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아비춤
조정래 지음 / 문학의문학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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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국민은 나라의 주인인가. 아니다. 노예다. 국가 권력의 노예고, 재벌들의 노예다. 당신들은 이중 노예다. 그런데 정작 당신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것이 당신들의 비극이고, 절망이다.

 

이번에 재벌의 재산권 불법 상속과 경영권 불법 승계 사건이 또다시 벌어졌다. (…) 왜 그런 사태가 거듭 벌어지는 것일까. (…) 나라의 주인이고 이 사회의 주인인 국민과 대중들이 그 끔찍한 사건을 방관하고, 묵인했기 때문이다.

(…)

어떻게 그런 황당무계한 불법 범죄 행위가 무죄가 될 수 있는가? 국민인 당신들이 노예이고 싶지 않다면 이 점에 눈을 부릅떠야 한다. 당신들 모르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알아야 한다. 그 엄청난 경제 범죄를 무죄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비자금의 막강한 힘이었다.

(…)

그들은 그 탈세한 검은 돈을 이 나라의 모든 권력 기관에 다 뿌렸다. 정치인, 법조인, 정부 관료들은 물론이고 언론인, 학자들까지도 그 돈을 받아먹었다. 그러나 놀라지 마라. 재벌을 감시 감독해야 하는 검찰, 국세청, 공정위, 금융감독기관도 모두 그 돈을 달게 먹었다. 이 사태는 무엇을 말하는가. 국가의 모든 권력이 재벌의 손아귀에 들어가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 아무리 큰 죄를 저질러도 무죄가 될 수밖에. 좀도둑은 포승 받아도 큰도둑은 상 받는다. 우리의 속담이다.

(…)

재벌들이 저지르는 그 불법 행위는 분명 사회를 병들게 하고 나라를 망치는 범죄이고, 그 피해는 국민 전체에게 씌워진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동안 재벌들의 경제 범죄에 대해 너무나 관대했다. 왜 그랬을까. 기업들이 잘 되어야 우리도 잘살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건 순진함을 넘어 바보 같은 기대고 희망이었다. 그건 지난 40여 년 동안 우리가 취해 있었던 환상이고 몽상이고 망상이었다.

(…)

우리가 그동안 일방적으로 품어 왔던 그 기대와 희망은 바로 자발적 복종이었다. 스스로 노예 되기를 자청한 것이다.

긴 인류의 역사는 증언한다. 저항하고 투쟁하지 않은 노예에게 자유와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그런데 노예 중에 가장 바보 같고 한심스런 노예가 있다. 자기가 노예인 줄을 모르는 노예와, 짓밟히고 무시당하면서도 그 고통과 비참함을 모르는 노예들이다. 그 노예들이 바로 지난 40년 동안의 우리들 자신이었다.『허수아비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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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집권플랜 - 오연호가 묻고 조국이 답하다
조국.오연호 지음 / 오마이북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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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사회를 둘러보면, 이른바 ‘왕년에 날렸던 사람들’로 뒤채입니다. 술 한 잔만 들어가면 자기들은 세상을 들었다 ‘놓았다며’ 어쩌고저쩌고 이러쿵저러쿵 납신댑니다. 그러면서 마치 으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이런 말을 꼭 덧붙이죠. 우리 때는 안 그랬는데 요즘 애들은…….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렇게 구시렁거리는 이들 가운데 지금 산뜻한 이들은 몹시 드뭅니다. 연봉에 쌍심지를 켜고 자기 자식만 이른바 ‘좋은 대학’ 보내려고 아득바득하죠. 구립니다. 오늘이 신명나고 자지러지면 구태여 ‘왕년’을 들먹이지 않겠지만, 요새 자신이 시시하고 데데하기에 걸핏하면 지난날을 끄집어다가 부풀리고 장밋빛을 덧씌우며 지금의 지질함을 감추고자 몸부림을 칩니다. 지난 시절을 꺼내다가 자신의 초라함을 가리는 덮개처럼 쓰는 꼴이죠.

 

이렇게 ‘늙어버리고 삭은’ 사람들이 읽으면 다시금 콩닥거릴 책이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가 묻고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답을 한『진보집권플랜』[오마이북. 2010]은 구겨지고 헤진 386세대의 등을 두드려주면서 회춘을 하자고 다정하면서도 따끔하게 이야기를 열어갑니다. 두 386세대가 늙다리로 변해버린 또래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죠.

