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악한 책, 모비 딕
너새니얼 필브릭 지음, 홍한별 옮김 / 저녁의책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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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행성에서 너와 내가』를 읽고 알게 된 책이다. 원제는 『wHY READ MOBY-DICK?』, '왜 모비 딕을 읽는가'이다. 어쩌다 한국판의 제목은 『사악한 책, 모비 딕』이 되었을까. 책 소개를 읽지 않고 제목만 봤다면 그냥 스쳐 지날뻔 했다.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은 저자다. 너새니얼 필브릭. 멜빌이 '뮤즈'로 삼고 숭배했던 『주홍글씨』의 작가 너새니얼 호손과 이름이 같다. 저자도 적시하고 있는바다. 저자는 "이 책 자체만큼이나 이 책이 쓰이기까지 일어난 일들에도 관심이 많"았다. 『모비 딕』을 "여남은 번 읽고 관련된 사실들을 수집하고 연구한 저자가 풀어놓는 이야기는 책에 대한 이해도를 높였다.


멜빌과 호손의 만남은 마리아 포포바의 『진리의 발견』에서 '발견'했다. 호손에 대한 멜빌의 마음, 멜빌을 대하는 호손의 태도를 알 수 있었다. 멜빌은 숭배하고 호손은 마뜩잖아했다. 『사악한 책, 모비 딕』 에는 멜빌이 호손을 만남으로써 『모비 딕』이 어떤 변화를 거쳤는지 설명되어 있다.


호손의 차분함에 영향을 받아 멜빌은 고래잡이를 주제로 한 평범한 피카레스크 소설을 쓰는 도중에 손을 멈추고 이 이야기를 호손의 단편에서 읽은 어둠의 힘의 관점에서 통째로 새로이 생각하게 되었다.

p.53


저자는 『모비 딕』을 이해하기 위해 두 작가가 주고 받은 "편지들을 꼭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멜빌은 책을 쓰는 동안 호손에게 그때 그때의 진행 상황과 자신의 상태 등을 써서 보냈던 모양이다. '사악한 책'을 써내는 동안 예술적 영감에 휩싸인 멜빌을 만날 수 있다는 말이다. 국내에 두 작가가 나눈 서신의 번역본이 있는지 모르겠다.


호손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역작을 쓰는 동안과 다 쓰고 난 뒤 멜빌의 정신 상태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나는 독자들에게 『모비 딕』만 읽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다. 이 책을 만들어낸 개인적 예술적 힘을 이해하려면 이 편지들을 꼭 읽어야 한다.

p.111


멜빌에게 영향을 미친 것이 호손만은 아니었다. 저자는 셰익스피어가 『모비 딕』의 "진정한 시작점"이었으며 성서도 영향을 미쳤다고 쓰고 있다. 멜빌은 셰익스피어와 성서가 주는 고전의 힘과 호손의 문학적 영향력을 뱃사람으로서의 경험에 녹여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멜빌이 살았던 19세기 중반의 미국이 담겨 있다. 피의 폭풍을 10여년 앞둔 미국이다.


셰익스피어가 『모비 딕』에 비판적 영향을 미쳤고, 또 멜빌이 젊은 시절 태평양에서 한 경험의 프리즘을 통해 다시 상상한 성서도 이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p.69


『모비 딕』의 서사에는 미국의 형이상학적 청사진이 담겨 있다. 거의 내내 바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지만 효과적인 비유와 은유를 집어넣어 1850년대 미국의 풍광과 정서를 담아냈다.

p.69


저자는 멜빌의 창작 과정을 따라간다. 소설의 모티브가 된 애식스 호 사건과 멜빌의 포경선 승선 경험을 말이다. 당시 포경선을 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고래 백과 사전이라고 불릴만큼 고래와 포경의 과정을 자세히 설명한 이유도 밝혀준다. 『모비 딕』의 시작 부분은 소설의 도입으로 읽기 어려울 만큼 지리한 고래 관련 어원과 발췌문 등이 포함돼 있다. 이런 부분을 읽어냈을 때에야 『모비 딕』이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서사의 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모비 딕』을 읽는다는 것은 포경선에서 여러 해 동안 강렬한 경험을 하고, 자기가 본 것 전부를 마음에 새기고, 7년쯤 더 지나 셰익스피어, 호손, 성서 등등을 읽고 흡수한 다음, 젊은 시절의 경험을 앞날에 공포할 목소리와 방식을 찾아낸 작가를 마주하는 일이다. 결국 바로 여기에서 『모비 딕』이라는 소설의 위대하고 탁월한 힘이 나온다. 그 힘은 그 자리에 있었을 뿐 아니라 자기가 보는 것의 경의를 제대로 음미할 수 있는 포용력있고 감수성 예민한 영혼을 가진 작가에게서 나온 것이다.

