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꿈들
박기범 지음, 김종숙 그림 / 낮은산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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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붙임.

 

<그 꿈들>.
이 책은 내용도 아름답지만 무엇보다 두 분 작가의 삶이 놀랍다. 책에 소개된 작가 소개를 그대로 옮겨 본다. 그림을 그린 김종숙 작가, 이야기를 만든 박기범 작가에 대한 소개.

 

 

박기범.
동화 쓰는 사람. 이천삼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시작할 무렵, 그곳 아이들의 곁이 되고자 인간방패, 평화지킴이로 전쟁터로 들어가 그 전쟁을 함께 겪었다. 한국에 돌아온 뒤로 그곳에서 인연을 맺은 이들과 우정을 나누며 평화를 바라는 일들로 지내었으나, 내전으로 치닫는 상황에 하나둘 소식마저 멀어졌다. 세상에 대한 무력감은 글을 쓰는 일에 대한 자괴감으로 이어졌고, 이천칠년, 한옥 짓는 일을 배우는 목수학교에 들어갔다. 이천십이년, 숭례문 복원공사와 석가탑 해체보수공사 같은 곳에 잡부로 들어가 맨 밑에서 일들을 배운 뒤, 지금은 문화재보수기술자가 되어 일을 하고 있다.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글과그림」 동인...으로 『문제아』, 『미친개』 같은 동화를 썼다.

 

김종숙.
그림 그리는 사람.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그림만 그릴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림 그리는 것으로 진정의 끝에 닿고자 하며, 붓을 잡으면 고통스러운 대결을 놓지 못한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눈물겨운 것,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그 극한의 칼날 위를 걸어야만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는. 그러하기에 그의 작업을 지켜보는 일은 조마조마하기만 하다. 당신의 붓질 하나하나가 얼마나 고통스러울지를 알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살라 버릴 것만 같은, 몸속 식지 않는 불덩이. 그러나 그 작고 가녀린 몸으로 오징어 덕장에서는 다른 이보다 곱절의 일을 씩씩하게 해내며, 식당 설거지도 마다하지 않고 즐겁게 해 오고 있다. 1965년 속초에서 태어났고, 「글과그림」 동인으로 『미친개』에 그림을 그렸다.

 

두 분 모두 직업과 생업 사이의 거리를 지닌 분들이라는 점이 우선 감동이 된다. 인터뷰에서 박기범 작가는 세상의 조화를 깨고 싶지 않아 목수가 되었고, 문화재 복원일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http://www.aladin.co.kr/author/wauthor_interview.aspx?AuthorSearch=@63071 

 

 

이렇듯 동화작가가 된다는 것은 그냥 작가가 되는 것과는 조금 더 고단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동화작가는 한편의 동화를 개연성있게 그려낼 수 있다는 것을 넘어 삶 전체가 고스란히 자신이 그려낸 동화 속 세계에 바쳐지길 요구 받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 헌신과 열정이 이 책의 그림과 글에서 그대로 전달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책을 보고(읽는 것이 아닌), 또 작가의 삶을 보고 나는 어떤 세계에 바쳐진 삶인가 생각하게 된다. 하느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데, 두 작가의 삶에 비하자면 나는 돈을 예배하며 매일 같이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가.. 책에 나온 이야기처럼 공감도, 고통도, 애원도 숫자에는 들어있지 않다. 숫자의 편리함은 공감의 고통과 번거로움을 줄여준다. 그림책 한 장 한 장을 넘기면서 숫자란 그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 돈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호기있게 외쳤던 10살 때의 감각이 되살아 남을 느꼈다.

 

 

그 꿈들

    

 

1.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떤 책을 소개해주실 건가요?

 

이번 주는 특이한 책을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혹시 진행자님께서는 최근에 그림책을 읽어본 적 있으세요?

 

2. 아이들이 보는 그림책이라면 자주 읽어주지요.

 

네, 저도 아직 아이가 어려서 그림책을 자주 읽어주는 편입니다만, 그래서인지 그림책이라는 것은 어린이들을 위한 책이라고만 생각해왔는데요, 아마 많은 분들이 저처럼 생각하실 겁니다. 하지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사실 서점에는 성인들을 위한 그림책도 많이 있는데요, 오늘은 특별하게 그림책 한권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출판사 낮은산에서 만들고, 박기범이 쓰고 김종숙이 그린 <그 꿈들>이라는 책입니다.

 

3. 성인을 위한 그림책이라고 하시니까, 언뜻 생각하기로는 만화책도 떠오르구요, 미술에 관한 책인가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어떤 책인가요?

 

네, 제가 오늘 소개해드릴 <그 꿈들>이라는 책을 처음 만나게 된 계기부터 말씀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저는 이 책을 제주도에 있는 그림책 갤러리 제라진이라는 곳에 방문했다가 소개 받게 되었습니다. 제라진 갤러리는 미술작품을 판매하는 상업 갤러리는 아니구요, 그림책미술관 시민모임이라는 곳에서 운영하는 그림책 문화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제라진갤러리를 방문했을 때는 오늘 소개해드리는 책인 <그 꿈들>에 그려져 있는 김종숙 화가의 원화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는데요, 잘 아시겠지만 사실 앤소니 브라운이나 로즈메리 웰스와 같은 아이들 그림책은 너무 아름다고 예술성도 뛰어나잖아요? 제라진갤러리는 그래서 이렇게 좋은 그림책에 실려있는 원화를 전시하고, 그림책을 읽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가해 그림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그림책 독서회를 진행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림책미술관 시민모임에서 읽는 그림책은 단지 어린이들을 위한 책은 아니구요, 어린이들도 읽기에는 별로 무리가 없긴 하지만 내용과 그림이 그보다는 좀더 복잡한 성인들이 읽는 그림책이라 할 수 있어요. 제라진 갤러리에서는 이 밖에도 그림책 창작 워크샵도 진행하구요, 드로잉 수업도 하구요, 작가를 모시고 북콘서트도 진행하기도 합니다.

 

4. 그림책을 읽고 독서모임을 하는 것을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왠지 그림책이라니까 참여하는데 부담이 적을 것 같아서 좋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저도 사실 제라진 갤러리에 방문해 그림책미술관 시민모임이라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만 해도 그림책 독서모임이라는 것은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요, 제라진 갤러리에 계신 분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정말 괜찮은 모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일단 그림책이면 큰 부담이 되지 않으니까 독서회에 와서 누구라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고전이나 어려운 책을 읽는 모임도 도움이 많이 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지적으로 더 훈련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면 모임에 나와서 자유롭게 생각을 나누기에는 한계가 많잖아요? 하지만 그림책은 그림을 보고, 이야기를 읽는 것에는 부담이 적지만 책의 그림을 보거나 글을 읽고 느끼는 점은 사람마다 다들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저는 이제 일곱 살인 제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줄 때도 새롭게 깨닫는 점이 많은데요, 저는 아이가 그림책에 나오는 이야기와 정보를 이해했는지에 집중하는 반면 아이는 이야기보다는 그림에 훨씬 더 관심이 많습니다. 얼마 전에 제가 <엉망진창 흙>이라는 그림책을 읽어준 적이 있는데요, 저는 흙의 종류가 10만가지가 넘고, 가로세로 1미터 크기의 땅에 300만마리가 넘는 생물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아이가 알게 되는 것이 더가치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이는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흙에 대해 설명해주는 두더지 옆에 조그맣게 그려진 개구리를 찾느라고 책을 읽어줘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거죠. 하지만 아이는 아빠가 전혀 보지 못하는 것을 배웁니다. 장난스럽게 그려진 개구리를 찾으면서 개구리는 흙에서만 살 수 있다는 것을, 흙이 점점 없어지면 더 이상 개구리도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말이죠. 아이와의 그림책 읽기에서도 어른인 제가 보지 못했던 것을 새롭게 보게 되는데요, 이처럼 그림책은 단순해 보여도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책에 실려 있는 그림을 하나 하나 살펴보며 의미를 파악하고, 감상하기 위해서는 보통의 책을 읽는 것보다 훨씬 더 시간이 많이 걸리고 복잡하다고도 할 수 있죠. 오늘 소개해드리는 <그 꿈들>이라는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5. 아, 그렇네요. 그림책에 실려 있는 그림들은 이해를 돕기 위한 단지 참조그림이나 일러스트가 아니라 그것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니까 그 의미를 읽어가는 것이 만만치 않겠네요.

 

네, <그 꿈들>이라는 이 책에 실려 있는 삽화들도 말씀하신 대로 이야기를 돕기 위한 참조그림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 하나의 작품이라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마치 너무 좋은 작품이 많이 전시된 미술관에서는 이 작품을 보다가 저 작품으로 가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죠. 오늘 소개해드리는 <그 꿈들>은 이라크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두꺼운 그림책입니다. 이 책에서는 전쟁에서 들리지 않는 목소리, 그러니까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와 언론의 왜곡에 가려져 잘 들리지 않는 소박하고 힘이 없는 개인들의 삶과 꿈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책의 한 부분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저 멀리, 텔레비전과 신문으로만 소식을 듣는 사람들은 더는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슬픈 마음에 깊이 젖어들지 못했습니다.

-어제 하루에만 백 명도 넘게 죽었다는군.

-시장 한가운데다 로켓포를 쏘았다나 봐요.

-어쩌자고 죄 없는 사람들까지 다 죽게 하는지.

-어차피 이럴 거면 한 번에 다 쏟아 부어야 해. (중략)

 

어느 날은 백 명이었고, 어느 날은 백오십 명이라 했습니다.

