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 - 그 집이 내게 들려준 희로애락 건축 이야기
구본준 지음 / 서해문집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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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경주에서 열린 큰 여성 대회에서 열린 토크콘서트의 패널로 참여했던 적이 있다. 거기에는 나 말고 부산의 어느 라디오 방송의 피디도 패널로 오셨는데, 말빨 중의 말빨, 내가 여태 본 사람 중 최고의 말빨이었다. 관객이 어디에서 감동을 받고, 어디에서 웃고, 어디에서 진지하게 듣는지를 정확히 알고 거침 없이 이야기를 풀어내는 재주가 정말로 뛰어난 분이었다. 피디가 말만 하면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존경스러웠다. 직장을 가진 엄마의 자격으로 오신 50대의 라디오 피디 다음으로 내가 발언해야 하는 것은 무척 부담스러웠다. 나는 그 빛에 가려서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한 탓인지, 관객들의 호응을 거의 얻지 못했다. 끝나고 나서 알게 되었는데, 라디오 피디 그 분은 이문세가 별밤에 출연하는 거의 전 기간동안 연출을 한 분이었다. 본인도 그 때의 경험이 자신을 ‘말빨’로 만든 것이라고 했다. (스스로를 '말빨'로 불렀다)

 

피디의 발언은 하나같이 재밌는 이야기였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의미있는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대중의 기호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당시의 토크 콘서트는 각자의 육아 경험을 이야기하는 자리였는데 피디는 “절대로 직장 그만 두지 마라”, “이렇게 아이 키워도 나처럼 아이들 좋은 대학 보낼 수 있다”처럼 토크콘서트의 관객 중 대부분에 해당하는 여성들이 선호하는 말이 무엇인지 꽤뚫고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아빠가 필요 없는 세상이 오고 있다”, “그래서 새로운 아버지상이 필요하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사실 내가 한 말 대부분은 대중의 호응을 이끌어 내야 하는 '콘서트'라는 자리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오히려 토론회 자리에서나 어울릴 법한 것들이었다. 내 위치는 논문발표장이나 토론장이 아니라 콘서트장인데도, 나는 내가 콘서트의 패널로 나가서 논문발표장에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아마 내가 아직 나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해서라기 보다 나의 위치를 수용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콘서트 패널로서의 나를 수용하지 못하고, 쉬운 책을 소개해달라는 라디오 방송에 나가는 나를 수용하지 못하고, 철학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육아를 동원해야만 하는 나를 수용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육아 이야기를 해야 하는 지면에 어려운 철학적 이야기를 끌어내고, 라디오 방송에 나가서 어려운 철학책을 소개하고 싶어하고, 콘서트 패널로 가서 철학적 토론을 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가히 몰맥락적인 존재라 할만하다. 미스플레이스드맨인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라디오 피디의 ‘말빨’, 너무 상황에 잘 맞는 말, 관객들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능력은 지나치게 노련해서 불편하다. 관객들의 호응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내 이야기가 아니라 일반화된 이야기를 재밌게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피디의 발언에 자신의 경험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실 구본준 기자의 <마음을 품은 집>을 읽으면서 그 콘서트에서 만난 라디오 피디가 생각났다. 구본준 기자의 글은 결코 날카롭거나 날렵하다고 할 수는 없다. 대신 ‘포인트’를 안다. 독자들이 어디서 반응하고, 어디서 느끼고, 어떻게 해야 이야기에 빠져드는지, 그 플레이스를 잘 파악하고 있다. 예를 들어 땅콩집 소개자로서의 구본준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땅콩집’이라는 작명에대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글자수가 적은 신조어를 만들어야 전파가 쉽다. 듀플렉스란 말은 너무 어렵다”. 나 같은 미스플레이스드맨이라는 말 정도밖에 못만들어내는 사람은 듀플렉스를 땅콩집으로 부를 생각은 거의 하지 못한다. 그래서 <마음을 품은 집>은 글빨이 살아 있어 잘 읽히고, 새로운 정보도 많고, 감동도 있다. 희-로-애-락, 감정을 단 네 개로만 정리해서 건축물을 소개하겠다는 기획, 그것이 경탄할만하다. 감정을 단지 네 개로만 풀겠다는 생각은 수십가지의 감정으로 하루에도 기분이 몇 번 바뀌는 나 같은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구본준의 이 책이 나는 지나치게 노련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그것은 하나의 능력이겠지만, 그래서 이 책에 구본준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것이다. 구본준에 대한 이야기로는 대중의 호응을 이끌어 내지 못한다. 구본준이 그 건물에 대해 일반적인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면 독자들은 글을 쉽다고 느끼고, 이해했다고 생각하면, 많은 것을 배웠다고 느낀다. 미스플레이스드맨은 이 점이 부럽기도 하고, 그래서 재미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격에 맞는 이야기, 장소에 맞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능력이 내 이야기를 하는 것과 적절히 잘 조화될 수 있는 경지는, 모두에게 연주되지만 마치 한 사람에게만 속삭이는 것 같은 연주를 하는 수준일 것이다. 너무 노련하면 기술적으로만 보여 한 사람에게 속삭이는 것 같지가 않다. 노련한 상담가와 대화하는 것이 항상 나쁜 기분으로 마무리되는 것도, 불일치와 맥락의 단절이 존재하지 않는 대화의 미끄러움 때문일 것이다. 잘 읽히지 않는 책이 내게 재밌는 이유는 아마 그 단절, 불일치를 끊임 없이 경험하게 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도, 다음 주에도 나는 노련하게 쓰여진 책을 소개할 것이다. 나는 미스프레이스드맨에서 좀 벗어나야 할 것 같으니까 말이다.

 

 

 

 

 

 

 

 

마음을 품은 집

- 그 집이 내게 들려준 희로애락 건축 이야기

    

1.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떤 책을 소개해주실 건가요?

 

안녕하세요? 오늘 소개해드릴 책은 출판사 서해문집이 만들고, 구본준 작가가 쓴 <마음을 품은 집>이라는 책입니다. 제목에는 ‘집’이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 오늘 소개해드릴 <마음을 품은 집>입니다. 오늘은 제가 먼저 진행자분께 질문을 드리면서 시작해보고 싶은데요, 혹시 서울 어린이대공원이 원래 어떤 곳이었는지 아시나요? (대답) 네, 저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는데요, 서울 어린이대공원 터는 원래 골프장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는 조선 왕실의 묘였는데, 정확히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의 부인인 순명황후의 능이 있던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황후의 능이 어처구니 없게도 일제 강점기 때 경성 골프장으로 바뀌었고, 해방 이후 이름이 서울컨트리클럽으로 바뀌고 한국에서 가장 좋은 골프장으로 인기가 대단했다고 해요. 서울 시내에 있으니까 가까웠으니 당연한 일이겠죠.

 

2. 그런데, 골프장이 어째서 어린이공원으로 바뀌게 된 걸까요?

 

정확한 문서는 없지만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의 한마디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종종 워커힐 호텔에 가서 쉬곤 했는데, 청와대에서 워커힐로 가기 위해서는 이 골프장을 지나야 했는데 1970년 12월에 이 골프장을 보고 크게 화가 났다고 해요. 조국 재건에 바쁜 이때에 평일 대낮에 한가하게 골프를 치는 작자들은 누구냐고 호통을 치면서 당장 골프장을 없애고 어린이들을 위한 공원을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고, 지시한지 2년만에 골프장이 이전되고, 서울시가 100일 작전 끝에 만든 공원이 바로 어린이대공원이었던 거죠.

 

3. 놀라운 이야기네요.

 

그렇죠? 이 책은 지금 말씀드린 것처럼 구본준 작가가 서울을 비롯해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감응한 건축물을 둘러싼 재밌는 이야기들을 정말 많이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건축물 하나가 만들어지게 된 뒷 이야기, 만들어지는 과정, 만들고 난 후 일어났던 일들, 그 과정에서 있었던 인간사의 희로애락을 정리하고 있는데요, 이 책의 부제가 ‘그 집이 내게 들려준 희로애락 건축 이야기’입니다. 작가는 이 책을 크게 4부로 각각 희, 로, 애, 락으로 제목을 붙이고 각 건축물에 담겨진 기쁨의 이야기, 분노의 이야기, 슬픔의 이야기, 즐거움의 이야기를 풀어 냅니다. 건축이라고 하면 설계도면이나 엔지니어링을 생각하기 쉬울텐데요, 이 책은 그런 이야기는 거의 없습니다. 대신 건축물 하나 하나에 담긴 인간의 드라마를 소개하는데 구본준 작가는 집중하는데요, 여기에는 저자가 건축물을 바라보는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책의 한 부분을 짧게 읽어드리겠습니다.

 

처음에는 디자인이 멋지고 근사한 건축이 좋았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집에 담긴 이야기를 알게 되면서 건축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들은 인생 그 자체였다. 너무나 감동적인 이야기도 있었고, 슬프기 짝이 없는 사연도 있었다. 오욕칠정이 스며든 건축은 희로애락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극장과도 같았다. (중략) 건축은 미술도 디자인도 아닌 인간의 모든 것을 담는 그릇이다. 우리 마음이, 우리 과거가, 우리 꿈이 건축을 통해 만들어지고 남겨지고 이어진다. 건축과 친해지면서 나는 집을 통해 인생과 역사, 문화와 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4. 건축물은 인간의 모든 것을 담는 그릇으로 보는 저자의 시선이 이 책을 희로애락으로 구성하게 된 이유라고 할 수 있겠네요. 어린이대공원의 경우는 희로애락 중 어디에 포함되어 있을까요?

 

네, 사실 이 책이 다루는 내용은 어린이대공원은 아니고, 어린이대공원 관리사무소 건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어린이대공원 관리사무소 건물은 40년이나 된 데다 근무직원수에 비해 너무 규모가 커서 서울시에서 헐고 새 사무실 건물을 지으려고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규모가 컸던 이유는 어린이대공원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 부지에 있던 골프자의 클럽하우스였기 때문인데요, 골프장이 사라지면서 관리사무소가 된 겁니다. 그런데 이걸 헐어버릴 계획을 갖고 있던 당시 서울시 최광빈 국장이 건물의 도면을 보고 이상한 점이 있어 조성룡 건축가에게 전화를 해서 한번 도면을 봐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런데 조성룡 건축가가 도면을 보고 깜짝 놀란거에요. 1970년대까지 한국 건축가를 대표했던 고 나상진의 작품이었고, 너무 훌륭했던 거죠. 그런데, 관리사무소로 오래동안 쓰면서 건물 내부를 이곳 저곳에 외피를 덧붙여서 진가가 숨겨져 있어서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 소식을 듣고 서울시도 신축 계획을 폐기하는 어려운 결정을 하게 되고 건물의 원형을 되살려 복원하게 된 거죠. 조성룡 건축가는 40년 동안 이 건물에 붙어있던 온갖 외피들을 다 걷어내고, 큰 공간 안에 작은 공간을 만드는 등 다양한 접근으로 완벽하게 복원해 냅니다. 그래서 2011년 5월에 다시 이 건물은 ‘꿈마루’라는 이름으로 어린이 대공원의 랜드마크로 다시 부활하게 된거죠.