 

먼저 “나는 아직 늙지 않았다. 아직 할 일이 있다”라고 되뇌어봅시다. 선배 또는 부모 세대의 역할에 대해 자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2017년이 되면 386세대는 50세 전후가 됩니다. 앞으로 386세대가 이루고 매듭지어야 할 일이 많이 있다는 거죠. 겉늙지 말아야 합니다. 오 대표와 저를 포함한 우리 세대가 ‘386’이라는 사회적 기호를 부여받은 것은 단지 나이, 학번, 출생 연도 때문만은 아니죠. 1980년대 우리의 뜨거웠던 삶 때문에 그런 호칭을 갖게 된 것 아닙니까? 지금은 그때보다 시각, 능력, 경험 등에서 훨씬 발전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건 과거보다 더 잘하고 더 프로페셔널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그라지려고 하는 열정을 되살려서 마지막으로 한 번 해보자, 그래도 안 되면 그때 다음 세대에게 넘기자, 이런 마음가짐으로 힘을 모아야 하지 않을까요? 78쪽

 

젊은 사람들 못잖게 상상력이 샘솟으며 사회변화를 일으키고자 조직을 꾸리고 애쓰는 386세들도 많긴 하죠. 그러나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폭삭 늙어버린 채 과거를 훈장처럼 달고, 자기자랑에 혓바닥을 놀리며 걸쩍지근하게 훈장질만 합니다. 참말 애처롭죠. 젊은이들한테 이글거림이 없다고 왜장치기에 앞서 과거를 뜯어먹지만 말고 시방 자기의 심장이 뜨거운지 돌아봐야죠.

 

젊은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걸 손수 해내면 같이 ‘해피’할 텐데, 그들은 입술만 헤피 들이밉니다. 난 이제 늙었다고 너희가 해야 한다고 말하며 얼밋얼밋 젊은이들만 탓하고 앉았죠. 오늘날 꼭 있어야 하는 것은 젊은이들의 정신 차림 못잖게 386세대의 절절한 자기반성입니다. 이대로라면 젊은이들이 움직여도 386세대가 어마어마한 걸림돌이 되어 도루묵 될 테니까요.

 

조국 교수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다고, 더불어 꾸었던 꿈들을 잊지 말자고 얘기합니다. 그동안 386세대들이 사회를 바꾸려고 함께 애써왔는데, 이제 늙었다고 손을 떼는 순간, 바위와 돌덩이들이 사랑스러운 자기 자식들을 덮칠 테니까요.

 

우리 세대가 꾸는 꿈은 이제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녀 세대의 미래에 대한 꿈으로 직결됩니다. 이미 자녀들이 중고등학교, 대학생까지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넘겨주어야 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의 새로운 집단노력이 세상을 완전히 바꾸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나은 세상, 몇 보 더 진보적인 세상을 자녀 세대에게 넘겨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좋아하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구절이 생각납니다. “숲은 사랑스럽고 어둡고 깊네. 그러나 잠들기 전에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더 걸어가야 할 몇 마일이 남아있다네.” 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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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마무리
법정(法頂) 지음 / 문학의숲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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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이 떠나고 나서도 그가 남긴 글들은 사람들을 맑고 향기롭게 해주네요. 뜨거운 차를 잔잔하게 마시듯 고요하면서도 묵직한 그의 글들을 나지막이 읊으면서 천천히 읽다보면 놀랍게도 삶의 무게는 보다 더 가벼워지고 마음은 더 시원해집니다. 그의 글들이 먼지털이마냥 오랜 세월 내 안에 묵었던 때들과 더께들을 떨어져나가게 해주니까요.

 

법정스님의『아름다운 마무리』[문학의숲. 2008]를 넘기다보니, 이명박 정부가 하고 있는 4대강 정책 같이 잘못된 일들엔 누구보다 불호령을 치지만 일상에선 친절과 배려에 힘쓰라고 거듭 얘기하시네요. “만나는 대상마다 그가 곧 내 ‘복밭’이고 ‘선지식’임”을 알아야 하는데, 그 까닭은 “그때 그곳에 그가 있어 내게 친절을 일깨우고 따뜻한 배려를 낳게 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친절이다. 이웃에 대한 따뜻한 배려다. 사람끼리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모든 존재에 대해서 보다 따뜻하게 대할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친절과 따뜻한 보살핌이 진정한 ‘대한민국’을 이루고, 믿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110쪽

 

