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몽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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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강남에 있는 백화점이 무너지면서 평생 말 한번 섞기 힘든 두 여자가 콘크리트더미에 갇힙니다. 한 여자는 상고를 졸업하고 갓 백화점에 들어간 일꾼이고, 다른 여자는 그 백화점 사장의 ‘첩’입니다. 서울에 올라와 자장면은 몇 번 먹었지만 탕수육은 처음 먹는 ‘철거민 여자’에게서 태어난 스무 살 여자와 요즘말로 ‘텐프로’ 출신으로 야코세우며 살아가는 중년 여자는 달라도 너무 다르죠. 하루하루 팍팍하게 살아가는 새내기와 달리 중년 여자는 이렇게 살아갑니다.

 

그녀는 대개 오전 느지막이 일어나 전화약속을 한 다음에, 은색 아우디를 끌고 상가구역 모퉁이에 있는 오성급 호텔 레스토랑에 들러 늘 만나는 친구들 한둘과 점심 먹고 커피 한잔씩 돌리고, 근처의 멤버십 사우나로 옮겨가 쑥탕에 몸을 담그고는 전용실에 모여서 고스톱 몇판을 돌리며 깔깔대다가 전신 마싸지로 피부관리를 받으며 몸을 풀고, 쌀롱 미용실에 들러 머리 매만지고 나와서, 수입 옷가지에 보따리 명품을 단골고객에게만 내놓는, 그 바닥에서 유명짜한 이태리나 프랑스 말로 시작되는 숍들을 차례로 둘러보며 새로운 옷이나 액쎄서리나 백이나 구두 등속이 들어온 게 없나 어슬렁거리며 둘러보고는, 잠깐 상가건물 관리사무소에 들러 세놓는 상가들에 무슨 민원거리나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고, 다시 알 만한 사람들이 모이는 카페에 들러 차나 칵테일 한잔하며 저녁까지 노닥거리다가, 일진이 괜찮으면 분위기 좋은 남녀 지인들과 저녁 겸 술자리를 하고 때로는 그들과 어울려 그녀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룸쌀롱에도 가는데, 그렇지만 다른 친구들처럼 이태원 호스트바로 옮기거나 젖비린내나는 것들과 바람을 피우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황석영씨의 <강남몽>[창비. 2010]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지은이는 1995년,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차례로 무너진 끔찍한 사건에 눈독 들이고 소설을 씁니다. 그즈음이 개발독재가 끝내고 한국 자본주의가 스스로 재생산구조를 갖추게 된 때라고 여기니까요. 이런 정치사회변화에 맞물려 “사회변혁에 대한 열정으로 지식인의 머릿속에서만 형성되어온 민중이 걷잡을 수 없는 소비사회의 적나라한 대중으로 휩쓸려들면서 욕망에 얽혀가는 시대“를 그려냅니다.

 

글쓴이는 오늘날 사람들을 몽땅 빨아들이는 욕망의 소용돌이에 그저 끌려 들어가기보다 저 거센 소용돌이가 일어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요새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욕망하는 꼴이 어떠한지 낱낱이 적기보다 “거꾸로 현재의 삶을 규정하는 최초의 출발점을 향하여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을 쓰죠. 이른바 ‘강남의 계보사’입니다.

 

강남개발을 둘러싸고 수많은 인물들이 울레줄레 얽히고설킨 걸 잡아내면서, 모르는 사이에 한국의 역사를 들춰냅니다. 남한 사회의 욕망과 운명이라는 그물망 속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뒤엉켜 돌아가는지 퍽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권력자들의 꿍꿍이와 친일파들의 기회주의, 건설업자들의 설레발과 조폭들의 주먹질, 졸부들의 게걸과 철거민들의 눈물을 한 데 묶어내면서 묻습니다. 강남을 향한 욕망은 사달이 났단 증상 아닌가요?

