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남자 & 황제내경 : 하늘, 땅, 인간 그리고 과학 지식인마을 20
강신주 지음 / 김영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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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들어 사람들은 자연을 기계처럼 보았죠. 갈릴레이와 뉴턴으로 상징되는 고전역학이 나타나면서 과학혁명이 시작됩니다. 자연에 무슨 목적이 있을 것이라는 세계관이 뒤집힌 거죠. 마치 하나의 기계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모든 사물과 자연현상을 분석하고 설명하려고 하죠. 이러한 기계론이 사람들의 자연관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그러나 핵무기가 나타나고, 자연이 끔찍하게 파괴되면서 사람들은 서양의 과학문명을 반성하게 되죠. 여기에 자연이 기계 같다는 세계관으론 풀어낼 수 없는 상대성이론과 양자이론이 나타나면서 사람들의 물음표는 커져만 갑니다. 20세기 후반부터 신과학운동(New Science Movement)가 일어나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자연관에 눈길을 돌립니다.

 

그동안 잊힌 중국과학과 철학의 알짬, 회남자와 황제내경, 동양 과학의 뿌리를 찾아 나서다

 

동양의 과학사상은 자연을 기계로 보는 근대 세계관을 넘어설 수 있는 ‘유기체 자연관’의 원형으로 서양 지식인들에 눈길을 받게 됩니다. 해외를 나가보면, 불교에 대한 관심이 엄청나게 뜨겁고 동양사상에 대한 연구가 힘차고 시원하게 이루어지고 있죠. 그렇다면, 한국에 사는 사람들은 동양과학과 철학에 대해 얼마나 알까요? <회남자&황제내경>[2007. 김영사]를 읽으며 많이 모르고 살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네요.

 

약 2,000년 동안 동양을 지배했던 중국 전통 과학사상 회남자와 황제내경은 어느새 많이 묻혔습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회남자나 황제내경이란 말을 처음 들어볼 겁니다. 한의학을 뺀 다른 동양 전통 과학들은 그저 미신이라고 여기는 분위기인 만큼 동양의 과학사상과 철학이 잊힌 거죠. 가끔 심심풀이로 사주나 관상을 보거나 풍수지리에 대해 풍월을 들을 뿐, 사람들은 더 이상 동양 전통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죠.

 

회남자와 황제내경은 기, 음양, 오행이라는 세 가지 범주를 엮어서 세계를 설명하는 동양과학 정신의 알짬이죠. 이러한 두 책을 가지고 왜 동양의 과학사상은 보다 진보한 모습으로 발달하지 못했는지, 동양 전통과학사상은 서양의 과학사상과 같은 과학이라고 봐도 좋을지 풀어서 알려주네요. 동양과학과 서양과학의 차이점을 뚜렷하게 견주고 한계들을 콕 집어내면서도 더 나아갈 수 있도록 대화마당을 펼칩니다.

 

이 책엔 우주, 땅, 그리고 시간에 대한 고대 중국인들의 이해 방식을 알 수 있는 회남자와 동양의학의 뿌리라 할 수 있는 황제내경을 중심으로 그 뒤에 나타난 여러 사상과 서양철학들을 두루 담았죠. 전통과학을 형이상학으로 만든 신유학, 이러한 형이상학을 의심하고 허물려 한 실학의 주장들도 만날 수 있죠. 송나라 시대 주자부터 한국의 정약용과 최한기까지 여러 자연관을 살필 수 있네요. 깔끔하면서 친절한 설명이 돋보입니다.

 

몸과 세상을 해석하는 출발부터가 다른 한의학과 양의학이 21세기 한국에서 부딪히다!

 

이렇게 두 세계관을 짚어보는 까닭은 오늘날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으르렁거리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라 할 수 있는 게 한의사와 양의사 사이 갈등이죠. 이 두 의학체계는 사람과 세상을 해석하는 시작부터가 아예 다르기에 언제든 부딪힐 수밖에 없죠. 몇 해 전, 젊은 양의사가 신문 칼럼에 한의학을 ‘사이비 학문’이라고 주장하면서 둘 사이는 더 험악해졌습니다.

 

일부 한의사들이 치유가 불가능한 말기 암환자를 대상으로 검증이 안 된 비싼 한약재를 팔아먹고, 전통 치료법이라고 하면서 효험이 밝혀지지 않은 시술을 하고 있다며 비판을 한 거죠. “과연 그들이 의사 자격이 있는 사람들인지, 또는 남의 불행을 빌미로 근거 없는 관념을 팔아서 부를 축적하는 사기꾼인지 모르겠다고”고 날을 세웁니다. 이에 한의사 단체는 젊은 양의사를 꾸짖는 모임을 열었고, 이에 질세라 양의사 단체에서도 한의학의 문제점을 꼬집는 기자회견을 하며 맞불을 놓았죠.

 

한의사와 양의사 사이엔 먹구름이 늘 껴 있었죠. 같은 의술이지만 세상 보는 눈이 딴판이니까요. 한의학에서는 몸을 살아있는 유기체로 보고 서로 다 이어져 있다고 생각하죠. 우리 몸에는 경락이라는 맥을 통해서 기가 끝없이 흐르고, 모든 질병은 몸 안의 기가 원활히 돌지 않아서 생기는 거라고 봅니다. 따라서 몸속의 질병은 분명히 겉으로 드러나기에 직접 몸속을 관찰 할 필요가 없으며, 문제가 나타난 부위만 고치려는 게 아니라 환자 상태와 여러 가지를 사정을 헤아려서 맞춤치료를 하죠.

