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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 고미숙의 유쾌한 임꺽정 읽기
고미숙 지음 / 사계절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농민, 노동자와 회사원이 거리로 내몰린 지는 이미 너무나 오래 되었어요. 비정규직과 이주민들이 거리를 메우게 된 것도 더 이상 새로운 현상이 아니죠. 여기에 더해 이젠 청년들, 특히 대졸자들이 백수가 되어 등 떠밀리고 있습니다. 대학생들은 청년실업의 다른 이름이죠. 대학을 가기 위해 죽어라고 공부하고, 대학에 가선 학점에 목숨을 겁니다. 그러고 나선? 백수가 되죠! 참 서글프면서 황당하기 짝이 없는 한국!
이러한 불안이 청년 때 잠깐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냐, 그것도 아닙니다. 정규직이 되고, 중년이 되어도 누구나 언제든지 백수가 되는 세상입니다. 하긴 정년퇴직을 한 노년층 역시 결국은 백수 아닌가요? 이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내일의 백수’로 살아가게 되었죠. 바야흐로 백수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속어이자 낮잡아보는 말이었던 백수가 정치경제학 용어로 당당하게 자리매김한 거죠.
때마침 나온『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2009. 사계절]은 오늘의 백수와 내일의 백수들에게 임꺽정이 살았던 시대를 보여주며 기운을 북돋워주네요. 지금보다 훨씬 ‘못 살았던’ 500년 전 사람들이 인생 맛을 풍성하게 즐기면서 재미나게 살았던 모습을 담아내네요. 지은이 고미숙 선생은 ‘임꺽정’을 경제, 공부, 우정, 사랑과 성, 여성, 사상, 조직으로 나눠서 구수하면서 유쾌한 입담을 펼치네요.
임꺽정은 백정 출신 화적입니다.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탐관오리를 죽이고 그 재물을 빼앗아 빈민에게 나누어 주는 일을 하다가 토포사 남치근에게 붙잡혀 죽죠. 벽초 홍명희 선생은 남아있는 사료 하나하나를 모아서 거대한 이야기『임꺽정』을 썼으나 미완성으로 남습니다. 그것이 80년대 베스트셀러가 되죠. 민중의 수난, 저항과 반역, 장렬한 최후가 떠오르는 임꺽정은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80년대와 잘 맞물렸으니까요.
홍명희는 북한의 거물이었으니 임꺽정은 당연히 금서였죠. 작년 ‘불온서적 파문’에서 알 수 있든 사람들은 금서라는 말에 호기심만 더 커졌죠. 금서는 사람들 눈을 사로잡았고 16세기 인물 임꺽정은 20세기에 다시 살아나 사람들 가슴에 솟아올랐죠. 시대를 주름잡던 화적패가 썩어문드러진 중앙권력과 맞장 뜨는 이야기에 사람들은 대리만족을 느끼며 입소문을 탄 것이죠. 그 뒤,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큰 인기를 얻은 임꺽정!
사랑과 우정, 공부와 놀이를 하며 풍요로운 삶을 사는 새로운 백수들, 그들의 비결은?
그렇게 의적으로만 알던 임꺽정에 대해 고미숙 선생은 신선한 해석을 꺼내죠. 바로 ‘백수’라는 겁니다. 이른바 신백수론, 책을 읽어보면, 임꺽정과 칠두령은 전혀 의적이 아니었고, 의적이 될 생각조차 없던 인물들이죠. 계급의식을 가지고 백성들과 연대하려고 한 흔적도 없어요. 그들은 그저 자신의 길을 거침없이 갔을 뿐이죠. 자기에게 주어진 신분이나 경제 환경 때문에 좌절하거나 무릎 꿇지 않죠.
쉽게 말해서 다 노는 사내들이었으나 오늘날 찌질한 느낌이 밴 백수라는 딱지를 그들에게 붙일 수가 없다는 거죠. 거의 모든 인물이 특별한 직업이 없거나 있어도 하는 둥 마는 둥 하지만 그들은 궁상맞게 살지 않습니다. 퇴계, 화담, 토정 등등 책에 잠깐씩 나오는 지성인들 역시 하나같이 백수들인데, 이들과 어울려 사랑과 우정, 공부와 놀이를 하며 지금과 견주어도 조금도 꿀리지 않고, 오히려 더 풍요로운 삶을 삽니다.
한마디로 자유를 마음껏 누립니다. 지은이는 여기에 감동 먹죠. 자본주의에 너무 물들었기에 논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현대인은 임꺽정을 만나면, 어안이 벙벙해집니다. 어떻게 일을 안 하고 먹고 사는 게 가능하지? 비결은 네트워크, 낯설고 다른 성질의 존재들과 접속하여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기 때문이죠. 화폐경제로 셈 되지 않는 즐거움을 선물하면서 그들은 잘 먹고 잘 살았던 겁니다.
따지고 보면, 조선의 선비들도 그렇지만 그리스 시대에도 자유인은 직업이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그 시절 노예란 정규직을 가진 이들이었죠. 평생 한 가지 직장과 일에 붙박여야 하는 것은 노예의 저주받은 숙명이었죠. 그런데 우리는 왜 그토록 정규직을 열망할까요? 과연 그게 자연스러운 생존본능일까요? 끊임없이 안달복달,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백수나 정규직 모두 노예가 되어버리는 기막힌 오늘날입니다.