 

…서서히 몰락해가는 상류 가족의 일상을 보여주면서 현실세계가 어째서 변해야 하는가를 드러내준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지금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사람살이가 어쩌면 꿈과 같이 덧없는 가상의 현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소설의 제목을 ‘강남몽(江南夢)’이라고 정했다.

 

강남으로 상징되는 욕망에 나남없이 휘우뚱거리고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소설에 나오는 친일파나 독재권력에 빌붙어 콩고물 얻어먹는 사람들을 쉽사리 손가락질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욕망은 이 시대 사람들의 바람과 그다지 다르지 않으니까요. 흥청망청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에 구역질이 나거나 딱하다기보다 부러워할 사람이 쌔고쌨습니다. 자신에게도 기회만 있었다면 강남에 땅이나 아파트를 사두는 건데, 애타는 사람들이 한국에 얼마나 많은지요.

 

-엄마, 내가 나가는 점포에 오는 손님들 보면 정말 돈 잘 쓰더라. 내 월급의 몇배 되는 애들 옷을 여러 벌씩 나가는 거야.

-우리 여사장님이 예전에 광화문 근처에서 요정을 했다는데, 거기서 높은 사람들이 지도 펴놓고 색연필로 표시하며 땅을 나누고 그랬대, 앞뒤를 맞춰보니 느이 아버지 잠실 아파트단지 짓는데 일 나가던 그 무렵이야. 뭐 그런 걸 알았더라도 우리야 땅 사모을 돈은커녕 하루 벌어먹기도 어려운 때였지만.

 

광주대단지에서 쫄쫄 굶던 사람조차 이런 욕망이 가슴 속 깊은 곳에 스며든 지경입니다. 그래서 여느 사람이라면 이 소설을 읽으며 지은이가 바라는 문제의식을 느끼기보다 언제나 권력과 정보를 가진 사람이 돈을 번다는 ‘엉뚱한 결론’에 이르기 십상입니다. 지은이의 뜻과 다르게 사람들의 감각과 의식은 이미 ‘강남몽’에 푹 젖어있기 때문이겠죠.

 

요즘 사람들의 욕망이 삼풍백화점처럼 위험하기 짝이 없는 건 아닐까, 지금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사람살이가 어쩌면 꿈과 같이 덧없는 가상의 현실이 아닐까, 생각하기보다 한탕해서 땀 흘리지 않고 돈 굴리며 살아가는 ‘꿈’을 모조리 꾸고 있습니다. 다리가 뽀개지고 백화점이 아작나도 이 사회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겠다는 욕망을 꺾지 못합니다. 꾸준함과 정직함보다 뻔뻔함과 돈벼락이 더 우러름 받고 있는 시대, 황석영씨의 입담이 잠꼬대처럼 여겨질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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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대학 - 대한민국 청춘, 무엇을 할 것인가?
이인 지음 / 동녘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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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젊은이들이 불안해합니다. 검은 파도가 쉼 없이 일렁이는데다 뿌연 안개에 덮인 상황에서 희끄무레한 섬에 닿아야하는 기분입니다. 가고 싶은 섬이 아슴푸레하게나마 보이면 다행이지요. 그저 어디에만 가야한다고 몰아붙이는 한국에서 젊은이들은 남들과 비슷하게 흘러가고, 그보다 더 많은 젊은이들은 그저 파도를 헤치며 떠있는 게 목표인 세상입니다.

 

청춘, 캬, 감탄이 나와야 하건만 막상 청춘의 한복판에 서 있는 사람은 태평양을 조각배로 건너가는 기분입니다. 팔뚝에 힘은 조금 있지만 까마득하게 펼쳐진 바다 앞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죠. 많은 젊은이들이 이런 기분일 거예요. 과연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잘할 수 있는지, 뭘 해야 하는지, 이것저것 해보면서 작은 보람과 큰 실망을 얻곤 하죠.

