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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타셀의 돼지들 ㅣ 민음의 시 152
오은 지음 / 민음사 / 2009년 3월
평점 :
쥐고 있던 책을 놓을 수 없더군요. 한 글자 한 글자 아껴가며 천천히 책을 읽게 되네요. 책을 펴는 순간 펼쳐지는 놀라운 세계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일상에 쓰는 언어를 재조합하고, 미처 눈길을 두지 않는 말의 변두리들을 끄집어냈기 때문이죠. 이전까지 보도 듣도 못한 ‘말의 신세계’입니다. 그 황홀하면서 유쾌한 풍경에 절로 무릎을 치게 되네요.
바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2009. 민음사]이에요. 이 책을 지은 오은 시인은 천재 시인이라고 불리죠. 20살에 등단한 뒤 8년 만에 나온 첫 시집이죠. 그가 8년 동안 벼른 언어감각과 날카로운 사회풍자는 시집을 빛나게 하네요. 사람들이 쓰는 말은 일상에서 닳고 닳아 시들어 있지요. 말라비틀어진 말들에게 시인은 촉촉한 당근을 나눠주며 생기를 북돋아주죠.
시와 말의 경계를 넘나들며 만든 ‘말의 신세계’ ㅋㅋ 웃게 만들다
시하면 뭔가 지루하거나 이해가 안 되는 이상한 말들이라고 생각하기 쉽죠. 일상에서 쓰는 말과 달리 다른 뜻으로 재고 비틀다보니 보통 사람들에게는 낯설 수 있지요. 일반인들에게 어색한 시와 평범한 사람들이 쓰는 일상 말로 갈리는 경계를 지은이는 넘나들지요. 말이 갖고 있는 지시 대상과 뜻들을 해체하고, 다시 묶어 새로운 뜻으로 보여주죠. 그렇게 만들어진 ‘말 같은 시의 세계’로 읽는 이들을 초대하지요.
밥을 먹는다 습기 먹는 김을 먹고, 인분을 먹고 자란 돼지고기 2인분을 먹고, 고기를 구울 때 나는 탄내도 덤으로 먹는다 풀 먹은 옷을 입고 담배를 빽빽 먹으며 출근을 한다 동료들에게 빌어먹을 골탕도 먹고 겁을 먹고 찾아간 부장에게 욕도 한 두어 바가지 얻어먹는다 ……「식충이들」
먹는다 뜻을 시의 재료삼아 처음부터 끝가지 ‘먹어주는 시’를 만들죠. 먹는다는 관용말법이 일상에서 얼마나 쓰이는지 새삼 알 수 있더군요. 한국 사람들에게는 먹는다는 게 중요하듯이 먹는다는 표현이 생활로 번져간 거죠. 먹는다에 줄거리를 입혀서 재미있는 시가 되었지요. 이 시를 읽으면, 되풀이되는 먹다 표현에 배가 고파지네요. 우습게도^^
뛰어올라 봐 팁이 되어 테이블을 빛내 봐 탑처럼 우뚝 솟아 봐 톨스토이처럼 참회했다가 부활해 봐 턴테이블처럼 회전해 봐 툰드라처럼 얼어붙어 봐 틀니처럼 잇몸에 붙었다 달아나 봐 템버린처럼 짤랑짤랑 웃어 봐 튤립처럼 고백해 봐 텔레파시로 변신해 「끌리는 모음 속으로」
자기가 끌리는 자음과 모음으로 시를 밀어붙이죠. ‘ㅌ’이라는 자음과 ‘봐’라는 모음으로 시는 쭉 이어집니다. 시는 어려운 게 아니죠. 경쾌하게 즐기면 되죠. ‘21세기 버라이어티 시대’에 맞게 시도 ‘엔터테인먼트’가 되는 거죠. 주말에 리모콘을 이리저리 돌리며 웃듯이 시인이 열어젖힌 말놀이 마당에서 시를 읽으며 ㅋㅋ 할 수 있네요.
늙은 돼지들로 변해가는 젊은 돼지들, 날 선 시인의 비판에 소름이 확
그렇다고 이 시집은 말놀이를 위한 말놀이거나 널널한 말재주에 그치지 않습니다. 시는 늘 지금 여기에 밑절미를 두고, 고민 끝에 간신히 영그는 열매니까요. 시인의 혀는 사회 비판으로 날이 서있지요. 곪고 있는 사회 구석구석에, 마음보다 몸 편한 삶을 살려는 사람들을 향해 바늘처럼 시는 꽂힙니다. 침의 효과는 맞은 사람만이 알 수 있듯 시의 효과는 읽은 사람만이 알 수 있죠.
