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공주 해적전 소설Q
곽재식 지음 / 창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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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필사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팟캐스트에서 『항상 앞부분만 쓰다가 그만두는 당신을 위한 어떻게든 글쓰기』라는 책 광고를 들었을 때. 쓰기의 기술도 그렇지만 작가적 평정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한 방법까지 가르쳐준다고 했다. 성우의 목소리도 코믹했고 "어떻게든" 쓰게 만들어주겠다는 작가의 단언도 인상에 남았다. 그가 누구든 '다른 사람이 글을 쓰게 해줄' 작가의 책은 만나기 어렵겠다 생각했었다. 실용서를 많이 보지 않기 때문에. 그런데 역시나 삶에 있어서 예단은 금물. 그 작가, 곽재식 작가의 소설을 만났다.


신라 공주가 어쩌다가 해적이? 책 『신라 공주 해적전』, 제목이 특이했다. 가제본을 받아 작가를 모르는 상태에서 읽었다. 누군가에게 말하듯 술술 풀어내는 내용을 읽고 있자니 어릴적 할머니 팔을 베고 옛날 이야기를 듣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꿈과 모험이 가득한 나쁜 사람은 벌받고 착한 사람은 복을 받는 이야기. 할머니의 이야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주인공이 더 매력적이라는 것 그리고 다 못 듣고 잠들 수 없다는 것.


『신라 공주 해적전』 가제본



책의 분량도 그렇거니와 빠르게 읽히는 책이었다. 해적이 나오는데 흥미진진하지 않기도 힘들다. 때는 신라 말, 장보고가 죽은지 10년 후다. 장보고와 함께 바다를 누비던 여인 장희가 생활고를 해결하고자 공터로 나서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무 밑천 없이 그저 꼬마때부터 장보고 무리를 따라다니며 익힌 말재주 하나를 믿고 나선 길이다.


그곳을 한번 둘러본 장희는 목이 좋은 공터에 자리를 펴고 앉은 후에 깃발을 내걸었다. 깃발에는 직접 크게 글씨를 썼다.

"행해만사(行解萬事)"

즉 무슨 문제든지 말만 하면 다 풀어준다는 뜻이었다.

p.10


가까스로 끼니를 때운 개업 첫날 짐을 쌀 무렵 한 남자가 다급히 장희를 잡는다. 자기가 가진 재물을 다 내놓을 터이니 자신을 도망치게 해달라는 요구와 함께. 순박한 남자 한수생의 재물을 손에 넣고 적당히 떼어버리려던 장희는 그의 절박한 사연에 발목이 잡힌다.


한수생의 사연이 또 기가 막힌다. 자식을 공부시키려는 부모 밑에서 학업에만 정진하던 그는 갑자기 인도구경을 하러 떠난 부모의 농사를 물려받는다. 농사라곤 지어본 적이 없지만 노력하는 그와 다르게 마을의 다른 청년들은 서라벌 병이 든다.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최소한 좋은 노래와 춤을 즐길 줄 알고, 또한 아름다운 시의 멋과 옛 성현의 지혜를 배우는 즐거움을 알아야 한다. 그저 밥 먹을 걱정, 굶지 않을 걱정만 한다면 그것은 짐승의 삶이지, 사람의 삶이라고 할 수 있는가?

p.16


'배부른 돼지가 되는니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는 말처럼 들린다. 한수생은 "스스로 먹고 살아야 하는 형편"을 말하고 "서라벌 나들이를 하며 재물을 써버린다면 나중 일은 어찌"할 것인지를 청년들은 한수생을 "그저 모든 것이 밥 먹는 일인 줄로만 아는 소같은 놈"이라고 비웃는다. 겨울이 왔다. 흉작으로 굶주림에 시달린 마을 청년들의 생각이 달라진다. 자신들은 '짐승의 삶'이 아닌 '사람의 삶'을 택했었다. 그러나 "사람의 삶"도 결국은 "짐승의 삶"이 해결돼야 가능한 거였다. 마을 청년들은 짐승이 되길 선택한다. "옛 시인들이 남긴 아름다운 글에 눈물 흘릴 줄 아는" 자신들이 "재물만 탐내는 벌레"같은 한수생에게 끼니를 의지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떳떳하게) 살기 위해서는 한수생을 죽일 수밖에 없다며 낫과 칼을 든다. 한수생은 뒷문으로 도망친다.