그래서 이 건물은 ‘희’, 그러니까 기쁨의 이야기가 있는 건축물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사라질 뻔 했는데, 사소한 것을 놓치지 않은 공무원의 눈썰미가, 자료를 뒤져 가치를 찾아낸 건축가가의 관심이, 발견된 가치를 소중히 받아들인 한 공무원의 고민이, 또 건물을 살리는 건축가의 열정이 합해져서 아이들에게 꿈의 마루를 선사한 것이니까요. 기쁨의 건축물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닌거죠. 특히 저는 이 과정을 진두지휘한 서울시 최광빈 국장의 안목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5. 재미있는 사연을 듣고 나니 어린이대공원에 가면 꼭 한번 ‘꿈마루’라는 건물을 찾아서 직접 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요. 부수고 새로 만드는 것을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풍조 속에서는 다시살려낸 것도 가치가 있는 일이었던 것 같아요.

 

혹시 재건축을 하게 되는 아파트 앞에 붙은 “경축 안전 진단 통과, 재건축 승인”이라는 현수막을 혹시 본 적이 있으세요? (대답) 그럼 여기 적힌 ‘안전 진단 통과’라는 말의 의미를 아시나요? (대답 : 안전 진단을 했는데 안전하다는 뜻이 아닌가요?) 만약 안전하다면 재건축 승인을 못 받겠죠? 안전 진단을 받았는데 내가 살고 있는 집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 받았다는 것이 바로 안전진단통과입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이 사실 안전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 경축한다는 뜻으로 읽히면 의미가 이상하게 되어 버리죠. 부수고 다시 짓기 보다 되도록 고쳐서 다시 사는 것이 ‘문화적’으로는 훨씬 더 가치있는 일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사실 ‘안전 진단 통과’와 관련해 제가 드린 말씀은 제 이야기는 아니구요,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정기용 건축가가 하는 말입니다. 정기용 건축가는 예전에 어느 방송국에서 주도했던 ‘기적의 도서관’을 만드는 과정에서 건축가로 참여한 분이죠. 이제 고인이 되셨지만 한국의 대표 건축가라 할 만한 분인데요, 누구보다 실험적이고, 폭넓은 지지를 받은 분이었습니다. 사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도서관의 형태는 ‘기적의 도서관’을 만드는 과정에서 정기용 건축가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원래 제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도서관이라는 공간은 중간고사, 기말고사 공부하러 다니는 곳이었어요. 그리고 주로 사서나 도서관 직원들이 열람객들을 관리 감독하기 좋은 식으로 책을 읽는 공간이 배치가 되어 있었던 거죠. 그런데 정기용 건축가는 기적의 도서관 작업에서 열람실에 마루를 깔고 온돌을 설치해서 아이들이 누워서, 구석에 틀어박혀서, 숨기 좋은 공간을 만들어 마음껏 책을 읽도록 공간을 완전히 새롭게 배치를 합니다. 지금 우리 주변의 도서관들의 형태는 기적의 도서관에서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는거죠.

 

6. 기적의 도서관 운동이 2002년에 있었으니 이제 15년이 된거네요.

 

그렇습니다. 구본준 작가도 정기용 건축가를 많이 존경했던 것 같아요. 아까 재건축에 대한 말씀을 드리다 말았습니다만, 정기용 작가는 대통령 사저를 설계할 정도로 유명했음에도 많은 돈을 벌기는커녕 자기 집 한 채 없이 살았다고 해요. 정기용 건축가가 시간을 쏟아 부은 작업은 대부분 예산은 적고 품은 많이 드는 작고 소박한 지역 공동체의 공공건축물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요, 정기용 건축가가 2011년에 세상을 떠나는데요, 오늘 소개해드리는 이 책의 저자인 구본준 작가도 사실 이미 고인이 되었습니다. 2014년 이탈리아 출장 중에 급작스러운 심정지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이 책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발간한 마지막 책인데요, 구본준 작가는 사실 건축학 전공자가 아닙니다. 신문사 문화부 기자였는데요, 건축에 대한 개인적 관심에서 출발해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건축 공부를 하며 많은 글을 남겼습니다. 무엇보다 오늘 책으로 구본준 기자를 소개해드리지만 구본준 작가는 우리 주택 문화의 변화에도 큰 기여를 한 분이기도 합니다. 땅콩집을 국내에 처음 만들고, 땅콩집이라는 용어를 만든 사람이 바로 구본준 기자입니다. 정기용 건축가가 우리에게 새로운 도서관을 남겨주고 떠났다면 구본준 작가는 우리에게 새로운 주택을 남겨주고 떠난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7. 정말 그렇네요. 책을 잠깐 보니까 이 책이 모두 12개의 건축물을 소개하는데 그 면면이 정말 다양하네요.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인도의 타지마할, 우리 지역의 도동서원도 있구요.

 

네, 각 건물이 담고 있는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건축물 하나 하나가 마치 인격을 가진 존재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래서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요. 서울시 서대문구에 있는 이진아 기념도서관은 스물 세 살에 교통사고로 죽은 이진아 양을 기념하기 위해 진아씨 아버지 이상철씨가 기부를 해서 건립한 것이라고 해요. 그래서 이진아 기념도서관 주변에 가면 둥글레꽃이 많다고 합니다. 6월에 피는 꽃인데 건축가가 이진아씨가 6월에 기일이 있어 심었다고 합니다. 달성의 도동서원은 동서남북 배치의 방향이 일반서원과 정반대라는 사실을 아시나요? 강의실은 남쪽이 아니라 북쪽을 바라보고, 동재는 서쪽에, 서재는 서쪽이 아니라 동쪽에 있습니다. 이 서원 자체가 남향이 아니라 북향인데요, 이것도 이유가 있습니다. 이 서원이 모시는 김굉필이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자세로 인해 결국 죽음에 까지 이르렀는데요, 이 서원의 배치도 김굉필이 평생 자신의 소신과 성리학의 도를 따랐듯이 도동서원의 배치도 그런 김굉필의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축물 하나 하나를 인격으로 대하게 된다는 말씀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8. 끝으로 이 책을 독자들에게 추천해주시는 이유를 정리해주시죠.

 

일단 책이 재밌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저는 이 책의 미덕은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건축물 하나 하나를 대하는 태도가 따뜻합니다. 그래서 집을 깊이를 가진 것으로 바라봅니다. 사실 인간이 공간을 만들지만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공간에 있느냐가 인간의 의식을 결정하는 면이 분명히 있거든요.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지금 이 공간이 나의 삶과 생각을 어떻게 만들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시면서 읽으시면 새로운 시각을 얻으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책에는 없는 내용입니다만, 혹시 진행자님께서는 대구의 계산성당이 원래 이름이 뭐였는지 아시나요?(대답) 성모성당입니다. 그러다가 천주교가 천주를 모시지 않고 성모를 모신다는 오해를 받고 이름을 계산성당으로 바꾼 거라고 해요. 이처럼 대구의 건축물들에도 온갖 사연과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우리 주변의 건축물, 대구의 건축물에 대해서도 이런 책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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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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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기. 

이번 명절에 작은 소동이 있었다. 사촌동생에게 했던 조언이랍시고 했던 말을 삼촌, 사촌동생의 아버지가 기뻐하지 않으셨다. 삼촌은 내게 "네가 무슨 권리로" 그런 조언을 하는지 물었다. 물론 내게는 아무 권리가 없다. 사실 나는 조언을 해야 한다는 막연한 의무감만 느끼고 있었을 뿐이다. 동생이 중학생일 때부터 가까이 지내왔던 동생은 이제 군 복무도 마친 성인이 되었는데, 내 시선은 어디까지나 '15살' 소년을 향하고 있었다. 동생을 향한 관심은 사실 삼촌에 대한 애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삼촌은 내게 다른 삼촌과 다른 분이었다. 삼촌은 내게 명절 때만 아니라 언제나 만나면 다른 삼촌들보다 몇 만원을 더 쥐어주셨다. 그건 단지 돈 몇 만원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부도로 인해 우리 집 만큼이나 가장 큰 어려움을 겪은 삼촌이 내게 '보호자'라는 것을 보증해주는 것이었다. 동생과 어린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밤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두분이 죽은 것은 아닐까 걱정을 하곤 했다. 그 때마다 우리는 '삼촌의 존재'에 기대어 안심하기도 했다.

명절을 지나면서 나는 '삼촌 없는 조카'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삼촌도 자녀들이 자라 성장했고, 이제 삼촌에게도 의지할 대상은 내가 아니라 삼촌의 자녀들이고, 나도 삼촌보다는 내 부모를 섬겨야 한다. 삼촌과 나는 정말 서로를 사랑했고, 삼촌은 내 유년기의 나의 세계를 호의적으로 만들어준 거의 유일한 존재였다. 너무 깊이 사랑했기 때문에 삼촌과 나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에서 너무 깊이 사랑하는 것은 '규칙 위반'이라고 김연수는 썼다. 이 단편소설집에서도 깊이 사랑하는 것은 눈을 멀게 하고, 사는 곳을 떠나게 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다. 너무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서로의 자존심이 자라는 마음 속 비밀의 장소'에는 결코 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사촌동생의 비밀 장소로 가려고 했고, 삼촌의 비밀 장소를 아무렇지 않게 드나들었다. 그것이 나의 죄다. 그리고 삼촌은 갑자기 내게서 사라져 버린 (것 같은) 존재가 되었다. 하루키는 이렇게 쓴다.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되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그건 여자 없는 남자들이 아니고서는 이해하지 못한다. 근사한 서풍을 잃는 것. 열네 살을 영원히 빼앗겨 버리는 것. 저 멀리 선원들의 쓸쓸하고도 서글픈 노랫소리를 듣는 것.."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무 깊이 사랑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1.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떤 책을 소개해주실 건가요?


네, 오늘 제가 소개해드릴 책은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만들고,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여자 없는 남자들>이라는 단편소설집입니다. 이 책은 마치 어떤 가수의 앨범처럼 한 권의 책에 7개의 소설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루키는 CD나 MP3파일보다는 카셋트테이프나 LP 판으로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이 책도 곡 순서를 마음대로 할 수 없는 LP 판처럼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어보시다면 좋으시리라 생각합니다.


2.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국내에도 많이 번역되어 있고 우리 청취자들도 많이 아는 작가일텐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작가를 처음 소개받는 분들을 위해 한번 소개해주시지요.