p.77


소설의 3분의 2 지점을 지나고 나면 독자들은 고래의 해부학적 구조와 고래잡이의 세부적인 내용을 낱낱이 알게 된다. 또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고래의 신비와 아름다움도 알 수 있게 된다. 그러고 나면, 멜빌은 에이해브와 모비 딕의 최종 대결을 당당하게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신빙성이 없고 과장되었다고 느껴졌을 최후의 대결이 그래서 놀라울 정도로 사실적으로 보인다.

p.78


소설을 완성한 후 멜빌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 반응을 마주한다. 불멸의 기억으로 남을 작품을 썼다고 생각한 작가를 알아보는 독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저자 필브릭은 『모비 딕』 이후의 멜빌이 "회의와 희망이 뒤섞"인 "극기심"을 찾았다고 말한다. 불멸의 책을 쓴 소설가가 마지막에 손에 쥔 것은 삶을 견디는 힘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이것이 『사악한 책, 모비 딕』의 저자 너새니얼 필브릭이 밝힌 『모비 딕』을 읽는 이유라는 것이다.


『모비 딕』을 창작할 때의 흥분감이 가라앉고 나자, 멜빌은 사악한 신과 같은 에이해브가 아니라 실망을 품고 살아가는 법을 익힌 조용하고 과묵한 생존자에게 감동한다. 자신의 불멸성을 더이상 믿지 않게 된 사람에게(곧 보겠지만 멜빌은 그런 상태에 다다랐다) 삶은 꿈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다. 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살아갈 방법을 찾는 게 삶이다.

p.126


결국 멜빌은 『모비 딕』에서 이슈메일이 지지한 입장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은 것이다. "세속의 모든 것에 대한 회의와 천상의 것에 대한 직관, 이 조합으로 신자가 되지도 불신자가 되지도 않고, 양자를 똑같은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회의와 희망을 뒤섞는 데서 오는 구원, 짧고 터무니없고 부조리한 삶 앞의 온화한 극기심, 이것이 내가 『모비 딕』을 읽는 이유다.

p.130


역자 홍한별의 요약은 이 책의 내용과 의미를 한 단락으로 잘 정리하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읽은 이유는 무엇인가 생각해봤다. 『모비 딕』을 바로 읽지 못하고 주변만 서성이고 있는 셈이다. 너새니얼 필브릭의 책이 아직 읽지 못한 벽돌 책 『모비 딕』을 읽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한편 『모비 딕』을 다루고 있는 또 다른 책 『모든 것은 빛난다』를 검색하고 있는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뿐만 아니라 저자는 멜빌이 『모비 딕』을 쓸 당시 미국의 상황, 위대한 작품을 쓰려는 멜빌과 그를 말없이 지켜본 작가 호손의 일화, 그리고 출간 당시에는 처참하게 실패했던 『모비 딕』이 훗날 비로소 빛을 보게 된 과정 등을 엮어 넣으며, 『모비 딕』에 켜켜이 쌓인 깊고 다양한 의미를 읽어낸다. 덕분에 우리는 어떻게 『모비 딕』이 시대를 뛰어넘는 식견과 우주적 규모로 확장되는 정신을 담아낸 책이 되었는지도 알 수 있다.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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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봐도 연애소설
이기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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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도 제목을 참 잘 짓는다. 『최순덕 성령충만기』,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김 박사는 누구인가?』,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에 이어 『누가 봐도 연애소설』까지. 소설가 이기호의 책은 제목에서부터 코믹한 뭔가가 내장되어 있을 것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누가 봐도 연애소설』이라니, 이렇게 연애소설임을 강조하는 소설은 왠지 연애소설이고 싶은 다른 종류의 이야기일 것같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도 연애소설이고 싶은 책을 연애이야기겠거니 하고 읽는 것이 이기호 작가의 책을 읽어본 독자의 자세라고 하면 과한 것일까.