 

사람들은 제가끔 생긴 건 다르지만 같은 사회 안에 있으면 비슷한 생각을 품고 비슷한 욕망을 쫓듯 저 또한 다를 수 없었죠. 그렇게 사회에서 하라는 대로 나름 성실하게 했는데 앞날이 환해지기는커녕 갈수록 더 손발이 오그라드는 일들만 쏟아지더군요. 제 안에 일렁이는 파도는 수그러들 줄 몰랐습니다. 오히려 갖추면 갖출수록 더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고, 남들은 저보다 훨씬 많은 걸 준비했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나곤 했죠.

 

그저 이리 쿵 저리 쿵 부딪히며 날마다 기대와 후회를 되풀이하며 하루하루를 버티었습니다. 젊음이란 팔팔한 기운을 허튼 데다 쓰면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청춘을 깎아먹는 듯하여 스스로도 안타까웠지만 그 당시엔 별 도리가 없었습니다. 일상이란 게 쉬이 바뀌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나이는 먹어가는데, 제 모습은 예전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는 데서 오는 조급함과 실망감이 컸습니다. 처음 가졌던 마음은 세파에 이리저리 치이면서 흐트러지고, 제 깜냥으론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어마어마한 일들 앞에서 마음은 움츠려져갔습니다. 세월은 휘리릭 지나가는데, 지난날에 했던 잘못들은 되풀이되고, 깨달음은 뒤늦게 찾아와 저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곤 했죠. 나이를 먹으면 더 의젓해지고 세상일을 두루 꿰뚫어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어떻게 된 게 갈수록 인생살이는 어지러웠고 벅찼죠.

 

나만 믿고 우쭐대던 어제가 지나고 내 부피가 여실히 드러나는 사건들, 너무 단단한 세상에 맞닥뜨리면서 발걸음은 무거워지고 눈빛은 무뎌진다. 내가 어찌할 수 없다고 느끼게 하는 세상사, 반복되며 만나는 행과 불행들, 그 모든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기엔 너무 얕은 가슴.

봄 햇살은 따분하기만 하고 휙휙 바뀌는 바깥세상을 바라보며 가끔 걱정이 든다. 달력은 잘도 넘어가지만 짧기만 한 내 눈길은 아직 멀리를 못 본다. 어리석게도 후회는 이어지고 늘 그렇듯 깨달음은 한 발 늦는다.

늘 모자란 마음의 허기를 채워줄 선생님이 필요하다. 지쳐가는 저녁, 등을 두드려주며 웃어줄 선생님이 필요하다. 지혜를 나눠주고 같이 아파하며 따끔하게 혼 내줄 선생님이…….

 

지난 2007년에 쓴 글입니다. 선생님이 그리웠습니다. 휘청대는 젊음에게 때론 토닥여주기도 하지만 이따금 매섭게 호통도 쳐주시고, 가끔은 어깨동무를 하면서 같이 콧노래를 부르지만 어디로 갈지 헤맬 때는 저 멀리서 이리로 오라고 손짓을 해주는 선생님. 그런 분이 있었다면 지금 겪고 있는 폭풍우 속에서도 내동댕이쳐지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죠. 존경할만한 분보다는 저렇게 되진 말아야지 했던 사람들을 많이 만났던지라 참 선생님이 간절했습니다.

 

자신의 알을 스스로 깨야 하지만 줄탁동시(啐啄同時)라고 바깥에서 누가 도와주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이런 노릇을 선생님들이 해줘야 하는데, 이런 역할을 해주시는 분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존경하는 선생님들도 많이 계셨지만 왜 저런 사람이 선생으로 있는지 이해가 안 되는 경우도 많았으니까요. 많은 젊은이들도 비슷하게 느끼겠지만, 세상의 어른들에게 도움을 받으며 알을 깨고 나와 한 사람의 어른으로 자라는 일은 드물죠.