 

이에 반해 서양의학에서는 몸을 기계처럼 다루죠. 마치 자동차는 여러 가지 부품들로 이뤄져 있고, 저마다가 자기 기능을 다해야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우리 몸도 여러 장기들로 이뤄져 있고, 그것들 각각이 기능을 떨치며 나타내야 건강할 수 있다고 보죠. 따라서 어디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만 해결하면 사람의 몸은 정상이 될 거라며, 문제가 일어난 속을 들여다보고 치료를 하죠.

 

서로 으르렁대는 한의사와 양의사, 진짜 건강은 무엇이고 세상은 어때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의학에서는 몸의 한 부분의 변화가 전체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지만 사람마다 몸이 다르다는 생각을 깔고 있습니다. 따라서 의학이라 하면, 보다 여러 층위에서 병과 사람을 바라봐야 하는데, 서양의학은 병이 걸린 다음에 아픈 곳만을 없애버리는 데만 힘을 쏟는 만큼 한계가 있다고 나무라죠. 그러면서 병이 아직 걸리지 않았을 때, 병을 치료하는 게 한의학이라며 서양의학이 한 수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네요.

 

양의학에선 ‘그때 그때 다르다’는 한의학은 스스로 과학을 포기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객관성을 갖춘 검증 가능한 일반 의학이론이 있어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모호한 신념체계와 경험을 바탕으로 환자를 다루는 건 위험한 일이며, 최첨단을 달리는 시대에 맞지 않는 ‘사이비 과학’이라고 낮잡죠. 모든 게 그렇듯 여기에도 밥그릇이 걸려있기에 이 둘은 평행선을 그리며 다투고 있네요.

 

한쪽 손을 들어주기보다 한의사와 양의사들이 함께 힘과 뜻을 모으길 바라게 되네요. 사람은 누구나 건강하고 싶고, 한의학이나 양의학이나 어느 정도 일리가 있지만 서로 모자란 점도 있는 게 사실이니까요. 자신을 앞세우기보다 남을 더 알려고 애를 쓰면서, 진짜 건강은 무엇이고, 세상은 어때야 하는지 의사들이 고민했으면 하네요. 마찬가지로 자기 몸의 주인으로서 사람들도 참 건강이 뭔지 자신의 생각과 몸을 슬기롭게 탐구했으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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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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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생긴 여자를 사랑할 수 있나요? 이 물음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일 남자는 많지 않을 겁니다. 그럴 수 있다고 말은 해도 못생긴 여자를 실제로 사랑하고 있을 남자는 더 적을 겁니다. 욕망대로 흘러가는 세상을 나무라긴 쉬워도 자기 삶에 배어있는 욕망을 비판하고 넘어서기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니까요. 외모지상주의에 딴지를 걸어도 외모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미모’는 성역이 되어 여자들을 사로잡고 있네요.

 

세상은 ‘구분 짓기’가 이뤄지는 마당이죠. 끝없이 남을 깔아뭉개면서 그 위에 올라타려고 합니다. 그렇게 매겨진 가격에 따라 사람들은 연애시장에서 거래되고 있습니다. 이 때, 남자와 여자의 가격 채점표는 좀 다르죠. 이른바 ‘사회에서 만들어진 미 기준’에 모자라는 남자들은 권력이나 재산으로 얼마든지 자기 가격을 올릴 수 있죠. 그래서 뚱뚱보 대머리 아저씨와 젊고 예쁜 여성의 만남은 지겨울 정도로 많이 일어납니다.

 

그렇지만 여성은 다릅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잘난 여성이라도, 너무 못생겼다면? … 어떤 대접을 받는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죠.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요. 자본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여자들도 돈을 갖게 되면서 입김이 생겼지만, 그럼에도 뚱뚱보 파마머리 아줌마와 젊고 멋진 남성의 만남은 보기 힘듭니다. 여전히 얼굴과 몸매는 여자에게 가장 중요하니까요. 그렇기에 오늘도 여자들은 거울을 보며 다이어트를 합니다.

 

인류역사상 최초로, 잘생긴 스무 살 남자가 너무나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이야기

 

박민규의 신작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우리 안에 외모지상주의가 어찌나 깊게 새겨져 있는지 돌아보게 하는 장편 소설입니다. 이 책은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 이야기를 다뤄 아주 독특합니다. 아마, 인류 역사상 최초일 듯싶어요. 지금까지 사람들은 예쁜 여자만 너무나 좋아했으니까요. 잘생긴 스무 살 남자가 ‘너무나 못생긴’ 동갑내기 여자를 사랑하는 이야기, 판타지 소설보다 더 환상 같은 장면이 펼쳐집니다.

 

주인공 ‘나’는 스무살이 되자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됩니다. 그러다 같이 일하는 ‘그녀’를 만납니다. 처음 봤을 때, 나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합니다. 얼핏 보면 마치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 한 눈에 뿅 간 거 같죠. 하지만 정 반대입니다. 이제까지 꽤 많은 못생긴 여자들을 봐왔지만 나는 그녀처럼 못생긴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못생긴 여자입니다. 아르바이트를 소개한 친구가 이렇게 평할 정도죠. 나도 첨엔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니까. 걘...정말 너무하지.

 

모든 남자를 얼어붙게 만드는 힘을 가진 추녀! 그녀는 혼자 밥을 먹고, 아무도 그녀와 얘기를 하지 않죠. 학창시절에 조금이라도 뚱뚱하거나 못생긴 여자에게 가했던 폭력들이 사회에서 아무런 변화 없이 또 벌어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외톨이 그녀가 계속 신경 쓰입니다. 잘생긴 얼굴 덕분에 여직원들 인기투표에서 1위를 차지한 내가 그녀에게 관심을 나타내면서 소설책이 뜨거워지네요.

