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패권주의라는 농담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은 나를 ‘베둘레햄’이라 불렀다. 배가 많이 나온 나를 본 선생님이 붙여주신 별명이었다. 베둘레햄은 그래도 견딜만했는데 ‘드럼통’이란 별명은 정말로 모욕적으로 들렸다. 대학에 들어가자 선배들은 나를 보고 ‘슈렉’을 닮았다며 볼 때마다 놀려댔다. 윌리엄 스타이그가 쓴 동화에 나온 슈렉을 보면 영화 속 슈렉보다 훨씬 더 끔찍하게 생겼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랄 정도이니까. 나는 내가 모든 못생긴 괴물 중에 가장 못생긴 그 괴물을 닮았다는 사실이 늘 납득되지 않았다. 고백하자면 거울에 비친 나를 보며 오히려 이만하면 꽤 괜찮은 외모라 생각하는 쪽이다.
얼마 전엔 이런 일도 있었다. 칼럼을 연재하고 있는 어느 신문에 유치원에 아이를 데리러 갈 때마다 느끼는 뻘쭘함에 대해서 썼다. 엄마들이 아빠인 내게 말을 거는 경우가 거의 없고 나 역시 엄마들이 모인 자리에 끼어들기 어려운 탓이었다. 그래서 나처럼 엄마들 모임에 끼지 못하는 할머니 한 분과 함께 뻘쭘함을 이겨보고 싶다는 말로 글을 마무리했다. 며칠 후 칼럼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사진을 보니 왜 아무도 말을 안 걸었는지 알겠네요.” “할머니가 무서웠을 것 같아요.” 웃기면서 슬펐다. 아내에게 물었다. “여보, 내가 그렇게 못생겼어?” 아내는 대답했다. “못 생긴 게 매력이야.” 물론 조금의 위로도 되지 않았다.
나는 외모패권주의와는 거리가 먼 뚱뚱하고 못생긴 사람이다. 그래서 나도 이번에 청와대로 들어간 분들의 면면을 보며 외모패권주의라 했다. 대통령과 신임 수석 비서관들이 하나같이 순백색 와이셔츠 차림으로 커피 산책을 하고 있는 사진을 보자 나도 모르게 든 생각이었다. 물론 새 정부가 외모로 인사를 했을 리 만무하다. 오히려 성공한 누군가를 향해 외모패권주의라 부르며 보잘것없는 내 처지를 못생긴 외모 탓인 양 돌리려 했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실체가 없다는 점에서 외모패권주의란 말은 하나의 농담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농담 속에 진실 한 자락이 있다면 어떤 사람이건, 지역이건, 사건이건 겉으로 보이는 ‘외모’만을 마치 전부인 양 대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는 점일 것이다. 외모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없는 사회였다면, 즉 세상을 피상적으로만 이해하지 않는 사회였다면 외모패권주의 같은 농담이 공감을 얻기 힘들 것이다. 가난 때문에, 학력 때문에, 지역 때문에, 외모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상처주고, 또 상처를 받는가. 그래서 외모패권주의, 영남패권주의, 친박패권주의, 강남패권주의 등 온갖 종류의 패권주의에 실체가 있는가를 따지기보다 그런 말에 담겨 있을 어떤 진실을 살피는 노력이 보다 값진 것이다. 외모패권주의는 농담이지만, 외모로 받은 상처는 농담일 수 없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17.6.13)
얼마 전 동아일보에서 박정자 선생이 '외모패권주의'에 대해서 쓴 글을 읽었다.
(http://news.donga.com/3/all/20170519/84435070/1)
텔렘수도원 잔상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는데, 대통령 취임 첫 날 하얀와이셔츠를 입고 양복 재킷을 한 팔에 걸친 후 커피 한 잔을 들고 대통령과 선임 비서관들이 청와대 산책을 하는 것이 연출된 것인데다, 자유로워 보이지만 자유를 강요하는 일종의 전체주의라는 것이었다. 외모패권주의 하나에서 사회주의적 획일성을 끄집어내는 글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한 마디만 가져오면, 박정자 선생은 "사회주의는 사회적 약자 또는 소수자 배려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지만 실은 건강하고 잘생긴 좋은 집안 출신만을 국민으로 인정하는 냉혹한 체제로 타락했다. 북한 체제가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평양에는 장애인이 들어올 수 없고, 모든 지배층은 당성이 좋은 집안 출신이어야 하며, 최고지도자는 백두혈통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외모패권에서 이런 걸 끌어낼 수 있는 것은 문해력인 것인지, 관심법인 것인지 알기 어렵다. 지혜자이자, 나의 유일한 구루라고 할 수 있는 나와 같이 사는 여자가 내게 늘 하는 말이 있다. "웃자고 하는 말에 죽자고 덤비고, 농담에 욱하는 사람과는 상종하는게 아니다"라고. 나도 상종하고 싶지 않았는데, 청와대 인사를 보며 외모패권주의라 생각했던 나도 한 마디 안 할 수 없어서 쓴 글이다. 그런데 쓰다보니 하나 마나 한 이야기가 되었는데, 그동안 내 별명의 역사가 궁금한 분이 만의 하나라도 계시다면 읽어보신다면 꽤나 즐거우실 것 같다. 외모패권주의라는 농담에 대해 마치 농담하듯이 쓰고 싶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