 

저 또한 홀로 알을 깨려고 몸부림을 치지만 좀처럼 깨어지지 않아 주저앉았던 지난날이 떠올랐습니다. 알을 깨고 싶었습니다. 이 시대를 뜨겁게 살아가는 선생님의 숨결을 옆에서 느끼고, 그들의 표정을 보고 말을 섞으면서 자연스럽게 알을 깨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무작정 1년 동안 선생님들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그 선생님들과의 만남을 묶었습니다. 거세게 소용돌이를 일으키다가도 잔잔하게 토닥여주는 선생님들의 말씀들을 모았네요. 선생님들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뭐가 뭔지 뒤죽박죽이고 겉으론 웃고 있지만 속은 앙상하기만 한 이 시대,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이 책이 자극되길 바랍니다.

 

여기서 잠깐, 젊은이란 나이가 20~30대인 사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젊음은 영원토록 자기 안에서 창조해내야 하는 것이고, 평생 지켜야 하는 가치인 것이죠. 따라서 얼마 살지 않았지만 정신은 폭삭 늙어버린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겉모습은 나이배기지만 속은 누구보다 싱싱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생물학 나이를 떠나 모든 ‘청춘’들을 위해 이 책을 전합니다. 지쳤을 때 힘이 불끈 솟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네요. 또한, 마음이 지쳐 늙은 분도 이 책을 만남으로써 ‘회춘’할 수 있었으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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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 김선주 세상 이야기
김선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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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빚쟁이입니다. 구두쇠처럼 아껴서 살고 있는데 뭔 소리냐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자신의 삶을 한 꺼풀 들춰보면,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을 머금고 있단 걸 알 수 있습니다. 아무도 자기 홀로 자신의 삶을 세우지 못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기대어 살아갑니다.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그나마 누리는 자유와 평등은, 일제침략기에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과 군사독재정권에 대들며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들이 없었다면 아마 주어지지 않았을 테죠. 4.19와 5.18, 6.10에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지 않았다면 요새도 왈패들의 눈치를 보면서 숨죽인 채 벌벌 떨었을 겁니다.

 

꼭 이런 역사들만이 아니더라도 일상을 들여다보면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는지 모릅니다. 쌀을 짓고자 구슬땀 흘리는 농부, 안전하게 갈 데까지 데려다주는 대중교통 운전기사, 공장에서 물건을 만드는 노동자, 새벽부터 움직이는 수많은 사람들…… 이들의 애씀 덕분에 팔팔하며 싱그럽게 살 수 있습니다.

 

물신세계에서 21세기 소비자들이 업신여기는 싸구려 여성주의

 

그러나 이러한 고마움을 일상에서 까먹기 일쑤죠. 돈이란 신을 떠받들며 살기에 고마운 사람들의 땀방울에 시큰둥해하며 손수건을 내밀기는커녕 수틀린다며 툴툴거리기 십상입니다. 왜? 돈을 냈으니까. 소비자가 왕이며, 돈 있는 사람에게 조아려야 한다는 망상이 한국사회에 넘실댑니다. 배를 쑥 내민 채 거들먹거리는 데퉁바리들이 적지 않네요.

 

모든 가치와 의미가 돈으로 셈되어지는 물신세계에서 여성주의도 싸구려로 다뤄집니다. 살만큼 살만해진 젊은 여자들은 여성주의에 심드렁해하죠. 돈이면 다 된다고 믿는 ‘21세기 소비자들’은 성평등도 돈 내면 살 수 있다고 믿으며, 여성운동은 ‘피해의식있는 여자들’이나 하는 짓이라며 절레절레 손사래 치기도 하죠. 이제 성차별은 없다며 깜냥이 안 되는 여자들이나 페미니즘에 빌붙는다며 되레 깔보기까지 하네요.

 

여성주의에 솔깃하지 않을 정도로 성차별을 받지 않는다는 건 반가운 변화지만, 그렇다고 성평등이 이룩된 건 아닙니다. 꽤 많은 여자들이 페미니즘에 떨떠름해하지만 쉽사리 고개 돌려선 안 됩니다. 자신은 선배 여자들이 거칠게 싸우면서 얻어낸 땅 위에 서있으니까요. 요즘 여자들은 지난 페미니스트들이 씨 뿌리고 힘겹게 일군 열매를 손쉽게 따먹고 있을 따름입니다. 언론인 김선주는 이렇게 글을 씁니다.

