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글게 내 볼을 파갔어. 

박 바가지였어

그래도 있잖아, 새색시였어


이쁘게 들여다보는 새벽이었어

떨려 온몸이 파들거렸지 뭐

하늘이 몇 번 우그러지고 펴지고 그랬어 . -박우물 (정화진 시)


‘우물에서 하늘 보기’는 황현산 선생의 시화집이다. 내가 제대로 읽었다면 선생은 책 어디에서도 제목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짐작하건대 선생은 책의 제목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몇 해 전에 나온 에세이집인 '밤이 선생이다'에서도 선생은 제목에 대한 말을 아낀다.



최근 인터뷰에서 선생은 ‘밤이 좋은 생각을 가져다준다’는 의미의 프랑스 속담에서 이 제목을 착안한 것이라 했다. 낮이 이성의 시간이라면 밤은 상상력의 시간, 낮이 사회적 자아의 세계라면 밤은 창조적 자아의 시간이라고 믿은 탓에 선생도 밤에 글을 썼다고 한다.


'우물에서 하늘보기'라는 제목도 어쩌면 그런 의미일까. 책을 읽기 전 제목을 보고 나는 곧장 ‘우물 안 개구리’가 하늘을 올려다보는 이미지를 떠올렸다. 우물이라는 좁은 세상에서 다른 세상인 하늘을 보게 하는 것이 시라면, 우물은 이성과 현실이 지배하는 낮의 세계를 상징하고, 하늘은 꿈과 몽상이 지배하는 밤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로고스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삶의 구석구석, 삶의 여백들을 조명해주는 것이 시가 아니던가.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 좀 달라졌다.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우물에서 하늘 보기’라는 제목은 앞의 시를 염두에 두고 붙였을 것이다. 이 시에서 ‘박우물’, 곧 박 바가지로 물을 뜰 수 있는 얕고 작은 우물은 ‘글을 쓰는 사람’이다. 글을 쓰는 사람을 ‘우그러지고 펴지고’ 전율을 경험하게 만드는 것은 마치 박우물이 ‘새벽의 새색시’를 만나는 것과 같은 에로스적인 경험이다. 바로 그때 우물에 비친 우그러지고 펴진 하늘은 ‘한편의 글’에 다름 아니다. 선생은 자신이 우물이 되어 물결 위에 비치는 시와 하늘의 우그러지고 펴짐의 일렁거림을 글로 담고자 했던 것 같다. 물론 선생이 스스로를 박우물로 여긴 것은 그저 겸양에 불과하다.


책을 다 읽고 보니 ‘우물’은 개구리의 우물만도, 새색시의 박우물만도 아니다. 세월호 참사가 있고 난 이후부터 선생이 쓴 글은 모두 슬픔과 닿아 있다. 선생은 ‘슬픔은 잊혀도 슬픔의 형식은 잊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문학이 늘 이마에 붙이고 다니는 부적이지만 세월호 이후의 삶에서는 그런 형식조차도 이제 사치스럽다고 통탄한다. '진정한 삶은 이곳에 없다'는 말은 이 삶을 포기하자는 말이 아니라 이 삶을 지금 이대로는 내버려둘 수 없다는 말이라고 할 때도 선생이 염두에 두는 것은 세월호 이후의 우리의 삶이다. 그렇게 보자면, 우물은 슬픔의 깊이를 뜻한다. 그리고 이 슬픔이 내는 길을 외면하지 않고 가슴 치며 따라가면 거기에서 하늘을 만난다. 무엇보다 시는 슬픔을 담는 우물이고, 우물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하늘이기도 하다. 선생은 책 말미에 이렇게 썼다. “시가 보기에 쓸고 닦아야 할 삶이 이 세상에는 없다. 시는 이를 갈고 이 세계를 깨뜨려 저 세계를 본다. 시가 아름답다는 것은 무정하다는 것이다.” 시는 우물을 깨뜨린다. 이것이 시의 힘이다. 지금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2016.1월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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