어느 날은 공원에서 폭발이 일어났다고 했고, 또 어느 날은 예배당 건물에 포탄이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뉴스에서는 거기까지만 말해 줄 뿐,

죽거나 다치게 된 이들이 간직한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스러져 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

묻혀 버린 한 사람 한 사람의 어젯밤 이야기,

숨이 막힌 한 사람 한 사람의 사랑,

저물어 버린 한 사람 한 사람의 꿈.

세상에서 단 하나 뿐인 것들.

하지만 전쟁을 벌이는 이들은 그 아름다운 것들을 아주 없는 것처럼 무시했습니다.

오로지 사망자 숫자만 헤아릴 뿐. 먼 곳의 사람들은 그 숫자에 무덤덤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난 번 그 오누이가 나눈 이야기도, 그 노인의 얼굴에 깊게 팬 주름도,

아이를 들쳐 업고 뛰던 아버지의 숨소리도 그 숫자로는 알 수 없었습니다.”.

    

 

6. 숫자에는 영혼이 없죠. 수백명이 죽었다는 것은 수백개의 삶과 꿈이 사라졌다는 것인데, 뉴스를 통해 사라져간 삶과 꿈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기란 어려우니까요.

 

그렇습니다. 이 책을 쓴 박기범 작가는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시작될 무렵, 그곳 아이들의 곁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인간방패로 전쟁터에 들어가 함께 전쟁을 겪었다고 합니다. 인간방패가 되었다는 것은 미국의 이라크 전쟁의 명분에 동의하느냐 못하느냐, 그러니까 이라크 독재자인 후세인 편이냐 미국 편이냐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라크인들도 독재자의 지배가 옳지 않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인데요, 박기범 작가는 독재보다도 어떤 명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쟁이 더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직접 전쟁을 겪으면서 한 개인의 삶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전쟁에는 결코 승자와 패자도 없고 모두가 패자라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됩니다.

 

이 책에는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너무 많은데요,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택시 기사인 하이달의 꿈은 곧 결혼할 가디르와 조그만 보금자리에서 가디르를 닮은 아기를 낳고, 해 저물녘 티그리스 강변을 가디르와 함께 거니는 것입니다. 소박한 꿈이죠. 또 다른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이 전쟁에 참전한 군인인 미국인 스미스 일병입니다. 스미스는 원래 트럭 운전을 하고 있었는데요, 여자 친구인 메이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고 결혼을 하려 했는데 여자친구의 아버지가 결혼을 반대했다고 합니다. 여자친구의 아버지는 스미스를 열정도, 용기도 없는 청춘으로 보았다고 해요. 스미스는 그래서 이라크 파병 군인이 되기로 했다고 합니다. 여자친구의 아버지에게 자신이 용기있고 열정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다시 청혼하기 위해서 말이죠.

 

7. 두 명 모두 비슷한 처지네요. 모두 결혼을 하겠다는 소박한 꿈이 있는...

 

네, 나이도 비슷했다고 해요. 어느 날 스미스 일병이 지키고 있는 검문소에서 소동이 일어납니다. 저쪽에서 자동차 수색을 하던 선임병이 그 안에 타고 있던 사람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서로 맞고함을 치고 차 안에 있던 한 젊은 남자가 어떤 손동작을 하기도 하면서요. 스미스 일병은 주변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나는 것을 자주 봤기 때문에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젊은 남자로부터 뭔가 위협을 느꼈어요. 그리고 죽고 싶지 않아서, 살아서 여자 친구를 다시 만나고 싶어서 버스에 타고 있는 사람들에게 방아쇠를 당겨 총구를 휘갈겼습니다.

 

그런데요, 그 실랑이 벌였던 사람이 바로 택시기사 하이달이었습니다. 이라크에 폭격이 시작되자 한 초등학교에도 폭탄이 떨어져 수 많은 아이들이 팔다리가 잘려 나갔는데요, 하이달은 운전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죽어가는 아이들을 병원으로 옮기는 일을 해 왔습니다. 늘 가는 병원에 더 이상 아이를 눕힐 곳이 없자 근처 보건소로 아이들을 싣고 가는 길에 검문소에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아이들의 출혈이 많아 위급한 상황이라 하이달은 너무 급하니까 그냥 지나가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군인들은 무조건 입다물고 기다려라는 거죠.

 

 하이달은 “아이들이 죽어간다”고 외쳤지만, 군인은 “한마디만 더 나불대면 테러범으로 생각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한 사람은 미국인, 한 사람은 이라크인이니까 서로 대화가 잘 될 리가 없죠.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에 하이달의 목소리가 커졌던 겁니다. 울부짖듯 애원을 했으니까요. 거기에 놀라서 스미스 일병이 하이달에게 총을 쏜 겁니다. 트럭기사인 스미스가 택시기사인 하이달을 쏘아죽인 거죠. 청혼을 준비하던 하이달에게 또 다른 청혼을 준비하던 스미스가 말이죠.

 

8. 아, 가슴이 아프네요. 한 사람은 전쟁에서 죽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 때문에, 다른 한 사람은 전쟁에서 죽어가는 아이를 살려야겠다는 간절함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거네요. 정말 전쟁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는 것 같아요.

 

이 책에는 사람들의 꿈이 전쟁에서 사그라드는 무수한 이야기들이 실려 있습니다. 기름통을 배달하지만 축구 선수가 꿈인 한 소년의 무릎에 폭탄의 파편이 박히고, 90세의 노인이 평생 처음 갖게 된 집이 폭격으로 폐허가 됩니다. 아마 청취자분들께서는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안타깝게 느끼시겠지만 이 책에 실린 그림들을 함께 보신다면 더 많은 것을 느끼고 경험하게 되실 겁니다. 폐허가 된 땅을 쓸고 있는 노인의 뒷모습의 슬픔과 폭격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초조한 모습이 물감을 두껍게 발란 그린 유화 작품으로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박기범 작가는 이 책을 이라크에서 돌아온 후 10년이 지난 후에 썼습니다. 이라크에서 돌아온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는 이라크의 많은 사람들과 연락이 닿았지만 종전 후에 이라크에서 내전이 발발하면서 대부분과 연락이 끊겼다고 해요. 그래도 마음 따뜻해지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10년 후 스미스가 이라크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사람들에게 용서를 빕니다. 임신하고 있던 여자친구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데리고 와서 말이죠. 그리고 스미스가 무릎을 꿇고 있는 동안 스미스의 아이인 빌리와 이라크 아이들은 벌써 친구가 되었구요.

 

9. <그 꿈들>, 이 책을 추천해주시는 이유를 한번 정리해주시죠.

 

네, 이 책은 전쟁에서 우리에게 잘 들리지 않았던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를 이야기와 그림을 통해서 들려줍니다. 뉴스를 보면서, 수많은 숫자들을 보며 놓치기 쉬웠던 전쟁의 비극과 고통, 한 사람의 꿈에 대해 다시 상상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수십만의 실직자가 있고, 수백명이 바다에 빠져 죽었을 때 거기에는 숫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한 인간의 삶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상상하기 위해서 감수성이 필요합니다. 뉴스를 보면서는 분노할 수 있지만 감수성이 생기지는 않잖아요. 이 책은 아름다운 그림들과 함께 그런 감수성을 일깨워줍니다. 그런 점에서 그림을 전혀 보여드리지 못한 오늘의 책 소개는 반쪽짜리 소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림책은 한번만 보는 책이 아닙니다.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사다주면 읽었던 그림책을 수십번을 읽잖아요? 읽을 책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읽을 때마다, 그림을 보면서 전에는 느끼지 못했고 발견하지 못했던 것을 다시 새롭게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동영상과 문자가 줄 수 없는 메시지를 움직이지 않는 한 장의 그림이 우리에게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소개해드리는 <그 꿈들> 뿐 아니라 더 많은 그림책을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어떤 분이 예전에는 문맹이 문제였지만 앞으로는 점점 더 이미지를 읽어내지 못하는 이미지맹이 문제가 될 거라고 한 말이 기억납니다. 그림책 읽기로 이미지맹에서 탈출을 시도해보시길 추천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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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자 대구신문에 나가는 글. 예전에 페북에다 써 놓은 글을 가다듬어 신문사에 보냈는데, 오늘 다시 읽어 보니 신문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글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가능성은 적겠지만 부디 신문에 가득 찬 '배신'이라는 말과의 대비 속에서 '고흐의 사랑'을 읽어 주길 빌 뿐이다. 그리고 지난 주는 고난주간이었다는 것도, 이제 오순절 기간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도 누군가는 생각해주며 읽어주길 빌 뿐이다. 극렬한 사랑은 부작용을 낳는다. 그리고 그것이 삶인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것, 소동을 일으키고, 창피를 당하고, 망신을 당하고, 사람을 긴장하게 했다가 의기 소침하게 만드는 것이니까. 사랑은 아름다운 말이지만, 사랑은 항상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지 않는다. 그러나 삶의 의미는 사랑으로 어떤 결과를 얻었느냐가 아니라 진정으로 사랑했는가에 있지 않을까. 따뜻한 관심과 열정적 사랑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생의 이유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아닌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이유는 쉽게 사랑을 포기해버리는 것 때문일 수도 있겠다. 고흐가 가난했지만 가난하지만은 않았던 것과는 다르게 말이다. 모든 순간, 그것이 무엇이든지 늘 강렬하게 사랑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규칙 위반이다."




