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관한 일기 (5) - 지방샘

                             성공과 실패의 표상으로서의 비만 



나는 집에서 버스로 25분 정도는 가야 하는 중학교에 배정받아 다녔다. 내가 살고 있는 집 가까이에는 중학교가 없었기 때문인데, 버스는 언제나 만원이었고, 비가 오는 날은 초만원이 되었다. 버스에서 내려 다시 10분 정도를 걸으면 학교 정문이 보였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40년이나 되어 낡디 낡았을 뿐 아니라 곧 이전을 앞두고 있어 관리가 전혀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아이들은 아주 거칠었다. 입학 첫 날부터 각 국민학교에서 온 주먹질 좀 한다는 아이들이 겁을 줬고, 누가 진정한 일진인지를 두고 싸움을 벌였다. '쓰바리'란 말은 중학교에 가서 처음 들었다. 상급생들이 신입생들에게 버스 승차권이라던가 잔돈 따위를 뺏아가는 '쓰바리'를 쳤다. 심지어 나는 중학교에 배정 후 입학 전에 치른 반 배치고사에서도 좋은 성적을 받지 못했다. 어머니께 야단을 하도 맞은 탓에 지금도 정확히 등수를 기억한다. 학급 9등, 전교 81등. 600명 신입생 중에서 10%에도 들지 못한다는 것을 어머니는 받아들이기 힘들어하셨다. 학교까지 오고 가고, 일진 아이들에게 치이고, 선배들을 피해다니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는데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성적 때문에 학교를 마치면 셔틀 버스를 타고 다시 학교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종합반 학원을 다녀야 했다. 셔틀 버스에서 아이들은 어느 학교의 누가 더 주먹이 쎈지, 어느 만화가 볼만한지, 어느 오락실이 좋은지를 이야기했다. 자위행위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것도 그 셔틀 버스 안이었다. 다른 학교에 다니던 한 녀석은 자위 행위를 소설가적 감수성으로 이야기하고는 했다. 어떤 여자를 생각하는지, 사정이 될 때의 느낌은 어떤 것인지 떠들어 대는 녀석 앞에서 나는 그저 애송이에 불과했다. 성적이나 학원 수업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해 본 기억이 없다. 그 때 한창 드라마 <마지막 승부>가 인기를 끌던 때라 이따금씩 주말에 만나 농구를 하자고 약속하는 정도가 셔틀 버스 토크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건전한 주제였다. 


중학교 시절은 지금 생각해봐도 모든 것이 어둡기만 하다. 이제 제법 근육이 붙기 시작하는 사춘기 남자아이들의 힘의 각축전으로 학교는 홉스적 자연상태라 늘 나는 뭔가 위축되어 있었고, 국민학교 때에 비해 성적도 떨어져 나는 선생님께나 다른 아이들에게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중학교를 입학할 때만 하더라도 72Kg 정도였던 몸무게가 2학년 때는 100Kg까지 나갔다. 학교에서의 일과가 끝나고 곧장 학원으로 가면 저녁은 언제나 라면이었다. 밤 10시에 집에 들어가면 늘 야식을 먹었다. 아버지는 다정한 분이시라 밤 10시에 가족이 함께 둘러 앉아 드라마를 보며 치킨을 먹고, 빵을 먹고, 과일을 먹는 것을 좋아하셨다. 공부 부담 때문에 운동할 겨를도 없었다. 성적은 꾸준히 올라 어느 덧 1, 2등을 다투게 되었지만 나도 모르게 살은 어마어마하게 쪄 있었다. 살이 쪘지만 사실 불편한 것은 없었다. 금화주머니와 그림자를 바꾼 사내처럼 나도 성적과 몸무게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심지어 당시에는 나 자신이 '비만'이라는 인식조차 없었다. 덩치가 좋아진 것일 뿐이었고 그것이 나의 학교 생활을 점점 더 편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14살 남자 아이들은 단순하다. 덩치가 크다는 것은 곧 강함을 의미했다. 어떤 세계에서는 큰 차가 권위를 상징하고, 큰 집이 부를 상징하고, 큰 것이 곧 권력을 상징하는 것처럼 말이다. 덩치가 커지자 학교에서 눈치 볼 일이 줄어들었다. 학교에서 꽤나 주먹을 쓴다고 하던 아이들까지도 나를 견제할 정도가 되었다. 나 역시 내 힘을 과시하고 싶었다. 나보다 덩치가 작았던 아이들이 마음에 들지 않게 굴면 가차 없이 두들겨 팼다. 나는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불량 학생의 표상이던 교내 화장실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거나, 힘이 약한 아이들에게 쓰바리를 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학교의 일진들이 공유하는 기호를 하나씩 갖기 시작했다. 빈폴 코트, 노티카 점퍼, 트래벌 폭스 야구화, 블랙앤화이트 바지 등을 입고선 마음에 들지 않는 덩치 작은 녀석 하나 두들겨 패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은 태도까지. 게다가 공부도 제법 했기 때문에 3학년이 되자 나는 언제나 학급의 중심에 있게 되었다. 신입생 때 가졌던 두려움은 모두 사라졌다. 성적은 올랐고, 덩치가 커져서 어느 누구도 나를 괴롭힐 수 없고, 최고학년이 되어 쓰바리를 당할 걱정도 하지 않았다. 힘이 생기자 학교 생활은 편해졌다. 그 때 나는 내가 느끼는 자신감의 원천을 지금처럼 제대로 규명해낼 능력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가장 다행스럽게 생각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또렷이 기억한다. 어머니 외에는 아무도 내 성적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분명 성적은 아니었다. 나는 내가 남들보다 상당히 덩치가 크다는 것, 거기에 안도했다. 


