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자 대구신문에 나가는 글. 예전에 페북에다 써 놓은 글을 가다듬어 신문사에 보냈는데, 오늘 다시 읽어 보니 신문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글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가능성은 적겠지만 부디 신문에 가득 찬 '배신'이라는 말과의 대비 속에서 '고흐의 사랑'을 읽어 주길 빌 뿐이다. 그리고 지난 주는 고난주간이었다는 것도, 이제 오순절 기간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도 누군가는 생각해주며 읽어주길 빌 뿐이다. 극렬한 사랑은 부작용을 낳는다. 그리고 그것이 삶인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것, 소동을 일으키고, 창피를 당하고, 망신을 당하고, 사람을 긴장하게 했다가 의기 소침하게 만드는 것이니까. 사랑은 아름다운 말이지만, 사랑은 항상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지 않는다. 그러나 삶의 의미는 사랑으로 어떤 결과를 얻었느냐가 아니라 진정으로 사랑했는가에 있지 않을까. 따뜻한 관심과 열정적 사랑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생의 이유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아닌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이유는 쉽게 사랑을 포기해버리는 것 때문일 수도 있겠다. 고흐가 가난했지만 가난하지만은 않았던 것과는 다르게 말이다. 모든 순간, 그것이 무엇이든지 늘 강렬하게 사랑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규칙 위반이다."




반 고흐의 세계

김연수는 ‘하루키 월드’에서 깊이 사랑하는 것은 규칙위반이라고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는 거의 항상 주인공이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면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떠나게 되고, 결국 홀로 남은 사람의 마음에도 깊은 상처가 남는다. 얼마 전 반 고흐의 편지글을 읽으면서 발견한 것은 하루키와 달리 ‘반 고흐 월드’에서는 사랑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죄가 된다는 것이었다. 고흐도 하루키의 생각처럼, 깊은 사랑은 결국 깊은 상처를 남기는 어리석고 바보 같은 짓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여동생 윌에게 남긴 편지에서 동생에게 ‘사랑할 것’을 권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래, 차라리 바보짓을 몇 번이든 하렴.” 이뿐 만 아니다. 고흐는 사람들이 공부에 집중하거나 종교나 이념에 빠지게 된 것은 ‘연애사건’, 즉 ‘사랑에 빠지지 못해서’라고 한다. 따라서 ‘반 고흐 월드’에서는 제대로 된 사랑을 하는 것이야말로 많은 공부를 하거나 사회주의에 심취하는 것보다 올바른 일이다. 

“대개는 그런 사건으로 창피와 망신만 당할 뿐이지만, 그래도 그렇게 한 것이 전적으로 옳았다고 생각한다”.

고흐가 극렬주의자였다면 바로 이런 면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사랑에 있어서 절제가 필요하다거나 지나치게 열정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하루키의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남자들처럼 ‘세련된’ 사랑은 없다. 고흐는 주변 사람들을 지치고 힘들 정도로 사랑했다. 그건 사촌인 케이에 대한 사랑에서나 매춘부였던 시엔에 대한 사랑에서도 마찬가지고, 동생인 테오에 대한 사랑에서도 그렇다.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고흐가 목숨을 스스로 끊게 된 이유는 테오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흐가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동생 테오에게 더 이상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은 편지 곳곳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정신 착란으로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어 동생에게 진 빚을 갚을 길이 없게 된 고흐가 동생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죽음 외에는 없었다.

어쩌면 정신 착란 증세도 깊은 사랑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고흐는 동생에게 신세를 갚겠다는 마음으로 ‘예술’로 끝까지 자기를 내몰았다. 테오가 정신 착란 증세가 심각해져 생레미 요양원에 입원해 있는 고흐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글귀가 나온다. 

“그 그림들은 형이 자연과 살아 있는 생명체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거야. 형이 생명체 안에 본래부터 내재한다고 강렬하게 느끼는 것들. 이런 그림을 그리기 위해 형은?모든 것을 극한까지 몰고가는 모험을 감수했을 테니 머리가 얼마나 힘들었겠어. 혼란을 겪은 것도 무리가 아니야”. 

고흐는 동생도, 예술도, 연인도, 자연도 극한까지 사랑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도, 건강도, 돈도, 심지어는 동생까지 모든 것을 잃었다. 오로지 작품만 남았다.

하루키 월드에서 보자면 이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짓임이 틀림 없다. 하루키는 새벽에 늘 같은 시각에 일어나 원고를 쓰고, 오후에는 취미로 번역을 하고, 마라톤을 완주하고, 이 나라에서는 선인세로 수억원을 받으며, 깊이 사랑할 가능성이 있는 자녀도 애초부터 낳지 않아 부유하고, 건강하고, 고흐에 비하자면 이렇게까지나 오래 살고 있다. 물론 고흐와 비교해 그것을 나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두 세계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차이는 내가 보기에 ‘깊은 사랑’에 대한 태도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 어느 글에서 나는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을 읽고 하루키의 지혜가 내게 없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무 깊이 사랑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썼다. 누군가에 대한 사랑이 그 사람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고흐의 서간집을 읽으면서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세상에 대한 경험도 부족한 주제에 사랑까지 깊이 하지 않겠다는 것은 사실상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것, 소동을 일으키고, 창피를 당하고, 망신을 당하고, 사람을 긴장하게 했다가 의기 소침하게 만드는 것이니까. 사랑은 아름다운 말이지만, 사랑은 항상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지 않는다. 그러나 삶의 의미는 사랑으로 어떤 결과를 얻었느냐가 아니라 진정으로 사랑했는가에 있지 않을까. 따뜻한 관심과 열정적 사랑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생의 이유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아닌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이유는 쉽게 사랑을 포기해버리는 것 때문일 수도 있겠다. 고흐가 가난했지만 가난하지만은 않았던 것과는 다르게 말이다. 모든 순간, 그것이 무엇이든지 늘 강렬하게 사랑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규칙 위반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