반 고흐의 세계

김연수는 ‘하루키 월드’에서 깊이 사랑하는 것은 규칙위반이라고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는 거의 항상 주인공이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면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떠나게 되고, 결국 홀로 남은 사람의 마음에도 깊은 상처가 남는다. 얼마 전 반 고흐의 편지글을 읽으면서 발견한 것은 하루키와 달리 ‘반 고흐 월드’에서는 사랑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죄가 된다는 것이었다. 고흐도 하루키의 생각처럼, 깊은 사랑은 결국 깊은 상처를 남기는 어리석고 바보 같은 짓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여동생 윌에게 남긴 편지에서 동생에게 ‘사랑할 것’을 권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래, 차라리 바보짓을 몇 번이든 하렴.” 이뿐 만 아니다. 고흐는 사람들이 공부에 집중하거나 종교나 이념에 빠지게 된 것은 ‘연애사건’, 즉 ‘사랑에 빠지지 못해서’라고 한다. 따라서 ‘반 고흐 월드’에서는 제대로 된 사랑을 하는 것이야말로 많은 공부를 하거나 사회주의에 심취하는 것보다 올바른 일이다. 

“대개는 그런 사건으로 창피와 망신만 당할 뿐이지만, 그래도 그렇게 한 것이 전적으로 옳았다고 생각한다”.

고흐가 극렬주의자였다면 바로 이런 면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사랑에 있어서 절제가 필요하다거나 지나치게 열정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하루키의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남자들처럼 ‘세련된’ 사랑은 없다. 고흐는 주변 사람들을 지치고 힘들 정도로 사랑했다. 그건 사촌인 케이에 대한 사랑에서나 매춘부였던 시엔에 대한 사랑에서도 마찬가지고, 동생인 테오에 대한 사랑에서도 그렇다.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고흐가 목숨을 스스로 끊게 된 이유는 테오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흐가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동생 테오에게 더 이상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은 편지 곳곳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정신 착란으로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어 동생에게 진 빚을 갚을 길이 없게 된 고흐가 동생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죽음 외에는 없었다.

어쩌면 정신 착란 증세도 깊은 사랑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고흐는 동생에게 신세를 갚겠다는 마음으로 ‘예술’로 끝까지 자기를 내몰았다. 테오가 정신 착란 증세가 심각해져 생레미 요양원에 입원해 있는 고흐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글귀가 나온다. 

“그 그림들은 형이 자연과 살아 있는 생명체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거야. 형이 생명체 안에 본래부터 내재한다고 강렬하게 느끼는 것들. 이런 그림을 그리기 위해 형은?모든 것을 극한까지 몰고가는 모험을 감수했을 테니 머리가 얼마나 힘들었겠어. 혼란을 겪은 것도 무리가 아니야”. 

고흐는 동생도, 예술도, 연인도, 자연도 극한까지 사랑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도, 건강도, 돈도, 심지어는 동생까지 모든 것을 잃었다. 오로지 작품만 남았다.

하루키 월드에서 보자면 이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짓임이 틀림 없다. 하루키는 새벽에 늘 같은 시각에 일어나 원고를 쓰고, 오후에는 취미로 번역을 하고, 마라톤을 완주하고, 이 나라에서는 선인세로 수억원을 받으며, 깊이 사랑할 가능성이 있는 자녀도 애초부터 낳지 않아 부유하고, 건강하고, 고흐에 비하자면 이렇게까지나 오래 살고 있다. 물론 고흐와 비교해 그것을 나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두 세계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차이는 내가 보기에 ‘깊은 사랑’에 대한 태도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 어느 글에서 나는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을 읽고 하루키의 지혜가 내게 없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무 깊이 사랑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썼다. 누군가에 대한 사랑이 그 사람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고흐의 서간집을 읽으면서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세상에 대한 경험도 부족한 주제에 사랑까지 깊이 하지 않겠다는 것은 사실상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것, 소동을 일으키고, 창피를 당하고, 망신을 당하고, 사람을 긴장하게 했다가 의기 소침하게 만드는 것이니까. 사랑은 아름다운 말이지만, 사랑은 항상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지 않는다. 그러나 삶의 의미는 사랑으로 어떤 결과를 얻었느냐가 아니라 진정으로 사랑했는가에 있지 않을까. 따뜻한 관심과 열정적 사랑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생의 이유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아닌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이유는 쉽게 사랑을 포기해버리는 것 때문일 수도 있겠다. 고흐가 가난했지만 가난하지만은 않았던 것과는 다르게 말이다. 모든 순간, 그것이 무엇이든지 늘 강렬하게 사랑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규칙 위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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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공발전소 엮음 / 이야기나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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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이번 주 교통방송에서는 놀공발전소의 <노력금지>를 소개했다. 이 책이 지닌 다채로움과 놀공이 만든 게임의 메커니즘을 제대로 설명했다는 자신이 없다. 게다가 오늘은 내 코너를 마친 후 특집 방송이 있어 13분 내에 소개를 마쳐야 했다. 지난 12월에 플레이어스 캠프에서 피터공을 만나 뵌 적이 있는데, 나보다 더 무섭게 생기셔서 다가가기 힘들었지만 몇분의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피터공이 직접 소개하는 게임과 놀공발전소에 대해서 들을 수 있는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그 때 들었던 내용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정확한 멘션은 기억나지 않지만, 게임은 가상적이지만 게임의 참가자들이 느끼는 경험과 감정은 결코 가상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가상현실을 체험한다고 하더라도 가상현실을 체험하는 나 자신은 결코 가상적이지 않다는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인데, 나는 그 때 가상현실에서의 체험을 실제현실에서의 체험에 비해 인식론적으로 더 불확실하고, 낮은 질과 등급을 지닌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어왔다는 것을 피터공과 대화하며 깨달을 수 있었다. 사실 예술-경험 자체가 본질적으로 '가상성'과 불가분하다는 것은 당연한 것임에도 유독 게임에 대해서만큼은 그 가상성을 어떤 혐의를 가진 것으로 의심하고 경계하고 있었다. 내가 별로 게임을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도 아마 그런 오해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흔한 스타크래프트 한번 한 적이 없고, 화투나 카드놀이, 장기, 바둑, 모든 종류의 보드게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놀이를 굳이 들자면 그냥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이 거의 유일했다고 할 수 있다. 왜 그랬을까. 돌이켜보건대 나는 가상의 갈등에 참여하면서 내가 갈등으로부터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때 느끼는 그 결코 '가상적이지는 않는 기분과 느낌'을 용납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실제 현실에서도 그런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은데 왜 가상현실에서까지 그런 경험을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이었던 거다. 가상의 갈등에서 진 것은 내가 바둑판에 둔 흰돌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것을 견디기 힘들었다.

 

더하여, <노력금지>를 이번에 소개하면서 새롭게 생각하게 된 것도 있다. 놀공이 하는 일, 더 본질적으로 게임이라는 것이 현상학적 환원과 유사한 점이 있다는 것이다. 현상학은 규정하기 어려운 분야지만, 내 식으로 이해하자면 '보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후설과 하이데거는 모두 사태 그 자체로 가서 사태를 직시하면서 보이는 것을 기술하려고 했다. 즉 관찰자가 아니라 세계 내에 존재하는 참가자로서 말이다. 놀공이 만드는 게임은 그런 의미에서 현상학적이다. 게임 참가자들이 사태의 방관자나 관찰자가 아니라 사태 자체에 들어가도록 게임을 고안하고, 어떤 사태를 기존의 방식과는 다르고 낯설게 볼 수 있도록 한다. 그러니까 놀공클래식의 경우, 우리가 고전에 대해서 갖고 있는 선입견에 대해서 판단 중지하고, 고전에 대해 누군가로부터 듣는 수준이 아니라 게임이라는 '틀'에서 직접 체험하게 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특정 고전을 다른 방식으로 보도록 만들고, 게임이 일어나고 있는 장소, 예를 들면 교보문고 강남점이라는 공간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만들고, 심지어 게임에 참여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다르게 보도록 만든다. 놀공이 유니세프와 협력해서 만드는 교육 게임이나 책에 소개된 어느 그룹에서 진행된 창의성과 관련된 게임도 기존의 구호활동, 창의성 자체를 게임을 통해 새롭게 보고 재정의하도록 유도하는데 이런 과정은 '현상학적인 것' 그 자체이다. 

 

현상학 이야기가 나왔으니 더 이어가자면, 하이데거는 '보는 방법'을 배우고자 오랜 시간을 들여야만 했다고 한다. 세잔 역시 생빅투아르산과 사과를 끝도 없이 그렸던 것도 보는 방법에 대한 탐구였다고 할 수 있다. 세잔을 사랑했던 피카소는 세잔이 이룩한 성과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보는 방법을 개척해 나갔다. 즉 그 방법은 '모방'이었다. 피카소는 습작으로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을 수없이 모방했는데 이것은 단지 테크닉 때문이 아니라 '다른 나'가 되어 보는 연습이었다. 다른 존재가 되어 대상을 바라보고, 그림을 그리는 과정의 반복을 통해 피카소는 자아를 연성화시키고자 했다. 쉽게 말해 모방은 자아를 '말랑말랑'하게 만든다. 창의성, 새롭게 보기는 이 말랑말랑한 자아라야 가능하다. 딱딱한, 경화된 자아의 시선은 일상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에 닫혀 있다. 무엇이든지 '-되기'를 원했던  피카소가 최종적으로 모방하고 싶었던 것은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자유분방하고 언제든지 다른 나자신이 되고,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편견이 없다. 어쩌면 놀공은 놀라운 현상학적 직관으로 자신들이 풀어야 하는 문제, 고전에 대해서, 학습에 대해서, 창의성에 대해서, 사회에 대해서 새로운 경험을 담은 게임을 고안하고, 게임 참가자들은 게임 속에서 피카소처럼 '다른 나'가 되는 경험으로 자아를 연성화시키고 사태를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된다. 어쩌면 나는 게임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토록 자아가 경직되고 굳어있고, 현상학 연구도 포기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몸이 안좋아져서 읽으면서 든 생각, 다이어트도 '노력금지'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것. 공부보다 살을 빼기 위한 노력의 총량이 더 많았던 것이 그동안 내 삶이었다. 놀듯이 공부하는 것처럼 놀듯이 다이어트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놀공발전소를 따라 놀듯이 다이어트하는 놀다이체육관을 만들어보고 싶다. 피터공은 러닝머신을 탈까?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그 기계를 '노력금지'를 세상에 외치는 놀공사람들은 어떻게 바라볼까 궁금해진다.

