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우연히 대학로 이음책방에 들렀다가 거기서 '오렌지가좋아', 엄명환씨를 만났다. 이유를 알기 어렵지만, 꽤나 자주 오렌지가 생각난다. 첫 만남에서 우리는 서로에 대한 호감을 갖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오해로도 가득한 만남이었다는 것은 그로부터 1년 후 그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난 이후였다. 그리고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떤 한 사람의 시민적 용기의 근원에 대해서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까지 종합해보면, 오렌지가 보여준 용기는 학교가 아니라 학교 밖에서, 교사가 아니라 사람으로부터, 책이 아니라 현장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오렌지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인권상도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제도, 엘리트, 서열주의의 표상 같은 '어륀지' 대신 자기 자신의 삶과 선호를 그 자체로 긍정하는 '오렌지'를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오렌지인권상에서 격려 받게 되었으면 한다. 사실은 오렌지이며, 오렌지가 좋지만, 어륀지가 되고 싶고, 어륀지에 대한 미련을 못버리는 나를 생각하며 썼다. 지금 하나의 희망이 있다면 이런 거다. 어륀지보다는 오렌지가 좋다. 그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 그거 하나다.

오렌지가 좋아.(2017.7.25. 매일신문 에세이산책)


2014년 여름, 대학로 이음책방에 들렀다가 사진가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자신을 이름 대신 ‘오렌지가 좋아’라는 별명으로 소개했다. 그냥 ‘오렌지’라 불러도 좋다고 했다. 이명박 정권 출범을 준비하던 이경숙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이 공청회에서 “미국에서 ‘오렌지’(orange)라고 했더니 아무도 못 알아듣다가 ‘어륀지’라고 하니 알아듣더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어륀지보다 오렌지가 더 좋다고 생각했던 그는 그때부터 자신을 ‘오렌지가 좋아’로 소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오렌지는 책방 한쪽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다산인권센터 자원활동가라는 직함이 새겨진 명함을 내게 건넸다. 그는 2009년부터는 반올림(삼성 반도체공장 노동자 인권지킴이) 활동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반올림 집회나 삼성에서 백혈병을 얻어 세상을 뜬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의 1인 시위 현장에 그는 늘 함께했고, 그의 사진들은 영화 ‘또 하나 약속’(2014)에서 엔딩 화면으로 쓰이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대개 그렇지만 경제적 대가는 거의 없기 마련이다. 생활은 어떻게 해나가느냐는 비루한 내 물음에 오렌지는 검도를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다. 유독 두꺼운 팔뚝이 눈에 들어왔다. 본격적으로 살아갈 방편을 찾아야 하지 않느냐는 꼰대 같은 내 물음엔 사진가로 자리 잡기 위해 노력 중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솔직히 그때 나는 사진을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다는 오렌지의 미래가 걱정스러웠다.


그날의 질문과 걱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한심한 것이었는지는 그로부터 1년 정도 지나 알게 되었다. 2015년 5월 26일, 오렌지가 심정지로 쓰러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알고 보니 그는 만성신부전증 환자로 1급 장애인이었다. 열두 살 때부터 일주일에 세 번씩 혈액 투석을 받아야 했다. 유달리 두꺼웠던 팔목은 투석을 위해 찔러댄 주삿바늘이 남긴 흔적이었다. 그 때문에 중`고등학교도 모두 검정고시로 마쳐야 했다. 장애인 인권과 의료민영화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사진에 뜻을 품었고, 어륀지보다 오렌지를 좋아했던 그는 결국 6월 10일 민주항쟁을 기념하는 날, 서른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여름에 그를 만났던 탓일까, 두 해가 지났지만 지금도 이맘때가 되면 명랑했던 오렌지가 생각난다. 황상기 씨는 “그의 사진기는 삼성 경비의 폭력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준 방패였다”고 했다. 그 자신도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버티기 어려웠을 처지로 어떻게 다른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었을까. 무엇이 이런 시민적 용기를 갖게 만들었을까. 아픔으로 두꺼워진 팔뚝으로 그는 타인의 아픔을 안았다. 자기 아픔으로 세상 아픔을 품었다. 세상 모든 일에 무덤덤한 내가, 내 아이가 어륀지를 행여나 오렌지로 발음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사는 자신이 부끄럽다. ‘오렌지가 좋아.’ 그의 이름은 바로 엄명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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