이기호 작가를 알게 된 건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때문이었다. 웬만해선 아무렇지가 않을 수가 없는 삶이 계속 되던 때가 있었다. 꼭 집어 말하라면 그렇게 하기는 어렵지만 심신이 피폐해지는 그런 시기였다. 작가의 소설 제목을 듣자마자 무슨 얘기로 아무렇지 않음을 말하는지 궁금해졌다. 책의 어떤 부분에서 아무렇지 않을 가능성을 발견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작가의 능청스런 유머에,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태연하게 풀어내지만 비어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던 것만 생각난다. 정색하고 쓴 소설의 문장을 쓴 작가의 표정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달까.



『누가 봐도 연애소설』은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세 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에 이은 세 번째 짧은 소설을 모은 책이다. 십여 장이 넘는 단편도 아니고 정말 책 서너 장에서 끝나는 이야기들이다. 나는 심오한 단편 읽기에 미숙한 독자지만 이기호 작가의 짧은 소설에는 적응하기 쉬웠다. 작가의 글 재주 때문인지 친근한 소재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책 읽는 속도 보다 하나의 에피소드가 끝난 후 멍하게 생각하는 시간이 더 길었다.


녹색어머니회 활동을 해야하는 아빠, 돈에 집착하는 치매 할아버지, 서로의 건강을 챙기는 별거 부부, 아무데로나 가달라는 손님을 태운 택시 운전기사 등. 이야기의 등장인물의 면면도 이걸 어쩔까 싶다. 매우 특수한 경우를 잡아낸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은 것이 '독박육아'를 담당하는 아빠들이 늘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치매로 인한 집착은 흔한 일이다. 별거하는 부부도 다반사고 술 취한 손님을 태우는 택시도 별난 일은 아니다. 삶을 바라보는 이기호 작가의 시선이 특별하다. 일상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결말을 묘하게 전복시켜 독자의 기대를 벗어난다. 잘 보이고 싶었던 여성에 대한 호감이 강아지에 대한 애정으로 급선회한다던가.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연애와 사랑이다. 독감을 나누고픈 초등생의 사랑도 있고 치매여도 좋은 노년의 사랑, 내놓고 말 못하는 옆집의 짝사랑, 술마시면 생각나는 미련, 오래전에 지나간 사랑도 있다. 각각 한편의 기나긴 소설감이 될 만한 이야기 30개가 모여 있다. 틈 날때 마다 천천히 한 편씩 읽고 싶은 책이다. 읽을 때마다 솟아나는 미소가 있고, 마음을 울리는 연민이 있다. 한 번에 꿀꺽 삼키듯 읽기보다는 한 모금씩 음미하고 싶은 책이다. 그리고 웃음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건네고 싶다.


작가의 전작에서 혼자 낄낄거렸던 것처럼 이번에도 변함없이 혼자 폭소하게 하는 대목이 있었다. 지리한 장마 안에서 소설을 읽으면서 큭큭거리는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근래 누가 이렇게 사람을 웃게 만들어줬나 싶다. 아래는 그 결정적 대목의 일부. 궁금하시면 이기호 작가의 신작 『누가 봐도 연애소설』을 읽어보시길.


"하하하, 이게 참. 제가 이사 가려고 급히 물리치료실을 알아봐야 할 일이 생겼거든요. 하하하."

이 사람아, 그게 말이야, 방귀야…….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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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와 함께하는 여름 함께하는 여름
실뱅 테송 지음, 백선희 옮김 / 뮤진트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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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가운 태양열이 끓어오르는 여름 풀밭, 까만 눈의 사마귀 한마리가 나를 바라본다. 창을 곧추든 흰색 실루엣의 고대 전사가 망토자락을 날리고 있다. 『호메로스와 함께하는 여름』의 표지다. 역대 최장의 장마를 맞은 올해 읽기엔 좀 아까운 표지의 책이다. 시원한 나무그늘 아래 앉아 작렬하는 햇살을 바라보며 읽어야 할 듯한데 말이다.


예년같았으면 한 여름에 웬 '호메로스?'했겠지만 올해는 좀 다르다. 코로나로 인해 선뜻 움직이기도 꺼려지는 이 때 그리스 고전을 읽으며 지중해로 책 여행을 떠나는 것도 괜찮다 싶어서다. 실뱅 테송의 『호메로스와 함께하는 여름』은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아직 안읽은 독자에겐 호메로스를 소개하는 책으로 이미 읽은 독자에겐 호메로스의 의미를 다시 새겨볼 기회를 만들어 준다.