 

 

노력금지

재미있는 게 이기는 거다!

 

1. 안녕하세요? 이번 주는 어떤 책을 소개해주실 건가요?

 

이번 주에는 출판사 이야기나무에서 만들고, 놀공발전소에서 만든 <노력금지>라는 책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특이하게도 이 책의 저자는 한 사람이 아닙니다. 놀공발전소라는 회사의 구성원들이 함께 쓴 책인데요, 사실 이 책이 특이한 점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노력금지>라는 책의 제목도 독특하고, 책의 구성도 독특하고요, 주제도 독특합니다. 그리고 책을 쓴 이 회사 구성원의 이름도 독특하고, 놀공발전소라는 회사가 하는 일도 독특합니다. 정말 모든 것이 독특한 책을 오늘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2. 그렇게 모든 것이 독특할 수 있나요? 어떤 책일지 궁금해집니다. 먼저 책의 저자가 놀공발전소라고 하셨는데요 어떤 곳인가요? 꼭 동아리 이름 같아요.

 

놀공발전소는 ‘놀공’으로 부르기도 하는데요, 한마디로 말하면 게임을 만드는 회사입니다. 게임이라고 하면 아마 많은 분들이 컴퓨터 게임이나 보드게임 같은 것을 떠올리실텐데요, 이 회사는 좀 다른 종류의 게임을 만듭니다. 사람들이 직접 움직이며 체험할 수 있는 빅게임을 만드는데요, 예능 프로그램 중에 “러닝맨”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죠? 거기에서 출연자들이 미션을 수행하고, 추격전을 펼치는 것을 생각해보시면 이해가 쉬우실 겁니다. 놀공발전소는 이렇게 게임 참가자들이 말을 움직이거나 캐릭터를 손가락으로 조작하는 게임과는 달리 참가자들이 직접 카드가 되고, 캐릭터가 되는 게임을 만드는 회사라고 소개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게임을 만드는 회사라는 설명만으로는 놀공발전소를 제대로 소개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놀공에서는 게임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합니다. “삶의 반경과 생각의 깊이가 게임을 통해 확장되도록” 만들겠다는 거지요. 그래서 이 회사의 이름이 놀이발전소가 아닙니다. 놀이와 공부의 첫 글자가 합쳐진 ‘놀공발전소’죠. ‘놀 듯이 공부하자!’라는 뜻을 품고 있는 회사인 겁니다. 그래서 이 회사는 게임을 만드는 동시에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거죠.

 

3. 아, 놀공발전소가 그런 뜻이었군요. 놀 듯이 공부하고, 공부하듯이 논다.

 

이 책의 제목 <노력금지>, 부제인 “재미있는 게 이기는 거다!” 라는 말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노력금지라는 말은 놀공을 창립한 피터공의 좌우명이라고 해요. 피터공은 미국 뉴욕에서 대학을 마치고 19년 동안 생활하면서 ‘Dinner Dash'라는 성공한 게임을 만든 게임회사의 CEO였습니다. 피터공은 게임회사를 세우기 전에 타임지에서도 일을 했고, 제약회사에서도 있었는데 그 때 “내가 진정으로 즐거운 일이 아니라면 노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해요. 이렇게 말하면 꼭 해야 할 일 중에 꼭 즐겁기만 한 일이 아닌 것도 있다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요, 피터공의 말은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피터공과 놀공발전소는 하기 싫지만 어떻게 하면 우리가 꼭 해야 할 일들을 ’게임‘을 활용해서 즐기면서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겁니다.

공부도 바로 그런 거죠? 꼭 해야 하지만 하기 싫죠. 사실 학창시절에 공부 참 하기 싫잖아요. 그래도 엉덩이에 진물이 날 정도로 앉아서, 졸리면 허벅지를 연필로 찔러가면서 공부했던 기억이 누구나 있죠? 피터공은 공부도 게임을 이용하면 전혀 다르게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게임의 문법을 이용하면 지루한 공부도 재미있게, 그리고 더 낫게 공부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 책에서 피터공은 게임을 “플레이어가 규칙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갈등에 참여하고 그 과정에서 측정 가능한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시스템”이라고 규정하는데요, 어떤 게임이라도 해 보셨던 분은 다 아시겠지만 이 게임 속의 갈등은 분명히 현실이 아니고 가상인데도 불구하고 거기에 참여하면서 갈등에서 이기려고 노력하고, 지면 분한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이런 게임의 특성을 현실을 변화시키고, 사람들이 힘들게 느끼는 학습과도 접목시켜 보겠다는 것이 피터공의 생각이었던 거지요.

 

4. 놀공발전소의 대표인 피터공이라는 이름도 특이하네요. 성이 공씨인건가요?

 

특이하죠? 저는 처음에는 좀 어색하게 느껴졌습니다. 피터공의 본래 이름은 피터 리거든요. 근데 왜 피터공이라고 할까, 이상했습니다. 그런데 피터공 뿐만 아니라 놀공발전소의 모든 구성원들의 호칭에도 지인공, 애련공, 은현공처럼 공이 붙어 있습니다. 피터공은 미국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온 후 수평적인 대화환경을 만들기가 어려웠다고 해요. 창의적인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멤버가 수평적으로 자유롭게 토론하고 비판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했는데 서로를 부를 마땅한 호칭도 찾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씨’라고 하기에는 건방지고, 영어 이름을 만드는 것도 어색했다고 해요. 그래서 이름 끝에 ‘씨’를 대신해 ‘공’을 붙여 부르기로 했다고 합니다. 뭔가 옛날 유럽 귀족 호칭도 연상되고 나이 차이나 직위 차이도 지워지기도 하고, 구성원들 간의 멤버십도 돈독해지는 효과가 있었다고 합니다. 놀공만의 특이한 조직 문화인데요, 놀공만이 지닌 독특하고 재밌는 조직문화가 이 책에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혹시 진행자분은 다른 회사 워크샵에 가본 적 있으세요? (대답) 내 회사 워크샵도 가기 싫은데 다른 회사 워크샵을 왜 갑니까? 그런데 놀공멤버들은 새로움에 대한 갈증을 해갈하기 위해서 다양한 사람들을 워크샵에 초대해서 1박2일간 게임하고, 바비큐하고, 콘서트도 한다고 해요. 놀공에는 놀공싸롱이라는 모임도 있는데요, 한 달에 한 번 마지막 주 수요일 저녁 7시에 놀공사무실에서 다양한 분야의 창작자를 초대해 자유로운 만남을 갖는다고 해요. 이렇게 창의적인 조직 문화 속에서 창의적인 결과가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5. 놀공발전소가 만들어낸 창의적인 결과물이 어떤 것들이 있나요?

 

이 책에는 놀공이 만들어지는 과정, 멤버 소개, 놀공만의 문화 뿐 아니라 놀공이 그동안 해온 일을 하나씩 소개하고 있는데요, 저는 그 중에서도 놀공클래식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마도 문고판 책이 나오는 펭귄클래식에서 착안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요, 놀공클래식도 펭귄클래식처럼 고전을 다루는 프로젝트입니다. 그동안 놀공에서는 놀공클래식으로 조지 오웰의 <1984>, 톨스토이의 <안나 까레니나>, 세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쥴리엣>, 괴테의 <파우스트>와 같은 고전을 다뤘다고 합니다.

 

6. 아, 그러면 고전을 게임으로 만드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정말 놀랍죠? 저는 이 책에서 놀공클래식을 소개하는 부분을 읽으면서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사실 고전은 읽기 힘들고 어렵잖아요? 고전은 꼭 읽어야 되는 책이기는 한데 정작 읽은 사람은 잘 찾기 어려워요. <로미오와 쥴리엣>도 많은 분들이 영화나 동화로 보았지, 정작 이 책을 원작 그대로 독서한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겁니다. 솔직히 저만 해도 그렇구요. 놀공클래식은 고전을 놀공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게임의 문법을 활용해서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이 ‘고전’을 친숙하게 여길 수 있도록 만드는 게임 시리즈입니다.

 

한 예로 <1984>라는 소설은 전체주의 국가에서 빅브라더가 사람들을 통제하는 디스토피아적인 세계를 그리고 있는 작품인데요, 놀공은 자체 스터디를 통해서 <1984>라는 작품 안에서 구어를 대신하여 ‘신어’, 그러니까 새로운 말을 빅브라더가 개발해 사회를 통제해 나갑니다. 신어를 개발하는 목적은 글의 구조를 단순하게 만들고, 어휘의 양을 줄여서 사회의 구조를 위협하는 사상 범죄를 차단하는 것에 있는 것인데요, 왜냐하면 어휘가 단순해지면 사고의 폭이 좁아져 사상 범죄가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놀공은 <1984>에 대한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게임을 만들었습니다. 게임 규칙은 이렇습니다. 12개의 부스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각각 서로 다른 단어가 스티커로 보관되어 있습니다. 12개의 부스에는 빅브라더의 얼굴이 그려져 있고, 게임 참가자는 그 얼굴 앞으로는 지나갈 수 없습니다. 참가자는 12개의 부스를 드나들며 그 속에 있는 단어를 기억하고, 방송에서 기습적으로 어떤 단어를 찾으라고 하면 그 단어가 적힌 부스를 찾아서 자신이 가지면 됩니다. 이런 과정을 반복해서 가장 많은 단어를 수집한 사람이 승리하는 게임입니다. 물론 실제 게임에는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세부적인 장치들이 있습니다.

