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타셀의 돼지들 민음의 시 152
오은 지음 / 민음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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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고 있던 책을 놓을 수 없더군요. 한 글자 한 글자 아껴가며 천천히 책을 읽게 되네요. 책을 펴는 순간 펼쳐지는 놀라운 세계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일상에 쓰는 언어를 재조합하고, 미처 눈길을 두지 않는 말의 변두리들을 끄집어냈기 때문이죠. 이전까지 보도 듣도 못한 ‘말의 신세계’입니다. 그 황홀하면서 유쾌한 풍경에 절로 무릎을 치게 되네요.

 

바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2009. 민음사]이에요. 이 책을 지은 오은 시인은 천재 시인이라고 불리죠. 20살에 등단한 뒤 8년 만에 나온 첫 시집이죠. 그가 8년 동안 벼른 언어감각과 날카로운 사회풍자는 시집을 빛나게 하네요. 사람들이 쓰는 말은 일상에서 닳고 닳아 시들어 있지요. 말라비틀어진 말들에게 시인은 촉촉한 당근을 나눠주며 생기를 북돋아주죠.

 

시와 말의 경계를 넘나들며 만든 ‘말의 신세계’ ㅋㅋ 웃게 만들다

 

시하면 뭔가 지루하거나 이해가 안 되는 이상한 말들이라고 생각하기 쉽죠. 일상에서 쓰는 말과 달리 다른 뜻으로 재고 비틀다보니 보통 사람들에게는 낯설 수 있지요. 일반인들에게 어색한 시와 평범한 사람들이 쓰는 일상 말로 갈리는 경계를 지은이는 넘나들지요. 말이 갖고 있는 지시 대상과 뜻들을 해체하고, 다시 묶어 새로운 뜻으로 보여주죠. 그렇게 만들어진 ‘말 같은 시의 세계’로 읽는 이들을 초대하지요.

 

밥을 먹는다 습기 먹는 김을 먹고, 인분을 먹고 자란 돼지고기 2인분을 먹고, 고기를 구울 때 나는 탄내도 덤으로 먹는다 풀 먹은 옷을 입고 담배를 빽빽 먹으며 출근을 한다 동료들에게 빌어먹을 골탕도 먹고 겁을 먹고 찾아간 부장에게 욕도 한 두어 바가지 얻어먹는다 ……「식충이들」

 

먹는다 뜻을 시의 재료삼아 처음부터 끝가지 ‘먹어주는 시’를 만들죠. 먹는다는 관용말법이 일상에서 얼마나 쓰이는지 새삼 알 수 있더군요. 한국 사람들에게는 먹는다는 게 중요하듯이 먹는다는 표현이 생활로 번져간 거죠. 먹는다에 줄거리를 입혀서 재미있는 시가 되었지요. 이 시를 읽으면, 되풀이되는 먹다 표현에 배가 고파지네요. 우습게도^^

 

뛰어올라 봐 팁이 되어 테이블을 빛내 봐 탑처럼 우뚝 솟아 봐 톨스토이처럼 참회했다가 부활해 봐 턴테이블처럼 회전해 봐 툰드라처럼 얼어붙어 봐 틀니처럼 잇몸에 붙었다 달아나 봐 템버린처럼 짤랑짤랑 웃어 봐 튤립처럼 고백해 봐 텔레파시로 변신해 「끌리는 모음 속으로」

 

자기가 끌리는 자음과 모음으로 시를 밀어붙이죠. ‘ㅌ’이라는 자음과 ‘봐’라는 모음으로 시는 쭉 이어집니다. 시는 어려운 게 아니죠. 경쾌하게 즐기면 되죠. ‘21세기 버라이어티 시대’에 맞게 시도 ‘엔터테인먼트’가 되는 거죠. 주말에 리모콘을 이리저리 돌리며 웃듯이 시인이 열어젖힌 말놀이 마당에서 시를 읽으며 ㅋㅋ 할 수 있네요.

 

늙은 돼지들로 변해가는 젊은 돼지들, 날 선 시인의 비판에 소름이 확

 

그렇다고 이 시집은 말놀이를 위한 말놀이거나 널널한 말재주에 그치지 않습니다. 시는 늘 지금 여기에 밑절미를 두고, 고민 끝에 간신히 영그는 열매니까요. 시인의 혀는 사회 비판으로 날이 서있지요. 곪고 있는 사회 구석구석에, 마음보다 몸 편한 삶을 살려는 사람들을 향해 바늘처럼 시는 꽂힙니다. 침의 효과는 맞은 사람만이 알 수 있듯 시의 효과는 읽은 사람만이 알 수 있죠.

 

젊은 돼지들은 겁이 많고 눈이 커다란 데다 제법 순종적이었거든요 꾸불거리며 대가리 쳐들 기회만 슬슬 엿보는 거지요. 젊은 돼지들은 침대 위를 뒹구는 마피아와 갱을 상상했습니다 소름이 돋았지요… 늙은 돼지들은 구석에 누워 심하게 낄낄거립니다 너무 늙은 나머지 꿀꿀거리지 못하는 돼지들도 있어요 그들은 다만 낄낄거릴 따름이지요. 늙는다는 것은 이렇게나 추하고 무서운 일이랍니다 「호텔 타셀의 돼지들」

 

이 시를 읽다보면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이 떠오르죠. 변화를 외치면서 권력을 잡은 뒤 변화의 가능성을 막아버리는 돼지들, 시인은 동물농장에서 살아가는 돼지들을 그려내고 있지요. 늙은 돼지들은 이제 꿀꿀거리지 않고 낄낄거리며 추하게 변했죠. 겁먹은 젊은 돼지들은 변화를 꿈꾸기보다 침대 위를 뒹구는 마피아를 상상할 따름이죠. 돼지들 사는 곳이 읽는 이 사는 데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소름이 확 돋네요.