책은 2018년 <프랑스 앵테르> 라디오에서 방송했던 내용을 엮은 것이다. 2013년에 시작한 <ooo와 함께하는 여름>시리즈의 일환이다. 지금까지 몽테뉴·프루스트·보들레르·빅토르 위고·마키아벨리·호메로스·폴 발레리·파스칼 등을 다뤘다. 이중 국내에 출판된 책은 『호메로스와 함께하는 여름』, 『보들레르와 함께하는 여름』,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 이렇게 세 권이다. 한 작가를 여름 내내 다루는 프랑스의 방송 기획이 가능하다니 놀라울 뿐이다. 게다가 그 방송을 정리한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를 수 있다니 또한 번 놀랄 뿐이다. 문화적 토대가 두껍기 때문일까. 문학과 책을 친근하게 느끼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돼 있는 걸까.


저자는 호메로스를 입체적으로 읽을 것을 제안한다. 2800년전에 쓰인 고대의 이야기로 읽을 것이 아니라 21세기에 세계에 비춰 읽어보자고 말이다.


21세기를 보라. 중동은 분열되고 있고, 호메로스는 전쟁을 묘사한다. 여러 정부가 잇달아 이어지는데, 호메로스는 인간의 탐욕을 그린다. 쿠르드 족은 그들 땅에서 용맹하게 싸우고 있고, 호메로스는 찬탈당한 권력을 되찾으려는 오디세우스의 싸움을 이야기한다. 생태학적 재해가 우리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데, 호메로스는 인간의 광기를 마주한 자연의 분노를 그린다. 요즘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 이 시 속에서 메아리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역사적 요동이 호메로스의 예감을 반영한다.

p.12


머리말 끝에 저자는 이 책에서 호메로스의 시를 "호메로스의 눈처럼" "파란색으로 인쇄"했다고 썼다. 그런데, 한국어 번역본은 시구들이 초,록,색이다. 원본의 상태가 궁금해졌다. 아마존에서 미리보기를 찾아보니 원서는 저자의 말대로 '파란색'의 시가 있었다. 원서와 번역본의 차이, 저자가 파란색으로 시를 인쇄했다고까지 적었는데 굳이 초록색으로 바꾼 이유는 표지와의 통일성때문일까. 국내본의 표지도 좋긴 하지만 저자의 의도를 조금 더 반영하는 디자인이었으면 좋았겠다고 잠깐 생각했다.

책은 호메로스에 대한 개관으로 시작한다. '호메로스'의 정체성부터 작품의 배경이 된 시대 전반을 이야기한다. 말하듯이 씌여진 문장 덕에 책의 가독성이 높다. 어렵게 얘기하자면 끝이 없을만한 고대 서사시를 "바다 앞에서, 방 창문 앞에서, 산꼭대기에서 큰 소리로 몇 구절 읽어보자"고 조언한다. 그러니까 "자질구레한 근심 따우니 떨쳐버리자! 설거지는 내일로 미루자! 모니터를 끄자! 젖먹이 아기들이 울어도 내버려두고" 당장 호메로스의 "노래가 우리 안에서 우러나도록" 해보자고 말이다. 누군가 이렇게까지 읽자고 하면 도리가 없다. 읽는 수밖에.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서 키클라데스 제도의 티노스 섬에 머물렀다고 한다. 에게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거처를 정하고 바다와 파도 소리를 들으며 호메로스를 느꼈다고 한다. 작가가 살았던 장소에 가서 작품의 "물질적 본질"에 다가갈 수 있었고 "고대 문장紋章의 메아리를 감지"했다고 말이다. 다른 빛깔의 바다와 다른 질감의 바람을 알아야 호메로스를 이해할 수 있다는 저자의 말에 좌절했다. 호메로스의 바다, 지중해에 언제 가본단 말인가.


빛과 파도 거품, 바람의 젖을 먹고 자란 늙은 젖먹이, 맹인 예술가의 영감을 이해하려면 그곳은 작은 섬에 머물러 봐야 한다. 장소의 정기가 인간을 기른다. 나는 우리 영혼에 지리의 링거가 꽂혀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모두 풍경의 자식들이다."라고 로렌스 더럴Lawrence Durrell은 말했다.

p.40


책은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의 소개로 이어진다. 작품의 주요 내용을 짚으며 저자의 해설과 현대적 해석이 곁들여진다. 예를 들면 『오뒷세이아』 세이렌을 '빅 브라더'에 빗대는 식이다.


