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열매도 나무 멀리 떨어진다 


자폐아이를 키우고 있는 한 엄마에게 메일을 받았다. ‘신이 제게 준 자식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는 부분이 유독 눈에 밟혔다. 사람들은 때론 자폐아에 대해 환상적인 그림을 그리는 천사 같은 아이를 떠올리지만 자폐증은 다른 어떤 장애보다 많은 자식 살해를 유발할 정도로 부모를 미치게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어떤 말을 건네야 할까 고민하다 앤드루 솔로몬이 쓴 ‘부모와 다른 아이들’을 꺼내 읽었다.


이 책은 자폐증, 신동, 트랜스젠더, 소인증 등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예외적 자녀를 키워낸 가족들의 이야기다. 앤드루는 10년 동안 300가정이 넘는 예외적 자녀를 둔 가족을 만나 기록한 인터뷰를 정리해 총 1천500쪽에 육박하는 분량의 책을 만들었다. 앤드루는 유명 작가지만 사실 그도 부모와 다른 존재였다. 심각한 난독증을 앓고 있고, 성적 소수자였던 탓에 아버지와의 불화가 극심했다. 책에 소개된 대부분의 부모들도 처음에는 자식들과의 차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청각장애를 가진 아이에게 수화 대신 발화 교육을 시킨 부모, 왜소인인 아이의 키를 늘리는 시술을 감행한 부모까지. 처음에는 아이가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는 부모들조차 결국 이렇게 예외적인 아이지만 이 아이는 바로 ‘나의 아이’라는 사실을, 또 우리가 열등한 차이로 구분하는 특질조차도 그저 또 다른 정체성의 차이일 뿐임을 깨닫게 된다. 앤드루는 이런 차이에 대한 인정이 다양성을 만들고, 이런 차이를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부모 역시 미성숙의 껍질을 벗고 ‘인간’이 된다고 선언한다.


영어 속담에 ‘사과 열매는 나무 멀리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자식은 부모를 닮기 마련이라는 뜻인데, ‘부모와 다른 아이들’의 원제인 ‘Far from the tree’는 이 속담의 의미를 뒤집은 것이다. ‘나무에서 멀리 떨어진’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이 말은 아이들은 모두 저마다 부모와 조금 혹은 때때로는 아주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암시한다. 나무에서 멀리 떨어진 사과라 해서 사과 아닌 것일 수 없고, 심지어 떨어진 열매가 사과가 아니었다고 해도 열매 아닌 것일 수 없다. 부모와 다른 아이라 해서, 자폐아라 해서 내 아이가 아닌 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이 다르다고 해도, 믿음이 다르다 해도, 지역도, 성별도, 성적 지향도, 계급이 다르다 해도, 이처럼 나무에서 멀리 떨어진 것이라 해도, 모든 열매는 나무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고 저마다의 ‘차이’는 당연한 것이다. 이 단순한 사실에 대한 인정이 세상을 조금이나마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것이리라.


“양육은 이들 가족에게 지난한 도전이었다. 그럼에도 후회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는 자녀를 받아들이는 부모의 태도에서 힘든 사랑이 손쉬운 사랑에 못지않다는 확신을 가졌다.” 나무에서 떨어진 사과, 아픔을 가진 이웃은 나무가 지키는 것이 아니다. 나와 너의 힘든 사랑이 지키는 것이다. (매일신문에 쓴 글, 201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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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우연히 대학로 이음책방에 들렀다가 거기서 '오렌지가좋아', 엄명환씨를 만났다. 이유를 알기 어렵지만, 꽤나 자주 오렌지가 생각난다. 첫 만남에서 우리는 서로에 대한 호감을 갖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오해로도 가득한 만남이었다는 것은 그로부터 1년 후 그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난 이후였다. 그리고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떤 한 사람의 시민적 용기의 근원에 대해서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까지 종합해보면, 오렌지가 보여준 용기는 학교가 아니라 학교 밖에서, 교사가 아니라 사람으로부터, 책이 아니라 현장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오렌지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인권상도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제도, 엘리트, 서열주의의 표상 같은 '어륀지' 대신 자기 자신의 삶과 선호를 그 자체로 긍정하는 '오렌지'를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오렌지인권상에서 격려 받게 되었으면 한다. 사실은 오렌지이며, 오렌지가 좋지만, 어륀지가 되고 싶고, 어륀지에 대한 미련을 못버리는 나를 생각하며 썼다. 지금 하나의 희망이 있다면 이런 거다. 어륀지보다는 오렌지가 좋다. 그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 그거 하나다.