 

7. 일종의 단어 스티커의 위치를 기억해서 많이 가지면 이기는 게임이군요.

 

네, 단순해보이지만 이 게임에는 <1984>와 관련된 많은 장치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빅브라더의 얼굴 앞으로 지나가지 못하는 규칙은 빅브라더의 통제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찾아야 하는 단어는 빅브라더가 없애려고 하는 구어를 상징하구요, 그리고 참가자는 게임에 참여를 하면서 이 소설의 핵심 주제라 할 수 있는 전체주의적인 통제 사회의 문제점을 온 몸으로 깨닫게 되는 겁니다. 실제로 후기를 보면 사람들이 이 게임을 계기로 <1984>를 직접 읽게 되었다고 해요. 게임을 통해, 놀이를 통해 공부한다는 놀공의 목표대로 말이죠.

 

8. 게임을 통해서 직접 체험하게 되니까 그냥 고전이 중요하다고 들을 때와는 느낌이 전혀 다르겠네요.

 

저는 이 게임을 직접 해본 적이 없는데도, 책에 소개된 게임 방법을 읽고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놀공클래식에서 다룬 고전작품들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피터공은 이 책에서 학습에도 새로운 모델이 필요하다고 해요. 전통적인 관점에서 학습은 무엇에 관해서 배운다라는 목표 하에서 지식 전달이 핵심이었지만 지금은 클릭 한번만으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 이런 식의 학습은 불필요해졌다고 해요. 피터공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다. 어떤 활동을 할 때 자신이 가장 즐거운지 알 수 있는 기회를 교육을 통해 제공해야 한다. 마치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가 자신의 정체성을 마법사, 요정, 기사 등으로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새로운 과제 앞에서 능수능란하게 전화하는 법을 알려주고 싶었다. 즉 놀공이 생각하는 교육 모델은 누군가가 되는 법을 배우는 형태였다”.

 

즉, 게임을 통해서 ‘누군가가 되는 법’을 배운다는 거죠. 수학을 배워야 한다면 공식을 위한 지식습득이 아니라 직접 수학자가 된 것처럼 사고하고 문제를 해결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게임을 통해 가능할 수 있다는 거죠. <1984>라는 게임에 참여한 사람은 직접 전체주의적 통제 하에 놓여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되고, 그것이 고전으로 더 가까이 가도록 해주는 징검다리가 되는 겁니다.

 

8. 끝으로 청취자들에게 책을 추천하시는 이유를 말씀해주세요.

 

놀공은 놀공클래식에서 <안나 카레니나>를 런칭하기 위해서 박웅현씨와 함께 강독회를 합니다. 박웅현씨는 <책은 도끼다> <여덟단어>와 같은 좋은 인문서를 쓴 유명한 광고디렉터시죠? 그리고 <파우스트>는 독일문화원의 요청으로 만들어져 이미 글로벌한 프로젝트가 되어 성공을 거뒀습니다. 놀공발전소라는 작은 회사가 해내는 일이 놀랍지요? 저 역시 책을 읽는 내내 놀라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저는 지금의 일상과 일에 권태를 느끼는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아주 일부만 소개해드렸지만 놀공발전소가 해온 일은 결국 우리가 세계를 조금 다른 방식과 태도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한 것이라 정리할 수 있습니다. 게임이라는 틀로 공부, 사회, 세계를 바라보니까 이전에 가치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하는 거지요. 놀공은 놀공 클래식의 하나로 <로미오와 쥴리엣>을 게임으로 만들었는데요, 이 게임은 영업이 끝난 강남 교보문고에서 진행했다고 합니다. 어렵고 딱딱한 고전만 새롭게 보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서점이라는 일상적 공간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도록 만들어 준거죠. 지루한 일상에서 너무 많은 노력으로 고단해 하시는 분들에게 <노력금지>, 이 책을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일상을 새롭게 보는 마법의 방법을 익히게 되실 겁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피터공과 놀공발전소가 자신들이 가장 잘하는 일로, 자신들이 가장 즐거워 하는 일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공부는 힘들고 지루하고 어렵다는 우리 모두가 한번은 겪는 고민을 ‘노력금지’를 외치면서 더 즐겁게 해나갈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고 있으니까요. 저는 놀공발전소가 게임으로 일과 놀이와 예술을 재정의하고 있다고 감히 단언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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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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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비행운, 민폐의 존재론

 

 교통방송에서 이번 주에 소개한 책은 김애란 작가의 <비행운>이다. 이 책은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2013년에 소개된 적이 있는데, 나도 이 소설집을 좋아해서 이번에 소개하게 되었다. 빨간책방 팟캐스트에서는 김애란 작가가 직접 나와서 이 소설집에 대해 이야기를 했었는데, 나는 그 방송을 KBS 1 라디오 '공부가 좋다'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위해 서울로 가는 길에 들었다. 이렇게 정확히게 기억하는 이유는 이 방송 이후로 빨간책방을 더 이상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동진을 평론가로서 신뢰하는 편이지만 이동진이 작가 앞에서 너무 많은 말을 하는 것이 불편했다. 마치 자신의 독해를 작가로 끝없이 추인 받으려는 것처럼, 작가가 작품에 대해서 너무 많은 말을 하도록 만드는 것 같았다. 배울 것이 많았던 방송이었지만 지금 기억나는 거라곤 그 때의 불편함, 김애란 작가의 조곤조곤 낮은 목소리와 시적인 화법과 같은 분위기 뿐이다.

  내가 이 소설집을 좋아하는 이유는 김애란의 조곤조곤한 목소리와 잘 어울리는 '간신히' 라는 말 때문이다.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주인공들은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야기를 따라 읽어가다보면 모욕감을 받는 것도 '간신히' 살아남은 나고, '간신히' 살아남은 누군가에게 모욕감을 주는 것도 나라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니까 사는 것은 끝없이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이다. <너의 여름은 어떠니>에서의 선배의 삶도, <서른>에서 수인의 삶, 수인의 남자 친구의 삶도, <벌레들>에서 임신한 아내의 삶도 끊임 없이 누군가에게 폐를 끼친다. 소설 속의 어느 누구도 악인은 없다. 갑도 없다. 간신히 살아남은 을이 간신히 살아남은 을에게, 보통 사람이 보통 사람에게 모욕감을 주고, 민폐를 끼치고, 모욕을 당하고, 민폐를 떠안으며 살아간다. 마치 내 삶처럼 말이다. 나는 항상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치고 있다는 자책에 시달린다. 내가 여기 살고, 일을 하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게 민폐가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 때면 우울한 기분마저 든다. 카드를 돌려 막듯이 누군가에게 짐을 떠 넘기며, 억지로 지게 하고, 그리고 모른 척 한다.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민폐고, 민폐는 죄다. 이런 생각이 나를 너무 강하게 사로 잡을 때면 예수를 생각한다. 원죄라는 것은 민폐를 끼치는 인간의 숙명을 두고 하는 말이었구나, 우리는 신에게까지 민폐를 끼치고 신을 죽게 만들었구나, 그리고 내가 끼치는 민폐를 기꺼이 예수만큼은 져주려고 했던 것이구나 하고 신을 부르게 된다. 물론 <비행운>은 이런 신앙의 세계가 아니다. 민폐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행운은 민폐를 떠 넘겨 받은 사람의 비-행운으로만 이뤄진다는 비극의 세계, 그렇지만 작가의 시선은 처절하지도 않고, 무겁지도 않다. 


 어쩌면 이 소설집의 윤리는 이런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세계의 저 아래에는 세계의 저 위에서부터 떠넘긴 온갖 민폐를 다 떠 맡은 누군가가 허덕이고 있겠지?", "그들은 지금 '간신히' 살아남기라도 한 것일까?". 이런 질문 앞에 우리를 서게  한다는 점 말이다.

 

비행운

- 김애란 소설집

 

1. 안녕하세요? 이번 주는 어떤 책을 소개해주실 건가요?

 

네, 이번 주에 제가 소개해드릴 책은 출판사 문학과 지성사에서 만들고 김애란 소설가가 쓴 <비행운>이라는 소설집입니다. 김애란 작가는 강동원씨와 송혜교씨가 나온 영화였던 <두근두근 내 인생>의 원작자로 잘 알려져 있는데요, 오늘 소개해드릴 책은 김애란 작가의 단편소설집입니다. 모두 여덟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요, 진행자님께서는 ‘비행운’이라고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시나요?

 

2. 비행운이라니까 비행기가 날아갈 때 생겨나는 구름이 먼저 떠오르는데요.

 

네, 이 책의 제목인 ‘비행운’은 사실 이중적인 의미가 있는데요, 말씀하신대로 비행기가 만들어내는 구름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비-행운, 그러니까 행운이 아니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실제로 이 소설집에 나오는 주인공들 대부분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제목이 많이 암시하고 있습니다. 행운인 줄로만 알았던 것이 결국에는 비-행운, 행운이 아니었던 것들이 밝혀지는 과정이 8편의 소설이 공유하고 있는 이야기의 구조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라는 단편 소설 많이들 아시지요? 인력거꾼이 오늘따라 손님이 많아 운수 좋은 날인 줄로만 알았는데 집에 돌아가보니 아내가 죽어있었던 것이죠.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는 그런 비행기를 타는 것과 같은 기분 좋은 행운과 모든 것이 꼬이고 엉망이 되어 버리는 비-행운의 엮이면서 진행됩니다.