농사를 업으로 삼는 촌에서 자식의 성공을 위해 공부만 시키는 부모들, 부모의 경제적 바탕아래 자신의 생활을 스스로 책임질 생각이 없는 자녀들, 좋아 보이는 것, 이상적인 것을 쫒느라 현실의 조건을 무시하는 일, 어려움이 닥치면 문제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태도. 한수생의 이야기에는 이런 사람 살이가 녹아 있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지금의 이야기지 않은가.


마을 청년들을 피해 도망가던 장희와 한수생 앞에 서해 해적의 강자 대포고래가 나타난다. 노예 신세를 면하려고 가까스로 탈출한 끝에 누군가에게 끌려간 섬에는 200년전 멸망한 백제의 재건을 외치는 무리가 살고 있다. 자칭 백제국의 공주는 한수생을 남편으로 지명하고, 남편감으로서의 자질을 증명하지 못하면 죽을 위험에 처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위험의 고비마다 장희의 말빨과 지략이 빛을 발한다. 신라를 멸하고 그 땅에 백제를 세우기 위해 백제 공주의 섬 사람들에겐 돈이 필요하다. 장희는 백제의 부흥을 위해 마지막 태자 '풍'이 남겼다는 보물을 찾아주겠노라 장담한다. 내심은 보물찾기 와중에 탈출할 심산이다. 마지막 모험이 시작된다. 누군가는 한 나라의 마지막 태자가 숨긴 황실의 보물에 눈이 멀고 누군가는 사라진 나라의 재건을 꿈꾼다. 그 틈바구니에 낀 장희와 한수생의 탈출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신라판 '신드바드의 모험'을 읽은 기분이다. 바다를 배경으로 생명을 건 모험이 펼쳐진다. 신라, 백제, 장보고를 비롯한 여러 왕들이 언급되기는 하지만 주요인물이 아니고 배경일뿐이다. 역사 문외한이라고 겁먹을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소설의 주는 모험이고 그 모험 와중에 드러나는 사회와 그 사회를 살아가는 삶에 대한 이야기다.


본시 벼슬아치들이란, 자기에게 귀찮은 일이 떨어지는 것ㅇㄹ 고양이가 목욕 싫어하듯 하는 법이오.

p.33


본시 사나운 기세로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 일어서게 되면, 중간에 그게 아니다 싶은 느낌이 들 때가 있어도 그냥 그 기세에 눌려 일을 저지르게 되는 수가 많은 법이오. 더군다나 자신은 현명하여 세상의 이치를 잘 아는데 주위에는 멍청한 자들뿐이라고 믿고 함부로 말 떠들기 좋아하는 놈이 한둘만 섞여 있으면 일이 험악해지는 것은 더 쉬워지게 마련이오.

p.25


장희와 한수생은 어찌보면 비슷한 사람이다. 장희는 약삭빠른 말재주꾼이고 한수생은 공부와 농사 밖에 모르고 산 순둥이지만 둘은 본능적으로 사람에 대한 신의를 따르는 인물이다. 장희는 재물을 받고 한수생을 버릴 수 있었지만 되돌아왔다. 한수생은 노예나 다름 없는 공주의 남편 자리에서 탈출한 기회를 두고 싸움터로 돌아갔다. 공주에 대한 의리를 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면서. 소설 속의 신의는 나름의 보답을 받았다. 현실 속의 신의는 어떠한가. 믿음을 잃을까 두려워 내가 먼저 누군가에게 등돌리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를 믿을 수 있는 사람인 것이 더 중요하다. 배신당하지 않기 위해 모두를 의심하기보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더 타당한 '사람의 삶'이 아닐지.