오렌지가 좋아.(2017.7.25. 매일신문 에세이산책)


2014년 여름, 대학로 이음책방에 들렀다가 사진가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자신을 이름 대신 ‘오렌지가 좋아’라는 별명으로 소개했다. 그냥 ‘오렌지’라 불러도 좋다고 했다. 이명박 정권 출범을 준비하던 이경숙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이 공청회에서 “미국에서 ‘오렌지’(orange)라고 했더니 아무도 못 알아듣다가 ‘어륀지’라고 하니 알아듣더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어륀지보다 오렌지가 더 좋다고 생각했던 그는 그때부터 자신을 ‘오렌지가 좋아’로 소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오렌지는 책방 한쪽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다산인권센터 자원활동가라는 직함이 새겨진 명함을 내게 건넸다. 그는 2009년부터는 반올림(삼성 반도체공장 노동자 인권지킴이) 활동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반올림 집회나 삼성에서 백혈병을 얻어 세상을 뜬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의 1인 시위 현장에 그는 늘 함께했고, 그의 사진들은 영화 ‘또 하나 약속’(2014)에서 엔딩 화면으로 쓰이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대개 그렇지만 경제적 대가는 거의 없기 마련이다. 생활은 어떻게 해나가느냐는 비루한 내 물음에 오렌지는 검도를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다. 유독 두꺼운 팔뚝이 눈에 들어왔다. 본격적으로 살아갈 방편을 찾아야 하지 않느냐는 꼰대 같은 내 물음엔 사진가로 자리 잡기 위해 노력 중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솔직히 그때 나는 사진을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다는 오렌지의 미래가 걱정스러웠다.


그날의 질문과 걱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한심한 것이었는지는 그로부터 1년 정도 지나 알게 되었다. 2015년 5월 26일, 오렌지가 심정지로 쓰러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알고 보니 그는 만성신부전증 환자로 1급 장애인이었다. 열두 살 때부터 일주일에 세 번씩 혈액 투석을 받아야 했다. 유달리 두꺼웠던 팔목은 투석을 위해 찔러댄 주삿바늘이 남긴 흔적이었다. 그 때문에 중`고등학교도 모두 검정고시로 마쳐야 했다. 장애인 인권과 의료민영화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사진에 뜻을 품었고, 어륀지보다 오렌지를 좋아했던 그는 결국 6월 10일 민주항쟁을 기념하는 날, 서른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여름에 그를 만났던 탓일까, 두 해가 지났지만 지금도 이맘때가 되면 명랑했던 오렌지가 생각난다. 황상기 씨는 “그의 사진기는 삼성 경비의 폭력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준 방패였다”고 했다. 그 자신도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버티기 어려웠을 처지로 어떻게 다른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었을까. 무엇이 이런 시민적 용기를 갖게 만들었을까. 아픔으로 두꺼워진 팔뚝으로 그는 타인의 아픔을 안았다. 자기 아픔으로 세상 아픔을 품었다. 세상 모든 일에 무덤덤한 내가, 내 아이가 어륀지를 행여나 오렌지로 발음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사는 자신이 부끄럽다. ‘오렌지가 좋아.’ 그의 이름은 바로 엄명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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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패권주의라는 농담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은 나를 ‘베둘레햄’이라 불렀다. 배가 많이 나온 나를 본 선생님이 붙여주신 별명이었다. 베둘레햄은 그래도 견딜만했는데 ‘드럼통’이란 별명은 정말로 모욕적으로 들렸다. 대학에 들어가자 선배들은 나를 보고 ‘슈렉’을 닮았다며 볼 때마다 놀려댔다. 윌리엄 스타이그가 쓴 동화에 나온 슈렉을 보면 영화 속 슈렉보다 훨씬 더 끔찍하게 생겼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랄 정도이니까. 나는 내가 모든 못생긴 괴물 중에 가장 못생긴 그 괴물을 닮았다는 사실이 늘 납득되지 않았다. 고백하자면 거울에 비친 나를 보며 오히려 이만하면 꽤 괜찮은 외모라 생각하는 쪽이다.



얼마 전엔 이런 일도 있었다. 칼럼을 연재하고 있는 어느 신문에 유치원에 아이를 데리러 갈 때마다 느끼는 뻘쭘함에 대해서 썼다. 엄마들이 아빠인 내게 말을 거는 경우가 거의 없고 나 역시 엄마들이 모인 자리에 끼어들기 어려운 탓이었다. 그래서 나처럼 엄마들 모임에 끼지 못하는 할머니 한 분과 함께 뻘쭘함을 이겨보고 싶다는 말로 글을 마무리했다. 며칠 후 칼럼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사진을 보니 왜 아무도 말을 안 걸었는지 알겠네요.” “할머니가 무서웠을 것 같아요.” 웃기면서 슬펐다. 아내에게 물었다. “여보, 내가 그렇게 못생겼어?” 아내는 대답했다. “못 생긴 게 매력이야.” 물론 조금의 위로도 되지 않았다.