행운에서 불운으로 전개되는 악화 일로의 이야기이지만 분위기가 무겁거나 어렵지 않습니다. 재밌어서 조금씩 아껴 읽게 되는 책입니다.

 

3. 좋은 일이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뒤돌아 보면 꼭 그렇지 않은 일도 있어요. 비행운이 비행기가 날아간 뒤에 생기는 것처럼, 어떤 일이 행운이었는지 불운이었는지도 지나봐야 알게 되더라구요.

 

비행운이라는 제목으로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도 바로 그 점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 책의 모든 이야기는 우리가 지나간 자리에서 생긴 비행운이 행운이 아니라 ‘불운’이었다는 비극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한 작품을 소개해드리고 싶은데요, <너의 여름은 어떠니>라는 가장 앞에 실린 작품입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서미영이라는 여자인데요,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잠깐 쉬면서 살이 찐 것으로 나옵니다. 서미영은 친구의 장례식 날, 2년 만에 대학 선배로부터 전화를 받게 됩니다. 만나자는거죠. 미영은 살이 찐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고민하다가 ‘도와달라’는 선배의 부탁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나가기로 마음 먹게 됩니다. 왜냐하면 미영이 대학 다닐 때 이 선배를 좋아했거든요. 대학 다닐 때 선배는 시 모임에서 미영이 쓴 시를 좋다고 격려해주고, 야구장에도 처음 데려가줬다고 해요. 자기가 한 때 좋아했던 선배를, 지금도 생각하면 설레는 선배를 도와줄 수 있다는 생각에 기대를 품고 선배가 일하는 방송국으로 갑니다. 더운 여름에 땀이 채이고, 저녁에는 친구 장례식도 가야하지만, 선배를 2년만에 다시 만난다는 설레는 마음을 가지구요.

 

4. 아, 한 때 좋아했던 선배를 만난다는 것은 그런거죠. 뭔가 두근두근대고, 심장이 떨리고..

 

네, 미영도 그런 마음으로 선배를 만나러 나갔는데, “선배는 자신이 맡은 프로그램에 누군가 펑크를 냈는데 그것을 자기 메꿔야 하는 상황이라고, 일반인 중에 구해야 하는데 아는 사람도 없고, 입사한지 얼마 안 돼 애를 먹고 있다며” 미영에게 잠깐 출연해줄 수 없냐고 부탁을 합니다. 미영이는 창피해서 하기 싫었지만 선배가 담당 피디에게 혼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흔들려 내키지 않지만 그만 수락하고 맙니다. 미영이 나가기로 한 방송에는 핫도그 먹기 챔피언인 탱크탑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늘씬한 여성과 뚱뚱한 역도선수, 유도선수, 그리고 일반인 여성 중 누가 가장 핫도그를 많이 먹는지를 보여주기로 되어 있었던 겁니다. 미영은 일반인 뚱보 여성 역할을 맡았고, 뚱뚱한 푸드 파이터가 되어서 날씬하지만 핫도그를 더 많이 먹는 챔피언을 부각시켜야 했습니다. 게다가 뚱뚱한 몸매를 도드라지게 하려고 ‘레슬링복’을 입고 말이죠.

 

5. 갈수록 가관이네요. 오랜만에 만난 선배가 방송에 대타가 되어 달라고 하고, 그것도 모자라 푸드파이터가 되어 달라고 하고, 심지어 레슬링 복장까지 입혀서 핫도그를 마구 먹게 하고..

 

야구장에 가서 소릴 지르고 싶다고 하면 “너는 야구장이 소리 지르는 덴 줄 아니”, “야구장은 신전이야”라고 했던 선배는 “그냥 평소 너 먹는대로만 해”라고 합니다. 그리고 부끄러워서 방송국을 황급히 빠져나간 미영을 쫓아와서 선배는 “오늘 고생했어. 고마워. 너 편할 때..”. 그러고 나서 뭐라고 그러는지 아세요? “문자로 계좌번호 좀 넣어주라. 주민번호랑...”

6. 아, 가슴 아픈 이야기인데요, 미영이가 느낀 모욕감이 엄청 컸겠네요.

 

네, 미영이 받은 선배의 전화는 미영의 마음을 잠깐 설레게 하고 돌이킬 수 없을 만큼의 모욕감을 느끼도록 만들었는데요,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작가가 독자들에게 ‘모욕감’이 무엇인지를 상상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 작품만이 아니라 이 책에서는 공항의 화장실 청소부, 다단계 판매원, 철거 아파트 주민 등 ‘모욕감’을 경험하는 캐릭터들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는데요, 작품들을 따라 읽어가다보면 우리가 한 개인이 느낄 수 있는 모욕적인 기분에 대한 상상력이 없이 살아왔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한 때 사랑했던 남자 앞에서 레슬링복을 입고 푸드파이터가 되어 핫도그를 허겁지겁 먹으며 출연료를 달라고 계좌번호를 보내야 할 때 느끼는 그 기분, 그 기분을 이해하는데 이 소설집의 가치가 있습니다.

 

미영의 예는 지나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요, 사실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누군가의 신체나 외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나, 취업이나 결혼에 대해서 종용하거나, 장애를 가진 분들에 대한 차별적인 표현들도 누군가에게는 모욕이 됩니다. 미영처럼 사람은 누구나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고, 지키고 싶은 자존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그 프로에서 뚱뚱하거나 외모가 예쁘지 않은 개그우먼들을 희화화하는 것에 대해서도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웃고 있지만 사실 그런 역할을 맡은 개그우먼들은 모욕감을 느끼지 않을까요?

 

7. 소설 속의 주인공은 화도 나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냥 무기력하고, 허탈하고, 답답했을 것만 같은데요, 작품을 듣고 말씀을 들어보니, <비행운>이라는 책 제목이 정말 와닿네요. 작가는 왜 이토록 불운이 겹치는 이야기를 쓴 것일까요?

 

네, 이 소설집은 정말로 ‘간신히’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벌레들>이라는 작품에서 주인공은 전세값 너무 올라 내몰리게 되었는데, 간신히 재건축을 앞둔 허름한 빌라에 안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끝도 없이 나오는 벌레를 잡으려다 애쓰는 과정에서 임신한 주인공이 전화도 없고, 누구의 도움도 요청할 수 없는 곳에서 출산을 하게 됩니다. <물 속 골리앗>이라는 작품에서 주인공은 아버지는 크레인에서 실족사로 죽고, 어머니는 당뇨 쇼크로 죽고 자신만 큰 홍수 속에서 화장실 문을 떼어내 뗏목 삼아 간신히 살아남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이런 이야기는 소설 속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야,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지만 사실 현실은 이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습니다. ‘간신히’, 겨우 살아남은 자들이 그리는 것은 바로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제 뉴스를 보니 청년 실업이 12.5%가 넘어 역대 최대라고 하지요? 청년들은 지금 정말 ‘간신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취업을 한 청년들의 경우에도 일자리의 질이 그렇게 높지만은 않아요. 비정규직이거나 정규직 파트타이머도 상당히 많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물 속 골리앗’의 주인공처럼 역시 ‘간신히’ 살아가고 있을 겁니다. 노인 빈곤율이 우리나라가 OECD 최고라고 하지요? 우리 어르신들도 자식들 키운다고 고생하시고 ‘간신히’ 살아가고 계십니다. 얼마 전 뉴스에 종교 시설에서 주는 500원을 받기 위해 하루 종일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는 500원 순례길에 대한 보도가 나온 적이 있죠. 하루에 6000원을 벌어 한달을 그렇게 해서 방값을 ‘간신히’ 낼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김애란 작가는 불운이 끝도 없이 겹치는 상황을 우리 시대의 실존적 상황이라고 본 것 같아요.

 

8. 사실 직장인들도 ‘간신히’ 살아가고 있죠? 언제 해고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으니까요. 소개해주신 이야기를 들으면서 작품 속에 판타지적인 요소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어쩌면 판타지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소설집의 가장 끝에 실린 <서른>도 ‘간신히’ 살아가고 있는 수인이라는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재수 끝에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했지만 마땅히 취업할 곳이 없었던 수인은 보습학원에서 60만원을 받는 강사가 됩니다. 꽤나 아이들에게 인기있는 강사가 되었는데, 그러다 아버지에게 일어난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해요. 빚이 많아지면서 돈이 급하던 차에 예전 남자 친구의 추천으로 다단계 판매를 시작하게 됩니다. 3만원 짜리 시계를 58만원에 넘기고, 15만원짜리 핸드백은 120만원에 건네고, 아는 사람 모두에게 전화를 걸어 인맥을 팔다가 수인은 결국 자기가 빠져 나오기 위해서 학원에서 자기를 좋아해주던 학생을 끌어들이기까지 합니다. 결국 그 학생은 자살을 시도한 후 식물인간이 되고, 수인은 큰 충격과 자괴감에 빠지게 됩니다.

 

이 작품을 보면, ‘간신히 살아남은 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이용하고, 또 어쩔 수 없이 빠져들게 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악의가 없다하더라도 자기가 살아가기 위해서 누군가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지요. ‘간신히’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는 서로를 이용하게 됩니다. 만약 여유 있게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서로 협력을 할 겁니다. 그래서 이 소설집은 우리 시대의 처절한 생존기이자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9. 끝으로 이 책을 우리 청취자분들게 추천해주시는 이유를 말씀해주세요.

