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몽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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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강남에 있는 백화점이 무너지면서 평생 말 한번 섞기 힘든 두 여자가 콘크리트더미에 갇힙니다. 한 여자는 상고를 졸업하고 갓 백화점에 들어간 일꾼이고, 다른 여자는 그 백화점 사장의 ‘첩’입니다. 서울에 올라와 자장면은 몇 번 먹었지만 탕수육은 처음 먹는 ‘철거민 여자’에게서 태어난 스무 살 여자와 요즘말로 ‘텐프로’ 출신으로 야코세우며 살아가는 중년 여자는 달라도 너무 다르죠. 하루하루 팍팍하게 살아가는 새내기와 달리 중년 여자는 이렇게 살아갑니다.

 

그녀는 대개 오전 느지막이 일어나 전화약속을 한 다음에, 은색 아우디를 끌고 상가구역 모퉁이에 있는 오성급 호텔 레스토랑에 들러 늘 만나는 친구들 한둘과 점심 먹고 커피 한잔씩 돌리고, 근처의 멤버십 사우나로 옮겨가 쑥탕에 몸을 담그고는 전용실에 모여서 고스톱 몇판을 돌리며 깔깔대다가 전신 마싸지로 피부관리를 받으며 몸을 풀고, 쌀롱 미용실에 들러 머리 매만지고 나와서, 수입 옷가지에 보따리 명품을 단골고객에게만 내놓는, 그 바닥에서 유명짜한 이태리나 프랑스 말로 시작되는 숍들을 차례로 둘러보며 새로운 옷이나 액쎄서리나 백이나 구두 등속이 들어온 게 없나 어슬렁거리며 둘러보고는, 잠깐 상가건물 관리사무소에 들러 세놓는 상가들에 무슨 민원거리나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고, 다시 알 만한 사람들이 모이는 카페에 들러 차나 칵테일 한잔하며 저녁까지 노닥거리다가, 일진이 괜찮으면 분위기 좋은 남녀 지인들과 저녁 겸 술자리를 하고 때로는 그들과 어울려 그녀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룸쌀롱에도 가는데, 그렇지만 다른 친구들처럼 이태원 호스트바로 옮기거나 젖비린내나는 것들과 바람을 피우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황석영씨의 <강남몽>[창비. 2010]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지은이는 1995년,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차례로 무너진 끔찍한 사건에 눈독 들이고 소설을 씁니다. 그즈음이 개발독재가 끝내고 한국 자본주의가 스스로 재생산구조를 갖추게 된 때라고 여기니까요. 이런 정치사회변화에 맞물려 “사회변혁에 대한 열정으로 지식인의 머릿속에서만 형성되어온 민중이 걷잡을 수 없는 소비사회의 적나라한 대중으로 휩쓸려들면서 욕망에 얽혀가는 시대“를 그려냅니다.

 

글쓴이는 오늘날 사람들을 몽땅 빨아들이는 욕망의 소용돌이에 그저 끌려 들어가기보다 저 거센 소용돌이가 일어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요새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욕망하는 꼴이 어떠한지 낱낱이 적기보다 “거꾸로 현재의 삶을 규정하는 최초의 출발점을 향하여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을 쓰죠. 이른바 ‘강남의 계보사’입니다.

 

강남개발을 둘러싸고 수많은 인물들이 울레줄레 얽히고설킨 걸 잡아내면서, 모르는 사이에 한국의 역사를 들춰냅니다. 남한 사회의 욕망과 운명이라는 그물망 속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뒤엉켜 돌아가는지 퍽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권력자들의 꿍꿍이와 친일파들의 기회주의, 건설업자들의 설레발과 조폭들의 주먹질, 졸부들의 게걸과 철거민들의 눈물을 한 데 묶어내면서 묻습니다. 강남을 향한 욕망은 사달이 났단 증상 아닌가요?

 

…서서히 몰락해가는 상류 가족의 일상을 보여주면서 현실세계가 어째서 변해야 하는가를 드러내준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지금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사람살이가 어쩌면 꿈과 같이 덧없는 가상의 현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소설의 제목을 ‘강남몽(江南夢)’이라고 정했다.

 

강남으로 상징되는 욕망에 나남없이 휘우뚱거리고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소설에 나오는 친일파나 독재권력에 빌붙어 콩고물 얻어먹는 사람들을 쉽사리 손가락질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욕망은 이 시대 사람들의 바람과 그다지 다르지 않으니까요. 흥청망청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에 구역질이 나거나 딱하다기보다 부러워할 사람이 쌔고쌨습니다. 자신에게도 기회만 있었다면 강남에 땅이나 아파트를 사두는 건데, 애타는 사람들이 한국에 얼마나 많은지요.

 

-엄마, 내가 나가는 점포에 오는 손님들 보면 정말 돈 잘 쓰더라. 내 월급의 몇배 되는 애들 옷을 여러 벌씩 나가는 거야.

-우리 여사장님이 예전에 광화문 근처에서 요정을 했다는데, 거기서 높은 사람들이 지도 펴놓고 색연필로 표시하며 땅을 나누고 그랬대, 앞뒤를 맞춰보니 느이 아버지 잠실 아파트단지 짓는데 일 나가던 그 무렵이야. 뭐 그런 걸 알았더라도 우리야 땅 사모을 돈은커녕 하루 벌어먹기도 어려운 때였지만.

 

광주대단지에서 쫄쫄 굶던 사람조차 이런 욕망이 가슴 속 깊은 곳에 스며든 지경입니다. 그래서 여느 사람이라면 이 소설을 읽으며 지은이가 바라는 문제의식을 느끼기보다 언제나 권력과 정보를 가진 사람이 돈을 번다는 ‘엉뚱한 결론’에 이르기 십상입니다. 지은이의 뜻과 다르게 사람들의 감각과 의식은 이미 ‘강남몽’에 푹 젖어있기 때문이겠죠.

 

요즘 사람들의 욕망이 삼풍백화점처럼 위험하기 짝이 없는 건 아닐까, 지금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사람살이가 어쩌면 꿈과 같이 덧없는 가상의 현실이 아닐까, 생각하기보다 한탕해서 땀 흘리지 않고 돈 굴리며 살아가는 ‘꿈’을 모조리 꾸고 있습니다. 다리가 뽀개지고 백화점이 아작나도 이 사회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겠다는 욕망을 꺾지 못합니다. 꾸준함과 정직함보다 뻔뻔함과 돈벼락이 더 우러름 받고 있는 시대, 황석영씨의 입담이 잠꼬대처럼 여겨질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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