 

수많은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으며 숱한 상처를 받았던 그녀와 나 사이에 ‘요한’이라는 직장 동료가 다리를 놓아줍니다. 셋이 어울리면서 조심스럽게 사랑을 키워나가는 과정은 그 어떤 남녀의 만남보다 훨씬 긴장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왜냐하면 쌔고 쌘 잘생기고 예쁜 짝이 아니라 너무나 못생긴 여주인공과 짝을 맺어야 하니까요. 이렇게 기묘한 만남은 본적도 들은 적도 없기에 읽는 이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게 됩니다.

 

사랑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밝혀준다는 ‘전구론’, 영혼에 불이 들어오는 순간 누구나 아름다워!

 

잘생긴 남자가 못생긴 여자를 사랑한다는 게 어쩌면 일어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나 ‘미녀와 야수’는 있어도 미남과 추녀는 동화에서도 없는 일이기에 지은이는 개연성을 갖추려고 장치를 씁니다. 바로, 부모 세대죠. 나는 뒤늦게 인기를 얻자 평생을 뒷바라지를 하며 헌신하던 ‘못생긴 어머니’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친 배우 아버지를 두었고, 요한은 재벌에 ‘첩’이었던 아름다운 어머니에게서 태어납니다. 이들은 부모세대 사랑방식을 거부할 이유가 있는 거죠.

 

그렇다 해도 상대가 멋지고 예뻐야 사랑할 수 있다고 믿는 보통 사람들은 주인공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죠. 동정이나 연민 아니냐며, 그것이 상대를 더 비참하게 하는 일이라고 따질 수 있습니다. 사랑을 뭔가 특별한 감정이라거나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나로호 발사대’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못생긴 여자와 만남은 말도 안 되는 거죠. 사랑을 좁게만 생각하는 이들에게 지은이는 ‘전구론’을 들고 나옵니다.

 

누구나 사랑을 원하면서도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불 꺼진 모습만을 보고 있기 때문이죠. 사랑하는 순간 빛이 들어오면 유리의 곡선도 전구의 모습도 빛에 묻혀버리지만, 우리는 빛이 들어오지 않은 것만을 보며 상대를 무시하는 거죠. 사랑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밝혀주는 존재라는 걸 모르고 필라멘트가 꺼져있는 전구처럼 막막하게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아무리 못생긴 전구라도 영혼에 불이 들어오는 순간 아름답고 눈부시게 변하는데…

 

연예인들이 아름다운 것은 외모 때문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해주기 때문이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보내주고 있기에 터무니없이 밝은 빛을 발하는 겁니다. 그래서 ‘스타’죠. 그 어떤 미인도 사랑받지 못한다면 불 꺼진 전구와 같죠. 결국, 빛은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겁니다. 자신의 필라멘트에 불이 들어오려면 저 멀리 있는 엉뚱한 사람에게 사랑을 몽땅 주기보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사랑을 줘야죠. 그때 자신에게 환한 빛이 들어오며 세상이 밝아집니다.

 

못생긴 여자를 사랑할 수 있나요? 가난한 남자를 사랑할 수 있나요? 사랑에도 상상력이 필요해!

 

그동안 사람들은 자신을 사랑하고 둘레를 아끼기보다 저 너머에 허깨비들을 바라고 있죠. 가난한 이들이 자본가를 사랑했고, 서민이 독재자를 존경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캄캄한 거죠. 저 멀리 어딘가는 환한데 자기는 늘 어둠에 묻혀있습니다.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저기를 부러워하는 세상살이가 그렇게 만들어지죠. 사회기준에 조금이라도 떨어지는 사람이 있으면, 자신을 못 견뎌하는 대중들이 달려들어 사정없이 물어뜯는 야만사회에 내동댕이쳐져 살아갑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사람들은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에서 예쁘고 똑똑하고 돈 많은 주인공들만 보며 살았죠. 따라서 그렇지 않은 대다수 인생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곧 깨닫습니다. 그럴 듯한 인생이 되려고 욕망할수록 결코 그런 인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수많은 스타들을 보면서 자기도 ‘백마 탄 왕자님’이나 ‘인형 같은 숙녀’를 꿈꾸지만, TV가 꺼지는 순간, 불 꺼진 전구 하나가 우두커니 있을 뿐이죠.

 

와와~하는 사람들에게 지은이는 워워~손사래를 칩니다. 부를 거머쥔 극소수의 사람을 가난한 대다수 사람들이 스스로 추어올리듯 미모를 지닌 극소수의 사람들을 평범하게 생긴 사람들이 우러르는 우리네 모습에 대해 고민해보자고 하네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쥘 수 없는 신기루를 쫓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자고 합니다. 아름다워<져야만> 하는 여자들과 힘을 <가져야만> 하는 남자들, 인류는 가야할 길이 아직 멀었다며 자기부터 반성을 하네요.