이 책은 비극적인 이야기지만 차갑지 않고, 따뜻합니다. 그래서 비극적인 이야기를 읽어가다 보면 슬픔에 빠지기 보다 마음이 치유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 책을 읽어보면, 작가가 간신히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겪고 있는 모욕감을 알아주고 있고, 살아가기 위해 다른 사람을 짓밟으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도 되돌아 볼 수 있도록 격려해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삶에 지쳐 있는 분들에게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우리 주변의 ‘간신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에 대한 깊은 상상력과 성찰을 줍니다. 우리가 저마다 다 ‘간신히’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서로 밟기보다는 오히려 서로를 격려해줄 수 있습니다. <서른>에서 수인은 재수할 때 고시원에서 만난 임용고사를 8번이나 낙방한 언니를 격려합니다. 이번 봄에는 주변에서 힘겨운 싸움을 하고 계시는 분들을 격려해보시면 어떨까 하여 이 책을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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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 팻, 비만과 집착의 문화인류학
돈 쿨릭.앤 메넬리 엮음, 김명희 옮김 / 소동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방송에서는 하지 못한 이야기.
교통방송에서 17번째로 소개한 책이다. <팻>. 지금 서경식 선생님은 아주 날씬해지셨지만 10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덩치가 크고 머리도 아주 짧게 자르시고, 중절모에 검은 코트를 입고 다니셨는데, 서경식 선생님을 내게 소개시켜 주셨던 사학과 I 교수는 내게 "따뜻하고 다정한 분이시지만 실제 만나뵈면 야쿠자처럼 보일 수도 있다"고 하셨다. 서울에 선생님께서 계실 때 선생님께 비만인권리투쟁협회, 비투협을 만들어야 한다고 농담을 했었는데 선생님께서는 그저 웃기만 하셨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가끔 비투협에 대해 언급하셨다. 나는 정말 그런 협회가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비만인권리협회가 미국에서 소수이지만 현재 활동을 하고 있고, 이 책에 소개된 내용을 보면 활동이나 철학이 아주 섬세하다. 예를 들어 협회 소속원들이 다이어트를 하는 것은 모순적일까, 우리의 주장이 청소년들에게 전달되는 것은 과연 바람직할까 등등의 진지한 고민, 그리고 길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뚱뚱하다고 생각하세요?"라고 묻는 등의 캠페인은 섬세하게 계산하지 않았다면 이뤄지기 어려웠을 활동이다. 특히 기억에 남는 내용은 뚱보 인권운동가에게 "사이즈가 얼마냐?"고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이다. 사이즈는 달라진다고 한다. 브랜드마다 다른 사이즈를 입고, 셔츠와 코트와 바지를 살 때도 같은 사이즈가 아니고, 시기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그리고 그들은 비만인들에게 맞는 옷 사이즈가 제공되지 않는 브랜드 매장 앞에서 공격적 시위를 하기도 한다. 나만 해도 이 정도 몸집이 되면 어지간한 브랜드에는 사이즈가 없을 때가 많다. 나는 폴 스미스에서 만든 옷을 예쁘다고 생각해 왔는데 여태 단 한번도 사입어 본 적이 없다. 사이즈가 없어서 둘러보다 그냥 나오기 민망해 머플러를 하나 산 것이 전부다. 랄프로렌은 예민한 디자인 감각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선호할 만한 브랜드가 아닐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폴로가 없다면 기성복 라인에서 내 몸에 맞는 남방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20대 초반에는 제일모직에서 나온 푸부라는 브랜드가 있었는데, 지금은 잘 찾아보기 힘들고 내 나이대에 걸맞는 디자인도 아니다. 백화점 점원들은 내가 너무 커서 맞는 옷을 팔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 하지만 시장 상인들은 나와 눈을 마주치면 "사이즈 없어요"라고 물을 기회도 주지 않는다. 심지어 제주에 어떤 시장에서는 사이즈를 볼 수 있냐고 물으니 상인이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아무 말 없이 다시 보던 TV를 보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살을 가장 빼고 싶은 이유를 들자면 폴로 말고 다른 옷을 입어 봤으면 하는 것이다!
방송에서는 하지 못한 이야기가 많은데, 특히 뚱보 포르노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할 수 없어서 아쉽다. 뚱보 포르노에는 뚱보 여성이 성관계하는 모습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저 가슴과 배를 드러내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생크림을 숟가락으로 떠먹는 모습을 비춰 준다는 것인데, 저자는 말년에 푸코가 가학/피학 성애에 대해 말을 많이 했다는 것을 가져와서 아마 푸코도 뚱보 포르노에 열광했을 것이라 예상한다. 푸코의 관점에서 이런 '변태 성향'은 남근 중심의 성적 욕망이 재배치된 결과이다. 보통 포르노 영상은 금지되고, 소수적인 취향을 미세하게 반영한다. 엄청나게 뚱뚱한 여자가 마음껏 음식을 먹는 것을 보는 것은 '금지'에 대한 도전이라는 점에서 별 차이가 없다. 뚱보 포르노에서 '비대한 살'은 역겹거나 혐오스러운 것이 아니라 사랑스럽고 욕망의 대상이 된다. 성기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과 비슷하게 말이다. 아무튼 이 책은 '뚱뚱하다는 것'을 철학적으로, 문화사회학적으로, 인류학적으로 해명하는 여태 보지 못했던 책이다. 솔직히 말해 잘 읽히지는 않는다. 그래도 팻에 대해서만큼은 팻하게 담고 있는 아주 내실 있는 책이다.

<팻>
비만과 집착의 문화인류학

1.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떤 책을 소개해주시겠어요?

벌써 2016년도 두 달이 지나 벌써 3월이 되었는데요, 새해에 세우셨던 계획과 다짐이 지금까지 잘 지켜지고 있으세요? 저는 새해 다짐은 세울 때마다 지키는 것을 실패하는 편이라 잘 세우지 않는 편인데요, 그래도 해마다 다짐하는 것이 있다면 “올해는 정말 살 한번 빼보고 싶다”는 겁니다. 청취자들은 저를 보신 적이 없으실테니까 모르시겠지만 사실 저는 상당히 뚱뚱하거든요. 그래서 연초에 피트니스 센터를 등록하긴 하는데요, 사실은 몇 번 가지 않고 그만둔 적이 많습니다.

2. 그런 분들이 많으시죠. 피트니스 센터를 등록하고 나서 운동은 하지 않으시고 거기서 목욕만 하고 오시는 분들도 많으시더라구요.

저도 그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헬스, 건강, 외국어 공부하기와 관련된 상품이 연초에 많이 팔리는데요 이런 것을 ‘결심산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결심과 다짐을 이용해서 장사를 하는 것인데요, 저도 매번 결심만 하고 있고, 벌써 살을 좀 빼보겠다는 연초 다짐은 물건너간지 오래인데요, 오늘 소개해드릴 책은 제가 그런 고민 끝에 찾아 읽게 된 <팻>이라는 책입니다. 출판사 소동에서 만들고 돈 쿨릭과 앤 메넬리가 쓴 책입니다. 그리고 책 속에서 어느 정도 답을 찾았는데요, 결국 다이어트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이 책에 따르면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의 76%는 다이어트를 시작한지 3년 뒤에 다이어트 이전보다 살이 더 찌며, 5년 뒤에는 95%나 살이 더 찐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차피 살을 뺐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다시 돌아가게 된다는 거죠. 제 경험에 비춰봐도 정말 맞는 이야기였구요, 유명한 아나운서인 이금희씨와 같은 분이나 오프라 윈프리 경우에도 정확하게 이 통계와 일치하는 사례입니다. 결심산업 같은 것이 되는 이유가 사실은 다이어트를 사람들이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이어트의 효과가 별로 없기 때문인거죠.

3. <팻>이라고 하면, ‘뚱뚱함’이라는 말인거죠? 그러면 제목이 우리 말로 ‘뚱뚱함’ 인거네요.

맞습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뚱뚱한 것, 그러니까 비만에 대해서 쓴 책인데요, 영어인 팻은 사실 ‘뚱뚱하다’는 뜻 외에도 여러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에요. ‘기름’을 의미하기도 하구요, 어떤 경우에는 부유하고 풍요롭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리고 ‘살찐’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냥 ‘살’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책의 번역자가 ‘팻’이라는 제목을 그대로 사용한 건데요, 이 책은 이렇게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팻’의 다양한 측면을 재밌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책 속에 흥미로운 내용이 정말 많은데요, 니제르 사람들이 뚱뚱한 여성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이유, 뚱보 포르노 영화가 만들어지는 이유, 하와이 사람들이 스팸 통조림을 좋아하는 이유가 소개되기도 하구요, 토스카나 지역에서 올리브유가 갖는 의미 등 한 마디로 ‘뚱뚱함’에 대한 정말 다양한 정보와 다각도의 시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통 비만과 관련된 책이 다루는 살을 빼는 방법이나 살을 빼야 하는 건강상의 이유 같은 것은 전혀 다루지 않습니다. 이 책은 다이어트에 관심을 갖는 독자들이 ‘지방’에 대해서, ‘뚱뚱함’이나 우리 몸의 체형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를 주려고 합니다. 책의 부제가 ‘비만과 집착의 문화인류학’인데요, 문화인류학적 방법으로 ‘뚱뚱하다는 것’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을 주는 책이죠. 딱 저 같은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진 책인거죠.