이렇게 세상이 엉망인 까닭은 어쩌면 이념이 모자라기 때문이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대단하다는 지식인들이 저마다 자기가 옳다며 내놓은 이론들은 차고 넘칩니다. 그렇지만 그 이론들만큼, 드잡이하고 실랑이하는 만큼, 사람들의 삶이 더 행복해졌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오히려 현실감각에서 멀어진 채 뜬구름 잡는 소리만 늘어놓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일그러진 현실에 눈감아서야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특정한 이론을 섬겨서도 안 되지요. 일상세계가 텁텁하고 힘겨운 까닭은 뛰어난 지도자가 정치를 하지 않았거나 어떤 사상을 밑천삼아 ‘변혁’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너와 나 사이에 살가움과 친절함이 달리기 때문이지요. 가까운 사람들과도 다정하고 행복하게 지낼 줄 모르는데, 어찌 낯선 사람들과 어울려 좋은 사회를 이룩할 수 있겠는지요.

 

사람에겐 거룩한 글자들이나 텅 빈 몸짓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로봇이 아니기에 이념을 지닌 채 앞만 보고 걸어갈 수 없죠. 짬짬이 발 쉼을 해야 하고 멈춰 서서 풍치도 느끼고, 이따금 길이 막히면 에움길로 가봐야 하고, 때론 쉬고 싶을 때는 퍼질러 앉아 생막걸리 한잔도 나눠야 합니다. 몸과 몸을 맞대고, 눈과 눈이 마주치는 생생한 관계를 통해서 사람들은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따라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믿음과 정이 도타워질 수 있게끔 사람들을 거듭나게 해주는 ‘영성의 기운’은 ‘사회과학지식’만치 소중하지요. 푸코의 주장대로 “권력은 손에 넣거나 빼앗거나 서로 나눠 갖는 어떤 것, 간직하거나 놓치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쁜 놈들’에게서 권력을 빼앗아와 세상을 바꾸자는 생각은 이제 털어내어야 합니다. 권력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른바 ‘사회과학자들’ 가운데는 ‘엘리트 의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먹물들로 세상을 그린답시고 옆 사람들에게 먹칠하며 업신여기기를 마다않는 이들이 드물지 않습니다. 날카로움과 야멸침을 가름하지 못하고, 뾰족한 꼬집기와 싸늘한 헐뜯기를 헷갈려하는 것이죠. 먹통이 되어버린 셈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법정스님의 글은 자신이 바꾸고자 하는 현실이 무엇을 위한 건지 되돌아보게끔 해주는 힘이 있습니다. 사막여행보다 더 막막한 인생여행을 할 때, 사람은 사상만으로 달려갈 수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살포시 감싸안아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친절함과 살가움은 삶을 촉촉하게 해주는 녹녹함입니다.

 

이러한 깍듯함과 자비심을 품을 때만이 삶이 살아있게 됩니다. 썩은 살은 아프더라도 도려내어야 하고 삭정이는 잘라버려야 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남에 대한 너그러움과 다사로움을 놓치는 순간, 삶은 성말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마음의 끈을 놓치다보면 어느새 죽음의 골짜기로 굴러 떨어지게 마련이지요. 그래서 법정 스님은 내 안의 정겨움을 지키라고 죽비소리를 해주시네요.

 

삶의 비참함은 죽는다는 사실보다도 살아 있는 동안 우리 내부에서 무언가 죽어간다는 사실에 있다. 가령 꽃이나 달을 보고도 반길 줄 모르는 무뎌진 감성, 저녁노을 앞에서 지나온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줄 모르는 무감각, 넋을 잃고 텔레비전 앞에서 허물어져 가는 일상 등, 이런 현상이 곧 죽음에 한 걸음씩 다가섬이다. 88~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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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의 나무 아우또노미아총서 12
움베르토 마투라나.프란시스코 바렐라 지음, 최호영 옮김 / 갈무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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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굳게 정해져 있다고 여느 사람들은 생각하기 쉽습니다. 사회는 저렇고, 사람이란 그렇고, 나는 이렇다며 어떠한 ‘틀’을 믿어버리는 것이죠. ‘정해진 세계’에 ‘객관화된 지식’을 얻으려고 나름 애를 쓰면서 사람들은 살아갑니다. 이런 흐름은 자연과학부터 처세술까지 고샅고샅 미칩니다.