 

다시 처음 물음입니다. 못생긴 여자를 사랑할 수 있나요? 이 물음은 가난한 남자를 사랑할 수 있나요? 이것과 이란성 쌍둥이죠. 이 물음들을 넘어서기 위해선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그 아무리 예쁘고 돈 많은 이를 만나도 얼마 안 가 시들해진다는 걸 우린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곧 시시해질 사랑이 아니라 시간과 함께 더 무르익으면서도 언제나 싱싱할 사랑을 해야겠죠. 사랑의 빛으로 삶을 밝혀나가는 세상을 상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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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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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동물입니다. 제 아무리 잘난 척을 해봐야 깊은 밤이면 외로움에 흔들리고, 자기 욕망에 휘둘리기 일쑤입니다. 뼈 속 깊이 웅크리고 있는 짐승은 틈 날 때마다 뛰쳐나와 삶을 할퀴죠. 사람들은 상처와 흉으로 너저분해진 생활을 붙들면서 어제와 다를 바 없이 살아갑니다. 해일처럼 밀어닥치는 욕망 앞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다가 후회하기를 되풀이하죠. 그렇게 인생이란 수레바퀴는 굴러갑니다.

 

놀라운 21세기라지만 사람들 의식수준은 그다지 높지 않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자유롭게 살기보다는 배부르게 살기를 바라죠. 더 크게 해쳐먹는 도둑을 부러워할지언정 그것에 맞설 용기는 뱃살에 눌린 지 오래입니다. 밥통과 창자가 지배하는 세계니까요. <도가니>[창비. 20009]는 그렇게 탐욕스러워진 세상을 잘 담아내죠. 사람이란 탈을 쓴 짐승들과 그래도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이들의 모습이 숨가쁘게 그려져 있습니다.

 

안개가 잔뜩 낀 세상, 평범하게 살고 싶으나 가슴 깊은 데를 긁어대는 너무 뜨거운 사건

 

처음부터 안개가 짙게 껴 있습니다. 한치 앞도 내다보이지 않는 날씨는 숨을 턱 막히게 합니다. 흐릿한 것이 날씨만은 아니니까요. 툭하면 희뿌옇게 도시를 휘감는 안개는 사람들 정신과 사회 상태가 얼마나 탁한지 전해주는 장치죠. 심심할라치면 어처구니없는 사건들이 잇따라 터지는 사회에서 살기란 안개 속에서 길 찾는 일과 비슷하게 갑갑하죠. 한마디로 안개에 뒤덮인 남쪽 도시 무진은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있는 곳을 상징합니다.

 

세상살이에 찌들기 시작한 강인호가 무진으로 옵니다. 아내가 힘써서 청각장애인학교 ‘자애학원’에 기간제 교사 자리를 얻게 된 것이죠. 너무 옳은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강인호는 그저 그렇게 닳아버린 소시민입니다. 사회 부조리를 들추기보다는 그저 잠깐 눈 감는 게 여러 모로 편하다고 생각하는 보통 서민이죠. ‘평범한 사람’이 평범하게 살고자 자애학교에 갔으나 ‘평범하지 않은’ 일이 쏟아집니다.

 

첫 출근 날, 학교는 너무나 조용합니다. 평화롭기 때문이 아니라 폭력으로 억눌려져 있기에 그렇죠. 아이가 기차에 치어죽어도, 낭떠러지에서 떨어져도, 학교는 태평하게 굴러갑니다. 퇴근할 때 우연히 듣게 된 여자화장실의 비명소리와 잠겨있는 화장실, 강인호는 평범한 소시민답게 문을 열고 들어가기보다 ‘내가 잘못 들었나 봐’, ‘다른 사람이 해결하겠지’라는 생각으로 그냥 지나가 버립니다.

 

그렇게 대충 살려고 하는데, 자애학원은 해도 해도 너무 합니다. 아직 순수함이 남아있는 강인호는 그래도 선생다운 선생노릇을 하려고 하자, 아이들은 너무 뜨거워 가슴 깊은 데을 긁어댈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을 털어놓습니다. 교장, 행정실장, 교사들 사이에 짬짜미가 있고, 학생들을 상대로 오랫동안 성폭력과 폭행이 이뤄져왔다는 거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에 강인호는 충격을 받으면서 분노를 하게 됩니다.

 

강인호는 대학 선배이자 무진인권운동센터 간사 서유진과 함께 지난날을 파헤치죠. 그러나 세상은 만만치가 않습니다. 자애학원은 교육청, 시청, 경찰서, 교회 등 무진의 기득권세력들과 이미 손을 잡고 있기 때문이죠. ‘지금 이대로가 좋아’를 노래하는 이들이 ‘고작 장애인들 때문에’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동무’들을 처벌할리 없죠. 사건을 어물어물 덮기 위해 비열한 방법들이 강인호와 서유진에게 덮쳐옵니다.

 

어렵게 법정까지 끌고 갔으나 잘 알다시피 사법부는 사회강자에게 면죄부를 주며 합법성을 주는 곳으로 변한지 꽤 되었지요. 진실보다는 거짓에, 정의보다는 이익 앞에 재판은 흔들리면서 중요한 것들을 다루지 않고 어물쩍 넘어갑니다. 돈과 힘 앞에 사람들은 하나둘씩 지쳐나가고, 상처를 입고 무너집니다. 처음에 잠깐 관심을 보였던 언론과 대중들도 수없이 일어나는 ‘이상한 사건들’ 앞에 자애학원을 잊어버리죠.

 

안개를 없애기보다 안개 속을 더듬으며 조용하게 사는 사람들, 그렇게 만들어진 안개지옥

 

이 소설을 읽다보면, 울컥, 무언가 치밀 때가 많습니다. 목이 메어 다음 장을 넘기지 못하고 한참 동안 하늘을 바라보게 되기도 하죠. 믿기지 않는 일에 대한 놀라움인지, 아이들이 겪었을 두려움과 서글픔 때문인지, 사람으로서 봐줄 수 없는 ‘종’들에 대한 분노인지, 온 몸에 휘몰아치는 감정이 잘 다스려지지 않죠. 세상에, 이럴 수가, 탄식하며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되죠.