 무라카미 하루키는 대단히 유명한 작가라서 사실 소개하기가 더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키가 유명한 만큼이나 하루키에 대해서 우리가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하는 쪽입니다. 사실 유명세가 있는 작가들의 이름을 안다는 것과 작가들의 생각을 안다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니까요. 저도 하루키에 대해서 잘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하루키의 어떤 한 부분만 받아들여지고 소비되고 있다고 저는 느낍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인 <노르웨이의 숲>, 우리에게는 <상실의 시대>로 알려진 이 작품은 하루키의 문학 세계 전반에서 보자면 ‘범작’에 해당하는 작품입니다. 사실 하루키 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태엽 감는 새>나 <언더그라운드> 같은 경우는 국내에서 잘 읽히지 않았고, 하루키 작품 중에서도 그다지 많이 팔렸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하루키는 어릴 적 아버지와 관계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다고 해요. 일찍 결혼한 이유도 그 때문인데요, 유년기에 부모의 사랑이나 관심을 적게 받으면 누구나 “내가 왜 존재하는가”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존재의 이유를 끊임 없이 묻게 되는 것인데, <태엽 감는 새> 같은 작품이 하루키의 이런 문제의식이 그대로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비롯해서, 일본 문학계와도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하루키는 90년대 초반만 해도 B급 정서라 할까요, 주류에서 벗어나 있다는 느낌에서 작품을 했는데요, 그래서 늘 지하 세계에 대한 관심이 컸던 작가입니다. 그런데 95년 1월에 일본 고베에서 대지진이 있었고,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3월에 옴진리교 독가스 테러 사건이 있었지요? 하루키가 보기에는 소설에서나 있을법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이 때부터 현실문제에 좀 더 천착하기 시작합니다. 수많은 사람들과 인터뷰를 통해서 쓴 작품이 바로 지하를 의미하는 <언더그라운드>입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여자 없는 남자들>은 <태엽 감는 새>나 <언더그라운드>처럼 작가가 힘을 많이 주고 쓴 작품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힘을 빼고 쓴 이야기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래도 하루키 작품의 특성들이 잘 나타나는 소설집입니다. 아버지와의 불화로 끊임 없이 존재의 이유를 묻고, 지하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바로 하루키라는 것을 알고 읽으신다면 그런 점을 찾아가는 재미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3. 어떤 이야기일지 궁금한데요, 제목처럼 ‘여자 없는 남자들’이 등장하나요?


 7편의 단편에서 모두 ‘여자 없는 남자들’이 등장합니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는 남자의 아내가 암으로 죽습니다. ‘예스터데이’에서 남자의 여자친구는 다른 선배와 잡니다. ‘독립기관’의 주인공인 의사 도카이를 사랑에 빠지게 한 유부녀였던 그녀는 도카이도, 남편도 아닌 다른 어떤 남자와 도망을 칩니다. ‘세에라자드’에서 이름도 모르는 여자는 언제 떠날지 모릅니다. ‘기노’에서 남자의 아내는 불륜을 저지르고 남자는 그것을 목격한 후 카페에 숨어듭니다. 모든 이야기에서 남자의 ‘여자’는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지고, 다른 곳으로 떠나버립니다. 그리고 ‘여자’가 사라져버리고 남은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여자 없는 남자들>이라는 책의 모티프인데요, 사실 이 책의 이야기들은 하루키가 즐겨 사용하는 이야기가 여러 방식으로 변형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김연수 작가가 어느 글에서 정리한 것인데요,


 1) 여자에게는 병이 있다. 2) 남자는 (성관계보다도) 그녀와 친밀한 시간을 공유하는 것을 좋아한다. 3) 그런 그녀가 남자와 잠을 잔다. 4) 그 직후 그녀는 사라진다. 5) 남자는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된다.


이런 식인데요, <노르웨이의 숲>, 그러니까 상실의 시대를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와타나베와의 잠자리 후에 나오코가 갑자기 사라집니다. 이 책의 이야기도 이런 이야기 구조가 반복되어서 나옵니다.


4. 이 책의 한 작품에서 어떻게 이야기가 진행되는지 구체적으로 듣고 싶은데요, 권영민씨께서 재미있게 읽으신 작품을 이야기해주세요.


 스포일러가 될까봐 조심스럽긴 한데요, 사실 줄거리를 듣는 것과 책을 직접 읽어보는 것은 전혀 다르니까 말씀드려도 상관은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드라이브 마이 카>를 빠져들 듯이 단숨에 읽었는데요, 이 소설에서 가후쿠는 40대 후반 정도되는 배우입니다. 가후쿠는 눈에 녹내장이 오기 시작해서 운전을 하기 어려워 지게 되자 자신의 자동차, 사브 컨버터블을 정비해주는 카센터 주인으로부터 운전기사 하나를 소개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 운전기사가 20대 초반의 여자운전사에요. 평소에 가후쿠는 여자들의 운전이 ‘지나치다 싶을만큼 난폭하거나 지나치다 싶을만큼 신중하거나’ 해서 신뢰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카센터 주인이 강하게 추천했고, 실제로도 수동 기어가 장착된 자동차를 변속한다는 느낌이 거의 없을 정도로 해내는 것을 보고 결국 기사로 고용하게 됩니다. 

 소설은 거의 말이 없는 여자 기사인 미사키에게 가후쿠가 자신의 죽은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진행이 됩니다. 가후쿠의 아내는 가후쿠와 마찬가지로 배우였는데요, 가후쿠와도 ‘파트너로서 항상 좋은 관계를 유지했었고’, ‘시간이 나면 다양한 문제에 대해 솔직한 의견을 열성적으로’ 나누었을만큼 사이도 좋았다고 해요. 그런데, 아내가 이따금 다른 남자와 잠을 잔거죠. 


5. 서로 사이가 좋았는데, 왜 그랬던 것일까요?


 아내의 잠자리 상대는 주로 함께 영화를 찍는 남자배우였는데, 가후쿠는 왜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함께 했는지, 왜 자야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걸 물어보기도 전에 아내가 암 투병을 하기 시작하게 된거죠. 아내에게 물을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아내는 “어느 것 하나 설명해 주지 않은 채 가후쿠가 사는 세계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가후쿠는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자고 있다는 것을 아는데도 모르는 척하고 연기를 합니다. 가후쿠는 배우였으니까요. 가후쿠는 아내의 마지막 잠자리 상대였던 남자에게 찾아가서 그와 일부러 친구가 되기도 합니다. 아내가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그 남자와 잤는지 알아보고 싶었던 거죠. 자신에게 없는 무엇이 그 남자에게 있었길래 아내는 그 남자와 잤던 것일까? 하지만 가후쿠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합니다. 그 남자는 대단한 연기자라 할 수도 없고, 깊이도 없는 그냥 예쁜 남자였던 거죠. 도무지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미사키도, 아내의 잠자리 상대였던 그 남자도 가후쿠에게 말합니다. “머리로 아무리 생각해봐도 별거” 안나온다고, “아무리 잘 안다고 생각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타인의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본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이죠. 

 저는 소설을 읽으면서 노란색 사브 컨버터블 자동차가 가후쿠의 아내를 상징하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봤습니다. 한 때 이 자동차는 가후쿠가 운전했지만, 지금은 자신이 무시했던 여자 운전수인 미사키가 운전하고 있죠. 이 작품의 마지막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가후쿠는 가죽시트 깊숙이 몸을 묻고, 눈을 감고서 신경을 한 곳에 집중해 그녀가 기어를 변속하는 순간을 감지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역시 불가능했다. 모든 게 너무도 매끄럽고 비밀스러웠다. 귀에 와 닿는 엔진 회전음이 아주 조금 달라질 뿐이다. 오가는 벌레의 날갯짓처럼. 가까이 다가오고, 그리고 멀어진다.”


6. 자동차의 기어 변속 순간 조차 정확히 파악하기는 힘든데, 사람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더 어려운 것이겠지요.


 그래도 이 차의 가죽시트에 깊숙이 몸을 묻고 잘 수 있는 사람은 가후쿠 뿐입니다. 운전하는 미사키가 아니죠. 소설을 읽어보면 가후쿠의 아내가 가후쿠를 깊이 사랑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도 이유는 알 수 없는거죠. 

 이 소설은 인간과 인간이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소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이해할 수 없지만 묻지 않고, 묻고 싶어도 참고, 모른 척 하고 연기하면서 살아가는 엇갈림이라할까요, 그런 불일치가 사랑의 본질은 아닐까 하고 저는 생각해봤습니다. 하루키 소설에서 여자가 다른 남자와 잠을 자면 갑자기 사라진다고 말씀드렸죠? 하지만 여자만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남자도 사라집니다. 가후쿠의 경우는 눈이 멀고 있고, ‘예스터데이’에서는 여자가 자신을 떠나자 주인공은 미국으로 떠납니다. ‘독립기관’에서 의사 도카이도 여자가 다른 남자와 도망가자 곡기를 끊고 굶어 죽어버리죠. 하루키는 책 어딘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되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한 여자를 깊이 사랑하고, 그러고는 그녀가 어딘가로 사라지면 되는 것이다”.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되는 것은 어쩌면 자기 자신을 잃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7. 방금 정리해주신 ‘드라이브 마이 카’라는 소설에도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는 하루키를 찾아 볼 수 있을까요?

 

 아, 물론입니다. 하루키가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지 않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이 단편을 보면 가후쿠는 아내 사이에 딸이 있었는데 일찍 죽고 자식이 없습니다. 만약 살아 있다면 운전기사인 미사키와 나이가 동갑이죠. 그런데 미사키의 경우는 아버지가 없습니다. 미사키 어머니의 말로는 미사키가 못생겨서 아버지가 버리고 떠났다고 해요. 자식에게는 아버지가 없고, 아버지에게는 자식이 없는 거죠. 이 단편에서 가후쿠는 아내가 왜 그 남자와 자야만 했는지 끈질기게 묻고 있는데, 그것은 가후쿠 자신이 아내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하는 아내에게 있어 자신의 ‘존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루키의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도 있는 대목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8. 하루키 소설은 많이 소개된 편이라 사실 무엇부터 읽으면 좋을지 판단하기 어려웠는데, 이 책으로 시작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가수 윤종신이 한 달에 한 번 월간 윤종신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곡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2014년 8월 28일에 국내에 출간되었는데요, 같은 날짜에 윤종신이 ‘여자 없는 남자들’이라는 같은 제목의 곡을 발표했습니다. 윤종신이 이 책에서 영감을 얻은 곡이라고 합니다. 뮤직비디오의 마지막 장면을 보시면, 영화배우 정우성이 수화기를 들고 ‘여보세요’라고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아마 이 책을 읽어보시면 정우성이 누구를 연기하고 있는 것인지, 왜 ‘여보세요’라고 하고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는지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이 책이 노래를 더 특별하게 만들어줄 것이라 생각하구요, 책과 노래를 한번 보시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책의 제목은 ‘여자 없는 남자들’이지만 저는 하루키 소설 속의 ‘여자’를 나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습니다. 하루키는 뭐든지 숫자로 세길 좋아하고 수치화하기를 좋아합니다. 존재감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특징이죠. 하루키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루키도 슬픔은 잴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슬픔을 간단하고 정확하게 계측할 수 있는 기계가 이 세상에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그렇다면 수치로 산출해 남겨둘 수 있었을 것이다. 그 기계가 손바닥에 들어올 정도의 크기라면 더 말할 나위 없다. 나는 타이어 공기압을 잴 때마다 그런 생각에 잠기고 만다”.