 

소수의 페미니스트들이 온갖 박해와 방해, 비난 속에서 시작해 이루어놓은 성과물을 대한민국 여성들 모두 무임승차로 공유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다른 부문처럼 아직도 부족한 면이 많지만 여성의 권리는 법적으로 눈부시게 신장되었다. 나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여성들 모두가 페미니스트들한테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에서

 

알파걸들과 골드미스들은 왜 ‘난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란 말을 할까?

 

여성운동이 닦아놓은 길을 요새 여자들이 걸어가고 있습니다. 페미니스트들이 온 몸으로 간신히 열어놓았기에 뒤에 따라오는 여자들이 보다 더 수월하게 가는 것이죠. 알파걸이라든가 골드미스란 말도 페미니스트들이 없었다면 나올 수 없었습니다. 젊은 여자들이 펼치는 반짝거리는 춤사위 뒤엔 묵묵히 연주를 해준 여성운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여자들이 자신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힘주어 얘기합니다. 여성문제를 얘기할 때도, ‘난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란 말을 버릇처럼 붙이죠. 여기서 안타까움이 빚어집니다. 페미니스트들에게 낙인찍고 뭇매 때리는 일그러진 사회에서 여성문제를 꺼낼 때 움츠러드는 건 어쩔 수 없겠으나 이런 사회에 맞서 싸우는 페미니스트들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않으니까요.

 

날아올 돌멩이만 두려워할 뿐, 피멍이 들면서도 앞에서 방패막이 해주는 선배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미안함을 갖지 않는 젊은 여자들이 무척 많습니다. 손대지 않고 코만 풀려는 심리라 할 수 있겠죠. 자신을 갈음하여 선배들이 싸워줬지만 자신은 전리품 챙기는 데만 골똘합니다.

 

물론, 페미니스트라고 했을 때 아직까지 매끈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이기에 요즘 여자들의 멈칫거림을 헤아리지 못하는 바가 아니죠.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대충 남처럼 살라고 윽박지르는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을 실천하기란 만만치 않으니까요. 비겁함과 약삭빠름, 거기에 입다물기가 사회도덕으로서 자리 잡았기에 여성의식을 갖고 살아가기란 몹시 고달프고 벅찬 일입니다.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는다면 여성으로서 제대로 산 인생이 아니다

 

어떤 여자들은 여성주의가 없어도 얼마든지 콧대 세우며 살 수 있다고 우쭐해합니다. 마치 인종차별을 없애려는 노력이 없더라도 성공할 수 있다는 흑인과 비슷하지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자들이 헉헉대고 있는데, 여자에게 얼마 돌아가지 않는 열매들을 자기 혼자 몽땅 차지한 뒤 자신의 힘만으로 얻었다고 흰소리 늘어놓는 사람을 볼 때면 입맛이 쓰죠.

 

여성주의가 너끈하게 퍼졌다고 하지만 올바로 스미지 않았습니다. 외려 여성주의가 더 절절한 시대인데도 내동댕이처지는 느낌이 듭니다. 권리만 늘어놓을 뿐 책임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는 여자들이나 여전히 남성우월의식에 찌든 남자들을 볼 때면, 아직 갈 길이 멀고도 멀죠. 여성운동은 이제 시작입니다.