 

이 글은 광주의 한 장애인학교에서 있었던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쓰였습니다. 작가가 그저 머릿속으로 지어낸 얘기가 아니라 몇 년 전에 일어난 일이라는 거죠. 지옥이 현실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었던 겁니다. 지은이는 소설에서 두 가지 지옥을 보여줍니다. 자애학원이라는 작은 지옥과 어른들의 사회라는 큰 지옥을. 그리고 묻습니다. 저 ‘작은 사건’에 지금 몸서리를 치듯 ‘커다란 세상’에 대들 수 있습니까?

 

진실은 차갑고 끔찍한 법, 사람들은 작은 지옥 풍경에도 아찔해 합니다. 여기에 고개를 돌려 버리기 쉽지만 그나마 응시한다 해도 더 큰 지옥이 입을 벌리고 혀를 날름거리고 있지요. 이미 세상은 부당하고, 누군가의 희생을 먹으면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여기에 돌을 던지기는 쉽지 않습니다. 자기 얼굴에 침 뱉기가 되니까요. 이 소설이 놀라운 이유는 평범한 소시민들이 큰 지옥의 구성원이며, 대중의 침묵이 큰 지옥을 만들어내는 걸 짚기 때문이죠.

 

둘레를 돌아보면, 작은 지옥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때마다 눈물을 흠뻑 흘리거나 부들부들 떨면서 욕을 하다가 사람들은 다시 큰 지옥에서 ‘잘’ 살아갑니다. 작은 지옥에 손가락질하는 사람은 많아도 큰 지옥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사람은 적습니다. 밥벌이에, 집 장만에, 아이 학원비 걱정을 하며 입 다물고 사는 거죠. 이렇게 안개를 만들어집니다. 안개지옥, 이것은 무진이 아니라 ‘눈 먼 자들의 세상’으로 변해가는 우리네 삶터를 가리킵니다.

 

이런 세상에서 진실을 찾기는 어렵지요. 더더군다나 진실을 보고자 하는 마음조차 갖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안개를 없애기보다는 안개 속을 더듬으며 조용하게 사는 편을 택합니다. 그저 눈에 띄지 않게, 남들과 다르지 않게, 총인구 셈할 때 머릿수 하나를 늘려주는 역할에 만족하며 살죠. 기득권을 욕하면서도 언제든지 기득권에 껴주면 헤벌레 웃으며 달려갈 사람들, 그렇게 안개지옥은 탄탄하게 이뤄집니다.

 

그럼에도 희망을 놓아선 안 되겠죠. 강인호가 처음에 학생들 앞에서 수화하면서 촛불을 켜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를 기억합니다. 어떻게 해야 상대와 소통할 수 있는지 아주 빼어나게 그린 명장면이죠. 수화하는 교사가 없는 장애인학교는 대화가 끊겨버린 한국사회의 판박이입니다. 상대와 소통하고자 한다면, 상대의 마음을 열고자 한다면, 자신의 마음을 먼저 열어야 한다는 걸 새삼 느낍니다. 책을 덮자 다시 안개가 몰려오네요. 미친 도가니가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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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안에서 길을 잃어라 - 이현주의 루미 잠언 읽기
루미 지음, 이현주 옮김 / 샨티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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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성이론이 아이슈타인의 임종에 도움이 되었을까요? 자본론이 마르크스의 최후를 평안함으로 이끌었을까요? 불확실성 원리가 하이젠베르크를 낙원으로 안내했을까요? 가끔씩, 위대한 사람들의 삶을 떠올려 봅니다. 대단한 지식들이 참으로 그들의 삶을 행복하게 해주었는가를 물었을 때, 선뜻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을 수 있죠.

 

이 때, 루미는 말을 합니다. 알아야할 모든 지식들 가운데 마지막 날을 위해 갖춰야 할 가장 좋은 지식은 영혼의 가난을 아는 것이라고.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혼의 걸작품이라 평가받는 <마드나위>를 지은 메블라나 젤랄룻딘 루미는 13세기 페르시아의 신비주의 사상가이자 시인입니다. 한국에도 꽤 알려진 이 수피의 말은 퍽퍽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한 모금의 정갈한 샘물 같네요.

 

지난 20세기 말, 서양 세계의 다양한 종교를 지닌 사람들은 루미의 글에 감탄을 합니다. 문학계와 영성계에 이른바 ‘루미열풍’이 불었지요. 그의 이야기들이 번역되었고 해석되어져 왔지요. 오랜 세월을 우연이라 불리는 운명들을 거쳐 마침내 이 책이 우리에게 닿았습니다. 이현주 목사님이 풀어서 쓴 글 덕분에 <사랑 안에서 길을 잃어라>[샨티. 2005]는 한층 더 아름다워진 작품이네요.

 

세계는 산이다. 말한 대로 돌아 온다. 그런데 사랑이라고 외쳐도 미워라고 메아리가 울린다면?

 

세계는 산이요

우리의 모든 행동은

메마리로 돌아오는 바람이다.