그들의 잔학함은 폭력성에 있지 않다. 그보다 더 지독하다! 그들은 모든 인간을 감시하므로 각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잘 안다. '빅 브라더'라는 말이 생기기도 전에 그들은 마치 빅 브라더의 화신처럼 맴돌면서 우리를 감시했다.

p.136


호메로스의 고대 서사시의 주요 테마를 소개한다. 영웅에 대해여, 신들에 대하여, 전쟁에 대하여, 히브리스에 대하여. 호메로스를 읽을 때 알고 있으면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주제들이다. 인상적으로 읽은 대목은 신들에 대한 부분이다. 그리스 신화를 읽다보면 '무슨 신들이 이럴까'싶을 때가 있다. 그리스의 신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 시대가 일신교 이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 인들은 신에게 도덕성을 기대하지 않았다.


신들은 인간에게 어떤 교리를 따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신화의 세계는 도덕적이지 않다. 덕성은 회교도들이 하듯이 적법한지 적법하지 않은지로 평가되지 않고, 기독교인들이 하듯이 선한지 악한지로 평가되지 않는다. 고대의 하늘 아래선 모든 것이 솔직하다. 신들은 개인적인 용무로 인간들이 필요했다.

p.228


우리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시대를 읽다보면 이질감만 남게 될 수 있다. 그러나 미리 그 시대에 대한 배경 지식을 알고 있다면 작품을 더 풍부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몇 년전 두어달에 걸쳐 호메로스를 읽었었다. 무턱대고 잡았던 터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였다. 잔혹한 전쟁 장면을 세밀화 그리듯이 반복하는 『일리아스』, 아들이 먼저 등장해 어리둥절했던 『오뒷세이아』. 『호메로스와 함께하는 여름』 속의 두 작품은 익숙하면서 낯설었다. 실뱅 테송의 가이드에 따라 호메로스를 다시 읽는 여름을 맞이해야 할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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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지나가다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3
조해진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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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넘게 이어지는 장마 속에서 『여름을 지나가다』를 읽었다. '8월이 되면 쨍쨍한 해를 볼 수 있겠지. 그 한 여름 속에서 읽을 만한 책일까'하는 생각을 했었다. 시간은 지나갔지만 그다렸던 그런 여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책 속에는 6월, 7월, 8월과 여름의 끝이 지나갔다. 비가 오고 습하고 숨막히는 햇살이 내리 쬐는 도시에서 서로를 모르는 그러나 삶의 한 시기에 중대한 의미를 주고 받는 사람들이 있다.




민은 다른 사람의 생을 궁금해 한다. 그래서 타인의 삶 속에서 잠시 그들의 생을 산다. 정해진 시간은 30분. 타인의 생활터에서 타인의 옷을 입고 그 삶을 밟아본다. 타인의 짧은 생의 끝은 죽음이다. 옷을 벗어두고 문을 닫고 그 삶에서 나온다. 조용히 그 짧은 삶을 애도하면서.

공인중개사 사무소에서 일하는 민은 몰래 매물로 나온 집을 방문한다. 마음에 남았던 집의 주인이 외출한 사이 몰래 집에 들어가 그 집의 옷을 입고 30분간 다른 삶을 산다. 불법 주거 침입에 해당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타인의 삶으로 들어가는 행동을 멈출 수 없는 건 민의 현재 삶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약혼자와 헤어지고 직장을 그만둔 후 우발적으로 공인중개사 사무소 일을 시작했다. 습관처럼 일하고 있지만 그녀의 삶은 그녀의 생각, 마음과 유리되어 있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게 의심될 때마다" 드나들던 문닫은 가구점에서 누군가를 만날 때까지.


수호는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한 후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생계를 잇는다. 온가족이 아버지의 대출 빚에 쫒겨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지만 끝은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로 앞만 보며 달리는 세 명의 동행자가 마음속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수호는 반사적으로 몸서리쳤다.…

아버지처럼 살지 않는 것, 그것이 지금 수호가 꿈꾸는 미래의 전부였다.

p.21


수호는 우연히 얻게 된 타인의 신분을 도용한다. 신용불량자라는 제약을 벗기 위해서다. 타인의 이름으로 얻은 아르바이트 자리에서 한 사람을 만난다. 자신의 자리에서 끝없이 노력하는 사람, 누굴 도울 처지가 아님에도 다른 사람을 감쌀 줄 아는 사람, 이연주다. 수호는 연주 덕분에 자신에게만 말하는 사람에서 다른 사람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 된다. 연주와 보낸 시간은 숨막히는 수호의 삶에 시원한 바람이 되었다.