 

젊은 여자 가운데 여성운동에 마뜩찮아 하는 이도 있습니다. 페미니즘이란 말을 꺼내면 괜히 다툼만 일어나니 그냥 말 꺼내지 말자고 합니다. 친일파란 말을 꺼내면 괜히 싸움만 벌어지니 묻어두자는 논리와 빼다 박았지요. 하지만 꼭 페미니스트가 아니더라도 성공을 하고 제대로 살고자 하는 여자는 페미니스트가 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입니다. 후배들이 가장 좋아하고 존경한다는 김선주씨의 페미니스트를 치켜세우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는다면 여성으로서 제대로 산 인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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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수첩 - 진실의 목격자들
PD수첩 제작진.지승호 지음 / 북폴리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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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생뚱맞지만, 책 <PD수첩-진실의 목격자들>을 덮으면서 다윈이 떠올랐습니다. 정말, 사람이란 존재를 이성의 존재니, 만물의 영장이니, 우쭐한 말들을 늘어놓으며 대단한 존재로 치켜세우려 하지만 사람도 생물계에서 진화한 하나의 종이기에 오롯할 수 없지요. 그렇기에 테레사 수녀도 있지만 히틀러도 있는 법입니다. 사람은 더 이상 나아지지 않아도 되는 완성체가 아니라 끝없이 거듭나야 하는 진화체란 생각이 드네요.

 

책장을 넘기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대놓고 벌어지는지 갑갑합니다. 무턱대고 ‘사람’을 떠받들어선 안 되죠. 사람은 짐승도 저지르지 않는 끔찍한 일들을 거리낌 없이 벌이니까요. “어떻게 사람이 이런 짓을 할 수 있지”라는 물음이 들면서 아찔해지는 일들은 오늘날에도 걸핏하면 일어납니다. 사람 안엔 오랜 세월 대물림되는 어두움이 깊게 새겨져 있고, 이런 비이성 욕망들이 툭하면 솟구쳐 사람을 짐승으로 바꿔버립니다.

 

언론, 정계, 재계, 검찰, 사법부 등등 사람이 들꾀는 곳은 어디든 부조리와 짐승성이 너울대기 마련이죠. 그러나 깨어있는 사람들이 어떻게든 사람 안의 괴물을 잡아매려 애쓰면서 그나마 이정도 사회가 돌아가고 있지요. 그런데 종교계엔 사람 안의 그을음을 걸러내는 장치나 수단이 잘 갖춰지지 않아 그야말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일들이 서슴없이 저질러집니다.

 

이재록 목사는 다음에는 나를 못 볼 것이라고 종말론을 펼치며 자기를 신처럼 떠받들게 했다. 만민중앙교회에 오면 병이 치유된다고도 했는데, 죽었던 아이가 다시 살아났다고 팜플렛에 싣고, 소아마비로 한 쪽 다리가 짧은 사람이 다리가 자라서 정상인처럼 되었다든지, 이재록 목사의 사진만 걸어놓으면 약 먹을 필요가 없다든지 하는 식으로 좀 심각했다. 특별기도회 때마다 몇 천만 원씩 개인 횡령하고, 성전 건축 명목으로 교인들 모르게 250억 가량을 대출받기도 했다. 그 돈으로 해외에서 도박하고, 고향 무안에서 물을 가져와서 생명의 샘물이라고 해서 팔고, 거기에 사생활도 아주 복잡했다.

 

윤길용 PD가 이런 문제점들을 방송에 내보내자 만민중앙교회가 쳐들어와 방송국을 들쑤셨고 방송은 도중에 멈춰버립니다. 대신에 얼룩말들이 뛰어다니는 방송이 나갔습니다. 이런 생게망게한 일을 버젓하게 저지르는 사람들이 조금만 뒤져보면, 얼마나 수두룩한지요. 왜 중세유럽에서 ‘마녀사냥’이 벌어졌고 21세기 한국에도 일그러진 종교인들이 이다지 많은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여기서는 세스팔다스신이라고 모시는데 들어본 적 있나? ‘세상을 스스로 팔팔하게 다스리는 신’이라고 지어진 이름이다. 교주 하 씨는 세계무술연맹 한국 총재인가 그랬다. 신동아 잡지 인물란에 무술연맹 총재로 이 사람 기사가 크게 나온 적도 있었는데, 신도들에게 강제로 그 잡지를 수백권이나 구입하게 했다더라. 하지만 그건 아무 것도 아니다. 신도들에게 집안의 재앙 운운하며 돈을 거두고, 심지어는 모녀를 함께 성폭행한 경우도 있다. 그래서 피해자들이 정신적 충격으로 이혼하고, 정신병원에 가고, 심지어는 가정 파탄으로 죽은 사람도 있었다.