 

우리가 원하는 건 깨끗한 표피나 빵빵한 부피가 아니다 스프레드시트 위에 빽빽이 들어찬 숫자, 이것만이 우리를 안심시킨다 180-70이나 36-24-35 같은 수치만이 우리의 긴장을 극에 달하게 한다… 우리는 머릿속으로 서로의 몸값을 재고 연봉 상승률을 비교한다 계산이 잘 안 풀리면 점심 값을 나누는 문제에 돌입해야한다 식사를 앞둔 우리에게 중력을 거스르고 있다는 사실은 거스름돈보다 가치가 없다 「엘리베이터」

 

모든 게 숫자로 평가되는 시대죠. 처음 만나는 사람이 어떠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그 사람 성격이나 됨됨이를 묻는 게 아닙니다. 키와 몸무게가 몇인지, 연봉이 얼마인지 묻는 거죠. 모든 것이 거래되는 디지털 세상, 법보다 밥이 지배하는 한국에서 중요한 건 더 이상 자유나 정의가 아니지요. 부동산시세와 칼로리죠. 보너스에 0이 몇 개 붙을지 셈하면서 우리는 늙은 돼지가 되어 킬킬거리고, 시인은 그 모습을 잘 담아냅니다.

 

찍찍대며 시집 곳곳을 돌아다니는 쥐가 꼭 절망은 아니다. 새로운 희망이 될 수도

 

어떤 낱말들은 반복해서 시집에 나와요. 빨간이라든지 당신이라든지. 그 가운데 쥐라는 말이 왜 이리 자주 나타나 설레발을 치고 있는 걸까요. 쥐는 찍찍대며 시집 곳곳을 돌아다닙니다. 쥐라는 동물은 십이간지 가장 앞에 나오듯이 뭔가 특별한 동물이죠. 중세시대에 페스트를 몰고 왔듯 쥐가 나타나면, 한 시대를 무너뜨립니다. 붕괴는 꼭 절망이 아니죠. 새로운 희망이 될 수 있지요. 마지막으로 쥐가 나온 시구들을 모아봤습니다.

 

아침에는 쥐를 가지고 변신술 연습을 합니다 … 쥐들에게 최면 거는데 아주 효과적이거든요. 어떤 쥐들은 잃어버린 시간 속에 갇혀 깨나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럴 땐 볼기짝을 찰싹찰싹 때려 줘야 해요 「플럭서스 요술사들」

 

펜은 칼보다 강했지만 쥐새끼의 민첩함을 따라잡기엔 역부족이었다 「어떤 말들이 있던 시절 2」

 

밤말을 듣던 쥐가 놀라서 나자빠졌지만, 그 순간에도 뒤로 호박씨를 까는 건 잊지 않았다 「어떤 말들이 있던 시절 3」

 

모든 게 엉망이에요 쥐들의 꼬리가 스륵스륵 천장을 쓸고 스탠드에선 녹물이 똑똑 떨어지는데 이 노골적인 방구석에서 벌어지고 있는 「신경쇠약 직전의 남자」

 

이리온 프리온 / 쥐새끼들이 주문을 외며 오메가 모양의 앞니를 세우고 내게 달려듭니다 고작 달러 몇 푼 잃었을 뿐인데도요!「개로 태어나 황소처럼 살다 고양이로 죽다, 톰」

 

콩밥도 먹고 나이도 먹고 그러다 운 좋게 한자리 해 먹으면 뇌물도 먹고 쓴소리에는 적당히 가는귀도 먹을 수 있을 것이다「식충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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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불제 민주주의 - 유시민의 헌법 에세이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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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뒤 유시민 전 장관에게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 다음가는 지지도를 보이며 차기 대선후보로 떠올랐기 때문이죠.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2010년 서울시장후보를 따졌을 때, 유 전 장관이 선호도 1위로 뽑혔고, 현직 오세훈 시장과 대결에서도 이기는 것으로 나왔지요.

 

대구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다 떨어진 그는 ‘지식소매상’으로 돌아와 <후불제 민주주의>[2009. 돌베개]를 펴냈지요. 이 책 1부에서는 헌법에 담겨 있는 민주공화국 정신과 국민 기본권을 이명박 정부가 파괴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2부에서는 헌법의 당위와 권력의 실재 사이 차이가 벌어지게 되는데, 이 격차를 만들어 내는 요인이 무엇이며 어떻게 줄여야 하는지 설명하죠.

 

참여정부는 사회자유주의 정권, 보수와 진보 양쪽 모두에게 신랄하게 공격당해

 

이 책은 지식소매상 유시민이 펴냈으나 정치인 유시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글입니다. 자신이 정치계에서 보고 겪은 경험이 녹아나있으니까요. 두 번의 국회의원, 한 번의 국무의원을 하면서 자신의 이상과 거친 현실 사이 틈에서 지은이는 아쉽고 안타까웠다고 얘기하네요. 그러한 자기반성은 이명박 정부의 실정 비판과 포개지면서 더 깊이 있게 와 닿네요.

 

책을 더 풍부하게 이해하기 위해선 참여정부를 돌아봐야 하죠. 5년 동안 이리저리 욕을 먹은 참여정부는 어떠한 정권이었을까요? 지은이는 ‘사회자유주의’ 정권이었다고 규정하며,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 사이에 있었다고 얘기하죠. 사회주의도 아닌 자유주의도 아닌, 어울리지 않는 반대 성격의 정치 기조를 묶는 시도를 하였다고 참여정부를 돌아보네요.

 

과거사 진상규명과 과거 국가범죄에 대한 정부의 사과, 신행정수도 건설과 지역균형발전정책 추진, 노사정 위원회와 저출산 고령사회 연석회의, 투명사회 실천협의회 등 사회 대타협을 위한 기구 신설과 강화노력, 국가사회지출의 대폭확대, 노인장기요양보험과 기초노령연급 도입, 아동과 장애인 지원, 교원확충, 종부세 신설과 보유세 강화 같은 강력한 부동산 거래, 거기에 신용규제까지 하여 사회 형평과 통합, 기회균등을 이루기 위한 국가 개입을 늘리고 강화하였다고 평가해요.