 

그러나 객관화된 세계란 없으며 모든 세상은 자신이 만드는 것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냐에 따라 세상이 달리 보인다는 얘기는 철학사에서 자주 나왔었지만, 마뚜라나와 바렐라는 신경생물학을 통해 ‘사람의 인식’을 찬찬히 파고들죠. 스승이면서도 동무였던 두 사람은『앎의 나무』[갈무리. 2007]에서 생명이 어떻게 생겨나고 앎이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아주 쉬우면서도 재미나게 풀어갑니다.

 

빨간 능금을 봤으면 뭇사람들은 빨간 능금이 내 앞에 있구나, 이렇게 알지만, 이들의 연구에 따르면 전혀 그렇지 않지요. 자기 몸의 얼개에 따라 그렇게 보인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은 객관화된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떠한 세계를 이룩합니다. 그 빨간 능금은 ‘나의 짜임새’에 따라 되돌려진 ‘앎’이지요.

 

독자들은 마치 ‘사실’이나 물체가 저기 바깥에 있어서 그것을 그냥 가져다 머리에 넣으면 되는 것처럼 인식현상을 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늘 되새겨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려는 모든 것의 근본이다. 33쪽

 

이들에 따르면, 자기로부터 얼마 떨어져 있는 능금은 ‘나의 짜임새’에 따라 ‘특수하게’ 알아낸 경험입니다. 세계를 알아서 앎이 생기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아는 움직임이 세계를 낳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는 자신이 만든 것이죠. 그렇다고 나 혼자 엉뚱하게 세계를 만들었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엔 ‘이미’ 자신의 몸짓이 엉켜있다는 뜻입니다. 겪음과 앎은 뒤얽혀있습니다. 함이 곧 앎이며 앎이 곧 함이고 앎이 삶이고 삶이 앎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생각이 낯설 수 있기에 지은이들은 상냥하게도 여러 자료들을 나긋나긋 들어주면서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아는지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앞에 있는 것들을 ‘고스란히’ 본다고 여기지만, 똑똑히 말하면, 구멍이 뻥 뚫려 있습니다. 바로 ‘맹점’이죠. ‘맹점실험’을 해보면, 버젓하게 앞에 있는 물건이 안 보입니다. 늘 맹점의 크기만큼 사람은 자신의 앞을 못 보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보지 못한다는 것을 보지 못하죠.

 

여러 보기들을 들면서 세상은 모두가 똑같이 알고 있는 ‘진짜’가 아니라 자신이 ‘이룸’을 한 것이며, 이에 ‘자기생성’ 개념으로 이야기를 뻗어나갑니다. 세포들이 그러하듯 생명 또한 바깥과 마주치고 맞대어 이어지면서도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낸다는 이론이죠. 이런 ‘자기생성’은 생명의 탄생부터 자연선택이 아닌 자연표류에 따른 진화에 이르기까지 여러 수수께끼들을 새롭게 밝혀줍니다.

 

이와 아울러 앎이 곧 함이고 함이 앎이라는 ‘맞물림’은 언어의 중요성을 도드라지게 합니다. 사람이 오늘날 사람일 수 있는 까닭은 언어가 있기 때문이지요. 언어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지 못한다면 벌레가 그러하듯 ‘나’를 인식할 수 없으니까요. 언어가 없으면 나도 없는 셈입니다. 사람은 언어를 통해 ‘정신’을 만들고 ‘세계’를 짓습니다.

 

이처럼 언어와 (그것이 나타나는) 사회적 맥락 전체가 생김에 따라 인간의 가장 깊숙한 경험인 정신과 자기의식이라는 새로운 현상이 생겼다. 그것에 걸맞은 상호작용의 역사를 거치지 않은 사람은 이 영역에 참여할 수 없다. 늑대소녀를 생각해보라! 그리고 정신이란 사회적, 언어적 접속의 그물에서 ‘언어 안에 존재’함으로써 나타나는 현상이지, 내 머리 속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의식과 정신은 사회적 접속의 영역에 속하며, 그 영역에서 의식과 정신의 역동성이 작용한다. 262쪽

 

이러한 돌아봄을 통해 신경생물학은 윤리학과 만납니다. 왜 자신의 생각을 자주 가다듬고 남과 어울리며 만나야 하는지 그 밑바탕을 신경생물학이 닦아줍니다.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이니까요.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는 ‘나의 얼개’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기에 남과 꼭 같을 수 없고, 늘 옳은 것이 아니죠. 따라서 어느 누구라도 남과 함께 지내려면 줄기차게 자신을 돌아보고 매만져야 하며, ‘나만의 옳음’을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는 ‘윤리’가 나옵니다. 이렇게 사랑이 열립니다.