교통방송을 들으시면서, 타이어 공기압을 재시면서, 속도계를 보시면서, 엔진회전수를 살펴보시면서, 슬픔을 측량하고 계신 분들께 이 책을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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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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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기.


나는 한 주에 한 번 교통방송에 나가 책을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 올리는 인터뷰 형식의 리뷰는 모두 그 방송에서 10~12분 정도 책을 소개한 내용의 전문이다. 교통방송을 집에서 듣는 사람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라디오가 결국 자동차용 매체가 되긴 했지만 교통방송은 특히나 운전을 많이 하는 분들이 즐겨 청취하는 채널이다. 그래서 작가는 항상 내게 보다 쉬운 책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한다. 소개도 쉬워야 한다. 나도 쉽게 써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한다. 내가 처음으로 방송에서 소개했던 책이 서경식 선생의 <내 서재 속 고전>이었는데 방송도 나가기 전에 청취자 수준에 비해 어려울 것 같다는 피드백이 돌아왔다. 책은 어렵지만 소개는 쉽게 해줬다는 평을 들었지만, 작가와 PD가 소개해 줬으면 하고 예를 든 책은 '라면을 끓이며'나 '미움 받을 용기' 같은 책이었다. 제목에서 이미 후크가 있는 베스트셀러라야 청취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책을 소개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항상 쉬운 글을 써달라고 나는 부탁을 받는다. 쉽게 쓰더라도 어려운 책이면 안된다. 제작하는 입장에서는 라디오의 청취자들이 '투명사회' 정도 수준의 독서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전제하는 것 같다. 지난 번에 소개한 '사랑하는 안드레아'나 '이노베이터의 탄생'도 어려운 책이라 청취자들이 관심을 갖기 어려울 것이라 단정해 버린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나는 남들이 다 아는 유명한 책과 소개 없이도 읽을 수 있는 쉬운 책들을 별로 소개하고 싶지 않다. 


신문에서도 마찬가지다. 칼럼을 쓰면 항상 '지나치게 철학적이다'라는 평이 돌아온다. 돌려말했지만 어렵다는 것을 내가 철학전공자라는 것을 보고 철학하는 사람은 글을 어렵게 쓴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얼마 전에 어느 신문에 썼던 글에 대해서도 기자는 '쉽게 써달라'고 했다. 사실 내가 그 신문에 소재로 쓴 그 책은 내가 쓴 글보다 훨씬 더 어렵다. 그리고 책의 모든 글은 어느 신문사에 1년 이상 신문 한면 전체에 한 주에 한번씩 연재되었던 글이다. 


그러니까 글이 독자에게 어렵게 느껴질지 어떨지를 생각하지 않고 글을 쓰기 위해서도 어떤 자격이 필요하다. 글을 어렵게 쓰더라도 이미 독자층이 확보되어 있는 경우나 이미 직업적으로 어려운 말을 해도 좋다고 암묵적인 허락을 받은 경우, 그러니까 교수들이나 변호사들, 평론가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일부러 어렵게 쓰지 않는다. 내 위치에서 보이는 사실과 어려움을 글로 드러내기 위한 과정에서 최대한 쉽게 쓰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런 의도가 실패하거나 주제가 일반적이지 않아서 어렵게 읽혀지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공적 발언권을 얻지 못하고 좁은 나만의 공간에서 독백에 가까운 이야기와 글을 쓰며 살았다. 그리고 가끔씩 신문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내게 허락한 최소한의 발언권을 얻기 위해 신문사나 언론의 요구에 맞춰 글을 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쉽게 쓰라'는 요구는 내가 내 목소리를 내기 위해 얻고자 했던 발언권의 의미를 훼손시킨다. 신문에 글을 쓰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그 때문에 정작 내가 쓰고 싶은 글은 못쓰게 된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읽고 싶은 책을 소개하고, 쓰고 싶은 글을 쓰면 다시 나는 독백의 방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어쩌면 지금도 청취자와 독자에게 나는 소통불가능한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고, 사실상의 독백에 불과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나 역시도 어려운 글을 쓸 권리가 없는 사람과 있는 사람을 구분하며 책을 읽어왔고, 어려운 글을 마음을 쓰고 시간을 내어 읽어주려는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어쩌면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쉽게 쓰고 싶다. 아직 내게  2000자로 생각을 담아 낼 기술이 부족하다는 것으로 변명을 할 뿐이다. 쉬운 글은 아니지만 쉽게 쓰려고 노력했기에 쉽게 쓰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다.




투명사회



1.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떤 책을 소개해주실 건가요?


 네, 이번 주에 제가 소개해드릴 책은 출판사 문학과 지성사에서 만들고, 한병철이 쓴 <투명사회>라는 책입니다. 제 전공이 철학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이 책은 우리 사회에 대한 철학적 진단이 담겨 있는 책입니다. 한병철 선생님은 <피로사회>, <시간의 향기>라는 책에서도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날카롭게 진단하기도 하셨는데요, 특히 <피로사회>의 경우는 인문학 분야에서는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인기를 얻은 책입니다. 현재 독일 베를린 예술대학 교수로 있고요, 오늘 소개할 <투명사회>도 독일어를 쓰여진 것을 서울대 김태환 교수가 번역한 것입니다. 번역도 좋아 잘 읽힙니다. 


2. 잘 읽힌다고는 하셨지만, 사실 철학이라고 하면 어렵게 느껴지거든요. 철학적 진단을 담고 있는 책이라니 일반 독자들에게는 어렵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는데요.


 철학이라는 말만 들어도 어렵다고 느끼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글이 어렵다는 말을 돌려 말할 때 ‘글이 너무 철학적이다’라고 말할 정도니까요. 사실 저도 신문이나 잡지에 글을 쓰면 그런 평을 받기도 하는데요, 오늘은 책에 대해서 말씀 드리기 전에 ‘철학책’을 읽는 방법에 대해서 먼저 말씀드려보고 싶습니다.

 사실 제가 알려 드리는 방법이 철학책 읽기를 쉽게 해주지는 않을 거에요. 그래도 철학책을 읽는 것이 대단히 재밌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데는 도움이 되실 겁니다. 철학책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철학자들이 개념을 아무 설명 없이 그냥 사용하기 때문이거든요. 그런데 사실 철학자들은 글을 쓸 때 항상 어떤 상황이나 현상을 염두에 두고 씁니다.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내용이 나온다면 이 사람이 어떤 ‘현상’을 두고 하는 말인가를 한번 생각해 보시면 글이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면, 이 책 <투명사회>도 언뜻 보면 추상적인 내용처럼 보이지만 요즘 자동차마다 설치된 ‘블랙박스’를 생각하면서 읽는다면 전혀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블랙박스에 대해 말하고 있는 이 철학자의 글이 정말 맞는 말인지 따지고 물어가면서 읽어보면, 철학책만큼 재밌는 책이 또 없거든요. 이 책의 내용이 어떤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인지 생각하면서 읽으면 어려운 철학책이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어요. 그리고 사실 <투명사회>는 본격적인 철학책이기 보다는 철학에세이라 보시는 편이 맞습니다. 

 예전에 제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라는 책을 소개해드렸던 적이 있죠? 그 책도 소설 읽듯이 읽으면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만, 실제로 우리가 책을 읽는 방식과 책의 내용을 비교하면서 읽는다면 재미있는 독서가 되는 거죠.


3. 말씀을 들어보니 소설이나 시 읽기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책을 읽으면서 우리의 경험을 비춰보게 되잖아요? 


 네, 그렇습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공감이 되는 때는 소설 속 내용이 우리 삶의 경험과 일치한다고 느낄 때이니까요. 지어낸 이야기인 소설이 진실이 되는 것이 바로 그럴 때죠. 그런데 문학은 이야기가 있다보니 몰입이 쉬운 편인데 철학책은 그렇지 않다보니 읽기가 상대적으로 어렵게 느껴지는 거지요. 

 오늘 소개해드릴 <투명사회>라는 책도 우리가 매일 만나는 현실의 경험에 비춰서 읽어나가면 정말 재미있는 책입니다. 금방 블랙박스 말씀을 드렸는데요, 블랙박스 제품 중에 ‘다본다’라는 것이 있거든요. 아시나요? 그런데 벤담이 생각한 원형감옥의 이름이 판옵티콘인데요, 판옵티콘에서 pan이 ‘전부’라는 뜻이고, optic이 ‘본다’는 뜻입니다. 원형감옥은 한 사람이 중앙에서 죄수 전부를 감시하는 구조로 이뤄져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여졌는데요, 블랙박스 ‘다본다’는 우리 사회가 일종의 감시 체계인 원형감옥 판옵티콘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거죠. 


4. 아, 그러니까 투명사회를 ‘원형감옥’과 같은 사회로 생각하면서 서로 서로를 감시하는 사회라고 생각하는 것이군요. 그런데 블랙박스만 하더라도 저자의 말처럼 꼭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가 있을까요? 블랙박스 덕분에 생긴 장점도 많은데요.


 네, 우리 경험에 비춰보면 꼭 블랙박스의 장점이 있어서 좋은 점이 참 많지요. 블랙박스 덕분에 교통사고가 났을 때 과실을 더 정확히 따질 수 있게 되어서 억울한 일이 줄어들고, 범죄 예방이나 범인 검거도 더 용이하게 된 것은 분명히 좋은 점이라 할 수 있을 거에요. 그런데 한병철 선생님은 그것을 “좋게만”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즉 투명한 사회가 항상 좋기만 한 것인지, 정말 개인과 사회에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는 건데요, 이 책에는 꼭 그렇게만 볼 수 없는 이유가 무수하게 나오고 있어요. 


 한 예로 ‘투명한 정치를 만들자’라는 구호는 언뜻 보면 바람직한 요구지만, 정보를 즉각적으로 공개하는 것이 반드시 바람직하다고만은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정치인들이 장기적 계획을 세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지게 됩니다. 즉흥적이 되는 거죠. 투명해져야 한다는 것은 ‘정직해져야 한다’는 말이기도 한데요, ‘정직’은 신뢰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덕목이지만, 정치적 통치술이기도 해요. 주인이 노예와 같이 일하지 않는 한 노예에게 정직해야 한다고,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쳐야 ‘관리와 통제’가 가능하니까요. 영화 <노예 12년>을 보면 흑인노예를 일요일 아침에 불러 모아놓고 백인 주인이 정직해야 한다고 설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투명해야 한다는 요구도 맥락에 따라 살펴봐야 한다는 것을 이 책은 말하고 있는 겁니다.