나는 외모패권주의와는 거리가 먼 뚱뚱하고 못생긴 사람이다. 그래서 나도 이번에 청와대로 들어간 분들의 면면을 보며 외모패권주의라 했다. 대통령과 신임 수석 비서관들이 하나같이 순백색 와이셔츠 차림으로 커피 산책을 하고 있는 사진을 보자 나도 모르게 든 생각이었다. 물론 새 정부가 외모로 인사를 했을 리 만무하다. 오히려 성공한 누군가를 향해 외모패권주의라 부르며 보잘것없는 내 처지를 못생긴 외모 탓인 양 돌리려 했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실체가 없다는 점에서 외모패권주의란 말은 하나의 농담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농담 속에 진실 한 자락이 있다면 어떤 사람이건, 지역이건, 사건이건 겉으로 보이는 ‘외모’만을 마치 전부인 양 대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는 점일 것이다. 외모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없는 사회였다면, 즉 세상을 피상적으로만 이해하지 않는 사회였다면 외모패권주의 같은 농담이 공감을 얻기 힘들 것이다. 가난 때문에, 학력 때문에, 지역 때문에, 외모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상처주고, 또 상처를 받는가. 그래서 외모패권주의, 영남패권주의, 친박패권주의, 강남패권주의 등 온갖 종류의 패권주의에 실체가 있는가를 따지기보다 그런 말에 담겨 있을 어떤 진실을 살피는 노력이 보다 값진 것이다. 외모패권주의는 농담이지만, 외모로 받은 상처는 농담일 수 없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17.6.13)


얼마 전 동아일보에서 박정자 선생이 '외모패권주의'에 대해서 쓴 글을 읽었다.

(http://news.donga.com/3/all/20170519/84435070/1) 

텔렘수도원 잔상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는데, 대통령 취임 첫 날 하얀와이셔츠를 입고 양복 재킷을 한 팔에 걸친 후 커피 한 잔을 들고 대통령과 선임 비서관들이 청와대 산책을 하는 것이 연출된 것인데다, 자유로워 보이지만 자유를 강요하는 일종의 전체주의라는 것이었다. 외모패권주의 하나에서 사회주의적 획일성을 끄집어내는 글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한 마디만 가져오면, 박정자 선생은 "사회주의는 사회적 약자 또는 소수자 배려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지만 실은 건강하고 잘생긴 좋은 집안 출신만을 국민으로 인정하는 냉혹한 체제로 타락했다. 북한 체제가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평양에는 장애인이 들어올 수 없고, 모든 지배층은 당성이 좋은 집안 출신이어야 하며, 최고지도자는 백두혈통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외모패권에서 이런 걸 끌어낼 수 있는 것은 문해력인 것인지, 관심법인 것인지 알기 어렵다. 지혜자이자, 나의 유일한 구루라고 할 수 있는 나와 같이 사는 여자가 내게 늘 하는 말이 있다. "웃자고 하는 말에 죽자고 덤비고, 농담에 욱하는 사람과는 상종하는게 아니다"라고. 나도 상종하고 싶지 않았는데, 청와대 인사를 보며 외모패권주의라 생각했던 나도 한 마디 안 할 수 없어서 쓴 글이다. 그런데 쓰다보니 하나 마나 한 이야기가 되었는데, 그동안 내 별명의 역사가 궁금한 분이 만의 하나라도 계시다면 읽어보신다면 꽤나 즐거우실 것 같다. 외모패권주의라는 농담에 대해 마치 농담하듯이 쓰고 싶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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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글게 내 볼을 파갔어. 

박 바가지였어

그래도 있잖아, 새색시였어


이쁘게 들여다보는 새벽이었어

떨려 온몸이 파들거렸지 뭐

하늘이 몇 번 우그러지고 펴지고 그랬어 . -박우물 (정화진 시)


‘우물에서 하늘 보기’는 황현산 선생의 시화집이다. 내가 제대로 읽었다면 선생은 책 어디에서도 제목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짐작하건대 선생은 책의 제목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몇 해 전에 나온 에세이집인 '밤이 선생이다'에서도 선생은 제목에 대한 말을 아낀다.