 

나아가 생물학은 우리가 인지적 영역을 넓힐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경우란 예컨대 이성적인 사고를 통해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때, 낯선 이를 나와 같은 이로서 마주할 때, 더 직접적으로는 사람들 사이의 생물학적 일치를 체험할 때 등이다. 사람들 사이의 생물학적 일치 때문에 우리는 타인을 볼 수 있고, 또 우리 곁에 타인이 있을 자리를 비워둔다. 이런 행위를 가리켜 사람들은 사랑이라 부르기도 하고, 좀 약하게 표현하면 일상생활에서 내 곁에 남을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77쪽

 

생물학으로 볼 때, 남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세계를 알 수 없으며 사랑 없이 사회란 있을 수 없다는 얘기는 매우 솔깃하고 두근거리죠.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는 것이 사랑이고 남과의 만남이고 자기 돌아봄이라는 ‘생물학’은 오늘날 이 사회에 절절하게 있어야 하는 윤리학을 마련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책에서 서술한 것들은 자연과학적 탐구의 한 바탕일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사람다움을 이해하기 위한 바탕이기도 하다. 우리가 여기서 마주친 사회적 역동성은 이제는 그저 가정에 머무르지 않는 인간 조건의 한 존재론적 근본 특징을 암시한다. 곧 우리가 가진 세계란 오직 타인과 함께 산출하는 세계뿐이다. 그리고 오직 사랑의 힘으로만 우리는 이 세계를 산출할 수 있다. 278~279쪽

 

무언가를 알면, 그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앎이 함이기 때문에 아는 순간, 자신은 이미 다른 주체로 넘어갑니다. 따라서 사람은 누구나 끝없이 더 나은 앎을 얻으려 애면글면해야 하고, 그릇된 앎을 갖고 있지 않나 안간힘을 내어 되짚어야 합니다. 자신의 앎이, 자신의 함이, 자신의 삶을 낳으니까요. 우리의 앎이, 우리의 함이, 사회를 낳으니까요. 남들과 만나고 세상을 만들어가면서 사람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습은 우리의 책임이라는 묵직한 깨달음을 안겨주며 책은 마무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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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를 다시 묻다 - 새로운 시대의 가치혁명을 위하여
윤한결.이윤영 지음 / 궁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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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사람을 달라지게 해주는 발판입니다. 인디고 서원에서 청소년 때부터 인문학을 공부한 끝에 새로운 주체들로 자라난 젊은이들은 세계로 떠납니다. 인디고 유스 북페어란 팀을 꾸린 뒤,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지식인들과 가치를 위해 애쓰는 단체들을 찾아가 만납니다. 그 이야기를 엮은 <가치를 다시 묻다>(궁리. 2010)는 어떤 가치를 품고 살아야 하는지 일러주는 나침반이네요.

 

이들은 지구마을을 찾아다니는데, 주제를 정해놓고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지요. 북아메리카ㅡ정의와 희망, 아시아ㅡ평등과 다양성, 유럽ㅡ자유와 자기실현, 아프리카ㅡ공동체와 민주주의, 오세아니아ㅡ생명과 자연, 남아메리카ㅡ사랑과 아름다움으로 짝을 지은 뒤, 거기에 알맞은 지식인을 찾고 그의 책을 읽은 다음에 만나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들의 푸르름에 눈이 부십니다.

 

워낙 짱짱하고 초롱초롱한 지성인들이라 그들이 해주는 이야기도 귀담아 들을만했지만 오히려 더 솔깃한 건 그들의 몸가짐이었습니다. 아시아에서 한국, 그것도 서울이 아닌 부산에서 찾아온 젊은이들을 맞이하는 그들의 모습은 정겹고 따사롭지요. 뭉클함을 자아냅니다. 먼저 하워드 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오래되고 익숙한, 그러나 청정하고 천진한 맑은 눈의 노학자는 이내 손을 잡고 그래, 너희들 왔구나. 다 준비했니, 문이 안 열렸구나. 아무도 오지 않았던? 하며 큰 키에 느린 걸음으로 가장 구석진, ‘Howard Zinn’이라고 A4종이에 크게 써붙인 그의 작은 방으로 함께 들어갔다.

