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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평점 :
사람들은 더 이상 꿈꾸거나 상상하려 하지 않아요. 오늘날 정직하게 일 한다고 행복하리란 보장이 없죠. 왜냐하면 돈을 별로 못 버니까요. 우리 사회 절대 다수는 돈을 제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았기에 자신의 월급숫자에 따라 표정이 달라져요. 열심히 성실하게 일했는지는 둘째죠. 중요한 건 폼 나게 신상을 살 수 있느냐 없느냐.
그렇게 살아도 행복하다면 괜찮겠지만 이상하게도 가지면 가질수록 바닷물을 마시는 것처럼 사람들은 더 괴로워하죠. 찢겨진 영혼에 바닷물을 들이부면서 고통스러워하는 현대인들, 이건 아니지 싶죠. 세상살이에 흔들리더라도 타인에게 친절을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면, 스스로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이라면 <예수전>[2009. 돌베개]을 읽어보세요. 우리네 사는 풍경을 돌아볼 수 있을 테니까요.
예수란 당신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왜 예수는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을까?
예수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인물이자 가장 많은 오해에 휩싸인 인물이죠. 예수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고 여러 사람이었다는 얘기도 있지요. 신약을 보면 동일 인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성격을 보이니까요. 뭐 2000년이 오는 동안 수많은 덧칠된 유대인 경전을 문자 그대로 믿는 것은 주몽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걸 믿는 사람과 비슷하지요.
중요한 건 2000년 전, 한 젊은이의 삶을 보면서 무엇을 얻느냐죠. 밤이면 빨갛게 변하는 십자가 밑에서 미쑴니다~를 외치며 무언가를 달라고 떼쓰는 사람들에게 예수란 마치 그리스 신처럼 사사건건 세상사에 끼어들어 무언가를 해주는 신이겠죠. 예수가 정녕 그렇다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탐욕을 들어주는 중계인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란 어떤 사람이었고, 이 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김규항은 자신의 종교 지식과 선입견을 걷어내고 복음서 읽기와 묵상을 거듭하면서 이 책을 써내려 갔다고 해요. 네 개의 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쓰이고 그만큼 후대의 덧붙임이 적은 ‘마르코복음’을 쭉 쓰고 거기에 대한 자기 생각을 풀어나가죠.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이도 있고, 사람으로서 존경을 하는 이도 있겠죠. 그건 남이 간섭할 문제가 아니죠. 이 책 역시 예수를 믿으라고 강요하거나 예수에 대한 유일한 해석이 아니지요. 다만 참되게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따끔할만한 고민들이 많이 담겨 있네요. 먹보요, 술꾼이며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 예수가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활동을 했으며, 무엇을 꿈꾸다가 왜 죽임을 당했는지 책은 나지막하지만 묵직하게 들려주네요.
가난과 차별,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절망감만 감도는 팔레스타인 갈리리 지방, 불의한 세상에 맞서 싸우다 줄줄이 죽어가는 동네 청년들을 보면서 예수는 자랍니다. 지금의 팔레스타인 소년처럼. 그런 참혹한 환경을 뚫고 그는 공생애 삶을 살지요.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다가 당시 지배세력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아무것도 가진 거 없던 그를 왜 죽였을까요?
불의한 사회체제에 저항한 예수, 우애와 환대가 삶의 원리로 삼으라고 가르친 예수
로마지배를 받는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예수운동이 벌어집니다. 이른바 ‘하느님 나라 운동’이죠. 예수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섬기는 일이 가장 숭고한 일이라고 주장하며 고통 받는 인민들을 찾아다니며 하느님의 위로와 전하는 일에만 집중합니다. 그것은 불공평한 대우를 받으며 인간 이하로 취급받던 사람의 인권을 회복시키는 노력이었죠.
그 과정에서 오병이어, 병 고치는 일 같은 이적들이 벌어집니다. 이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중요하지 않죠. 예수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술사라서 존경하고 신앙하는 게 아니니까요. 그 이적이 삶에 변화와 감동을 줄 수 없다면 아무리 놀랍고 신비스러운 이적이라 해도 단지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죠. 예수를 만나면서 사람들은 변해요. 남보다 많이 가진 걸 자랑스러워하던 사람이 그것을 부끄럽고 불편해하게 되죠. 물위를 걷는 것보다 더 큰 이적이죠.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하는데, 그리스도는 뭘까요? 그리스어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에요. 히브리어 ‘메시아’와 같은 말이죠. 당시엔 왕에게 머리에 기름 붓는 관습이 있었죠. 따라서 그리스도란 이방인의 압제를 물리쳐주는 정치 구원자를 뜻합니다. 예수는 가난하고 못난 사람들이 사람 취급받는 세상을 관념 속에 건설하려 한 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안에서 ‘새로운 세상을 펼치는 왕’이라 불린 거죠.