손님의 발길이 뜸해졌을 땐 골목 바닥에 전단지를 깔고 그녀와 나란히 앉아 흘러가는 여름을 지켜보기도 했다.

p.78


그러나 수호는 그런 안온함이 불안했던 모양이다. 연주의 믿음을 스스로 깨고 고통에 빠져든다. 불안한 세계를 기본값으로 살아온 사람에겐 타인에게서 비롯된 안온함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걸까. 불안하고 숨막히는 일상으로 돌아가기위해 수호는 연주를 배신한 걸까. 수호의 바람과 달리 연주는 그를 몰아 붙이지 않는다. 그의 삶을 흔들지 않고 제자리에 그대로 둔다. 그것만으로도 막다른 자리라는 걸 알기 때문일 것이다. 수호는 다른 이름으로 일했기 때문에 연주가 수호에 대해 아는 것은 모두 가짜다. 연주는 수호가 누군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가 자신을 인정하는데 가장 큰 몫을 했다.


"실은 제가 그 친구를 전혀 몰라요. 알고 보니 알았던 게 진짜 아는 게 아니더라고요."

"실은 저도 잘 몰라요. 그냥 어딘가에서 만났고 어쩌다 보니 심부름을 하게 됐어요."

pp.166-167


연주의 믿음을 잃었다고 생각한 수호는 병이 나 아버지의 가구점에 숨어들었다가 그곳을 찾은 민을 만난다. 일면식도 없었지만 민은 앓아누운 수호를 간호한다. 자신이 누군가를 모른 척했기 때문에 일어났던 일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민은 수호를 돌보면서 진짜의 삶을 느낀다. 자신의 삶을 벗어나 타인의 삶 속으로 숨고만 싶었던 민에게 진짜의 삶이 돌아온 것이다.


어쩌면 진심이란 단순한 것인지도 몰랐다. 살아 있는 것 같아. 민은 속으로 말했다. 사는 게 진짜 같고 아무것도 부끄럽지 않아, 너를 돌보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이.

p.157


폐허같은 이 세상에서 다른 삶을 외면하지 않는 일은 누구에게도 쉽지 않다. 구경꾼으로 지나치지 않고 누군가의 지난함을 들여다보는 일은 그 자체로 고통일 수 있기 때문이다. 민은 타인의 고통에 원인을 제공했다는 죄책감에 내부고발자가 돼버린 약혼자를 방관했었다. 자신들이 부도덕함이 드러내지 않기 위해 한 사람을 부정하는 일에 동참했던 것이다. 그 사람이 자신의 약혼자임에도. 그 일은 민에게 회복할 수 없는 상처가 됐다. 당시에 느끼지 못했던 죄책감이 그녀를 타인의 삶으로 몰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세상에 폐허는 흔하고 그 사실에 진지하게 공감하면서 지켜보는 부류는 별로 없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이곳을 찾아온 것일까. 적어도 배타심이나 적대감은 없는 구경꾼이란 걸 인정받고 싶었던가.

p.64


그의 행동은 정의가 아니라 비상식으로 받아들여졌다. 혹은 만들어진 허상, 아니면 유치한 과대망상. 그의 정의를 인정하면 자동으로 처하게 되는 상황, 그러니까 부도덕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그 상황은 모두에게 껄끄럽고도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옳은 것, 그리고 옳지 않은 것이 종우의 믿음만큼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도 아니었다.

pp.94-95


견고한 사회 체제는 그 사회 구조의 밑바닥을 떠받치는 사람들을 옥죄고 있다. 비정규직, 임차인, 장애인, 노인, 이들 모두는 빛나는 성채의 바깥에 존재한다. 그 벽은 점점 더 높고 단단해져서 이 쪽의 사람들이 넘어다 보기도 어려운 장소가 돼가고 있다. 바깥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테두리가 흩어지지 않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그 노력이 매번 보답을 바랄 수 없는데도 말이다.


서울은 거대한 유리 감옥 같았고 살아 있는 한 어디로도 가지 못하리란 예감은 점점 더 뚜렷하게 수호의 마음에 새겨졌다.

p.108


삶은 결국에는 모두 공평해지는가, 아플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지만 기쁠 때도 행복할 때도 있으니 공평한 걸까. 어떤 상처는 치유되지 않고 삶 전체를 바꾼다. 민은 "아픈 것도 없고 억울할 것도 없는" 삶이라는 환상을 버린다. 이전의 삶으로 돌아오라는 손길을 외면한다. 그런 삶을 믿기엔 "몸집이 너무 커져 버렸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아이가 어른이 되고 어른은 노인이 되는 동안 결핍은 보완되고 상처는 치유되는 것, 혹은 삶이란 둥근 테두리 안에서 부드럽게 합쳐지고 공평하게 섞이는 것이므로 아픈 것도 없고 억울할 것도 없는 것, 그런 환상이 가능할 까.