(…)

우리 젊은이들이 꼭 다시 정의하고 지켜나가야 할 소중한 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짧은 정지……. 친절이라고 생각해.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 다른 이들의 입장에서 느끼고 생각해보는 것, 관대한 것, 존중하는 친절.

평생을 사회 정의를 위해 저항하고 투쟁하며, 앨리스 워커의 말대로 그는 항상 우리와 함게 있었다, 라고 말했던 그가 삶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라는 질문에 정의도, 평등도, 자유도 아닌 Kindness라니. 가슴이 울컥했다. 나의 좋은 선생님, My kind teacher.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그의 어떤 것도 놓치지 않고 싶던 그 시간, 한 인간의 존엄과 겸손과 아름다움 앞에서 눈물이 났다.

 

인디고는 “가르친다는 것, 그것은 바로 저렇게 따뜻하고 천진하고 아름답고 용기 있는 사람이 지금 여기의 현실에서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사회적 책임과 이상을 향한 투쟁을 손을 잡고 함께, 젊은이들과 늘 함께 해나가는 것이라는 걸.

나는 이제 다시는 뵙지 못할 아름다운 선생님. 하워드 진에게서 느끼고 배웠다”고 적네요. “그의 삶은 아름다운 그 자체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니까요. 그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지면서 먹먹해지더군요. 그렇다면 지그문트 바우만은 어떤가.

 

그의 친절함은 거기서 끝나게 아니었다. 부엌 식탁에서 인터뷰를 하자며 잠시 앉아 있으라 하더니, 어디론가 나가셨다. 카메라며 필기구며 인터뷰 준비를 할 수 있게 시간을 내준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다시 식탁으로 돌아온 그의 손에는 방금 오븐에서 꺼낸 뜨거운 춘권과 소시지가 있었다.

 

지그문트 바우먼은 택시기사에게 어떻게 길을 설명하는지 이메일에 덧붙여 설명해줄 정도로 섬세하고 친절하였죠. 양쪽 귀 모두에 보청기를 할 정도로 청력이 좋지 않은 그는 질문지를 미리 받고 답변을 준비하여 침을 꼴깍 삼키게끔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냅니다. 그 안에 담긴 다정과 번뜩임에 찌릿하네요.

 

인디고가 가치를 다시 묻는 까닭은, “왜 타인의 고통을 느껴야 하나요?” 라고 묻는 어린 학생을 보면서 혼란스러웠기 때문이죠. 그래서 가치를 찾아 세상으로 나가서 “왜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없지요?”라고 묻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타인의 고통을 줄이려고 온 마음을 다해 서로서로 챙기고 보듬는 온누리의 사람들을 보면서 희망의 불꽃을 지핍니다. 그 가운데 쿠바의 젊은의사들이 퍽 인상 깊은 말을 합니다.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죠.

 

탁아소(유치원)의 아이들이 커서 무엇이 되고 싶냐고 물어보면 쿠바 또한 의사가 될 거라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의사가 되면 어떻게 살 수 있는지를 배우게 되는데,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이 아닌, “타인을 도와주는 직업”이라고 배우지요. 어린 시절부터 많이 배우게 됩니다. 태어나자마자 이렇게 타인을 도와주는 직업이라는 교육을 받기 때문에 저희가 이렇게 활동하는 것은 전혀 특이할 것 없습니다.

 

쿠바의 젊은의사들이라고 해서 태어날 때부터 더 착한 유전자를 갖고 지구동네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들을 보면서 그 사회의 이념과 교육, 문화와 가치관이 어떠하냐에 따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딴판이 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지요. 돈을 많이 벌고자 의사가 되겠다는 한국아이들과 남을 위해 돈을 벌지 못하더라도 의사가 되겠다는 쿠바아이들 사이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릅니다.

 

물론 쿠바에도 엄청난 허물들과 가탈들이 쌔고쌨지요. 그러나 그러한 문제 때문에 모든 걸 싸잡아 손사래 쳐선 안 됩니다. 배울 건 배워야 하겠지요. 가난하지만 의사가 되고자 하는 꿈을 가진 지구인 모두에게 의사가 되는 모든 과정을 공짜로 가르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 아픈 사람들을 돕도록 이바지하는 쿠바를 보면서 체 게바라의 정신이 느껴집니다. 쿠바에선 초등학교 수업을 받을 때, 선생님에게 이렇게 인사를 한다고 하네요.

 

세레모스 꼬모 엘 체!(Seremos como el Che. 우리가 체 게바라 같은 사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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