 

사회공공성 확충과 함께 자유주의가 사회에 퍼집니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기초 원리 삼아 한칠레 FTA 비준, 한미 FTA를 체결을 하면서 자유무역을 늘렸죠. 또한 정경유착과 권언유착 같은 짬짜미들을 해체함으로써 권력의 민주화, 분권화를 추진합니다. 사회 곳곳 해묵은 권위주의 문화를 씻어내고자 정부부터 탈권위를 하였으며, 기업에 대한 정치권력의 부당한 개입을 극소화하였지요.

 

이렇게 중도 통합, 또는 중도 진보 정책을 폈지만 참여정부는 보수와 진보, 양쪽 모두에게 신랄한 공격을 받으며 5년 내내 시달렸지요. 진보는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을 두고, 왼쪽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한다며 비판을 하였고, 보수는 사회정책을 보면서 좌익 포퓰리즘이라며 이념 공세를 펼쳤지요. 진보는 자유주의 측면에 화살을 날렸고, 보수는 사회주의 쪽으로 칼을 찔러대었죠.

 

빛과 그림자가 같이 있듯 참여정부를 보면, 잘했던 것도 있고 못했던 것도 있는 게 사실이죠. 국민들은 참여정부 시절 잘했던 것은 그대로 하면서 경제성장과 일자리 만들기를 더 잘할 거라고 믿었던 이명박 대통령을 뽑지요. 그러나 1년 만에 국민들은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게 드러납니다. 경제 살리기는커녕 위기관리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으며, 남북관계는 파탄이 났습니다. 시민들은 이제야 노무현과 이명박의 차이를 실감하고 있지요.

 

이명박 정권은 문명 역주행, 한국이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헌법을 얻었기 때문

 

지은이는 이명박 정부가 ‘문명 역주행’을 하고 있다며 통탄해 하고 있죠. 이명박 대통령을 꼭대기 삼아 그동안 어렵게 만들어온 시민의 자유와 인권을 무너뜨리고 헌법 정신과 민주주의 절차를 짓밟고 있지요 그 어떤 정책에 대해서도 공청회나 토론회를 여는 법이 없어요. 그들끼리 쑥덕거리고는 일처리가 끝나죠. 결정한 정책에 항의하는 시민들은 오로지 힘으로 다스립니다.

 

이러한 반작용은 어느 정도 예상할 수밖에 없었죠. 왜냐하면 세상에는 공짜가 없는데, 한국은 너무 쉽게 민주주의를 얻었기 때문이죠. 대한민국은 처음부터 민주공화국이었어요. 1948년 7월 17일 제헌전의회가 한국을 민주공화국으로 규정하고 정치, 경제, 사회 기본질서를 담은 첫 헌법을 널리 알렸지요. 그러나 그 헌법정신을 누리기 위해 치러야할 비용을 한국 사람들이 지불하지 않았다고 지은이는 꼬집죠.

 

대한민국 헌법은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손에 넣은 ‘후불제헌법’이라는 겁니다. 헌법 조문을 보면 동서고금 앞선 사람들이 피땀 흘려 얻어낸 것들인데, 한국 사람들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 공정한 재판 받을 권리를, 양성평등이 대중 의제가 되지도 않고 여성들이 동등한 참정권을, 산업화가 이루어지기 전에 노동 3권을 얻은 거죠.

 

대한민국은 시민혁명을 거치지 않고 외상으로 민주공화국 정신을 얻으면서 그 값을 지금 치르고 있는 거죠. 민주주의는 헌법과 제도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죠. 자기가 나라의 주인이라는 주권의식, 헌법과 민주 절차에 대한 이해, 공정한 경쟁 규칙의 수립과 경쟁 결과에 대한 승복, 생각이 다른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민주공화국을 만들지요.

 

물론,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 60여 년 동안 한국은 꾸준히 외상값을 갚아 나갔죠. 1960년 4.19혁명, 1980년 5.18 민중항쟁, 1987년 6월 항쟁, 수많은 시민들이 엄청난 수고와 희생을 치러냈죠.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헤아릴 수 없는 지식인과 언론인, 노동조합 지도자와 대학생들, 종교인과 정치인, 농민과 회사원들이 체포와 구금, 해고와 고문을 당하며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애를 썼지요.

 

하지만 5.16군사반란, 유신체제, 12.12군사반란, 3당 합당 등 권력자들의 일그러진 욕망으로 툭 하면 빚이 늘어났지요. 지도자들이 헌법의 정신과 민주주의 원칙을 존중하려는 자세를 지니고 있으면 국민들이 갚아야할 민주주의 비용이 줄어들지만 지금까지 지도자들은 비용을 늘려놓고 국민에게 떠넘겼지요. 국민을 업신여기거나 만만하게 보기에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 주권자 스스로 나서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죠. 한국에서는 촛불시위로 나타나게 됩니다.

 

촛불시위는 아름다운 운동이긴 하지만 한국제도가 얼마나 엉터리인지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또 촛불시위를 하게 되면, 사회 비용이 엄청나게 드는 것도 사실이죠. 이러한 비용은 훌륭한 헌법을 거저 가져온 대가이며, 한국이 민주사회를 가기 위해 반드시 치러야 했던 외상값이죠. 문제는 이명박 정부 들어서면서 이상하게 촛불을 아무리 들어도 갚아야 할 게 쌓인다는 거죠. 거꾸로 가는 한국 정치사회를 보면서 시민들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이 아무리 문명 역주행을 한다고 해도 2013년 2월을 넘기지 못하지요. 문제는 그 다음이죠. 이명박 이후에 무엇이 올지 내다봐야 합니다. 시민들의 정치의식은 어떠하며, 무엇을 바라고 있는 같이 얘기 나눠야 합니다. 갚아야할 헌법정신과 민주주의 비용이 얼마나 남았는지 짚어봐야 합니다. 무엇보다 자기 둘레에서 시작을 해야 합니다. 그 나라 수준은 국민 평균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니까요. 딱 그만큼이니까요.