p.188


모르는 사람의 삶을 존중하는 일, 그들의 삶을 외면하지 않아야 함을 새기면서 민과 수호의 여름은 끝난다. 그들은 서로 눈맞춤을 하진 않았지만 둘 사이를 지나간 서늘한 바람으로 악수했다. 뜨겁고 습했던 그 여름 이후의 그들을 생각하니 마음 한 구석에 온기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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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화의 종말 - 하버드 의대 수명 혁명 프로젝트
데이비드 A. 싱클레어.매슈 D. 러플랜트 지음, 이한음 옮김 / 부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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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삶의 마지막에 대한 두 가지 생각이 있다. 하나는 늙음과 죽음을 자연의 순환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생각, 또 하나는 인간이 발견 또는 개발한 모든 기술을 동원하여 늙음과 죽음으로부터 멀어지려는 생각이 그것이다. 인간의 처음부터 최근까지 노화와 죽음의 문제는 사람이 어쩔 수 없는 일, 인간 능력 밖의 일로 받아들여졌다. 운명이 점지한 지상의 시간을 다 살고나면 그 기간에 관계없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저세상으로 가는 일이 당연하다 여겨졌다. 근래 의학기술의 발달로 이런 생각이 도전받고 있다. 알고 보니 죽음에 대한 기존 관념이 흔들리기 시작한지 꽤 됐다.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의 데이비드 A. 싱클레어 교수의 책 『노화의 종말』은 과학계, 의학계의 최신 정보를 근거로 인간의 생존한계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길다는 걸 증명하고 있다. 인간은 120세를 넘어 150세, 그 이상을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현재 개발되어 있는 혹은 개발 중인 기술만으로도 그 정도의 수명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것도 건강하게 말이다. 사이비 종교가도, 약장수도 아닌 과학계에서 인정받는 학자의 주장이다. 귀 기울여볼만하지 않은가.


사실 인간은 세월이 가면 늙어야하고 때가 되면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과하게 회춘하려는 노력은 명을 재촉할 수 있고 아름다움을 유지하겠다는 성형의 노력은 자연스럽지 않아 보였다. 나이에 맞게 주름지는 피부가 아쉽지만 당연하다 생각한다. 적지 않은 나이에도 팽팽한 피부와 검은 머리는 노력도 있겠지만 타고난 부분이 크다고 본다. 그런데 저자의 사진을 보고 생각을 달리 해야할까 싶었다.


데이비드 A. 싱클레어 교수는 사람이 "늙는 이유와 노화를 되돌릴 방법에 대한 연구"로 알려져 있다. 연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발견한 "세상에 유익한 약물과 기술로 상용화 하는 일"도 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연구만 하는 이론가가 아니라는 거다. 자신의 연구 결과를 인체에 적용할 약과 처치 기술로 실용화 하는 사람이다. 이 부분이 무언가를 믿거나 사용했을 때 영생을 얻으리라는 말과 저자가 다른 지점이다.


책은 노화를 질병으로 정의하는 것을 기본 가정으로 하고 있다. 근대를 지나 현대로 오면서 인가의 평균수명은 놀랄만큼 길어졌다. "평균 수명의 증가는 식량과 깨끗한 물을 안정적으로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아와 아동의 사망률이 줄어들면서" 높아진 사망 하한선은 평균 수명을 늘렸지만 상한을 늘리지는 못했다. 건강 수명도 마찬가지다. 사는 기간은 길어졌지만 건강하게 사는 기간은 같은 비율로 길어지지 못했다. 덕분에 인생의 말년은 기나긴 병치레의 연속이 돼 버린 것이다. 가족과 떨어져 요양원을 전전하며 고통의 시간을 보내거나 치료비로 남은 가산을 탕진해 남은 가족이 위기를 맞기도 한다. 저자는 이런 노년의 문제를 해결책으로 '노화를 질병으로 정의하기'를 제시한다. 노화가 질병으로 정의될 때 의학 연구 지원, 약물 개발, 보험사의 의료비 청구 항목을 위한 체계 구축 등이 따라 오기 때문이다.


노화가 삶의 불가피한 일부가 아니라 "폭넓은 병리학적 결과들이 빚어내는 질병 과정"이라는 것이었다. 이 사고 방식에 따르면 우리가 으레 노년과 연관 짓곤 하는 심장병, 알츠하이머병 같은 증상들은 반드시 질병 자체가 아니라 더 큰 무언가의 증상이다.