최근 인터뷰에서 선생은 ‘밤이 좋은 생각을 가져다준다’는 의미의 프랑스 속담에서 이 제목을 착안한 것이라 했다. 낮이 이성의 시간이라면 밤은 상상력의 시간, 낮이 사회적 자아의 세계라면 밤은 창조적 자아의 시간이라고 믿은 탓에 선생도 밤에 글을 썼다고 한다.


'우물에서 하늘보기'라는 제목도 어쩌면 그런 의미일까. 책을 읽기 전 제목을 보고 나는 곧장 ‘우물 안 개구리’가 하늘을 올려다보는 이미지를 떠올렸다. 우물이라는 좁은 세상에서 다른 세상인 하늘을 보게 하는 것이 시라면, 우물은 이성과 현실이 지배하는 낮의 세계를 상징하고, 하늘은 꿈과 몽상이 지배하는 밤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로고스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삶의 구석구석, 삶의 여백들을 조명해주는 것이 시가 아니던가.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 좀 달라졌다.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우물에서 하늘 보기’라는 제목은 앞의 시를 염두에 두고 붙였을 것이다. 이 시에서 ‘박우물’, 곧 박 바가지로 물을 뜰 수 있는 얕고 작은 우물은 ‘글을 쓰는 사람’이다. 글을 쓰는 사람을 ‘우그러지고 펴지고’ 전율을 경험하게 만드는 것은 마치 박우물이 ‘새벽의 새색시’를 만나는 것과 같은 에로스적인 경험이다. 바로 그때 우물에 비친 우그러지고 펴진 하늘은 ‘한편의 글’에 다름 아니다. 선생은 자신이 우물이 되어 물결 위에 비치는 시와 하늘의 우그러지고 펴짐의 일렁거림을 글로 담고자 했던 것 같다. 물론 선생이 스스로를 박우물로 여긴 것은 그저 겸양에 불과하다.


책을 다 읽고 보니 ‘우물’은 개구리의 우물만도, 새색시의 박우물만도 아니다. 세월호 참사가 있고 난 이후부터 선생이 쓴 글은 모두 슬픔과 닿아 있다. 선생은 ‘슬픔은 잊혀도 슬픔의 형식은 잊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문학이 늘 이마에 붙이고 다니는 부적이지만 세월호 이후의 삶에서는 그런 형식조차도 이제 사치스럽다고 통탄한다. '진정한 삶은 이곳에 없다'는 말은 이 삶을 포기하자는 말이 아니라 이 삶을 지금 이대로는 내버려둘 수 없다는 말이라고 할 때도 선생이 염두에 두는 것은 세월호 이후의 우리의 삶이다. 그렇게 보자면, 우물은 슬픔의 깊이를 뜻한다. 그리고 이 슬픔이 내는 길을 외면하지 않고 가슴 치며 따라가면 거기에서 하늘을 만난다. 무엇보다 시는 슬픔을 담는 우물이고, 우물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하늘이기도 하다. 선생은 책 말미에 이렇게 썼다. “시가 보기에 쓸고 닦아야 할 삶이 이 세상에는 없다. 시는 이를 갈고 이 세계를 깨뜨려 저 세계를 본다. 시가 아름답다는 것은 무정하다는 것이다.” 시는 우물을 깨뜨린다. 이것이 시의 힘이다. 지금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2016.1월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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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va la zarzuela는 내가 가장 즐겨듣는 음반이자 내가 가장 아끼는 음반이다. 1996년 콘서트 실황을 담았다. 2014년부터는 연주 실황이 유튜브에 공개되어 영상으로 볼 수도 있다. 아이가 등교하고 오전에 모처럼 파트너와 같이 집에 있는 날이면 유튜브로 Maria Bayo, Placido Domingo 등 거장들의 노래를 들으며 온갖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이 아주 큰 기쁨 중 하나다. 어제도 그런 날이었다. Carlos Alvarez가 무대 위에서 무표정하지만 고도로 집중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을 보며 나는 "짐승의 눈빛"이라고 했다. 공허한 듯 순수하게 보였고, 그래서 "짐승처럼 노래한다"고 했다. 파트너도 덧붙였다. "짐승처럼 부르는게 아름다운 거지. 나도 노래를 하지만 그게 아름다운 것인지 나는 몰랐던 거 같아. 어쩌면 그래서 오페라를 좋아하지 않았은 것이고".