 

평범한 사람들의 비굴함과 굴종이 부당한 정권을 유지, 노무현을 죽인 것은 누구인가?

 

올해는 중국 천안문 민주화운동 20주년이에요. 20주년 기념을 하려고 하자 중국당국의 탄압으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얘기가 들려왔죠. 중국과 한국은 얼마나 다른지 눈 감고 비교해봅니다. 한국은 문명역주행을 펼치며 중국을 따라잡고 있습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앞선 모습도 보이죠. 사회주의든 자유주의든 부패한 정권이 권력을 잡으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유지 자체가 목적이 되니까요.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천안문에서는 민주화를 바라는 중국인들이 운동을 벌였지요. 중국공산당 지도자 덩샤오핑은 무력 진압을 지시하고 시위 주동자들을 처형하라고 명령을 내리죠.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맨몸으로 인민해방군 탱크를 막아선 한 남자는 지구촌 시민들 가슴에 큰 울림을 낳았지요. 자유를 향한 의지는 죽음을 무릅쓰고 탱크 앞에 꼿꼿하게 사람을 세웁니다. 가로막던 저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보기에 덩샤오핑은 중국 인민의 자유를 억누르는 독재자고 이름 모르는 저 남자는 투쟁의 영웅처럼 생각하기 쉽죠.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죠. 중국 인민들이 공산당 독재를 알게 모르게 요구한다면 상황은 달라지죠. 덩샤오핑은 중국 인민들의 의사를 담은 지시를 내린 것일 뿐이고, 저 남자는 중국체제에 금을 내려는 ‘난동자’가 되는 겁니다.

 

어떤 부당한 정권도 총칼로만 권력을 지탱할 수 없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비굴함과 굴종이 밑바탕에 깔려야 정권이 유지될 수 있죠. 그 어떤 정권도 그 사회 대다수 구성원들이 거부 표시를 하면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70, 80년, 일제시대도 마찬가지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온 수많은 분들이 있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침묵하거나 현실에 동조하고 있었다는 걸 잊어선 안 됩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 대니얼 골든하겐 교수는 ‘히틀러의 자발적 사형집행인들’이라는 책에서 왜 독일인들이 유대인 대학살을 집행했는지 설명해요. 그 당시 독일인들이 집단으로 미쳤느냐, 아니죠. 미친 짓을 저지른 독일인들은 대부분 정신 건강한 사람들이었어요. 그렇다고 학살명령을 거부한다고 해서 나치에게 무거운 처벌을 받느냐,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오랜 세월 반유대주의가 뿌리 깊었으며, 여러 언론조작에 평범한 독일 시민들은 나름의 사명감을 갖고 기꺼이 학살에 참여했다고 대니얼 교수는 분석하지요.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란 유명한 개념을 내놓죠. 유대인 대학살을 저지른 죄로 뒤늦게 체포된 나치 군대 중령 아돌프 아이히만은 사람의 탈을 쓴 악마나 비정상 살인광이 아니었지요. 주어진 책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상부 명령에 복종한 평범한 군인일 뿐이었지요. 아이히만은 유대인을 학살하면서 아무런 양심의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고 진술합니다.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공감하지 못하고 아무 생각 없이 일을 한 것이 아이히만의 죄였지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죽었습니다. 피해자는 있는데 책임지는 사람은 없지요. 시민들은 검찰과 족벌언론에 대한 책임을 끄집어내고 있죠. 그들 역시 평범한 아버지들이자 남편들일 겁니다. 또한 너그러운 이웃이자 의리 있는 친구일 수 있죠. 그저 상부의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한 일꾼이었는지 모르지요. 약간의 공명심과 진급에 대한 욕심과 나름의 애국심 때문에 노무현을 물어뜯었는지도 모르죠. 어쨌든 결코 지울 수 없는 일을 저지른 건 뚜렷하죠. 아이히만처럼 아무 생각 없이.

 

검찰과 족벌언론에 엄중한 문제제기와 사회변화를 이끌어내야겠지만 그들에게만 책임을 물어선 안 되지요. 그들이 ‘악한 행동’을 하도록 부추기고 있는 ‘악한 뿌리’를 뽑지 않는 이상 악은 재생산되기 때문이죠. 권력자들은 언제나 선학목적을 들어 악한 방법을 정당화시키고, 선량한 사람들로 하여금 악을 저지르게 만들지요. 민주주의는 악한 뿌리를 뽑고, 헌법정신을 사람들 의식에 심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악한 뿌리가 어디 있는지 성찰하는 시간이 요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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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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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더 이상 꿈꾸거나 상상하려 하지 않아요. 오늘날 정직하게 일 한다고 행복하리란 보장이 없죠. 왜냐하면 돈을 별로 못 버니까요. 우리 사회 절대 다수는 돈을 제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았기에 자신의 월급숫자에 따라 표정이 달라져요. 열심히 성실하게 일했는지는 둘째죠. 중요한 건 폼 나게 신상을 살 수 있느냐 없느냐.

 

그렇게 살아도 행복하다면 괜찮겠지만 이상하게도 가지면 가질수록 바닷물을 마시는 것처럼 사람들은 더 괴로워하죠. 찢겨진 영혼에 바닷물을 들이부면서 고통스러워하는 현대인들, 이건 아니지 싶죠. 세상살이에 흔들리더라도 타인에게 친절을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면, 스스로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이라면 <예수전>[2009. 돌베개]을 읽어보세요. 우리네 사는 풍경을 돌아볼 수 있을 테니까요.

 

예수란 당신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왜 예수는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을까?

