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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 김선주 세상 이야기
김선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6월
평점 :
사람은 누구나 빚쟁이입니다. 구두쇠처럼 아껴서 살고 있는데 뭔 소리냐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자신의 삶을 한 꺼풀 들춰보면,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을 머금고 있단 걸 알 수 있습니다. 아무도 자기 홀로 자신의 삶을 세우지 못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기대어 살아갑니다.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그나마 누리는 자유와 평등은, 일제침략기에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과 군사독재정권에 대들며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들이 없었다면 아마 주어지지 않았을 테죠. 4.19와 5.18, 6.10에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지 않았다면 요새도 왈패들의 눈치를 보면서 숨죽인 채 벌벌 떨었을 겁니다.
꼭 이런 역사들만이 아니더라도 일상을 들여다보면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는지 모릅니다. 쌀을 짓고자 구슬땀 흘리는 농부, 안전하게 갈 데까지 데려다주는 대중교통 운전기사, 공장에서 물건을 만드는 노동자, 새벽부터 움직이는 수많은 사람들…… 이들의 애씀 덕분에 팔팔하며 싱그럽게 살 수 있습니다.
물신세계에서 21세기 소비자들이 업신여기는 싸구려 여성주의
그러나 이러한 고마움을 일상에서 까먹기 일쑤죠. 돈이란 신을 떠받들며 살기에 고마운 사람들의 땀방울에 시큰둥해하며 손수건을 내밀기는커녕 수틀린다며 툴툴거리기 십상입니다. 왜? 돈을 냈으니까. 소비자가 왕이며, 돈 있는 사람에게 조아려야 한다는 망상이 한국사회에 넘실댑니다. 배를 쑥 내민 채 거들먹거리는 데퉁바리들이 적지 않네요.
모든 가치와 의미가 돈으로 셈되어지는 물신세계에서 여성주의도 싸구려로 다뤄집니다. 살만큼 살만해진 젊은 여자들은 여성주의에 심드렁해하죠. 돈이면 다 된다고 믿는 ‘21세기 소비자들’은 성평등도 돈 내면 살 수 있다고 믿으며, 여성운동은 ‘피해의식있는 여자들’이나 하는 짓이라며 절레절레 손사래 치기도 하죠. 이제 성차별은 없다며 깜냥이 안 되는 여자들이나 페미니즘에 빌붙는다며 되레 깔보기까지 하네요.
여성주의에 솔깃하지 않을 정도로 성차별을 받지 않는다는 건 반가운 변화지만, 그렇다고 성평등이 이룩된 건 아닙니다. 꽤 많은 여자들이 페미니즘에 떨떠름해하지만 쉽사리 고개 돌려선 안 됩니다. 자신은 선배 여자들이 거칠게 싸우면서 얻어낸 땅 위에 서있으니까요. 요즘 여자들은 지난 페미니스트들이 씨 뿌리고 힘겹게 일군 열매를 손쉽게 따먹고 있을 따름입니다. 언론인 김선주는 이렇게 글을 씁니다.
소수의 페미니스트들이 온갖 박해와 방해, 비난 속에서 시작해 이루어놓은 성과물을 대한민국 여성들 모두 무임승차로 공유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다른 부문처럼 아직도 부족한 면이 많지만 여성의 권리는 법적으로 눈부시게 신장되었다. 나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여성들 모두가 페미니스트들한테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에서
알파걸들과 골드미스들은 왜 ‘난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란 말을 할까?
여성운동이 닦아놓은 길을 요새 여자들이 걸어가고 있습니다. 페미니스트들이 온 몸으로 간신히 열어놓았기에 뒤에 따라오는 여자들이 보다 더 수월하게 가는 것이죠. 알파걸이라든가 골드미스란 말도 페미니스트들이 없었다면 나올 수 없었습니다. 젊은 여자들이 펼치는 반짝거리는 춤사위 뒤엔 묵묵히 연주를 해준 여성운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여자들이 자신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힘주어 얘기합니다. 여성문제를 얘기할 때도, ‘난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란 말을 버릇처럼 붙이죠. 여기서 안타까움이 빚어집니다. 페미니스트들에게 낙인찍고 뭇매 때리는 일그러진 사회에서 여성문제를 꺼낼 때 움츠러드는 건 어쩔 수 없겠으나 이런 사회에 맞서 싸우는 페미니스트들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않으니까요.
날아올 돌멩이만 두려워할 뿐, 피멍이 들면서도 앞에서 방패막이 해주는 선배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미안함을 갖지 않는 젊은 여자들이 무척 많습니다. 손대지 않고 코만 풀려는 심리라 할 수 있겠죠. 자신을 갈음하여 선배들이 싸워줬지만 자신은 전리품 챙기는 데만 골똘합니다.
물론, 페미니스트라고 했을 때 아직까지 매끈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이기에 요즘 여자들의 멈칫거림을 헤아리지 못하는 바가 아니죠.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대충 남처럼 살라고 윽박지르는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을 실천하기란 만만치 않으니까요. 비겁함과 약삭빠름, 거기에 입다물기가 사회도덕으로서 자리 잡았기에 여성의식을 갖고 살아가기란 몹시 고달프고 벅찬 일입니다.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는다면 여성으로서 제대로 산 인생이 아니다
어떤 여자들은 여성주의가 없어도 얼마든지 콧대 세우며 살 수 있다고 우쭐해합니다. 마치 인종차별을 없애려는 노력이 없더라도 성공할 수 있다는 흑인과 비슷하지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자들이 헉헉대고 있는데, 여자에게 얼마 돌아가지 않는 열매들을 자기 혼자 몽땅 차지한 뒤 자신의 힘만으로 얻었다고 흰소리 늘어놓는 사람을 볼 때면 입맛이 쓰죠.
여성주의가 너끈하게 퍼졌다고 하지만 올바로 스미지 않았습니다. 외려 여성주의가 더 절절한 시대인데도 내동댕이처지는 느낌이 듭니다. 권리만 늘어놓을 뿐 책임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는 여자들이나 여전히 남성우월의식에 찌든 남자들을 볼 때면, 아직 갈 길이 멀고도 멀죠. 여성운동은 이제 시작입니다.
젊은 여자 가운데 여성운동에 마뜩찮아 하는 이도 있습니다. 페미니즘이란 말을 꺼내면 괜히 다툼만 일어나니 그냥 말 꺼내지 말자고 합니다. 친일파란 말을 꺼내면 괜히 싸움만 벌어지니 묻어두자는 논리와 빼다 박았지요. 하지만 꼭 페미니스트가 아니더라도 성공을 하고 제대로 살고자 하는 여자는 페미니스트가 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입니다. 후배들이 가장 좋아하고 존경한다는 김선주씨의 페미니스트를 치켜세우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는다면 여성으로서 제대로 산 인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