 

산에는 골짜기가 있어서 메아리를 울린다. 내가 “사ㅡ”하면 메아리도 “사ㅡ”하고 내가 “ㅡ랑”하면 메아리도 “-랑”한다. 내가 “미ㅡ”하면 메아리도 “미ㅡ”하고 내가 “ㅡ워”하면 메아리도 “-워”한다. 산은 제 소리를 따로 만들어내지 않는다. 들리는 소리를 그대로 되돌려줄 따름이다. 내게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은 모두 네가 만든 것들이다. 이 비밀을 알기에 군자는 위로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아래로 남을 탓하지 않는다.

 

루미의 글과 이현주 목사님의 풀이는 절묘하게 어우러지면서 가슴을 울립니다. 정말 모든 것은 맞물려 돌아가죠. 가끔 우리가 알 수 없는 시간차가 생겨서 그렇지, 뿌린 대로 거두기 마련입니다. 이 점을 깨닫고 나면, 삶이 달라집니다. 지금 사랑을 해야 하고, 잔뜩 부풀어 오른 배가 부끄러운 것임을 알게 되죠. 상대를 향한 자신의 독설은 결국 자신에 대한 불만족과 공허함에서 나온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다만 쉬쉬하며 그냥 살아갈 뿐.

 

여기서 고개를 갸우뚱할 수 있습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세상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아무리 사랑이라고 외쳐도 미워라고 메아리 울리는 산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때도 사랑을 해야 하냐고 사바세상의 사람들은 딴지를 걸게 되죠. 그들과 나누고 싶은 말은 먼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미워라는 메아리가 겁이 난 나머지 사랑을 실천해보지도 못하고 그럴싸하게 자기 합리화를 하는 사람이 많으니까요.

 

사랑을 얘기해도 미워라고 답하는 산일 때, 우리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사랑이란 이름의 망치를 들어야죠. 억울하게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어린 아이가 굶주려 죽는 세상을 바꿔야죠. 그런 맥락에서 군사독재에 맞서 싸운 사람들은 진짜 사랑을 하고 싶었던 사람들이고, 제국주의 시대 때, 독립을 외친 사람들 역시 사랑을 실천한 사람들이죠. 사랑할만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니까요.

 

오늘날 사람들은 모두 사랑에 목마른 자들이 되었죠. 그늘진 곳에서 누구는 배를 곯고 있는데, 혼자서 모피코트를 입어대는 사람들은 사랑을 실천할 능력도 힘도 없지요. 그저 바닷물을 마셔가며 하루하루 야위어가는 자신의 영혼을 번쩍거리는 보석과 물건으로 가려보려 하지만 더욱 안쓰럽게 보일 뿐이죠.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거리로 나와 사랑을 구걸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사람들은 사랑을 갈구했고, 예수가 인류에게 보여준 것 역시 사랑입니다. 세상과 사람을 사랑하라고 공생애 동안 거듭 가르치죠. 그러나 예수를 신으로 우러르는 사람들 가운데 입으로만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요. 그들은 예수처럼 살지 않습니다. 예수처럼 사랑하지 않죠. 그저 예수라는 이름을 내걸고 또는 종교라는 간판을 붙이고, 사랑과 너무 멀리 떨어져버린 수많은 단체들 사이를 헤매고 다닐 뿐이죠.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다는 예수의 복음! 사랑하는 순간, 그것이 천국이다. 지금 사랑하라!

 

천국을 팔면서 오늘을 지옥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예수는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려고 온 게 아니라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주기 위해 왔다고 하면서, 갑자기 예수가 죄를 대신 값아 준 죄인이라면서 포승줄을 던지고, 회개하라고 소리치죠. 사람들의 외로움과 약함을 부추기며 돈을 바쳐야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영혼이 가난한 자들은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는다며 종교단체 대표의 배에 기름기를 채우고 있죠.

 

그렇다면 예수의 복음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이미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죽어서 최후의 심판을 통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 우리는 모두 사랑의 존재이며 지금 천국을 누려야 한다는 거죠. 예수를 비롯하여 깨달음을 얻은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다 말한 것들이죠. 항상 천국은 와 있지만 사람들은 볼 수 있는 눈이 없을 뿐인 거죠. 복음은 언제나 우리 곁을 떠돌고 있지만 들을 수 있는 귀가 없는 겁니다.

 

천국을 누리려면? 몸이 변해야죠. 구원을 받으려면 자기 몸을 바꿔야 하는 겁니다. 이것이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하는 자의 차이죠. 헌금을 통해서, 목사의 기도를 통해서 천국에 가는 게 아니란 거죠. 어리석은 자는 그 자체로 징계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그 자체로 복이죠. 복된 자는 거짓과 욕망으로 물든 우상들을 망치로 부숩니다. 그것이 천국의 문을 두드리는 일임을 알기에.

 

기독교 경전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유대인 경전 토라를 보면, 띄어쓰기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구두점 하나를 어디에 찍느냐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집니다. 물론, 자기만의 해석을 유일한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어디가나 어깨를 떡 벌린 채 정통이란 이름으로 진리라는 것들을 독점하죠. 왜냐하면 다른 해석은 자신의 수입을 줄어들게 만드니까요. 어리석은 사람들은 엄마가 씹어준 밥을 먹듯 누군가 해석한 이야기를 되뇌며 살아가게 됩니다.