 

예수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인물이자 가장 많은 오해에 휩싸인 인물이죠. 예수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고 여러 사람이었다는 얘기도 있지요. 신약을 보면 동일 인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성격을 보이니까요. 뭐 2000년이 오는 동안 수많은 덧칠된 유대인 경전을 문자 그대로 믿는 것은 주몽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걸 믿는 사람과 비슷하지요.

 

중요한 건 2000년 전, 한 젊은이의 삶을 보면서 무엇을 얻느냐죠. 밤이면 빨갛게 변하는 십자가 밑에서 미쑴니다~를 외치며 무언가를 달라고 떼쓰는 사람들에게 예수란 마치 그리스 신처럼 사사건건 세상사에 끼어들어 무언가를 해주는 신이겠죠. 예수가 정녕 그렇다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탐욕을 들어주는 중계인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란 어떤 사람이었고, 이 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김규항은 자신의 종교 지식과 선입견을 걷어내고 복음서 읽기와 묵상을 거듭하면서 이 책을 써내려 갔다고 해요. 네 개의 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쓰이고 그만큼 후대의 덧붙임이 적은 ‘마르코복음’을 쭉 쓰고 거기에 대한 자기 생각을 풀어나가죠.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이도 있고, 사람으로서 존경을 하는 이도 있겠죠. 그건 남이 간섭할 문제가 아니죠. 이 책 역시 예수를 믿으라고 강요하거나 예수에 대한 유일한 해석이 아니지요. 다만 참되게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따끔할만한 고민들이 많이 담겨 있네요. 먹보요, 술꾼이며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 예수가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활동을 했으며, 무엇을 꿈꾸다가 왜 죽임을 당했는지 책은 나지막하지만 묵직하게 들려주네요.

 

가난과 차별,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절망감만 감도는 팔레스타인 갈리리 지방, 불의한 세상에 맞서 싸우다 줄줄이 죽어가는 동네 청년들을 보면서 예수는 자랍니다. 지금의 팔레스타인 소년처럼. 그런 참혹한 환경을 뚫고 그는 공생애 삶을 살지요.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다가 당시 지배세력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아무것도 가진 거 없던 그를 왜 죽였을까요?

 

불의한 사회체제에 저항한 예수, 우애와 환대가 삶의 원리로 삼으라고 가르친 예수

 

로마지배를 받는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예수운동이 벌어집니다. 이른바 ‘하느님 나라 운동’이죠. 예수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섬기는 일이 가장 숭고한 일이라고 주장하며 고통 받는 인민들을 찾아다니며 하느님의 위로와 전하는 일에만 집중합니다. 그것은 불공평한 대우를 받으며 인간 이하로 취급받던 사람의 인권을 회복시키는 노력이었죠.



그 과정에서 오병이어, 병 고치는 일 같은 이적들이 벌어집니다. 이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중요하지 않죠. 예수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술사라서 존경하고 신앙하는 게 아니니까요. 그 이적이 삶에 변화와 감동을 줄 수 없다면 아무리 놀랍고 신비스러운 이적이라 해도 단지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죠. 예수를 만나면서 사람들은 변해요. 남보다 많이 가진 걸 자랑스러워하던 사람이 그것을 부끄럽고 불편해하게 되죠. 물위를 걷는 것보다 더 큰 이적이죠.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하는데, 그리스도는 뭘까요? 그리스어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에요. 히브리어 ‘메시아’와 같은 말이죠. 당시엔 왕에게 머리에 기름 붓는 관습이 있었죠. 따라서 그리스도란 이방인의 압제를 물리쳐주는 정치 구원자를 뜻합니다. 예수는 가난하고 못난 사람들이 사람 취급받는 세상을 관념 속에 건설하려 한 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안에서 ‘새로운 세상을 펼치는 왕’이라 불린 거죠.

 

언제나 혁명성은 주장되는 게 아니라 지배체제에 의해 증명되죠. 제 아무리 혁명을 외쳐도 지배체제가 별다른 위협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혁명이 아니죠. 예수를 이해할 때 놓치기 쉽지만 가장 중요한 게 있습니다. 예수가 ‘지배체제에 의해 사형 당했다’는 사실입니다. 지배체제가 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을지 아는 순간, 예수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비로소 알게 되죠.

 

시간이 흘러 하느님 나라를 만들려 했던 예수의 뜨거웠던 삶은 어느새 불의한 사회체제를 유지하는데 이용 되고 있고, 비폭력주의자로 저항을 하였던 예수는 어느새 믿으면 천국행 보증수표가 되어버렸습니다. 무기력하고 비굴하게 살아가도록 윽박지르는 세상에서 예수는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줄까요?

 

바깥에 있는 적과 싸우는 일은 혁명, 자기 안의 적과 싸우는 일을 영성, 둘을 같이 해야

 

예수는 다른 사람의 수고와 고통 덕에 안락을 누리는 게 아니라 서로가 돌보는 세상을 만들려고 했고, 우애와 환대를 삶의 원리로 삼으라고 가르쳤죠. 신앙이란 인간이 만든 종교체제와 교리에 충성하는 척 하면서 떡고물 달라고 조르는 게 아니라 하느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는 겁니다. 하느님이 벌이고 있는 역사에 참여하는 것이죠. 가진 걸 나누고 가난하고 약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 운동을 하려면 바깥에 잘못된 세상도 바꾸는 동시에 자신도 달라져야 하죠. 바깥에 있는 적과 싸우는 일을 혁명이라 하고, 자기 안의 적과 싸우는 일은 영성이라 할 때, 진정한 혁명가는 영성가이지 않을 수 없고, 진정한 영성가는 혁명가이지 않을 수 없죠. 기도든 명상이든 하루에 30분도 자신을 안 돌아보는 혁명가가 만들 새로운 세상은 위험하며, 혁명에 고개 돌리는 영성가가 얻을 수 있는 건 편한 제 몸뚱이 뿐이죠.