5. 조금 이해가 되는데요, 긍정적으로 보이는 것도 꼭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런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겠네요.


 방금 말씀하신 그런 면 때문에 한병철 선생은 ‘부정성’의 철학자라고 불립니다. 부정성이라는 말도 말은 어려운데 의미는 단순합니다. 우리가 소위 부정적이라 여기는 것들의 가치를 생각해보자는 말인데요, 우리는 나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것, 나의 의지와 통제에 따르지 않는 것, 나에게 거역하는 것, 내가 원하지 않는 것,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 혐오스러운 것, 이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여기는데요, 금방 말씀드렸던 것처럼 부정적인 것이 꼭 나쁜 것만이 아니라는 거죠. 그러니까 투명하지 않는 것이 반드시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는 겁니다. 사실 ‘자유롭다’는 기분이 언제 가장 크게 생겨나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나 외에는 아무도 없는 집, 비밀스러운 시간, 나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고 나를 아는 사람을 만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곳, 그러니까 내가 투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사람들은 자유롭다고 느끼고, 새로운 생각과 꿈을 꾸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페이스북에는 이런 부정성이 없죠? 오직 마음에 드는 글에 반응할 수 있는  ‘좋아요’ 버튼만 있고, ‘싫어요’ 버튼은 없습니다.


6. 정말 그런 면이 있네요. 우리 사회는 그런 부정적인 것들이 없는 상황을 오히려 자유로 느끼는 때가 많지만, 모든 것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것도 자유롭지 않을 것 같아요.


 역사와 문명이 진보하는 과정이라는 것이 나의 의지대로 되지 않고,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을 축소시키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스마트폰은 궁금한 것을 더 이상 참지 않아도 되도록, 필요한 정보를 즉각적으로 얻을 수 있도록 해서 불편을 엄청나게 줄여줬다고 할 수 있을텐데요, 다른 한편 우리는 스마트폰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나요? 끊임 없이 SNS에 접속을 하고, 강박적으로 검색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게 된거죠. 그런데요, 이것이 단지 중독을 초래한다는 것은 정말 사소한 문제에 불과합니다. 한병철은 우리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 사적인 사진과 글을 마치 노출증 환자처럼 끊임 없이 올리고 자신의 정보를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공개하는 것이 모두 자본주의 기업들의 요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페이스북을 보면요, 거기 자신의 이름이나 얼굴만 올리는 것이 아니에요. 출신학교, 좋아하는 책, 연예인, 영화, 온갖 취향까지도 공개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기업 입장에서는 좋은 마케팅 재료인거죠. 

 

 검색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구글이나 네이버 등 검색 사이트에서는 개개인들이 무엇을, 어디서, 언제 검색했는지 모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게 범인들 검거에는 확실히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사실은 기업과 국가가 마음만 먹으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관리하고 지켜볼 수 있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 책은 <투명사회>는 사회는 사실상 통제 사회와 다를 바 없다고 진단하는 겁니다.


7. 애플이 아이폰 사용자의 위치를 추적해서 기록해서 몇 년 전에 문제가 되었던 적도 있었죠? 인터넷 사이트에 회원 가입을 하면서 무심코 하게 되는 ‘정보제공동의’에 그런 의미가 있었던 거네요.


 카카오톡의 경우도 그렇죠? 카카오톡에서 오고 간 이야기가 모두 저장되어 있어서 검찰이 수사 과정에서 기업에 정보를 요구했던 적이 있다고 하는데요, 이 책에 따르면 바로 감시 사회가 디지털에서 완성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이 책에 따르면 투명사회는 감시사회, 통제사회인데요, 결국 이것은 인간 관계의 타락으로까지 이어진다고 합니다. 


8. 관계가 투명하면, 관계면에서는 더 좋을 것 같은데 그건 왜 그런 걸까요?


 아까 한병철 선생을 ‘부정성의 철학자’라고 소개해드렸는데요, 이 책에서는 ‘오직 투명한 것은 기계 뿐’이라고 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본래 불투명하고, 그래서 그 불투명함 때문에 ‘신뢰’라는 것이 중요해지고 깊은 인간 관계도 생겨난다는 거죠. 투명하기만 하면 다른 사람을 신뢰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모든 것이 투명할 때 ‘믿음’이라는 것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것이 되는거죠. 상대가 다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다 드러나지 않는 그런 비밀스럽고 은밀한 부분에 대해서까지도 믿는다는 것이 믿음의 가치이지, 투명하게 명명백백하게 드러난 것을 믿는다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인 거니까요. 깊은 인간 관계라는 것이 ‘믿음’에 기반하고 있다면, 더 이상 누군가를 믿을 필요 조차 없이 투명한 사회에서는 인간관계가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이 책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기계는 우리를 속이지 않지만 기계와의 관계가 깊은 관계일 수가 없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죠.


 이런 가정을 한번 해볼까요? 만약 나와 가장 가까운 친구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을 내게 말했다거나, 친구가 가장 숨기고 싶은 과거를 내가 우연히 알게 되었다고 가정을 한번 해봐요. 이 경우 두 사람 간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가장 친밀한 사이에서 가장 은밀한 이야기를 했으니 관계가 더 깊어질까요? 아마 이런 경험을 해보신 분은 공감하실텐데요, 이런 경우 서로의 비밀이 서로에게 알려지는 순간 그 관계는 얼마가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만약 그 비밀을 말해 준 친구가 그 사실을 숨기고 싶었을 때 내가 그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불편하게 느낄 것이 분명하거든요. 비밀은 비밀로 남아 있는 것이 관계를 오래동안 유지하기는 훨씬 좋지요. 


9. 아 그런 면이 있겠군요. 우리 청취자들이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에 대해서 정리해주시죠.


  이 책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좋은 것이라 인식하는 것들의 다른 측면을 보도록 도와줍니다. 투명성에 대한 요구가 지배자의 통치술일 수 있고, 감시와 통제를 가능하게 한다는 거죠. 친밀함이라는 것도 무조건 긍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적인 삶이 무너진 자리에 사적 관계가 자리잡게 되니까요. 우리 사회의 지역주의 문화나 학벌 문화나 이런 것이 모두 법과 공공성 대신에 사적인 친밀함이 중시되기 때문에 나오는 것일 수 있는거죠.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도 우리에게 더 넓은 관계를 맺도록 도와주지만 우리가 페이스북에 올라온 사진과 글에 ‘좋아요’를 누르는 것으로 진짜 관계를 맺지 못하고, 편리한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우리를 오히려 가두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이 책은 말합니다.


 이 책은 얇고 작은 책이지만 결코 쉬운 책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차마다 붙여진 블랙박스를 생각하면서, 인터넷과 SNS, 디지털 카메라를 생각하면서 읽어보신다면 그동안 생각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독서 경험이 되실 겁니다.


 이 책에는 한계점도 적지 않습니다. 책의 전체 내용이 투명사회라는 현실에 대한 스케치에 치중되어 있어서 대안을 찾기 어렵다는 점에서, 또 책을 다 읽고 나면 출구가 없다고 느껴지는 점, 그리고 내용이 지나치다 할만큼 관념적인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즉 페이스북의 시대, 블랙박스의 시대의 어두운 측면을 직시하는 힘을 갖길 원하는 분들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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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안드레아 - 열여덟 살 사람 아들과 편지를 주고받다
룽잉타이.안드레아 지음, 강영희 옮김 / 양철북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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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안드레아

열여덟 살 사람-아들과 편지를 주고 받다



1.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떤 책을 소개해주실 건가요?


오늘 제가 소개해드릴 책은 양철북 출판사에서 만들고, 룽잉타이와 안드레아가 쓴 <사랑하는 안드레아>입니다. 룽잉타이는 엄마이고, 안드레아는 룽잉타이의 아들인데요 제목에서 눈치셨겠지만 이 책은 룽잉타이와 안드레아, 그러니까 엄마와 아들이 주고 받은 편지 서른 통을 엮어서 만든 책입니다. 일종의 서간 문학이지요. 


2. 엄마와 아들이 주고 받은 편지로 엮은 책이라니 독특한 기획이라 호기심이 생기는데요, 청취자분들을 위해서 이 책의 작가에 대해서 좀 더 소개해 주세요.


 네, 룽잉타이는 대만의 대표적인 지성으로, 중화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 5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한 사람입니다. 타이베이 시 문화국 국장을 지내기도 했고, 독일, 스위스, 홍콩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교수이기도 합니다. 룽잉타이에게는 두 아들이 있는데요, 큰 아들이 안드레아, 작은 아들이 필립입니다. 이름이 중화권의 이름이 아니지요? 거기에는 이유가 있는데요, 룽잉타이가 독일인 남편과 결혼을 해서 낳은 아들이라 두 아들 모두 소위 ‘혼혈아’들입니다. 따지고 보면 순혈은 없기 때문에 혼혈아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은 말이기는 한데, 룽잉타이의 아들들은 어머니는 대만사람, 아버지는 독일사람이니까 평범한 가정이라 하기는 어렵겠지요. 그런데요, 룽잉타이도 난민의 딸로 태어난 ‘실향민’이에요. 우리로 치자면 다문화가정이라 할 수 있지요. 이 책에서 안드레아는 독일의 고등학교라 할 수 있는 김나지움에서의 마지막 학년(2004년)을 보내고, 홍콩에 있는 대학에서 생활하고 있는 21살(2007년) 때까지 3년 동안 엄마와 편지를 주고 받습니다. 독일, 홍콩에서 지내는 안드레아와 타이완에서 지내는 엄마가 서로 공개편지를 주고 받은 거지요.


3. 아 그러니까, 개인적인 편지가 아니라 공개적인 편지였군요. 열 여덟 살의 아들과 엄마가  편지를 주고 받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인데, 공개적으로 썼다니 저로서는 놀랍네요. 한창 예민할 나이잖아요?


 네, 맞습니다. 안드레아도 평범한 열여덟 살이고 정말 예민하고 까칠한 성격이에요. 엄마 룽잉타이는 그런 열여덟 살 아들과 대화하기가 아주 힘들었다고 해요. 대만의 최고 지성인 룽잉타이도 아들은 어려웠던 거죠. 룽잉타이가 아들과 편지를 주고 받게 된 이유를 쓰고 있는 한 부분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방학 때 만나서도, 안드레아는 거의 모든 시간을 친구와 보내고 싶어했다. 나와 저녁 식탁에 마주 앉아서도 아이는 침묵만 지켰다. 눈은 휴대폰에 가 있었고 손가락은 문자를 보내느라 바빴다. 나는 그 애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것은 좋아하는 것과도, 그냥 아는 것과도 다르다. 사랑은 때로 좋아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소통하지 못할 때 핑계거리가 되곤 한다. 사랑이 있으면 제대로 된 소통은 없어도 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아니, 나는 이 함정에 빠져들지 않으려 한다. 남자아이 안안을 잃어버린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성장한 안드레아를 알아갈 수는 있는다. 나는 이 사람을 알아야 한다. 나는 열여덟 살의 이 사람을 알아야 한다.