 

세계정교란 곳의 이야기입니다. 세스팔다스신이란 말에 진짜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이 신을 진짜로 믿었던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많은 사이비가 그렇듯 한 번 빠지면 발을 빼낼 수 없고, 흐리멍덩한 눈으로 오로지 자신의 종교를 지키는 데만 열을 내는 강시로 변하지요. 사이비 종교는 혼백이 다 망가지고 나서도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이니까요.

 

할렐루야 기도원에서 몇 사람이, 심지어 3살 먹은 어린애까지 매독에 걸렸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왜 매독이 걸렸나 취재하기 위해 백종문PD가 카메라를 숨겨 기도원에 들어갔다. 원장이라는 사람이 안수치료를 하고 있었는데 그게 어떤 식이냐 하면, 우선 상처 난 데를 손톱으로 지익 긁고 거기다가 거즈를 한 장 붙여주는 거였다. 그 다음 사람에게도 그런 식으로 계속됐다.

 

김상옥 PD가 취재한 할렐루야 기도원 사건이지요. 아픈 몸을 고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저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안수치료랍시고 저지른 것이죠. 이곳이 얼마나 유명했냐면, 옛날 여배우 트로이카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남정임씨도 재산 다 갖다 바치고 여기서 죽었다고 하더군요.

 

맑스는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라고 하였죠. 뒤틀린 사회구조가 빚어낸는 고통과 아픔에 사람들은 종교란 마약을 맞으며 버틴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맑스는 종교만 타박하였지 마약을 필요로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나봅니다. 사회구조만 뜯어고치고 사람들을 계몽하면 지상낙원이 펼쳐질 거라고 너무 천진하게 생각한 것이죠.

 

하지만 계몽의 시대도 끝나고 최첨단 21세기가 왔으나 아직도 한국엔 수많은 사이비종교들이 떵떵거리며 사람들의 삶을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새로운 종교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생겨나 수많은 사람들을 꼬드기고 있지요. 왜 사람들이 터무니없는 말에 솔깃한지, 둘레에 사이비종교에 휘둘리는 피해자는 없는지 살펴봤으면 하네요.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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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 신자유주의 한국사회에서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탄생
서동진 지음 / 돌베개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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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이 쉴 줄 모릅니다. 방학(放學)이면 말 그대로 좀 쉬어야 하죠. 그동안 공부 부지런히 했으니 잠깐이나마 목을 돌리면서 마음에 빈칸 하나쯤을 남겨두어야 하는데, 요새 젊은이들에겐 이딴 소리를 했다간 세상물정 모른다며 따가운 눈총받기 십상입니다. 요즘 세상이 어떤 줄 알아요? 전쟁이에요. 총성 없는 전쟁!

 

그렇습니다. 젊은이들은 방학 때 더 바쁩니다. 계절 학기를 통해 조금 떨어지는 학점들을 끌어올리거나 인턴으로서 새로운 경험을 해보거나 기업에서 좋아라 하는 자격증을 따거나 새벽에 영어학원에 다니면서 스펙을 쌓아야 하니까요. 느긋함이란 말은 박물관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골동품이 되었습니다. 회계사란 전문자격증을 딴 대학생은 이렇게 털어놓습니다.