그 많던 노동은 누가 다 먹었을까? 사실상 ‘임금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현대인들
노예란 말에 발끈할 수도 있지만, 지은이는 그것을 노리고 있을지 모르죠. 스스로 노예가 아니란 것을 증명할 수 있나요? 노동을 찬양하면서 사람들은 흔히 개미를 얘기하는데, 생물학자들에 따르면, 개미들 가운데 직접 노동을 하는 비율은 1/3이고, 나머지 2/3은 위기관리를 위해 놀죠. 또 노동하는 개미들도 단 4시간만 땀을 흘리고 나머지는 자기 삶을 즐깁니다. 하루 종일 비지땀을 흘리면서 사람들은 개미보다 행복한가요?
살기 힘겹다는 불만이 터져 나오는 걸 막기 위해 지배자들은 노동을 우러릅니다. 더 많은 노동이 더 큰 부를 가져올 거라고 목소리 높이죠. 부지런히 일해서 경제성장 하고,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자던 유령은 21세기에도 떠돌고 있습니다. 결국은? 수치상 국가총생산이 높아졌으나 많은 사람들의 삶은 더 팍팍해지고 있죠. 그 많던 노동은 누가 다 먹었을까요? 그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일할 게 아니라 생각을 하고 살자는 거죠.
노동하지 않을 수 없게 내몰리면서도 노동하는 것을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물인양, 심지어는 대단한 권리인 양 떠드는 것은 허깨비이자 환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노예제도에 대해서는 아주 부끄럽게 여기면서도 사실상 ‘임금 노예’인 자신의 모습은 인정하고 싶지 않아 노동을 치켜세우는 일에 들떠서 동의하죠. 우리가 옛날 노예보다 더 가지고 있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바로 ‘허영심’이라고 니체는 꼬집습니다.
우리는 노예제도 폐지를 원하지만 사실 노예들이 근대의 노동자보다 더 안정되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사실, 노예 노동은 노동자의 노동에 비해서 얼마 안 되는 노동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노동 없는 사회를 상상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노동이 불가피하다는 주장과 그것을 찬미해야 한다는 주장은 전혀 다른 거죠. 노동의 성격을 제대로 보는 사회는 그것을 줄이고, 어떻게든 자유로운 활동을 늘리려 하겠지만, 노동에 허영심이 있는 사회는 그것을 늘리고자 안간힘을 쓰기 때문이죠. OECD국가 가운데 가장 많이 일을 하는 한국은 과연 노동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고, 노동자들의 삶이 그들의 말처럼 숭고한지 곰곰 생각해봤으면 하네요.
어제와 똑같은 평범하면서 불행한 하루를 살아가는 오늘의 백수이자 내일의 백수에게
혹시나 정규직을 무조건 하지 말라는 소리로 받아들이실 분이 계실까봐 노파심에 몇 글자 덧붙이면, 직업의 안정성은 더 말할 거 없이 중요한 과제죠. 그러나 직업의 안정과 거기에 평생 목매는 일은 다르다는 거죠. 그것이 정말 자신의 삶을 알차게 하고 자유롭게 하는 일이라면 한평생 즐거움으로 하겠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은 상황이니까요. 요컨대 비정규직 확산을 막는 것과 더불어 지금보다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풍토가 이뤄져야 한다는 얘기죠.
말이야 쉽지, 라고 빈정거리며 어제와 똑같이 ‘평범하면서 불행한’ 하루를 살아갈까봐 지은이는 자신의 백수 이야기를 먼저 솔직하게 들려줍니다. 대졸자 백수신세가 너무 창피했으며 ‘박사 실업자’가 되어서도 부끄러웠다고 얘기하지만, 생각이 바뀌면서 백수의 자유로움을 누렸고, 그러면서 새로운 길이 열렸다고 하네요. 그 경험을 바탕으로 오늘날 백수들에게 용기를 내라고 등 두드려 주네요.
현실에서 백수의 삶은 곤혹스럽고 힘겨울 때가 많죠. 타인의 눈에 사로잡힌 삶이기에 남 신경도 써야하고, 이래저래 주머니 사정도 쪼들리니까요. 거기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농담처럼 어찌나 세상은 백수를 몰아붙이는지 그야말로 쩐다, 쩔어! 이때 임꺽정은 큰 도움이 되겠네요. 노예로 사는 게 아니라 시간을 부리며 살아가는 방법들, 백수신분에서 벗어나고자 함이 아니라 오히려 백수로서도 떳떳하게 살아가는 태도를 귀띔해주니까요.
더구나, 당대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의 웅숭깊은 이야기와 피 비린내 나는 정치권 역사, 사설시조에서 자주 등장하는 여성들의 화끈한 성풍속이나 청춘 남녀의 내숭 없는 사랑, 거기다 남자를 보쌈해서 죽이는 ‘괴이한 행각’까지 교과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조선전기사가 잘 드러나 있네요. 재미난 역사 공부는 덤, 오늘의 백수이자 내일의 백수가 어떻게 살아야할지 힘주는 책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