  룽잉타이는 안드레아가 어린 시절에 ‘안안’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고 해요.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사랑스러운 안안은 없어져 버린 거지요. 엄마 손을 잡고, 눈을 떼지 못하게 하고, 안기고, 같이 놀자고 졸라대던 아이는 더 이상 없고 안드레아만 남은 거에요. 안드레아는 엄마가 다가가면 물러가고, 엄마가 대화하자고 하면 “저는 더 이상 엄마의 사랑스러운 안안이 아니에요. 저는 저라고요”라고 대답합니다. 엄마 입장에서는 섭섭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룽잉타이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안안은 사라졌으니까 이제 열여덟살의 안드레아를 이해하기로 마음을 먹고, 아들에게 편지 형식으로 된 칼럼을 신문에 연재하자고 제의를 합니다. 안드레아도 엄마가 쥐어준 마이크를 들고 자기 생각을 크게 한번 말해보자는 생각을 제의를 수락하게 되죠. 원고료도 글을 쓰게 된 이유가 됐구요, 그렇게 이 편지가 시작되게 됩니다.


4. 아들을 이해하려는 엄마와 엄마로부터 벗어나 자기 자신이 되고 싶은 아들 사이에서 주고 받은 편지라고 할 수 있겠네요. 


 맞습니다. 이 책에 부제가 있는데요, “열여덟 살 사람-아들과 편지를 주고 받다”입니다. 그냥 열여덟살 아들이라고 쓰지 않고, 열여덟 살 사람-아들이라고 되어 있는데요, 여기에는 아들이 그저 내 아들이기 전에 어떤 ‘사람’이라는 사실이 강조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부모에게 종속된 존재이기 이전에 독자성을 가진 독립적인 주체이고, 또 그래서 엄마에게는 어느 정도의 거리감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열여덟 살 사람-아들’이라는 말이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 편지를 읽어보면요, 두 사람의 편지를 읽는 것이 예상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다정다감하다할까요, 달달하다고 할까요, 그런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이 편지와 편지 사이에서 팽팽한 줄다리기처럼 이어집니다. 가끔씩 안드레아가 엄마의 말에 동의를 하기도 하고, 고분고분하다가도 이내 대만 최고의 지성인 엄마를 공격하고 비꼬고 조롱합니다. 그런데 엄마도 그냥 져주지 않습니다. 화를 내고 따지고, 아들이 모르면 독자들이 불편하게 느낄 정도로 아들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이런 긴장 관계는 책의 첫 시작부터 끝까지 이어져서 마지막 편지에서는 이런 긴장이 해소되기는 커녕 오히려 그 긴장감이 더 고조되기도 합니다.


 한 예로요, 두 아들이 여름 학기 인턴을 상하이로 가기로 결정을 하니까, 엄마도 뛸뜻이 기뻐 연구여행을 상하이로 가기로 결정을 하게 되요. 가족들이 홍콩, 독일, 대만 등에 흩어져 지내다 보니 모처럼 모자 셋이서 한 달을 보내는 것에 대한 기대로 즐거운 상상에 빠진 거죠. 그리고 엄마가 직접 독일에서 자란 유럽 아이들에게 직접 중국을 알려줄 수 있어 신이 났다고 해요. 그런데 그런 엄마를 향해 안드레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겨우 저만의 독립적인 공간을 가지게 됐는데 왜 또 엄마랑 같이 지내야 하죠? 나중에 제가 일하러 가는 도시까지 따라올 생각은 아니죠? 엄마 손에 이끌려 중국을 이해하러 다니는 것만은 사양할게요. 엄마는 뭐든 다 알아서 척척 계획해 놓지만, 현실이 어디 그런가요? 저 혼자 중국을 알아볼께요”.


5. 음.. 상당히 냉정하네요. 그게 유럽과 아시아의 가치관 차이일까요?


 엄마는 아들의 유럽식 가치관에 지치고, 아들은 엄마의 아시아식 가치관에 지친 것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이 책 전체가 방금 말씀 드린 것 같은 엄마와 아들이라는 두 사람, 두 문화, 두 세대 간의 긴장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엄마와 아들은 흡연에 대한 생각도 다르구요, 취향도 다르고,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도 다릅니다. 이를테면 아들은 흡연이 자신의 자유와 관련된 부분이라고 생각하지만 엄마는 아들의 자유는 존중하고 싶지만 담배 필 때마다 아들을 때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해요. 안드레아는 룽잉타이가 좋아하는 ‘사운드오브뮤직’을 키취라고 거부하구요, 심지어 자신이 생각하는 키취 탑10에 ‘엄마의 사랑-모성애는 절대적인 키취’라고까지 씁니다. 


 안드레아는 엄마가 18살 아들을 이해했다는 식으로 말하는 태도, 즉 자신이 가진 가치관을 설명하려는 태도에 대해서도 모조리 조소합니다. 안드레아가 개방적이고 개인적인 태도를 가지게 된 이유를 유럽에서 1968년에 있었던 문화운동이었던 68혁명으로 엄마가 설명하면, 안드레아는 자신을 그런 식의 설명으로 재단하지 말라고, 엄마가 생각하는 것보다 자신은 훨씬 더 복잡하다고 딱 잘라서 말해버립니다. 


 저는 이 책을 보면서 어쩌면 부모와 자식 간의 문제라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부모는 자신의 기준과 경험으로 자식을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애쓰고, 자식은 부모가 자신을 신비와 복잡함을 가진 한 사람의 존재로 인정받기 위해 애쓰고... 그런 점에서 안드레아와 룽잉타이 사이의 편지는 부모님과 나와의 관계, 또 나와 내 자식 간의 관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6.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쉬운 것 같으면서도 정말 어려운 것 같아요. 많은 경우는 작가의 말대로 사랑을 핑계삼아서 정말로 소통하지 않기 때문에 쉽다고 느끼는 것 같거든요.


 사랑하니까 이해해주겠지라고 생각해 버리는 경우가 정말 많은 것 같습니다. 사랑하니까 떨어져 있어도 되고, 사랑하니까 말하지 않아도 되고, 사랑하니까 상대에게 희생을 강요하기도 하는 것일 수 있으니까요. 제가 몇 해 전에 <철학자 아빠의 인문 육아>라는 책을 쓴 적이 있는데요, 그 책을 쓴 이유도 어쩌면 거기에 있습니다. 아이 엄마가 미국으로 떠나고 나서, 세 살 아들을 키우는데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 몰랐던 거지요. 그냥 사랑하면 만사가 다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이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랑말고도 끊임 없이 대화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했던 거죠. 저는 세 살 아이를 아빠로 혼자 이해해보려고 일기의 형식으로 글을 쓴 것이라면 <사랑하는 안드레아>에는 엄마 룽잉타이와 아들 안드레아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담겨져 있습니다. 저도 이 책을 보면서 제 아들이 저와 뽀뽀를 하지 않을 날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섭섭하기도 하고, 그 때를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7. 책을 살펴보니, 그냥 일상적인 편지라고만은 여겨지지 않았어요. 작가가 유명한 지성인이기 때문인지 상당히 인문학적이라는 인상도 받게 되는데요.


 네, 맞습니다. <사랑하는 안드레아>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깊이 성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어쩌면 부모와 자식의 관계라는 주제는 책의 일부분에 불과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룽잉타이의 경력 답게 정치, 윤리, 문화, 예술에 대한 폭 넓은 이해를 주는 책이기도 하기 때문인데요. 사회 문제에 적극 참여하는 엄마는 열여덟의 아들에게 “너희 세대의 도덕은 무엇인지” 묻습니다. 그러자 안드레아는 중국여성들이 비인도적인 작업환경에서 나이키를 생산하지만 자신은 나이키를 신을 거고, 맥도날드가 소고기 생산을 위해 남미의 원시림을 파괴하고 있어도 맥도날드에 안가지는 않을 거라고 하면서 자신을 100% 나쁜 놈이라고 해요. 윤리적인 딜레마에 빠진거죠. 그런 아들에게 룽잉타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는 성인이 아니야. 엄마는 엄마가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거야. 도덕의 취사선택은 개인의 일이야. 논리가 끼어들 필요가 없어”라고 하며 도덕적 순결주의에 빠져 자책하고 있는 아들을 구해냅니다. 그리고는 도덕적으로 불안을 느낀 아들을 격려하면서 거짓말하는 정부를 비판하고, 멍청한 정책 결정에는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또, 홍콩의 대학에 간 아들이 독일에 비해 문화 수준이 낮은 것을 두고 불평을 합니다. 거기에 엄마는 문화가 있기 위해서는 프랑스와 영국의 예술가들이 카페에 죽치고 앉아 있었던 것 같은 여유가 필요한데 홍콩처럼 세계에서 노동시간이 가장 긴 나라에서 그것이 가능하냐고 묻습니다. 안드레아는 엄마의 편지 때문인지 수업을 빼고 홍콩에서 있었던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에도 나가기도 합니다.


 문화나 정치, 예술 여러 분야에 대해 최고 지성을 지닌 엄마가 사랑하는 아들을 훌륭한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원포인트 레슨을 하는거죠. 그런 가르침을 이 책을 통해 공유할 수 있는 점도 이 책의 큰 장점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8. 이제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요, 마지막으로 이 책을 우리 청취자들이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정리해주시죠.


 이 책에서 룽잉타이는 “부모는 말이야, 끊임 없이 자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기쁘면서도 슬프고, 달려가 안고 싶으면서도 불러세우지 못하는 그런 존재”라고 합니다. 안드레아는 3년간의 편지쓰기를 통해서 엄마와 자신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엄마를 알아가야 한다는 ‘소임’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제가 여기서 책을 소개하지만 저는 세상에 꼭 읽어야 할 책은 없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이 책은 좀 다릅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자식이고, 또 누군가의 부모이거나 부모가 될 사람이기 때문이죠. 저는 육아책을 쓴 작가이고, 여러 곳에 글을 쓰기도 하고 강의도 하지만 이 책을 통해 부모가 된다는 것에 대해서 이전에 하지 못했던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독특한 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룽잉타이와 안드레아의 각 편지 뒤에는 두 작가가 받은 메일과 댓글, 또 두 사람의 채팅 대화 등이 수록되어 있어서 각 편지가 어떻게 쓰여졌는지, 또 어떤 반응이 있었는지 뒷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편지 형식의 글이 가진 장점일텐데요, 두 사람의 대화에 함께 할 수 있고, 또 다른 많은 독자들은 이 글에서 어떤 것을 느꼈는지도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두 모자의 대화도 엿보시고, 책을 읽어보신 후 부모님께 혹은 자녀에게 편지를 한번 써보시는 것은 어떠실까요? 이 책을 통해 사랑한다는 핑계로 미뤄뒀던 속마음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편지에 담아 보시게 되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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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베이터의 탄생
토니 와그너 지음, 로버트 콤프턴 영상제작,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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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베이터의 탄생>에 대한 소개를 시작하기 전에.