언제나 혁명성은 주장되는 게 아니라 지배체제에 의해 증명되죠. 제 아무리 혁명을 외쳐도 지배체제가 별다른 위협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혁명이 아니죠. 예수를 이해할 때 놓치기 쉽지만 가장 중요한 게 있습니다. 예수가 ‘지배체제에 의해 사형 당했다’는 사실입니다. 지배체제가 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을지 아는 순간, 예수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비로소 알게 되죠.
시간이 흘러 하느님 나라를 만들려 했던 예수의 뜨거웠던 삶은 어느새 불의한 사회체제를 유지하는데 이용 되고 있고, 비폭력주의자로 저항을 하였던 예수는 어느새 믿으면 천국행 보증수표가 되어버렸습니다. 무기력하고 비굴하게 살아가도록 윽박지르는 세상에서 예수는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줄까요?
바깥에 있는 적과 싸우는 일은 혁명, 자기 안의 적과 싸우는 일을 영성, 둘을 같이 해야
예수는 다른 사람의 수고와 고통 덕에 안락을 누리는 게 아니라 서로가 돌보는 세상을 만들려고 했고, 우애와 환대를 삶의 원리로 삼으라고 가르쳤죠. 신앙이란 인간이 만든 종교체제와 교리에 충성하는 척 하면서 떡고물 달라고 조르는 게 아니라 하느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는 겁니다. 하느님이 벌이고 있는 역사에 참여하는 것이죠. 가진 걸 나누고 가난하고 약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 운동을 하려면 바깥에 잘못된 세상도 바꾸는 동시에 자신도 달라져야 하죠. 바깥에 있는 적과 싸우는 일을 혁명이라 하고, 자기 안의 적과 싸우는 일은 영성이라 할 때, 진정한 혁명가는 영성가이지 않을 수 없고, 진정한 영성가는 혁명가이지 않을 수 없죠. 기도든 명상이든 하루에 30분도 자신을 안 돌아보는 혁명가가 만들 새로운 세상은 위험하며, 혁명에 고개 돌리는 영성가가 얻을 수 있는 건 편한 제 몸뚱이 뿐이죠.
그래서 예수는 회개하라고 다니죠. 회개라고 번역된 메타노이아는 길을 바꾸다, 되돌아서다는 뜻을 지녔지요. 이것은 당시 생기지도 않은 기독교 안에서 회심하라는 게 아니죠. 지금까지 삶의 태도와 방식을 완전히 뒤집으라는 겁니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들었던 삶에서 현실에 눈을 뜨고 신음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라는 거죠.
예수는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한 애끊는 마음’으로 움직이죠. 그의 분노 역시 애끊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그는 비폭력주의자였지만 목표는 비폭력이 아니라 저항이라는 걸 잊어선 안 되지요. 예수의 변혁은 당연히 정치변혁을 뜻하지요. 사람들을 억누르고 착취하는 지배체제를 예수가 용납할리 없으니까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생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생기지 않았다는 유명한 말처럼 그는 사람을 위하는 인본주의자입니다. 또한 사람을 옥죄는 판에 박힌 율법체제에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이었지요. 사람을 가장 귀하게 여기며, 사람을 억누르는 모든 것에 저항하죠. 예수의 삶을 보면서 끝내 용서하되 먼저 분노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걸 배웁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내가 덜 가지려 할 때, 나보다 가난한 사람이 더 갖게 돼
예수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죠. 이 말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말이 아니라 들어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부가 정당한 방법으로 쌓은 것인가와 상관없이 가난한 사람이 존재하는 한 부끄러운 것입니다. 예수가 갖고 싶은 걸 쏟아주는 산타할아버지가 되어버린 물신화된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갈리리의 가난한 청년을 떠올려봅니다.