 

누구나 한 번쯤, 더할 나위 없이 자기 삶이 초라하고 의미 없게 다가올 때가 있을 겁니다. 그러하기에 사람들은 자살을 하거나 극단의 쾌락을 쫓으며 ‘살아있음’을 느끼려 하죠. 그만큼 우리들 삶이 살아있지 못하다는 반증이기도 하죠. 좀비들만이 어떻게든 살아있고자 애를 쓰는 거니까요. 인생 뭐 있나, 다 그렇게 사는 거지, 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에게 루미는 얘기합니다. 지금 사랑하라고, 사랑 안에서 길을 잃으라고.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또는 ‘저기 있다’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너희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지금 사랑하는 순간이 천국이고 하나님 나라라는 얘기죠. 사랑이 천국이기에 거기서 길이란 세속의 욕망과 집착들은 잃어버리게 됩니다. 등 하나가 천년 동안 쌓인 어둠을 한순간에 없앤다고 했습니다. 사랑이 삶을 구원합니다. 세상과 뜨거운 사랑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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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 고미숙의 유쾌한 임꺽정 읽기
고미숙 지음 / 사계절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농민, 노동자와 회사원이 거리로 내몰린 지는 이미 너무나 오래 되었어요. 비정규직과 이주민들이 거리를 메우게 된 것도 더 이상 새로운 현상이 아니죠. 여기에 더해 이젠 청년들, 특히 대졸자들이 백수가 되어 등 떠밀리고 있습니다. 대학생들은 청년실업의 다른 이름이죠. 대학을 가기 위해 죽어라고 공부하고, 대학에 가선 학점에 목숨을 겁니다. 그러고 나선? 백수가 되죠! 참 서글프면서 황당하기 짝이 없는 한국!

 

이러한 불안이 청년 때 잠깐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냐, 그것도 아닙니다. 정규직이 되고, 중년이 되어도 누구나 언제든지 백수가 되는 세상입니다. 하긴 정년퇴직을 한 노년층 역시 결국은 백수 아닌가요? 이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내일의 백수’로 살아가게 되었죠. 바야흐로 백수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속어이자 낮잡아보는 말이었던 백수가 정치경제학 용어로 당당하게 자리매김한 거죠.

 

때마침 나온『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2009. 사계절]은 오늘의 백수와 내일의 백수들에게 임꺽정이 살았던 시대를 보여주며 기운을 북돋워주네요. 지금보다 훨씬 ‘못 살았던’ 500년 전 사람들이 인생 맛을 풍성하게 즐기면서 재미나게 살았던 모습을 담아내네요. 지은이 고미숙 선생은 ‘임꺽정’을 경제, 공부, 우정, 사랑과 성, 여성, 사상, 조직으로 나눠서 구수하면서 유쾌한 입담을 펼치네요.

 

임꺽정은 백정 출신 화적입니다.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탐관오리를 죽이고 그 재물을 빼앗아 빈민에게 나누어 주는 일을 하다가 토포사 남치근에게 붙잡혀 죽죠. 벽초 홍명희 선생은 남아있는 사료 하나하나를 모아서 거대한 이야기『임꺽정』을 썼으나 미완성으로 남습니다. 그것이 80년대 베스트셀러가 되죠. 민중의 수난, 저항과 반역, 장렬한 최후가 떠오르는 임꺽정은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80년대와 잘 맞물렸으니까요.

 

홍명희는 북한의 거물이었으니 임꺽정은 당연히 금서였죠. 작년 ‘불온서적 파문’에서 알 수 있든 사람들은 금서라는 말에 호기심만 더 커졌죠. 금서는 사람들 눈을 사로잡았고 16세기 인물 임꺽정은 20세기에 다시 살아나 사람들 가슴에 솟아올랐죠. 시대를 주름잡던 화적패가 썩어문드러진 중앙권력과 맞장 뜨는 이야기에 사람들은 대리만족을 느끼며 입소문을 탄 것이죠. 그 뒤,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큰 인기를 얻은 임꺽정!

 

사랑과 우정, 공부와 놀이를 하며 풍요로운 삶을 사는 새로운 백수들, 그들의 비결은?

 

그렇게 의적으로만 알던 임꺽정에 대해 고미숙 선생은 신선한 해석을 꺼내죠. 바로 ‘백수’라는 겁니다. 이른바 신백수론, 책을 읽어보면, 임꺽정과 칠두령은 전혀 의적이 아니었고, 의적이 될 생각조차 없던 인물들이죠. 계급의식을 가지고 백성들과 연대하려고 한 흔적도 없어요. 그들은 그저 자신의 길을 거침없이 갔을 뿐이죠. 자기에게 주어진 신분이나 경제 환경 때문에 좌절하거나 무릎 꿇지 않죠.

 

쉽게 말해서 다 노는 사내들이었으나 오늘날 찌질한 느낌이 밴 백수라는 딱지를 그들에게 붙일 수가 없다는 거죠. 거의 모든 인물이 특별한 직업이 없거나 있어도 하는 둥 마는 둥 하지만 그들은 궁상맞게 살지 않습니다. 퇴계, 화담, 토정 등등 책에 잠깐씩 나오는 지성인들 역시 하나같이 백수들인데, 이들과 어울려 사랑과 우정, 공부와 놀이를 하며 지금과 견주어도 조금도 꿀리지 않고, 오히려 더 풍요로운 삶을 삽니다.

 

한마디로 자유를 마음껏 누립니다. 지은이는 여기에 감동 먹죠. 자본주의에 너무 물들었기에 논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현대인은 임꺽정을 만나면, 어안이 벙벙해집니다. 어떻게 일을 안 하고 먹고 사는 게 가능하지? 비결은 네트워크, 낯설고 다른 성질의 존재들과 접속하여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기 때문이죠. 화폐경제로 셈 되지 않는 즐거움을 선물하면서 그들은 잘 먹고 잘 살았던 겁니다.