1. 이번 주에는 토니 와그너의 <이노베이터의 탄생>을 라디오에 나가서 소개했다. 나는 이 책을 지난 12월에 있었던 플레이어스 캠프에서 소개 받게 되었다. 엄윤미 대표님은 이 책이 자신이 읽은 2015년에 가장 인상 깊은 책이라고 소개했다. 엄 대표님의 여러 소개와 함께 책 제목에 끌렸다. 나는 조사 '의'가 불투명한 면이 있어 늘 지적을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의 제목들은 한결같이 '~의 ~' 라는 형식의 제목들이다. 내 서재 속'의' 고전, 소년'의' 눈물, 사랑'의' 단상, 철학자 아빠'의' 인문 육아 등. 물론 마지막 책은 공감을 얻기 어렵겠지만, 내 글에 '의'가 많이 쓰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노베이터'의' 탄생이라니 뭔가 근사해 보였다. 읽게 된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다. 제목에 '의'가 들어가 있다는 것. 그래도 엄윤미 대표님이 소개해주시지 않았다면 나는 몰랐고 읽지 않았을 책이다. 책을 만나도록 주선해주신 엄대표님께 감사드린다. "엄대표님 덕분에 만나게 된 사람들이 많고, 이렇게 읽게 된 책도 많습니다".


2. 아주 유익했다. 책을 읽는 한 주동안 몇 사람에게 권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노베이터의 탄생> 읽기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의 세 영역을 통합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놀이-부모-가르치는 이 세 가지 역할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짜여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돌아보면, 이 책에 적힌 혁신가들의 이야기와 혁신가가 탄생하게 된 스토리는 한결 같이 당연한 것들인데 읽기 전에는 계속 갈등했던 것들이다. 교육이나 육아의 방향에 대한 분명한 전망을 이 책이 열어주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3. 나는 이 책을 나를 거쳐간 많은 학생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애들아, 꼭 읽어봐'. 아마도 이 사회의 젊은 세대들은 이 책의 많은 이야기가 한가한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른다. 다른 길을 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이 책을 줄여준다. 그리고 한 길만 가라고 권하고 믿었던 나 자신에 대한 반성도 생긴다. 학생들은 한결 같이 의사, 약사, 한의사, 판검사(변호사가 아니다), 교수, 여학생이라면 외교관, 아나운서, 교사를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진로로 믿고 자라난다. 나는 학생들에게 "그것을 통해 실현하고 싶은 가치가 뭐니"라고 물으면 대개 "안정적이잖아요"라는 말로 돌아온다. 

이 학생들의 문제가 아니다. 학생들이 안정적이지는 않지만 하고 싶은 일을 말하면 아마도 주변 사람들이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 그 진로가 얼마나 허무맹랑한지를 두고 설교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전 항공운항학과에 다니는 여학생을 만났다. "학생은 왜 승무원이 되고 싶었나요?". 그 학생은 "여행이 좋아서요"라고 대답했다. 여행이 좋으면 여행가를 꿈꿀 수 있는 교육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그 여행가가 적당한 돈도 벌고, 또 세계에도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여행가면 여행가라는 꿈은 지지받을 수 있고 응원받을 수 있는 것일텐데 어른들의 좁은 상상력이 학생들에게 여행을 하기 위해 승무원이 되어야 한다는 길로, 더 먼 길로 우회하도록 만들지는 않았는가. 어쩌면 내 조언도 그런 수준이었다는 것에 후회감이 든다. 물론 지금은 취업도, 학비를 감당하기도 힘든 상황이겠지만 그런 학생들에게 나는 '두개의 심장을', '두개의 마음을', '두개의 의지를', '두개의 꿈을' 갖고 살아가라고 권하고 싶다. 그런 분열적 상황이 우리를 성장시키는 힘이 될테니까. 아마도 우리 교육과 사회의 비참함은 분열을 권하지 않는다는 것에, 분열을 병적인 것으로, 분열을 모순적인 것으로, 분열을 이중적인 것으로, 분열을 기만적이고 위선적인 것으로 평가하는 것에 있는지도 모른다.


4. 이 책의 모든 내용에 동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노베이터는 어쩌면 몽상가들이기 때문에 어떤 문제를 창조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에 집중하는 나머지 어떤 문제의 진짜 원인과 진정한 해결방식에 대해서는 무관심할 수도 있다. 그라민 은행이 사실상 방글라데시에서 새로운 착취기구가 된 점에서나, 이 책의 시리타 게이츠가 꿈꾸는 세상은 더 큰 연대에서 비롯되고, 청소년 범죄의 많은 경우는 경제 문제에서 나왔다는 점, 그런 점에서 보자면 우리는 몽상가들이 세상을 혁신하도록 기다려줄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여기 혁신가들이 몽상가라 하더라도, 이들은 안정만을 추구하는 현실주의자보다는 안전하다는 점이다.


5. 마지막으로 이 책에 나온 혁신가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들은 대학이나 수업, 정교수들이 아니라 종신재직권이 없는 계약직 교수들이 후원을 받아 개설한 수업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돌이켜보면 내게도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장학회에서 만났던 김건호 전도사님, 이재환 학형, 서경식 교수님 같은 사람들이다. 제도화된 수업으로부터 나는 어떤 영감도 받은 적이 없다. 특히 대학 다닐 때 들었던 경영학 수업에 대해서는 완전히 단언할 수 있다. 아웃라이어를 아웃라이어로 만드는 사회, 대학, 상황은 나쁜 것이지만, 아웃라이어는 아웃라이어만이 가지는 높이와 자존이 있다는 것도 기억할만하다. 종신재직권이 한 자아의 자존의 원천이라면 그 자아는 분명히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장학회의 김건호 전도사님 생각이 많이 났다. 진실로 앞서 가 계셨고, 내가 본 어떤 분보다 가장 강력한 사회 혁신가시다. 지금은 목사님이 되셨지만 40세가 훨씬 넘도록 안수를 거부하셨고, 지금은 용산역에서 노숙인 쉼터에서 사역하고 계신다. 나는 장학회 덕분에, 장학회를 이끄신 당시 전도사님 덕분에 제대로 놀이하는 것을 배웠고, 제대로 놀았고, 사람들을 만났고, 세상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 내가 느끼는 한 없는 부끄러움과 자책감의 시작이 거기서부터였을 것이다.

스스로가 자동판매기가 아니라고 믿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이노베이터의 탄생

세상을 바꿀 인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1. 안녕하세요? 이번 주는 어떤 책을 소개해주실 건가요?


 네, 이번 주에 제가 가지고 나온 책은 출판사 열린책들이 만들고, 토니 와그너가 쓴 <이노베이터의 탄생>이라는 책입니다. 그동안 제가 소개해드렸던 책은 에세이, 시화집, 여행기처럼 한마디로 규정해서 말씀드릴 수 있었는데요, 이 책은 한마디로 규정이 쉽지 않는 책입니다. 이 책은 우선은 교육학 책인데요, 다른 한편으로는 경영학 분야의 책이기도 하구요, 세계의 고등 교육에 대한 책이기도 하고, 부모 교육서이기도 합니다. 아이가 있는 부모님, 또 교육에 관심이 있으신 선생님, 또 경영가나 혁신가가 되고자 하는 청년들, 우리 사회의 미래가 궁금하신 모든 분들에게 추천드리고 싶은 책입니다.


2. 여태껏 소개하신 어떤 책보다도 적극적으로 추천해주셨는데요, 이 책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나요?


 이 책의 저자는 토니 와그너라는 하버드대학 교육학과의 교수입니다. 토니 와그너의 관심은 이 책의 제목 그대로인데요, 이노베이터, 즉 혁신가는 어떻게 탄생하고, 자라는가 하는 것입니다. 영어판에는 없는 한국어판 부제가 “세상을 바꿀 인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로 붙여져 있는데요, 이 책 전체의 주제 의식이 이 질문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토니 와그너는 20-30대의 미국의 젊은 혁신가들을 만나 그들이 걸어온 길을 세심하게 검토합니다. 그리고 젊은 혁신가들을 키운 부모들을 만나서 혁신가들의 부모들은 어떤 양육 방식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조사합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젊은 혁신가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준 선생님이나 조력자가 누군인지를 찾아내 그 사람들과도 일일이 인터뷰를 진행합니다. 혁신가들과의 대화, 혁신가 부모들과의 대화, 혁신가를 지원해준 이들과의 대화에서 저자인 토니 와그너가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을 정리한 책이 바로 이 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처음에 부모님들께, 젊은 이들에게, 선생님들께 이 책을 추천드린다고 말씀드렸던 거죠.


3. 혁신가라는 말은 사실 좀 생소하기도 해요. 인재라는 말이 더 와닿는데 작가가 혁신가라는 말을 쓴 이유가 있을까요?


 네, 아마도 진행자님께서 말씀하시는 부분 때문에 출판사에서도 ‘세상을 바꿀 인재’라는 말이라는 부제가 붙게 되었던 것 같아요. 신문이나 학교에서나 혁신가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은 보편적이지 않은 것이 분명한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은 이것이 우리 사회가 ‘혁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크지 않다는 것은 방증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 책에서 정의하는 ‘인재’는 전통적 의미의 인재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인재는 의사, 변호사, 회계사와 같은 전문 직종에 종사하거나 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거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사람들과 같이 소위 사회적인 성공을 거둔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요, 이 책에서 말하는 ‘인재’는 관습화된 성공, 그러니까 정해진 길로 남들보다 빨리 가서 경제적으로 큰 이익을 얻는 사람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기존에 없었던 문제를 인식하거나, 그동안 우리가 당면했던 온갖 문제들을 기존에 없었던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죠.


4. 그러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경제적으로 부유해지거나 명예 획득 같은 것을 성공이라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인거네요. 그렇다면 혁신가들은 어떤 동기로 일하는 사람들인가요?