 

그래서 예수는 회개하라고 다니죠. 회개라고 번역된 메타노이아는 길을 바꾸다, 되돌아서다는 뜻을 지녔지요. 이것은 당시 생기지도 않은 기독교 안에서 회심하라는 게 아니죠. 지금까지 삶의 태도와 방식을 완전히 뒤집으라는 겁니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들었던 삶에서 현실에 눈을 뜨고 신음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라는 거죠.

 

예수는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한 애끊는 마음’으로 움직이죠. 그의 분노 역시 애끊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그는 비폭력주의자였지만 목표는 비폭력이 아니라 저항이라는 걸 잊어선 안 되지요. 예수의 변혁은 당연히 정치변혁을 뜻하지요. 사람들을 억누르고 착취하는 지배체제를 예수가 용납할리 없으니까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생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생기지 않았다는 유명한 말처럼 그는 사람을 위하는 인본주의자입니다. 또한 사람을 옥죄는 판에 박힌 율법체제에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이었지요. 사람을 가장 귀하게 여기며, 사람을 억누르는 모든 것에 저항하죠. 예수의 삶을 보면서 끝내 용서하되 먼저 분노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걸 배웁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내가 덜 가지려 할 때, 나보다 가난한 사람이 더 갖게 돼

 

예수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죠. 이 말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말이 아니라 들어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부가 정당한 방법으로 쌓은 것인가와 상관없이 가난한 사람이 존재하는 한 부끄러운 것입니다. 예수가 갖고 싶은 걸 쏟아주는 산타할아버지가 되어버린 물신화된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갈리리의 가난한 청년을 떠올려봅니다.

 

우리는 이미 물질을 섬기고 있으며, 물질 체제에 깊이 사로잡혀 있기에 애써 빠져나가려 하지 않는 한 물질의 종으로 살게 됩니다. 말로는 적당한 물질을 바란다고 하지만 그 수준은 점점 늘어만 가고 어느새 포로가 되기 십상이죠. 행복의 기준이 돈과 물질로 바뀌면서 결국 스스로를 해치게 되죠. 예수는 고결하고 금욕의 삶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자기 해치는 일을 경고합니다. 물질의 풍요와 영혼의 풍요는 한 사람에게 동거할 수 없으니까요.

 

한 사회의 가난이나 굶주림은 재화나 식량이 모자라서 생겼다기보다는 정당하지 못한 분배의 결과이죠. 힘을 가진 소수가 지나치게 많이 갖고 많이 먹기 때문에 힘없는 다수가 모자라고 배고픈 것이죠. 내가 덜 가지려 할 때, 나보다 가난한 사람이 조금이라도 더 갖게 된다는 것을 가슴에 새겨야 하죠. 이것은 새로운 세상을 맞을 때, 가장 기본이 되는 태도니까요.

 

예수가 가르치는 나눔은 나와 내 식구가 배불리 먹고 남는 걸로 불쌍한 사람을 돕는 적선이나 자선이 아니죠. 그런 논리를 따를 때 불쌍한 사람을 도우려면 내가 먼저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가 나오죠. 진정한 나눔은 적선과 자선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죠. 누구든 제 능력과 개성에 맞추어 정직하게 일하는 것만으로 사람으로서 최소한 품위와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회, 나눔의 체제로 이루어진 세상이 하느님 나라지요.

 

누구나 인생이 끝날 때 제 인생을 돌이켜보면 인생에서 가장 자유가 넘친 시기는 가장 가난했던 청년시절이기 마련이죠. 사람이 자유를 누리기 위해 필요한 부는 생각보다 적어요. 그걸 넘어서는 부는 사람에게서 자유와 평화를 앗아가죠. 땅의 기준에 매인 사람에게 자기 재산 나누는 일은 슬프고 고통스럽지만 하늘의 기준을 받아들인 이에게는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썩어빠진 세상에서 예수를 만나고 싶다면 또한 바로 이 순간 예수 부활을 원한다면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가지만 교회 다니는 부자는 천국에 간다며, 교회의 탈을 쓴 커다란 야바위판을 차려놓았습니다. 헌금과 십일조를 바치라며 당신의 믿음을 시험하겠다는 목회자들, 오직 예수를 믿어야 천국을 가며 자신의 말을 예수님 말처럼 믿으라는 목사들, 유대인 경전을 보면 이런 곳을 ‘강도들의 소굴’이라며 예수는 때려 부수죠.

 

앙상한 교리와 신학을 내세워 하느님 독점 가게를 차린 곳이 한국에는 너무 많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목에 힘을 주며 오만하게 예수를 팔고 있죠. 예수조차 그 뜻을 다 알 수 없다던 하느님이 어떻게 된 게 그들 혓바닥 위에는 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무엇을 헤아리고자 힘닿는 데까지 노력과 동시에 미처 헤아리지 못하는 부분을 겸손히 인정하는데, 불쌍한 사람들을 홀리는 ‘독사의 자식들’은 언제나 자기만 옳다고 떠들죠.

 

사이비공갈에서 벗어나 진짜 예수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은 돌아봐야죠. 어떤 시대 어느 곳에 살든 예수는 이미 우리 안에 있지요. 칸트가 말한 대로 가장 놀라운 건 저 바깥에 그리고 내 안에 이미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든 참나든 부처든 알라든 어떤 말을 붙여도 상관없죠. 본질이 달라지진 않으니까요. 예수를 만난다는 건 자기 삶을 지배하는 온갖 부질없는 집착과 욕망들을 씻어내고 내 본디 모습, 하느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걸 말합니다.

 

하느님은 내 안에 존재하며 또한 ‘모든 다른 내 안’에 존재하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나와 남을 금을 그어서 사랑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 경계가 무너지는데서 이뤄집니다. 부처가 깨달으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한 말과 같은 말이죠. 나와 남은 둘이 아닙니다. 하나입니다. 이것이 진리이고, 예수정신이지요.