아니 더 단순하면서 아마 더 선동적일 방식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노화 자체가 질병이다."

p.140


저자 자신도 자신의 주장에 대한 반응을 잘 알고 있다. 과학적 근거가 충분함에도 아직 사람들의 인식이 그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생은 본래 그런거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수인 현실에서 늙지 않는 약물과 치료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이거나 사기처럼 들린다. 저자의 동료과학자들은 종종 저자에게 "안 좋게 보일 수 있어."라고 충구한다고 한다. 과학적으로 볼 때 확실한 이야기도 들을 준비가 안된 사람들에겐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자신의 "낙관론"을 멈추지 않는다.


저자는 노화가 일찍 죽을 수 밖에 없는 환경에 적응한 산물이라고 말한다. 험난한 자연 환경에 노출되어 사는 동안에는 '세포 노화'가 30-40대에 암을 막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생존 기간이 길어지면서 노화세포들이 다시 암의 원인이 되었다. 인간의 몸은 그 진화 단계를 넘지 못했다. 저자가 연구하는 노화 방지 기술들은 자연적 진화의 시간을 단축하려는 의도다. 이 주장을 밀고 나가 보면 자연상태에서도 언젠가는 인간이 노화를 극복하는 때가 올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미래를 향한 진화의 시계를 좀 더 빨리 돌리는 것이 그리 부자연스럽지만은 않은 일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진화는 아직 그 증가한 수명에 맞추어 적응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우리는 노화세포에 시달리고 있으며, 노화세포는 방사성 폐기물이나 다름없다.

p.271


저자와 저자의 가족은 자신의 연구 결과에 따라 세포의 손상을 복구하고 노화를 늦추는 약물을 복용하고 있다고 했다. 저자가 제시한 과학적 연구의 증거들, 저자가 자신과 유사한 유전자를 타고난 동생과 자신의 건강을 비교한 이야기, 무엇보다 저자의 사진을 볼 때 노화 방지 약물에 대한 저자의 주장은 의미있어 보인다.


주변에 노화를 예방한다는 수많은 의약외품, 보조식품들이 있다. 하지만 객관적인 안정성이 보장된 정말로 신뢰할만한 것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노화가 '질병'으로 지정되면 의학계가 합의하는 노화 방지 약물의 규정이 정해질까.


다행히 약물외에도 노화를 늦추고 건강 수명을 늘리는 방법이 있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적게 먹어라.

간헐적 단식 또는 주기적 단식을 하라.

육식을 줄여라.

땀을 흘려라.

몸을 차갑게 하라.

후성유전적 경관을 흔들지 마라.


'후성유전적 경관을 흔들지 마라'는 쉽게 말해 DNA 손상을 촉진하지 말라는 얘기다. 즉 담배, 가공식품, 방사선을 피하라는 말이다. 나머지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건강을 위한 생활 습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건강 수명을 늘리는 방법을 상당히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인공적, 기술적인 노화방지에 따르는 여러 가지 고려할 점들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노화 치료에서의 차별 문제일 것이다. 누군가는 혜택을 받고 누군가에게는 접근할 수도 없는 기술이라면, 그것이 인간에게 최소한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을 흔드는 것이라면 말이다.


저자는 노화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점검하면서 책을 시작하고 현재의 기술들을 서술한 뒤 미래의 문제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대단히 낙관적으로 바라본다. "다행히 그런 일이 벌이지기 전에 나는 이미 죽고 없을 거야."라며 "미래를 나와 상관없는 문제"라고 여기는 태도로는 현재의 기술 발달이 가져올 가까운 미래조차 대비할 수 없다. 저자는 "미래에 영향을 미칠 우리의 과거 결정에 책임을 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노화의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닥친 불행에 대해 우리는 살아서 설명해야 할 것이라는 말이다.


그저 생명 연장의 개념으로 생각했던 노화 방지의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새롭게 할 수 있는 독서였다. 기술은 우리의 관념의 변화보다 훨씬 빨리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저자는 고통스런 생명의 연장이 아닌 오랜 기간 건강하게 살기의 문제를 다뤘다. 누구나 바라는 그 일을 위해서는 미리 아니 시급히 준비해야 할 책무들이 많았다. 정치문제, 사회 보장 제도 개혁, 양극화 문제 등.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선행해야할 그 일들이 무겁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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