우리는 이미 물질을 섬기고 있으며, 물질 체제에 깊이 사로잡혀 있기에 애써 빠져나가려 하지 않는 한 물질의 종으로 살게 됩니다. 말로는 적당한 물질을 바란다고 하지만 그 수준은 점점 늘어만 가고 어느새 포로가 되기 십상이죠. 행복의 기준이 돈과 물질로 바뀌면서 결국 스스로를 해치게 되죠. 예수는 고결하고 금욕의 삶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자기 해치는 일을 경고합니다. 물질의 풍요와 영혼의 풍요는 한 사람에게 동거할 수 없으니까요.
한 사회의 가난이나 굶주림은 재화나 식량이 모자라서 생겼다기보다는 정당하지 못한 분배의 결과이죠. 힘을 가진 소수가 지나치게 많이 갖고 많이 먹기 때문에 힘없는 다수가 모자라고 배고픈 것이죠. 내가 덜 가지려 할 때, 나보다 가난한 사람이 조금이라도 더 갖게 된다는 것을 가슴에 새겨야 하죠. 이것은 새로운 세상을 맞을 때, 가장 기본이 되는 태도니까요.
예수가 가르치는 나눔은 나와 내 식구가 배불리 먹고 남는 걸로 불쌍한 사람을 돕는 적선이나 자선이 아니죠. 그런 논리를 따를 때 불쌍한 사람을 도우려면 내가 먼저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가 나오죠. 진정한 나눔은 적선과 자선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죠. 누구든 제 능력과 개성에 맞추어 정직하게 일하는 것만으로 사람으로서 최소한 품위와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회, 나눔의 체제로 이루어진 세상이 하느님 나라지요.
누구나 인생이 끝날 때 제 인생을 돌이켜보면 인생에서 가장 자유가 넘친 시기는 가장 가난했던 청년시절이기 마련이죠. 사람이 자유를 누리기 위해 필요한 부는 생각보다 적어요. 그걸 넘어서는 부는 사람에게서 자유와 평화를 앗아가죠. 땅의 기준에 매인 사람에게 자기 재산 나누는 일은 슬프고 고통스럽지만 하늘의 기준을 받아들인 이에게는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썩어빠진 세상에서 예수를 만나고 싶다면 또한 바로 이 순간 예수 부활을 원한다면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가지만 교회 다니는 부자는 천국에 간다며, 교회의 탈을 쓴 커다란 야바위판을 차려놓았습니다. 헌금과 십일조를 바치라며 당신의 믿음을 시험하겠다는 목회자들, 오직 예수를 믿어야 천국을 가며 자신의 말을 예수님 말처럼 믿으라는 목사들, 유대인 경전을 보면 이런 곳을 ‘강도들의 소굴’이라며 예수는 때려 부수죠.
앙상한 교리와 신학을 내세워 하느님 독점 가게를 차린 곳이 한국에는 너무 많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목에 힘을 주며 오만하게 예수를 팔고 있죠. 예수조차 그 뜻을 다 알 수 없다던 하느님이 어떻게 된 게 그들 혓바닥 위에는 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무엇을 헤아리고자 힘닿는 데까지 노력과 동시에 미처 헤아리지 못하는 부분을 겸손히 인정하는데, 불쌍한 사람들을 홀리는 ‘독사의 자식들’은 언제나 자기만 옳다고 떠들죠.
사이비공갈에서 벗어나 진짜 예수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은 돌아봐야죠. 어떤 시대 어느 곳에 살든 예수는 이미 우리 안에 있지요. 칸트가 말한 대로 가장 놀라운 건 저 바깥에 그리고 내 안에 이미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든 참나든 부처든 알라든 어떤 말을 붙여도 상관없죠. 본질이 달라지진 않으니까요. 예수를 만난다는 건 자기 삶을 지배하는 온갖 부질없는 집착과 욕망들을 씻어내고 내 본디 모습, 하느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걸 말합니다.
하느님은 내 안에 존재하며 또한 ‘모든 다른 내 안’에 존재하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나와 남을 금을 그어서 사랑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 경계가 무너지는데서 이뤄집니다. 부처가 깨달으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한 말과 같은 말이죠. 나와 남은 둘이 아닙니다. 하나입니다. 이것이 진리이고, 예수정신이지요.
예수는 바로 이 순간 부활할 수 있습니다. 신상에 쩔어 있던 사람이 스스로 가난을 선택할 때, 권력자가 낮고 약한 사람들 편에 설 때, 제 삶의 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던 사람이 달라질 때, 예수가 그 안에서 다시 살아납니다.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 인생의 진짜 즐거움과 진짜 행복과 맞닿아있음을 예수는 온 생애로 보여주었고, 예수전은 그 예수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