 

예수는 바로 이 순간 부활할 수 있습니다. 신상에 쩔어 있던 사람이 스스로 가난을 선택할 때, 권력자가 낮고 약한 사람들 편에 설 때, 제 삶의 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던 사람이 달라질 때, 예수가 그 안에서 다시 살아납니다.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 인생의 진짜 즐거움과 진짜 행복과 맞닿아있음을 예수는 온 생애로 보여주었고, 예수전은 그 예수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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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는 어디에서 올까?
나카무라 유미코 외 지음, 이시바시 후지코 그림, 김규태 옮김 / 초록개구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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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지경을 넓히는 일은 무척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경험한 만큼만 세상을 이해하고, 아는 만큼만 상상할 수 있고, 자기 그릇만큼 세상을 담아낼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됨됨이가 된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많아지는 걸 상상해보세요. 세상은 한결 행복하게 될 겁니다. 지금보다 서로 더 양보하고 다투지 않는다면, 세상은 따뜻하게 될 겁니다.

 

그래서 교육이 중요합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이 되려면 아이들을 잘 가르쳐야 해요. 지금 사회의 한계와 모순을 알려죽고, 아이들에게는 새로운 상상력을 불어넣어준다면 그들은 여기에서 저기로 날아가겠죠. 한 아이만 꿈을 꾼다면 그 아이는 ‘바보’가 되겠지만 모두가 더불어 꾼다면 ‘현실’이 돼요.

 

평화는 어디에서 올까? 평화를 고민하면서 찾아가기

 

평화로운 세상은 누구나 꿈꾸는 유토피아죠. 하지만 평화가 무엇인지 서로 생각하는 바가 다르고, 평화를 이뤄가는 과정에서 의견이 엇갈리기 쉽죠. <평화는 어디에서 올까?>[2009. 초록개구리]는 평화가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면서 ‘뜨거운 평화’를 찾아가는 어린이 책입니다. 저마다 바라는 평화들이 모여서 웃음꽃을 피우는 놀이터 같은 책이네요.

 

보통 아이들과 팔레스타인 아이들이 생각하는 평화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테두리에서밖에 생각하지 못했던 아이들은 팔레스타인 아이들이 바라는 평화를 읽으면서 고민을 하게 되죠. 여기에서 저기를 상상하며, 평화란 도대체 무엇인지 턱을 괴며 나름 진지한 사색을 하게 됩니다.

 

먹을 거를 독차지하고 배가 불러 더 먹을 수 없어도 손에 쥔 걸 놓을 줄 모르는 아이들, 달래고 얼러도 주먹을 스스로 피기란 쉽지 않죠. 책을 읽다보면 혼자 많이 먹는 것보다 사이좋게 나눠먹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배울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가져도 만족할 줄 모르고 자기밖에 모르는 이 시대의 수많은 ‘어른아이’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고요.

 

이밖에 전쟁놀이를 하며 노는 아이들과 소년병, 버려지는 음식물과 굶어주는 아이들, 전쟁과 난민 아이들, 즐거운 축구 경기와 축구공 만드는 아이들을 잘 엮어 놓았지요. 무감각하게 넘어갔던 세상사의 속살을 드러내면서 겉과 속을 다 알게 합니다. 그러한 양면성을 아이들은 놔두지 않고 왜 그런지 물음으로 이어가게 되죠.

 

그저 세상이 좋다고만 믿으며 자란 아이들과 세상의 아픔을 고민하며 자란 아이들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그늘을 보면서 가슴앓이를 한 아이들의 가슴은 어른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치 커집니다. 그들이 가슴으로 품어낼 세상은 지금보다 더 포근하겠지요. 그대들이 흘리는 눈물들은 앞날의 희망이라 하겠지요.

 

차가운 사람은 결코 행복하지 않아, 진정한 평화는 나와 남이 같이 행복해야 이뤄져

 

누구나 심장이 있기에 슬프면 눈물이 나고, 가난한 사람들 보면 도와주고 싶게 마련입니다. 인지상정이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착한 마음씨’를 잘라내고 저 멀리 파묻게 되면서 ‘차가운 어른’이 되죠. 문제는 차가운 어른이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겁니다. 겉으론 봐선 멀쩡하지만 날마다 속으로 전쟁을 치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따뜻한 어른이 되어야 삶이 행복해집니다. 세상이 행복해지는 길은 자기가 먼저 행복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무엇이 행복인지 묵직한 물음을 가슴에 품고 세상에 부딪혀야죠.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놀다가도 고통 받는 이웃과 함께 하고, 신음소리에 귀 기울여야 아이는 ‘따듯한 어른’이 될 수 있습니다. 자기 체온 유지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누구나 어릴 때는 참 따뜻합니다. 세상에 무릎 꿇으면서 아이는 점점 차가워지죠. 그것은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라 이렇게 세상을 만들어놓은 어른들의 잘못이죠. 아이의 체온을 지켜주지는 못할망정 떨어뜨리지는 않아야겠죠. 아이들이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그네들이 따뜻한 상상을 할 수 있도록 온기를 불어넣어줘야겠죠. 이것은 어른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이겠죠.

 

여전히 이 땅의 한 쪽에는 수많은 소년병들이 사람들을 총으로 죽이고 있으며 또한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아이들이 굶어죽고 있으며, 열악한 환경에서 축구공 바느질을 하느라 눈이 멀기도 합니다. 이런 ‘끔찍한 전쟁’이 버젓이 일어남에도 당장 자기에게는 어떤 해꼬지가 없는 걸 평화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른들은 어떻게 전쟁을 없애냐며 고개를 갸우뚱하고 세상의 부조리는 어쩔 수 없다며 체념하기 일쑤죠. 그게 차가운 어른들의 한계고 상상력의 가난이죠. 아이들은 다릅니다. 모든 아이들이 전쟁을 반대한다면, 총을 없애기로 마음을 모은다면, 또 다른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이 책은 따뜻한 상상력을 아이들 가슴에 불어넣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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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투를 빈다 - 딴지총수 김어준의 정면돌파 인생매뉴얼
김어준 지음, 현태준 그림 / 푸른숲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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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넘기면서 빙그레 웃기를 10번, 감탄하며 무릎치기를 20번, 골똘히 생각에 잠기기를 30번 정도 하다 보니 <건투를 빈다>[2008. 푸른숲]가 끝이 나네요. 누구나 가슴 속에 있는 수많은 고민들을 ‘불친절하지만 진심으로 상담’한 ‘딴지일보 종신총수’ 김어준씨, 그 상담 내용을 묶은 이 책은 가슴 속 깊은 곳을 돌아보게 하는 얘기가 가득해 무척 볼 만하네요.