젊은 돼지들은 겁이 많고 눈이 커다란 데다 제법 순종적이었거든요 꾸불거리며 대가리 쳐들 기회만 슬슬 엿보는 거지요. 젊은 돼지들은 침대 위를 뒹구는 마피아와 갱을 상상했습니다 소름이 돋았지요… 늙은 돼지들은 구석에 누워 심하게 낄낄거립니다 너무 늙은 나머지 꿀꿀거리지 못하는 돼지들도 있어요 그들은 다만 낄낄거릴 따름이지요. 늙는다는 것은 이렇게나 추하고 무서운 일이랍니다 「호텔 타셀의 돼지들」
이 시를 읽다보면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이 떠오르죠. 변화를 외치면서 권력을 잡은 뒤 변화의 가능성을 막아버리는 돼지들, 시인은 동물농장에서 살아가는 돼지들을 그려내고 있지요. 늙은 돼지들은 이제 꿀꿀거리지 않고 낄낄거리며 추하게 변했죠. 겁먹은 젊은 돼지들은 변화를 꿈꾸기보다 침대 위를 뒹구는 마피아를 상상할 따름이죠. 돼지들 사는 곳이 읽는 이 사는 데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소름이 확 돋네요.
우리가 원하는 건 깨끗한 표피나 빵빵한 부피가 아니다 스프레드시트 위에 빽빽이 들어찬 숫자, 이것만이 우리를 안심시킨다 180-70이나 36-24-35 같은 수치만이 우리의 긴장을 극에 달하게 한다… 우리는 머릿속으로 서로의 몸값을 재고 연봉 상승률을 비교한다 계산이 잘 안 풀리면 점심 값을 나누는 문제에 돌입해야한다 식사를 앞둔 우리에게 중력을 거스르고 있다는 사실은 거스름돈보다 가치가 없다 「엘리베이터」
모든 게 숫자로 평가되는 시대죠. 처음 만나는 사람이 어떠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그 사람 성격이나 됨됨이를 묻는 게 아닙니다. 키와 몸무게가 몇인지, 연봉이 얼마인지 묻는 거죠. 모든 것이 거래되는 디지털 세상, 법보다 밥이 지배하는 한국에서 중요한 건 더 이상 자유나 정의가 아니지요. 부동산시세와 칼로리죠. 보너스에 0이 몇 개 붙을지 셈하면서 우리는 늙은 돼지가 되어 킬킬거리고, 시인은 그 모습을 잘 담아냅니다.
찍찍대며 시집 곳곳을 돌아다니는 쥐가 꼭 절망은 아니다. 새로운 희망이 될 수도
어떤 낱말들은 반복해서 시집에 나와요. 빨간이라든지 당신이라든지. 그 가운데 쥐라는 말이 왜 이리 자주 나타나 설레발을 치고 있는 걸까요. 쥐는 찍찍대며 시집 곳곳을 돌아다닙니다. 쥐라는 동물은 십이간지 가장 앞에 나오듯이 뭔가 특별한 동물이죠. 중세시대에 페스트를 몰고 왔듯 쥐가 나타나면, 한 시대를 무너뜨립니다. 붕괴는 꼭 절망이 아니죠. 새로운 희망이 될 수 있지요. 마지막으로 쥐가 나온 시구들을 모아봤습니다.
아침에는 쥐를 가지고 변신술 연습을 합니다 … 쥐들에게 최면 거는데 아주 효과적이거든요. 어떤 쥐들은 잃어버린 시간 속에 갇혀 깨나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럴 땐 볼기짝을 찰싹찰싹 때려 줘야 해요 「플럭서스 요술사들」
펜은 칼보다 강했지만 쥐새끼의 민첩함을 따라잡기엔 역부족이었다 「어떤 말들이 있던 시절 2」
밤말을 듣던 쥐가 놀라서 나자빠졌지만, 그 순간에도 뒤로 호박씨를 까는 건 잊지 않았다 「어떤 말들이 있던 시절 3」
모든 게 엉망이에요 쥐들의 꼬리가 스륵스륵 천장을 쓸고 스탠드에선 녹물이 똑똑 떨어지는데 이 노골적인 방구석에서 벌어지고 있는 「신경쇠약 직전의 남자」
이리온 프리온 / 쥐새끼들이 주문을 외며 오메가 모양의 앞니를 세우고 내게 달려듭니다 고작 달러 몇 푼 잃었을 뿐인데도요!「개로 태어나 황소처럼 살다 고양이로 죽다, 톰」
콩밥도 먹고 나이도 먹고 그러다 운 좋게 한자리 해 먹으면 뇌물도 먹고 쓴소리에는 적당히 가는귀도 먹을 수 있을 것이다「식충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