 정확하게 보신 건데요, 이 책에 재밌는 사례가 나옵니다. 제가 그 부분을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젊은 혁신가들은 돈과 명예 대신 무엇 때문에 움직이는가와 관련된 부분입니다. 로버트 콤프턴의 말인데요,


 한 무리의 젊은 직원들을 관리하고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일은 지극히 암담한 좌절감을 느끼게 한다. 내가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배운 모든 수단과 기술이, 그리고 대학원을 졸업한 이후로 현장에서 배우고 경험한 모든 것이 아무런 쓸모도 없게 된다. 무엇보다 최악인 점은 전통적으로 그 효과가 검증된 동기 부여 요소, 즉 스톡 옵션이나 수수료, 보너스 등을 제공하는 게 이 세대에게는 반대의 결과를 낳기 십상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회사가 자신을 관리한다는 사실에 불쾌감을 표시한다. 우리 회사의 한 젊은 직원에게 상품 개발을 예정보다 빨리 끝내 준 데 대한 성과급으로 주식과 보너스를 지급하겠다고 하자 그 직원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로버트, 나는 단지 동전만 집어넣으면 작동하는 자동판매기가 아니에요”. “자동 판매기”가 아니라고? 그렇다면 그 젊은 친구를 ‘작동’하게 만드는게 뭐지? 그 말은 지금도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젊은 세대를 움직이는 것은 돈도, 보너스도, 대학 졸업장도 아니라는 거에요. 이 책에는 많은 혁신가들이 소개되는데요, 지금부터 소개드릴 이 혁신가들 중 어느 누구도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돈이 부족해서 걱정을 하지, 자신이 더 많은 급여를 받고자 하기 때문에 일을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커크 펠프스는 아이폰이 처음 개발될 때 애플에서 일했던 사람입니다. 커크는 성공이 어느 정도 보장된 애플사에 남아 있을 수도 있었지만, 자신이 더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자 애플을 그만두고, 벤처 기업을 지원해주는 투자 회사로 갔다가 거기서 좋은 회사를 알게 되어 이직을 합니다. 커크가 지금 일하고 있는 회사는 적당한 가격으로 태양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서 미국의 전력 공급 방식을 획기적으로 전환시키려는 목표를 가진 회사인데요, 물론 아직 제대로 수익도 나지 않고 있지만 커크를 작동시키는 힘은 돈이 아니라 ‘환경 문제’에 자신이 기여하고 있다는 것에서 나옵니다. 


5. 자신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거군요.


맞습니다. 토니 와그너가 이 책에서 다루는 혁신가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부분인데요, 모두 자신에게 재미있는 일을 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커크는 엑시터고등학교를 중퇴했구요, 심지어는 스탠포드대학을 다녔는데 2개의 수업만을 남겨두고 대학도 중퇴해버립니다. 커크가 정말로 뛰어난 사람이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사실은 거기에는 실력보다는 커크의 열정이 큰 몫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커크의 부모는요, “무엇을 공부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며, 그보다는 자신이 흥미를 느끼는 대상을 찾아낼 줄 아는게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끊임 없이 가르쳐왔다고 해요. 그리고 아이들이 일단 어떤 대상에 흥미를 느끼면 흥미가 유지되고 발전되도록 계속 지원해주는 것을 부모의 역할로 삼았다고 합니다.


사실, 이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결코 쉽지 않거든요. 저도 마찬가지인데요, 저는 제 아이가 얼마 전부터 플롯을 배우고 싶다고 했었는데요, 저와 제 파트너는 아이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치고 싶어했어요. 지금 배우고 있는 피아노를 배우면서, 바이올린을 하면 청음이 좋아지지 않을까 생각했던 건데요, 제 경우에서도 드러나지만 부모들은 아이의 흥미 자체를 지지해주기 보다는 아이가 느껴야 할 흥미대상을 미리 정해주고 그 대상에 집중하도록만 요구하는 경우가 아마 훨씬 더 많을 겁니다. 그러니까 법조인이 되어라, 의사가 되어라, 서울대를 가라고 ‘방향’과 ‘답’을 정해주고 그 길을 가도록 하는거죠. 토니 와그너는 이런 식으로는 제도와 사회 시스템에 순응적인 사람으로만 길러질 뿐 절대로 사회를 긍정적인 의미에서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 생겨날 수 없다고 봅니다. 커크의 부모들은 아이들의 놀이를 적극적으로 권장하면서 최대한 자유롭게 놀도록 내버려두고, 그것을 잘 관찰하면서 아이들이 어디에 흥미를 가졌는지 발견하고자 했다고 해요.


6. 저도 아이를 키우지만 아이의 흥미만을 따라간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거든요. 다들 영어, 중국어한다면 왠지 나도 학원을 보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아시겠지만, 헬리콥터 부모, 타이거 마더라는 말이 있죠? 헬리콥터 부모는 아이가 어떤 위험도 감수하지 않도록 미리 모든 일에 개입해서 아이를 보호하는 부모를 말하구요, 미국에서는 하나의 사회 현상이 되었다고 하면서 말이 많은데 우리나라에서는 워낙 일반화되어 있어서 별로 놀랍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타이거 마더는 예일대 로스쿨 교수인 에이미 추아의 교육법인데요, 아이들에게 자유를 주지 않고 매우 엄격하게 아이들이 부모가 정해진 공부를 하도록 양육하는 방식입니다. 토니 와그너의 경우는 이런 방식이 모두 대단히 잘못되었고, 심지어는 역겨운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양육 방식에서는 혁신가는 절대 나올 수 없다는 거에요.


 이 책에는 제이먼이라는 또 다른 혁신가가 나오는데요, 제이먼은 싱글맘 자녀인데다가 경제적으로도 부요하지 않았고, 엄마의 엄격한 교육도 없었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제이먼의 어머니도 커크의 부모와 똑같이 합니다. 제이먼이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내버려두고 그걸 지지해주는 거죠. 제이먼의 경우는 신발광입니다. 운동화를 수천 켤레를 사서 모았고, 8살 어린 나이부터 운동화에 관심을 가졌는데, 당시 갖고 싶은 나이키 운동화를 살 수 없어서 점토로 만들기도 했다고 해요. 보통의 부모라면 말리겠지만 제이먼의 어머니는 제이먼이 신을 수도 없는 점토 운동화를 만드는데 어떤 색깔이 필요하다면 사다 주고는 했다고 하니까 아이의 놀이를 지지해준 겁니다. 커크나 제이먼의 부모 모두 아이들의 놀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한거죠.


7. 아, 그렇군요. 제이먼은 지금은 어떤 분야의 혁신가가 되었나요?


 아, 제가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빼 먹은 것 같은데요, 제이먼은 신발을 디자인하는 일을 하는데, 우연히 신발을 생산하는 중국 공장에 갔다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해요. 환경적으로 너무 열악한 상황에서 제품이 생산된 걸 본 후로 친환경적인 생산 공정을 만들고, 신발에 들어가는 복잡한 제작과정을 통합해서 미국에서도 생산가능하도록 해 미국 내의 일자리를 만들고자 하고 있습니다. 제이먼은 사실 계속되는 실패를 하는데요, 그가 실패하고 다시 일어서는데 가장 중요했던 것을 저자인 토니 와그너는 ‘놀이’에 있다고 합니다. 놀이가 어떤 분야에 대한 ‘열정’으로 변모한다는 거죠. 생각해보면 놀이라는게 몰입을 하게 만드니까 당연한 이야기죠.


8. 이런 혁신가들의 탄생 이야기를 들으면 이런 사람들은 어떤 학교를 다녔을까 가장 먼저 궁금해지게 되요. 좋은 대학 출신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 아닐까?


 사실 저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말씀드렸던 커크의 경우 비록 중퇴이긴 하지만 스탠포드대학 출신이죠. 이 책에 나오는 시에라리온 출신의 데이비드의 경우는 하버드 출신입니다. 하지만 다 그런 건 아니에요. 방금 말씀드린 제이먼도 그렇구요, 미국 청소년 범죄를 줄이고자 노력하는 시리타 게이츠의 경우도 명문대학교의 출신은 아니에요.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요, 이 책에 나오는 모든 혁신가들이 대학이나 학교 교육에 아주 많은 회의를 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커크의 경우는 자신이 다닌 학교에서 받은 영감이 단 하나도 없었다고 말하고 있고, 시리타 케이츠도 지금 다니고 있는 뉴욕시립대학을 때려치우기 직전의 상황입니다. 데이비드의 경우도 학점 관리를 전혀 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정말 공통적으로 자신이 다닌 학교가 끔찍했다고 이야기하는데요, 아마 여기에는 틀에 박힌 학교 교육이 이들의 혁신가적 성향과 맞지 않았던 탓이 클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토니 와그너는 우리가 이런 혁신가들, 혹은 혁신가를 키워 내기 위해서 어떻게 이들을 응원하거나 지원해야 줘야 하고, 교육시스템은 어떻게 바꿔나가야 하는지를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죠.


 좀 더 말씀드리자면 이 책에 등장하는 혁신가들이 학교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않은 것은 아니에요. 그런데 한결 같이 이들이 지목하는 사람들은 대학 내에서 정년을 보장 받지 못한 교수들, 종신재직권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커크에게 가장 큰 영감을 준 애드 교수는 1년마다 재계약을 해야 하고, 조디 우라는 혁신가에게 영향을 준 에이미 스미스 교수는 2010년 타임지에서 뽑은 가장 영향력있는 100인인데도 MIT에서 종신재직권이 없습니다. 여기 나온 모든 영감을 준 멘토가 다 마찬가지에요. 이런 사람들은 제도권 밖의 있는 능력자라는 점에서 아웃라이어라고도 부르는데요, 보통 대학이 요구하는 방식, 그러니까 연구하고 이론을 가르치고 외우고 시험치는 식으로 수업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을 대학이 수용을 못하는 거지요. 이들은 그런 방법 말고 학생들에게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고 스스로 문제를 설정하고 해결하도록 하는 능력 자체에 초점을 둡니다.


9. 혁신가들의 탄생에는 ‘놀이’와 ‘권한 부여’가 있군요. 끝으로 이 책을 지금 우리 청취자들이 읽어야 할 이유가 있다면 정리해주시죠.


 토니 와그너는 혁신가들은 단지 ‘열정’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 열정이 사회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공공적인 목표를 위한 것이어야 끝까지 가게 된다고 보는거죠. ‘사회에 무엇인가 돌려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어쩌면 혁신의 첫 걸음인지도 모릅니다.

 토니 와그너는 이 책을 쓴 이유를 미국의 경제 상황에서 찾습니다. 저성장에, 더 이상 일자리가 없고, 미국이 꿈을 실현할 가능성이 점점 더 낮아지는 상황에서 인류가 당면한 여러 문제를 해결할 혁신가를 응원해줄 방법을 모색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죠? 요즘 젊은 세대에서 헬조선이란 말이 회자됩니다. 꿈을 이루기는커녕 기본적인 생활 조차 위협받는 상황이 된거죠. 우리가 이들의 꿈을 어떻게 교육에서부터 다시 지지해줄 수 있을지 고민하는데 이 책이 많은 도움이 됩니다. 또 이 책은 무엇보다 영감을 굉장히 많이 주는 책입니다. 책 곳곳이 아이디어 투성입니다. 이 책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책은 책의 형식 자체가 책 이상의 혁신적인 책입니다.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변화’를 희망하시는 분들에게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줄 수 있는 책이 아닐까 합니다. 적극 추천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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