 

“한 친구가 회계사 자격증을 땄어요. 그게 가장 큰 동기가 되었어요. 돌아다니는 걸 좋아해서 제가 앉아서 공부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안 했어요. 고시는 나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친구가 회계사 시험에 붙으니, 친구들에게 뒤쳐지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안 되겠다 싶었죠. 뭔가를 시작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 저에게 가장 중요했던 건 나중에 제가 뭘 하고 싶으냐가 아니라 당장 뭘 하는 거였어요. 크게 봐서 제가 뭘 할 거니까 이게 필요하다는 게 아니라 이거 따면 어떤 기회가 생기고 뭔가를 얻게 되겠지, 이렇게 생각을 했죠. 나중에 뭘 하려는 과정으로서 자격증을 준비한 게 아니라 일단 뭘 해야 했고 해야 될 게 필요했어요

 

그렇습니다. 이젠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암만 뛰어나고 스펙이 빵빵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조마조마한 시대입니다. 뭘 하고 있어야만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입니다. 한 손엔 자기계발서적을 꼭 쥐고 부채삼아 자기 안의 일렁거림을 달래려 하지만, 가슴 한복판의 불길은 좀처럼 수그러들 줄 모릅니다. 이러한 불안을 장작삼아 사람들은 이곳저곳을 뜨겁게 뛰어다닙니다.

 

이른바 ‘자기계발하는 주체’들이죠. 이제 자기계발하지 않는다면 멍텅구리가 되는 형편입니다. 너나할 거 없이 죄다 자기계발을 뇌까리며 허리띠를 조릅니다. 이젠 깍쟁이보다도 제 앞가림 못하는 사람을 더 거북해하고, 가난이나 차별 때문에 쓰러진 사람에게 “너가 못났기 때문”이라고 손가락질하는 현실이죠. 어느 때보다 물질이 넘치는 시대를 살지만 어떻게 된 게 사람들은 더 헉헉거리고 툭하면 악다구니를 벌입니다.

 

이런 현실을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돌베개. 2009]는 아주 날카롭게 파헤칩니다. 이 책은 신자유주의 한국사회에서 자기계발하는 주체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매우 촘촘히 밝힙니다.

 

글쓴이는 자본주의가 자기계발하는 주체를 만들어냈다고 여러 자료를 통해 보여줍니다. 자본주의는 주체를 지배하지 않고 주체를 ‘통해’ 지배하니까요. 그러니까 옛날 권력들은 사람들을 손아귀에 넣고 주무르려고 했다면 이젠 통치이성으로서 지배합니다. 오늘날엔 단순히 어떤 권력자가 주먹으로써 지배하지 않고 자본주의가 ‘자유로써’ 지배합니다. 언제나 권력은 자유를 통해 작동하니까요.

 

결국 권력은 지배받는 주체에게 직접 작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주체성을 형성하고 그 주체가 자신의 삶에 작용하는 방식을 규정함으로써 주체를 ‘멀리에서’at distance 지배한다. 신자유주의는 바로 그런 지배대상으로서의 주체를 빚어낸다.

 

그러므로 개인들은 어떤 의미에선 자유롭습니다. 자신이 땀 흘린 만큼 보상을 받는다고 믿으면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어련히 자기계발을 하고 자신의 욕망대로 움직이며 살죠. 그런데 야릇하게도 자유를 쫓으면 쫓을수록 삶은 갈팡질팡 더 흔들리고 땀에 흠뻑 젖은 등줄기는 하루도 편치 않습니다. 가만 되돌아봅니다. 나는 정말 자유롭게 생각하며 살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고 자기계발하는 자유가 허깨비이자 쇠사슬이라면서 사람들이 매트릭스에 갇혀있는 꼭두각시라고 빈정거리지 않습니다. 이 자유가 거짓이니 벗어던지자고 할 수도 없습니다. 대신, 오늘날의 자유가 어떠한지 짚어보면서 자유가 지닌 아찔함을 알리며 ‘새로운’ 자유의 정치학을 일구자고 얘기하네요. 여태껏 몸소 채찍질을 하면서 달려왔다면 이젠 자신을 후려치던 ‘자유’를 어디에 써야할지 고민하자고 합니다. 참 자유는 참 사유를 거쳐서만 태어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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