 

따지고 보면, 조선의 선비들도 그렇지만 그리스 시대에도 자유인은 직업이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그 시절 노예란 정규직을 가진 이들이었죠. 평생 한 가지 직장과 일에 붙박여야 하는 것은 노예의 저주받은 숙명이었죠. 그런데 우리는 왜 그토록 정규직을 열망할까요? 과연 그게 자연스러운 생존본능일까요? 끊임없이 안달복달,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백수나 정규직 모두 노예가 되어버리는 기막힌 오늘날입니다.

 

그 많던 노동은 누가 다 먹었을까? 사실상 ‘임금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현대인들

 

노예란 말에 발끈할 수도 있지만, 지은이는 그것을 노리고 있을지 모르죠. 스스로 노예가 아니란 것을 증명할 수 있나요? 노동을 찬양하면서 사람들은 흔히 개미를 얘기하는데, 생물학자들에 따르면, 개미들 가운데 직접 노동을 하는 비율은 1/3이고, 나머지 2/3은 위기관리를 위해 놀죠. 또 노동하는 개미들도 단 4시간만 땀을 흘리고 나머지는 자기 삶을 즐깁니다. 하루 종일 비지땀을 흘리면서 사람들은 개미보다 행복한가요?

 

살기 힘겹다는 불만이 터져 나오는 걸 막기 위해 지배자들은 노동을 우러릅니다. 더 많은 노동이 더 큰 부를 가져올 거라고 목소리 높이죠. 부지런히 일해서 경제성장 하고,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자던 유령은 21세기에도 떠돌고 있습니다. 결국은? 수치상 국가총생산이 높아졌으나 많은 사람들의 삶은 더 팍팍해지고 있죠. 그 많던 노동은 누가 다 먹었을까요? 그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일할 게 아니라 생각을 하고 살자는 거죠.

 

노동하지 않을 수 없게 내몰리면서도 노동하는 것을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물인양, 심지어는 대단한 권리인 양 떠드는 것은 허깨비이자 환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노예제도에 대해서는 아주 부끄럽게 여기면서도 사실상 ‘임금 노예’인 자신의 모습은 인정하고 싶지 않아 노동을 치켜세우는 일에 들떠서 동의하죠. 우리가 옛날 노예보다 더 가지고 있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바로 ‘허영심’이라고 니체는 꼬집습니다.

 

우리는 노예제도 폐지를 원하지만 사실 노예들이 근대의 노동자보다 더 안정되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사실, 노예 노동은 노동자의 노동에 비해서 얼마 안 되는 노동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노동 없는 사회를 상상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노동이 불가피하다는 주장과 그것을 찬미해야 한다는 주장은 전혀 다른 거죠. 노동의 성격을 제대로 보는 사회는 그것을 줄이고, 어떻게든 자유로운 활동을 늘리려 하겠지만, 노동에 허영심이 있는 사회는 그것을 늘리고자 안간힘을 쓰기 때문이죠. OECD국가 가운데 가장 많이 일을 하는 한국은 과연 노동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고, 노동자들의 삶이 그들의 말처럼 숭고한지 곰곰 생각해봤으면 하네요.

 

어제와 똑같은 평범하면서 불행한 하루를 살아가는 오늘의 백수이자 내일의 백수에게

 

혹시나 정규직을 무조건 하지 말라는 소리로 받아들이실 분이 계실까봐 노파심에 몇 글자 덧붙이면, 직업의 안정성은 더 말할 거 없이 중요한 과제죠. 그러나 직업의 안정과 거기에 평생 목매는 일은 다르다는 거죠. 그것이 정말 자신의 삶을 알차게 하고 자유롭게 하는 일이라면 한평생 즐거움으로 하겠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은 상황이니까요. 요컨대 비정규직 확산을 막는 것과 더불어 지금보다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풍토가 이뤄져야 한다는 얘기죠.

 

말이야 쉽지, 라고 빈정거리며 어제와 똑같이 ‘평범하면서 불행한’ 하루를 살아갈까봐 지은이는 자신의 백수 이야기를 먼저 솔직하게 들려줍니다. 대졸자 백수신세가 너무 창피했으며 ‘박사 실업자’가 되어서도 부끄러웠다고 얘기하지만, 생각이 바뀌면서 백수의 자유로움을 누렸고, 그러면서 새로운 길이 열렸다고 하네요. 그 경험을 바탕으로 오늘날 백수들에게 용기를 내라고 등 두드려 주네요.

 

현실에서 백수의 삶은 곤혹스럽고 힘겨울 때가 많죠. 타인의 눈에 사로잡힌 삶이기에 남 신경도 써야하고, 이래저래 주머니 사정도 쪼들리니까요. 거기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농담처럼 어찌나 세상은 백수를 몰아붙이는지 그야말로 쩐다, 쩔어! 이때 임꺽정은 큰 도움이 되겠네요. 노예로 사는 게 아니라 시간을 부리며 살아가는 방법들, 백수신분에서 벗어나고자 함이 아니라 오히려 백수로서도 떳떳하게 살아가는 태도를 귀띔해주니까요.

 

더구나, 당대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의 웅숭깊은 이야기와 피 비린내 나는 정치권 역사, 사설시조에서 자주 등장하는 여성들의 화끈한 성풍속이나 청춘 남녀의 내숭 없는 사랑, 거기다 남자를 보쌈해서 죽이는 ‘괴이한 행각’까지 교과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조선전기사가 잘 드러나 있네요. 재미난 역사 공부는 덤, 오늘의 백수이자 내일의 백수가 어떻게 살아야할지 힘주는 책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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