 

사람들은 비슷하고, 사는 모습은 다 거기서 거기이기에 사람들 고민은 닮아있지요. 벌써 나이 서른인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원하는 대학 가지 못한 내가 하찮은 사람 같아요, 불륜, 어떻게 해야 하나요? 모친과 여친 사이에 끼었어요, 친구를 배신했어요, 일곱 번째 고백인데, 열 번 찍으면 넘어갈까요? 등등 보통 사람들에게 공감되는 얘기들이 많네요.

 

가지각색 사연들을 읽다보면 맞아, 어쩜 내 얘기랑 똑같네, 진지하다 못해 심각한 표정으로 책을 삼킬 듯이 쳐다보다가 딴지총수의 진심어린 상담에 아, 그렇구나, 막혔던 배수로가 뻥 뚫리듯 시원한 느낌을 얻게 되지요. 다양한 고민들을 엿보면서 세상 사람들의 마음 풍경도 지켜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네요.

 

따끔한 회초리가 되는 상담, 왜 고민할 수밖에 없는지 무엇이 잘못인지 따지고 들어가는 화법

 

종아리를 걷어서 때리는 훈장님처럼 이 책은 따끔한 회초리가 될 수 있겠네요. 다 잘 될 거야,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의 상담이 아니거든요. 지금 왜 고민할 수밖에 없는지, 무엇이 잘못인지 바로 문제 본질을 따지고 들어가는 화법은 화끈하면서 후련하네요. 물론 문제를 피하고 싶거나 위로와 위안을 기대하는 사람에게는 아프겠지만.

 

몇 가지 보기를 들어볼게요. 장남이라는 부담감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사람에게, 다 큰 어른들이 비루한 자신의 삶을 부모 탓으로 돌리는 것처럼 꼴불견도 없다며 나무라고, 아부하면서 제 뒤통수치는 동료와 어떻게 지내야 하냐고 묻는 질문에, 주댕이를 확 찢어버린다는 딱 한마디만 하라며, 그 이유를 타당하게 풀어주네요.

 

나, 가족, 친구, 직장, 연인 다섯 가지 장으로 이뤄진 상담 이야기는 아무래도 연인편이 가장 많네요. 여친이 돈 한 푼 쓰지 않는다는 얘기에. 서른한 살에 그러는 건 정신착란이니 관계를 때려치우라 하고, 된장녀 여자친구를 고치고 싶다는 남자에게 당신이 뭔데? 라는 답변을 주고, 남친을 확 뜯어고치고 싶다는 여성에게 사람은 고쳐 쓰는 물건이 아니라며 조근조근 설명을 해주죠.

 

여성들을 위한 결혼 성공확률 배가법이 상당히 재미있네요. 누군가와 심각하게 결혼을 생각한다면, 그 전에 최소 보름이상 배낭여행 한번 다녀오라고 권하네요. 적은 비용으로 가는 배낭여행에서 ‘그 놈’ 바닥이 드러날 테고 저마다 타고난 품성과 문제해결능력을 가름할 수 있게 되니까요. ‘그 놈’이 어떤 놈인지, 평생 함께 할 수 있는 놈인지 알게 된다며 보름 투자해서 50년을 건지니까 이보다 남는 장사가 없다고 강추하네요.

 

세상사 결국 다 행복하자는 수작 아니더냐. 행복하려면 먼저 자신에 대한 공부부터 하삼!

 

지은이는 수많은 고민들을 접하면서 나름 한국 사람들이 고민하는 최소공배수 몇 가지를 발견하지요. 많은 이들이 돈이냐 사랑이냐를 묻는데, 그게 아니라 자신이 언제 행복한지 물어야 된다는 거죠. 무엇을 할 때 더 행복한지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지 사람들이 모른다고 안타까워하네요. 자신에게 물어야할 걸 남에게 묻는 거죠. 그러니 답이 안 나오죠.

 

이것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그런 자신을 움직이는 게 뭔지, 그 대가로 어디까지 지불할 각오가 되어 있는지 모른다는 얘기죠. 이런 물음에 대해 깊게 고민한 적도 없기에 이리 비틀 저리 흔들거리며 살아가죠. 남들이 어떻게 볼지 끊임없이 의식하면서 스스로에게 ‘이방인’이 되는 사람들, 아, 씨바, 무척 안습이죠.

 

행복할 수 있는 힘은 애초부터 자기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거, 그러니 행복하자면 먼저 자신에 대한 공부부터 필요하다는 거, 이거 꼭 언급해두고 싶다. 세상사 결국 다 행복하자는 수작 아니더냐. 제 행복 찾아들 나서는 길에 이 책이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다면 더 바랄게 없겠다. - 책에서

 

날마다 갈림길에서 갈팡질팡만 한다면, 오랜 고민 끝에 선택하지만 늘 후회를 하면서 뒤를 돌아본다면 이 책이 큰 도움을 줄 수 있겠네요. 삶을 장악하라고, 남의 기대 저버리는 연습을 하라고, ‘누군가의 무엇’이 아니라 스스로 ‘누군가’가 되어야 한다고 총수는 침을 튀기며 뜨겁게 소리치네요. 우리 다 행복하자고 이 지랄하는 거 아닌가요?^^ 건투를 빌어요. 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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