어머니도 내가 살이 찌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셨다. 어머니는 나더러 뚱뚱하다는 친척들에게 언제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국민학교 때도 살이 많이 쪘었는데 그게 다 키로 가더라구요". 살이 키로 갈리 없는데도, 어머니는 이번에도 내 살이 키로 갈 것이라 믿고 계셨다. 그래서 튼 살이 생기고, 몸에 맞는 옷이 점점 줄어들어도 어머니는 개의치 않으셨다. 오히려 어머니의 걱정은 다른 곳에 있었다. 내 몸 곳곳에 여드름처럼 올라오는 붉은 뾰루지들이었다. 사춘기 시절에는 누구나 얼굴에 나는 여드름으로 고민하지만, 나는 뾰루지가 팔뚝에 집중적으로 생기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주말 저녁이면 나를 무릎에 눕혀 놓고선 팔뚝에 난 뾰루지의 고름을 짜냈다. 뾰루지는 아주 작았기 때문에 고름의 양은 많지 않았지만 양 팔의 팔뚝에 작은 뾰루지가 수백개나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단순한 여드름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고, 심각한 피부병일 수 있겠다며 걱정하셨다. 며칠 후 내 엄지 손톱의 물집을 치료했던 피부과로 갔다. 오랜만에 나를 본 의사는 내 팔에 난 뾰루지를 보기도 전에 이렇게 물었다. "왜 이렇게 살이 쪘어?". 어머니는 대답 대신 내 팔뚝에 난 뾰루지를 의사에게 보이며 이게 왜 생기는 거냐고 물었다. 의사는 이번에도 "당장 살을 빼세요"라며 이번에도 내 살을 문제 삼았다. 어머니는 "살이 요새 좀 쪘는데 다 키로 갈거에요"라고 하신 후 내 팔에 난 뾰루지에 대해서 다시 물었지만 의사는 내 팔에 난 뾰루지가 뭔지 정확히 설명해주지 않았고, 별 다른 치료도 없었다. 그냥 여드름 같은 거니까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고만 했다. 진료실을 나서려 하자 의사는 등 뒤에서 다시 말했다. "지금 팔이 중요한 게 아냐. 당장 살을 빼야 해요!".


의사의 말과 달리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내 팔뚝의 뾰루지는 없어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한동안 뾰루지 짜내기에 집중하셨지만, 얼마 안 가 그만두셨다. 내 피부가 닭살이라서 그렇다고 어머니는 자체 결론을 냈다. 사실 별로 불편한 것이 없었다. 가렵거나 아프지 않고, 일부러 짜지 않으면 고름이 나와 옷을 더렵히는 일도 없었다. 민소매만 입지 않으면 남들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피부 문제를 해결도 못하는 실력 없는 피부과 의사 주제에 나더러 왜 자꾸 살을 빼라는 건지 짜증만 났다. 살은 나의 힘이었기 때문에 살을 빼라는 것은 힘을 버려라는 것과 똑같은 말이었다. 어머니도 그 의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살은 키로 곧 갈 것이기에, 또 의사가 말한대로 뾰루지들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살을 빼라는 말을 진지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확실히 그 의사는 돌팔이였다. 내 팔뚝에 난 수백개의 뾰루지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대로다. 20년이 넘도록 전혀 사라지지 않고 있다. 만약 여드름이라면 나는 지금까지도 2차 성징기를 겪고 있는 셈이 되는 거다.