4. 그렇네요. 우리는 흔히들 비만은 무조건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이 책은 다른 관점을 보여주는 책인거네요.

네, 이 책도 비만이 건강에 해가 된다는 명백한 과학적인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비만은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을 책의 초반부터 이야기해두고 시작합니다. 책의 한 부분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뚱뚱함을 걱정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최근 <이코노미스트>는 비만 특집호에서 비만의 몇 가지 문제점을 이렇게 요약했다. “뚱뚱하다고 해서 죽는 것은 아니지만, 비만한 사람은 여러 질병에 걸려 일찍 죽게 될 위험성이 높다. 과체중인 여성은 표준 체주의 여성보다 제2형 당뇨병에 걸릴 확률이 다섯 배 높고, 고도 비만인 여성은 50배나 더 높다. 비만은 암과도 관련이 있다. 최근 미국의 한 연구에 따르면, 암으로 사망하는 남자의 14%와 여자의 20%는 비만에 원인이 있다. 또한 과체중은 전쟁, 말라리아, 에이즈를 제외하고 전세계 인류의 최고 사망원인인 심장병의 주요 발병 요인이기도 하다”. (중략) 이런 식으로 논박의 여지가 없는 증거를 앞에 두고도, 사람들은 어떻게 자신을 살이 찌도록 놔두는 걸까? 아마도 현실의 삶은 훨씬 더 복잡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 맞는 이야기죠? 사실 저도 비만이 이런 건강에는 정말 좋지 않다는 것을 몰라서 살을 빼지 못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리고 아시다시피 비만이 건강에만 좋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우리나라와 같은 문화에서는 ‘뚱뚱하다’는 것은 자신의 신체를 가꿀만한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해서 빈곤을 표시하기도 하고, 또 ‘게으르고 둔하다’는 이미지도 있으니까 이런 온갖 것을 생각해보면 이렇게 부정적인 것이 많은데 사람들이 살을 빼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이상한 일이죠. 이 책에서는 인간과 현실이 아주 복잡하기 때문이라고 하는 거죠.

5.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요. 비만에서 벗어나야 할 이렇게나 많은 이유가 있는데 왜 살을 빼지 못하는 걸까요?

이 책에 ‘스팸’을 다룬 챕터가 있는데요, 스팸이라는 통조림 제품 잘 아시죠? 짭짜름한 맛을 내는 고기 통조림인데요, 이걸 하와이 사람들이 아주 좋아한다고 해요. 미국에서 스팸 소비가 가장 많은 지역이고, 스팸과 관련된 축제도 열리는데, 여기에서 스팸 만리장성 쌓기, 기네스북에 올리기 위한 세게에서 가장 긴 약 99미터의 스팸 무스비 만들기 만들기 대회 같은 것을 열 정도로요. 그런데 하와이 사람들도 스팸이 건강에는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스팸을 즐겨 먹는데 그 이유는 아주 복잡한데요, 스팸이 휴대가 편하고 오래 보관할 수 있으니까 2차 대전 당시에 미군들에게 식량으로 보급되었다고 해요. 그런데, 진주만 공습이 있고 하와이에 미군이 증강되면서 군인 뿐만 아니라 스팸도 밀려 들어온 거죠. 그러니까 2차 세계 대전 때 하와이 주민의 식단에서 중요한 위치가 된 건데, 그렇게 된 것은 진주만 피습 후에 미국 정부가 근해 어업을 금지하면서 하와이 사람들의 주식인 생선이 귀해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스팸은 구하기 쉽고 저렴했기 때문인거죠. 맛은 있지만 몸에는 별로라고 생각하는 음식이 하와이에서는 전쟁의 힘든 시기를 성공적으로 이겨낸 것을 연상시키는 ‘그리운’ 음식이 되었고, 해를 거듭하면서 전통으로 자리잡게 된 겁니다.




6. 아, 그러니까 사회 문화적인 배경이 있는 거네요. 살을 빼고 찌우는 것이 단지 개인의 의지나 건강상의 요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의 측면도 있다는 거군요.

네, 사실 이 밖에도 흥미로운 다른 요인이 많은데요, 책의 저자들은 노동자들이 달고 기름진 음식을 좋아하게 된 것은 문화와 경제, 정치적인 힘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합니다. 영국의 경우에는 19세기에 설탕이 엄청난 인기를 얻었는데요, 그게 노동자들의 에너지를 보충해주고 배고픔의 고통을 덜어주는 효과가 있어서 공장주들에게 이득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책을 보면 살을 빼지 못하는 이유가 개인의 심리적인 상처 혹은 트라우마와도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라틴랩의 거장인 ‘빅 펀’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그래미상 후보가 될 정도로 90년대 후반에 날렸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빅펀이라는 가수의 몸무게가 698파운드, 그러니까 316킬로그램이나 나갔습니다. 어렸을 때는 뚱뚱하지 않았지만 섭식장애가 있었다고 해요. 어머니는 마약 중독자였고, 양아버지는 아주 폭력적이었는데 거기에 대한 분노와 좌절감으로 빅펀은 벽에 구멍을 내서 벽돌 부스러기를 먹곤 했다고 합니다. 영양분이 없는 물질을 계속 먹는 것을 이식증이라고도 하는데요, 주로 영양 결핍이 있거나 부모의 방치나 학대가 있으면 생긴다고 합니다. 빅펀은 어릴 때 당했던 사고에 관한 소송으로 50만 달러를 받게 되는데요, 돈이 생기자 식욕을 채우기 시작했고 체중이 급격하게 불어났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28살의 나이에 심장병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빅펀의 경우는 하와이 사람들과는 다르게 어릴 적 경험이 비만의 요인이 되기도 했고, 힙합 세계라는 문화적 요인도 한 몫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럽의 귀족은 몸무게가 무거운 것을 힘이나 권력과 연결시켜서 생각을 했고, 힙합 가수들이 덩치가 크고 헐렁한 옷을 입는 것도 백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감을 과시하는 방법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뚱뚱하다는 것은 명예고, 금전적 성공을 의미하는 거죠. 힙합 문화가 주류 문화에 대한 저항을 노래하잖아요? 힙합 랩퍼들은 뚱뚱하면 역겹고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미국인의 주류적인 시각에 저항을 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7. 같은 미국인이라고 해도 백인계 미국인과 흑인계 미국인이 뚱뚱함을 바라보는 시각에 차이가 난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네, 미국에 가보면 백인보다는 흑인 중에 뚱뚱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요, 거기에는 흑인들이 단지 가난하기 때문에 패스트푸드를 많이 먹어서가 아니라 흑인들이 백인들보다 뚱뚱하게 된다는 것에 거부감이 별로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대체로 흑인들은 백인과는 다른 아름다움에 대한 이상을 갖는 경우가 많고, 음식을 조절하는 것을 ‘쿨하게 생각하지 않는 문화’가 있는 거죠.
실제로 이 책에 나오는 니제르의 경우는 여성들이 마른 여성을 엄격하고 남자 같아 보여서 싫어한다고 해요. 심지어 이 사람들은 살이 쪄서 생기게 되는 ‘튼살 자국’을 좋아한다고 해요. 노래 중에도 “튼살 자국이 있는 허리”가 있는데 이게 사랑 노래구요, 젊은 여자들은 하나 같이 팔이나 다리에 튼살 자국이 생기기를 소망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체중을 잴 때마다 조금이라도 덜 나가게 하려고 신발도 벗고, 외투도 벗고 재잖아요? 니제르 여자들은 편안하게 모든 것을 갖추고 올라가는 거죠. 그 이유는 니제르의 아랍 상류층 여자들에게 움직일 수 없을만큼 찐 살은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될 능력을 나타내는 거라고 합니다. 또 이 사람들에게 건강한 몸은 차가움과 뜨거움이 조화를 이룬 상태인데 살이 쪄야 몸에 있는 구멍들이 막혀 따뜻해 지게 된다고 생각한다고 해요. 우리와 몸에 대한 관념 자체가 완전히 다른 거죠.

8. 아, 재밌는 이야기들이 정말 많네요. 이제 정리를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청취자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시는 이유를 한번 정리해주세요.

이 책에는 비만인권운동가가 나옵니다. 이 사람들은 섹시한 옷을 입을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체형인정협회와 연대합니다. 저만 해도 제 사이즈에 맞는 옷을 사면 기분이 나빠질 때가 많습니다. 사이즈가 없어서요. 비만인권운동가들은 여성들에게 날씬할 것을 강요하는 사회와 싸우고, 뚱뚱하다는 것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생각들에도 저항합니다. 뚱뚱하고도 행복할 수 있고, 뚱뚱하고 자랑스러울 수 있다는 거죠. 앞서 제가 말씀 드렸던 내용처럼 뚱뚱하다는 것이 문화적 정체성을 나타내기도 하고, 힘과 권력을 상징하기도 하는데 우리는 너무 일방적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체형을 부정하도록 만드는 문화에서 살고 있습니다. 여성분들 100퍼센트가 다이어트를 한다는 농담도 있는데, 사실 다이어트의 효과가 별로 없다는 것은 입증된 것이라 다이어트가 오히려 대사를 망치고 사람을 더 살찌게 할 수도 있습니다.

비만은 건강에 나쁜 것은 분명하지만, 이 책은 우리가 비만이라는 현상에 대해 정말 다양한 관점을 갖게 도와줍니다. 비만하고 뚱뚱한 것을 바라보는 여러 관점을 읽어가다보면, 인간이 정말 단순하지 않고 깊이를 지닌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올해 다이어트 계획을 세웠다고 실패하신 분들에게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자책하시기 전에 이 책을 한번 읽어보시면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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