며 철학했다는 칸트도, 하이데거도, 니시다 기타로도 러닝머신 위에서는 '사유'하지 못했을 것이다. 단지 러닝 머신 위에서는 나 자신이 '강제되고' 있다는 불쾌한 기분 외에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가끔 바로 옆 러닝 머신을 타고 있는 사람의 걸음 속도를 힐끗 보거나, 늘씬하고 건강미 넘치는 여자의 경쾌한 발놀임을 감상하는 것 정도가 전부인 '건조한' 경험이다.
건강이 나빠졌다는 감각이 이제서야 생기고 나니 그 건조한 경험도 가치 있는 활동일 수 있다는 자각이 생긴다. 최근 나는 온갖 병이 내게 다 달라 붙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늘 손목이 아프고, 무릎 관절이 좋지 않고, 혈당도 비교적 높고, 혈압이 높고, 편도가 커서 열이 자주 나고, 심한 알러지에 자주 감기에 걸린다. 강의를 하고 나면 예전과 다르다는 것이 느껴진다. 강의 후 20분이라도 잠깐 자두지 않으면 다음 강의에 영향이 생긴다.
그러니까 나는 '살'에 신경을 쓰는 동안 '몸'에 무관심했다. 저 여자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를 생각하고,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매장에서 내게 맞는 사이즈가 없다고 할 때 느끼는 불쾌감을 생각하는 것의 단 절반만큼이라도, 살 대신 몸에 집중했다면 더 좋았을텐데,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먹고, 불규칙하게 생활하고, 적당하게 몸을 움직이는 일에도 무관심했다. 즉 '뚱뚱함'에 대한 저항이 역설적으로 '몸'의 존재를 은폐시켰다. 나는 단지 뚱뚱해 보이지 않길 바랬을 뿐이지, 뚱뚱함이 내 존재의 물질적 기반을 심각하게 훼손시키고 있다고는 그동안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날씬해질 수 있다면 보잘 것 없는 몸이야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식의 생각을 한 것이다. 내가 몸에 관한 일기를 쓰기 시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살에 관한 일기가 아닌, 다이어트에 관한 일기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는 나에 대한 일기가 아닌, 나의 가장 내밀한 부분인 나의 물질적 기반에 대한 일기를 쓰는 이유 말이다.
나는 얕은 수준의 금욕주의자다. 소위 '죄'라고 하는, 알고보면 별 것 아닌 것을 스스로 금지하면서 살아간다는 점에서 나는 금욕적이지만, 나는 생산성을 높여야겠다는 욕망과 다른 사람에게 더 낫게 보이고 싶다는 욕망에서 단 한번도 놓여난 적이 없다는 점에서 내 금욕은 얕다. 이 일기를 오늘 밤에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고백하자면, 이런 일기라도 써서 글로 남겨 두지 않는다면 보잘 것 없는 몸을 위해 보내는 내 시간과 노력이 아깝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음식을 세심하게 조절하고, 시간에 맞춰 운동을 하고, 때에 맞춰 잠을 자는 것, 다시 생각해봐도 별로 쿨하지 않은데 원래 '먹고 사는 일'이라는 것은 항상 쿨하지 않은 법이다. 어떻게 보면 찌질하다. 직장에서 모욕을 당해도 그만두지 못하고, 밥을 먹으면 똥을 싸야 하고, 죽는 줄 알면서도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면 살아가는 것은 결코 쿨하지만은 않다. 영혼으로 물질적 삶을 초월해 있다는 거짓된 종교적 관념의 끝, 실제는 어떻든 간에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자기 기만의 끝은 늙어감과는 다른 몸의 부서짐이다.
2016년 3월 9일. 오늘은 오전에 현미에 무채가 들어간 무침, 호박전을 먹었다. 아침 식사가 늦어 점심에는 커피를 한잔하는 것이 전부였다. 오늘은 아이 생일이라 아이가 원하는 스시 뷔페에 갔다. 스테이크를 먹었고, 스시의 밥을 거의 다 덜어내고 먹었다. 방울 토마토가 오늘따라 맛이 좋아 30개는 족히 먹은 것 같다. 뷔페에 가니 본전 생각이 나 토마토라도 많이 먹자는 생각에 좀 과하게 먹었다. 토해낼까 하다가 말았다. 아이 생일날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돼지감자와 여주차를 먹고 있는데 돼지감자가루는 맛이 없다. 저녁에는 러닝머신을 40분을 타면서 라디오를 들었다. 지루했다. 그리고 다리 근력 운동을 종류대로 두세트씩 스무번했다. 진정한 향락주의자는 향락이 몸을 상하게 하기 때문에 오히려 향락을 위해서 몸을 지킨다. 사이비 금욕주의자의 세계에서 진정한 향락주의자의 세계로 가보고 싶다. 삐걱대는 러닝머신을 타고서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