짐승처럼 부른다는 것의 의미는 가수의 목소리가 자연에 가까운 소리를 낸다는 것이었다. 결국 우리가 아름답다고, 최종적으로 아름답다고 승인하는 것은 자연 아니면 자연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Maria Bayo는 새처럼 노래하고, Placido Domingo의 목소리는 강이 내는 소리처럼 들린다. 여전히 유효한 관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회화의 오랜 이상도 자연이지 않았던가.(물론 자연의 이상이 왜 여체로 표상되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하여간 벨칸토 창법이 말그대로 아름다운 까닭은 그 목소리가 듣기에는 꾸밈이 없고 순수하게 들리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은 거칠지만 자연스럽고, 우연적이지만 모든 것이 조화롭고, 위협적이지만 생명을 품고 있다.
정교하게 다듬은 결론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Viva la zarzuela 연주에 감응된 탓인지 '자연'의 관점에서 내가 좋아하는 다른 작품들을 떠올려 보았다.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가 지닌 문학적 높이는 오르한 파묵이 말하는 것처럼 그 작품이 어떤 교훈도, 어떤 종류의 필연성도 담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연과 몹시도 닮았다. 자연은 교훈적이지도, 서사적이지도, 예시적이지도 않고 필연적으로 보일 뿐 우연의 향연으로 가득하다. 어떤 시점부터 데리다와 들뢰즈에 매혹된 이유도 그런 이유였던 것 같다. 들뢰즈가 베이컨을 두고 자연에 대해서 직접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감각의 논리>에서 말하는 표상되지 않는 감각이라는 것도, 아플라니 윤곽이니 하는 것도 자연을 염두에 두는 것이 분명하다. 들뢰즈가 철학은 자본주의 나라에서, 도시에서 성립한다고 했던 말의 의미도 분명해진 것 같다. 그런 곳이야말로 '자연'의 결여가 크기 때문인 것이다.











자연을 닮은 글쓰기라는 것이 있다면 어떤 글일까 생각하다 떠오른 것이 데리다의 글이었다. 마치 산을 올라가며 만나는 돌과 나무, 바위, 풀들이 조각 조각 흩어져 있어 그 자체로 유기성은 없지만 거기에 조화가 없지 않은 것처럼, 데리다 글을 읽는 것도 그렇게 느껴진다. 각 문장, 단어 하나하나의 유기적 연결을 회피하는 듯 보이지만 책을 덮었을 때 산을 내려왔을 때 비로소 느끼고야 마는 산을 올라갔다 내려오는 것의 의미 같은 것이 거기에 있다. 그 철학이나 문학이 정당한가를 떠나서 최소한 미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데리다나 들뢰즈의 글이 아름답게 느껴진 것은 그런 이유였던 것 같다. 그렇게 보자면 자연에 대한 묘사가 가득해야 꼭 자연을 닮은 문학, 그림, 음악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자연을 담고 닮는 것은 자연적으로 되지 않고, 무엇이 자연인지에 대한 자연적 규정과 그에 대한 부자연스러운 거부를 끝없이 해나가야만 가능한 것이다. 다시 플로베르를 생각해보면, 소설에 어떤 교훈도 담지 않는 것이 담는 것보다 더 어려웠을 것이다. 글을 써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글을 교훈조로 마치는 글이 되지 않게 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짐승의 눈을 하며 소리를 내는 벨칸토 창법은 마치 백조가 수면 아래에서 다리를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것처럼 가능한 한 노력을 다해야만 제대로 소리가 난다.













잘못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생각해보건대, 하이데거가 대지와 세계의 투쟁을 담는 것이 예술작품의 본질이라고 한 것도 어쩌면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대지를 자연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예술작품은 자연을, 즉 사물을 세계 내 존재로서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그 사물이 지닌 존재론적 깊이인 자연을 담으면서 동시에 농부가 대지를 개간하듯 대지와의 투쟁을 담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 대지와 세계의 길항은 예술이라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자연을 담고자 하는 인위적 노력을 통해서만 성립하는 것이라는 진실을 담고 있는 은유일 것이다.

<아주, 기묘한 날씨>(푸른지식, 로런 레드니스)라는 책을 읽는 중이다. 이제 시작인데, 이 책이 한 평자의 말대로 무시무시하게 아름다운 까닭은 이 책이 '자연'을 담고, '자연'을 닮은 방식의 글과 그림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북극의 빛맹 현상, 북극곰의 위협과 홍수로 파헤쳐진 공동묘지를 묘사하는 글이 이토록 아름다울지 몰랐다. '자연'이라는 말에 각자가 떠올리는 상이 다르기에 자연을 닮는다는 말은 모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여하간 모든 아름다운 것이 자연의 한 조각을 담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자연을 닮지 않은 글을 썼지만, 자연을 닮았다고 할만큼 아름다운 글을. 쥐를 무서워해서 가까이 있는 숲에 들어가는 것도 무서운 내게는 요원한 일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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