내 팔뚝의 뾰루지를 여드름이 아닌 다른 관점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대학 3학년 때이다. 교회에서 친하게 지냈던 선배 둘과 함께 목욕탕에 갔는데 공교롭게 두 선배에게도 팔뚝 뾰루지가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같은 대학에 다닌다는 것, 같은 교회에 다닌다는 것, 같은 성가대에서 노래한다는 것, 팔뚝에 같은 뾰루지가 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셋 다 뚱뚱하다는 것. 같은 대학, 같은 교회, 같은 성가대라고 해서 같은 뾰루지가 있을 가능성보다는 우리 모두가 뚱뚱하다는 것이 같은 뾰루지의 원인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생각하고 나는 그날부터 생각날 때마다 뚱뚱한 사람들의 팔뚝을 관찰했다. 뚱뚱한 사람들은 뚱뚱하기 때문에 민소매 티셔츠를 거의 입고 다니지 않아 일부러 티셔츠의 소매를 들춰보지 않는 한 팔뚝에 뾰루지가 있는지를 확인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알 수 있었다. 의심스러우면 모른 척 좀 더 가까이 가서 보기도 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 사이라면 직접 물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이런 뾰루지가 주로 뚱뚱한 남자들에게 많이 발견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머니께 오랜만에 다시 한번 뾰루지를 짜달라고 했다. 그러고보니 짜낸 것은 고름과는 확실히 달랐다. 고름을 짜내면 피가 섞여 나오지만 내 팔뚝의 뾰루지에서는 피가 나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고름처럼 보이는 노란 것은 끈적한 액체가 아니라 오히려 작은 알갱이 같았다. 나는 친구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생물학과에 다니는 동아리 후배에게 '노란 알갱이'의 성분이 무엇인지를 알아봐달라 부탁했다. 다음 날 문자 메시지가 왔다. "형 어제 주신거요. 그거 지방인데요".


지방이라고? 그러면 내 몸에 과잉 축적된 지방이 팔뚝 지방샘으로 분비되는 것인가? 그때 의사가 살을 빼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었나? 여드름이 아니라 지방샘인가? 몸에 지방을 더 이상 저장할 곳이 없어서 뚱뚱한 사람들만이 지니고 있는 새로운 배출 기관인건가? 물론 얼마 안가 이런 생각이 조금도 신체애 대한 완전한 무지에서 나온 공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 팔뚝의 뾰루지가 '팔뚝 여드름' 증상의 하나이고, 팔뚝 모공이 각질로 인해 막히면서 생기게 된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실제와는 정반대로 추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팔뚝의 뾰루지는 지방을 배출하는 지방샘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반대로 정상적인 경우라면 지방샘에서 지방이 배출되어야 하는데 각질과 노폐물로 지방샘이 막혀 지방이 나가지 못해 생긴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과는 다르게 나는 내 팔뚝 뾰루지를 볼 때마다 나 자신이 지방으로 꽉 차 있다는 것을 다시 인지하게 된다. 그러니까 내게 팔뚝 여드름은 모공의 고장이 아니라 지방이 꽉 차 있음을 드러내는 문학적인 상징 같은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항상 모든 것을 거꾸로 이해하며 지내왔다. 12살 어린이일 때는 살이 키가 된다고 믿었고, 14살 까까머리 중학생일 때는 살이 찌는 것을 문제가 아니라 자랑으로 믿었고, 23살 대학생 때는 팔뚝 여드름을 보며 지방이 너무 많이 분출되고 있다고 믿었고, 최근까지 나는 고도비만이면서 동시에 건강할 수 있다고, 수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믿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도 사실과는 전혀 다르게, 또 어떤 것을 완전히 거꾸로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내 몸의 변화와 내가 하는 작은 습관 조차도 알지 못하면서 모두 아는 양 여기에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두웠던 중학교 시절에 성적을 올리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살이 쪘고, 다른 한편 힘을 갖기 위해 일부러 살을 찌웠다. 살은 성적 상승의 결과였고, 작은 아이들을 굴복하게 만들었으니까. 오래동안 살을 빼지 못했던 것은 '살'은 최소한 나 자신에게만큼은 승리의 표상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패배와 무책임과 낮은 자존감의 표상이다. 의학에서나 팔뚝 여드름이나 비만은 단정적으로 문제로 규정할 수 있겠지만, 실제에서는 팔뚝 여드름 하나 조차 앞서 내가 문학적 상징으로 이해한 것처럼 의미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중학교 때 아이들을 두들겨 팬 것에 대한 대가는 지금 충분히 치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큰 덩치로 지금 나는 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3월 29일.

27일이 생일이었다. 생일에는 일을 했다. 28일에 처형이 생일축하를 해주셨다. 나를 위한 케잌을 사기 위해 버스를 타고 2시간이나 시간을 쓰셨기 때문에 사양할 수가 없어서 조금 먹기로 했다. 그런데 너무 맛있었다. 케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 2시간을 쓸만큼 맛있는 케잌이었기 때문에 유혹을 이길 수가 없었다. 오늘은 아이와 집근처 커피샵에 갔다. 아이가 배 고파해 커피샵에서 파는 피자를 사줬다. 아이가 졸라대는 통에 몇 조각을 먹었다. 다이어트는 정성을 거절하고, 남은 음식은 버릴 수 있는 자만이 성공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새삼 든다. 정말 나 자신이 먹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나는 지금 케잌과 피자를 먹은 나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다이어트는 음식만이 아니라 예의와 경제 관념과도 거리를 둘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나는 아직 그럴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내가 먹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먹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던 거다. 하지만 정말 맛있었다. 케잌도, 피자도. 내일은 어떤 어쩔 수 없는 일이 생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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