제목의 '신라 공주'는 장희를 말하는 호칭이었다. "작은 나라의 공주처럼 꾸미고 다니는 해적 두령"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장희가 얻은 별명이 '공주 해적'이다. 애초 책 제목이 흥미로웠던 것은 '신라 공주'였다. 막상 책을 읽고 보니 제목의 방점은 '해적'에 찍혀있었다. 즉 '역사' 보다는 '모험'에 촛점을 맞춘다면 예상을 뒤엎는 내용의 걸죽한 판소리 한판과 같은 이야기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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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미래의 달까지 얼마나 걸릴까?
N. K. 제미신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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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개의 단편을 모은 566페이지의 책을 읽는데 얼마나 걸릴까? N.K. 제미신의 『검은 미래의 달까지 얼마나 걸릴까?』 얘기다. 책에는 SF와 환상 장르의 단편이 가득하다. 작가의 데뷔작인 「비제로 확률」(2009)부터 책이 출판된 2018년까지의 작품까지. 6쪽에 이르는 짧은 것부터 50쪽에 가까운 것까지. 작가가 그려내는 한계 없는 시공간을 같이 떠돌다보면 내가 앉아 있는 이 곳이 낯설어질 지경이었다. 하나의 단편이 끝날 때마다 '다음은? 그 다음은?'하며 책장을 넘기다보니 어느새 '감사의 글'과 마주하게 됐다.


이 책은 좀 특별하다. 휴고 상을 수상한 첫 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가인 자신의 정체성을 도드라지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인종적)정체성이 자연스럽게 작품에 반영됐다기 보다는 작가 자신이 의식적으로 작품을 그렇게 썼다. 대학에서 심리학과 상담학을 전공한 저자의 이전 직업은 당연하게도 상담 심리사였다. 일을 하는 동안 글쓰는 일 외에 저자가 관심있었던 두 가지 활동이 있다. 하나는 SF와 환상문학,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에 관심을 놓지 않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성차별과 인종차별 및 여러 정치사회적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었다. 저자는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던 차별이라는 주제를 역시 오랫동안 즐겨온 문학에 접목해 특별한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SF와 환상문학은 "중세 유럽과 아메리카 식민지화"가 주무대였고 이성애자 백인 남성이 쓴 것이 아니고는 출판조차 어려웠다고 한다. 이런 출판 시장에 "흑인 여성으로서 SF와 판타지를 사랑하기"로 결정한 작가의 용기에 존경을 보낸다. 그녀는 자신이 "쓰는 소설에서 나 자신을 제외시킬 수는 없"었고 그런 그녀의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현재 SF, 판타지 문학에서 작가가 이룬 성취가 그 증거다. 그냥 그녀의 단편집을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N.K. 제미신의 작품이 구태의연한 SF와 다른 어떤 독특함을 가지고 있는지.


2002년에 SF와 판타지를 쓰고 싶은 흑인 여성으로서, 내게는 작품을 출간한 기회도, 비평가들의 눈에 띌 기회도, 중세 유럽과 아메리카 식민화를 끝없이 변주하는 내용 말고는 원하는 것이 없어 보이는 독자층의 인정을 받을 기회도 없었다.

p.8, 책머리에 中


그 글(2013년에 쓴 에세이 '검은 미래의 달까지 얼마나 걸릴까?')은 … 내가 흑인 여성으로서 SF와 판타지를 사랑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에 대한 사색이기도 하다. SF와 판타지 그리고 그 업계에서 뿜어 내는 인종차별과 내가 스스로 내면화한 인종 차별에 맞서 얼마나 치열하게 싸워야 했는지. 내 민족에게 이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라밍 아무도 없음을 깨닫고 얼마나 무서웠는지. 그리고 마침내 나 자신을 받아들이고 내가 보고 싶은 미래를 자아내기 시작하자 얼마나 흐뭇한지.

p.12, 책머리에 中


당연하게도 저자가 "작가로서, 그리고 운동가로서 성장한 과정을 기록한 연대기"인 단편집에서는 두 가지의 강렬한 뉘앙스가 담겼다. 등장인물의 인종적 다양성에 대한 남달리 세밀한 묘사와 시공간을 뛰어넘는 차별의 보편성이다. 대중 소설에서 '창백한 피부에 하늘 빛 눈동자, 태양을 닮은 머리칼...'의 인물은 대개 주연급이다. 이런 묘사는 소설의 주인공이 고난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이고 잘 생겼다고 서술되는 것 만큼이나 관습적이다. 주요 등장인물 특히 여성에 대한 제미신의 다음과 같은 묘사는 대중 소설의 그것과 구별된다.


그 여자 기억하나? 키가 아주 크고 갈색 피부에, 근사한 얼굴에 머리를 밀고, 솔직한 즐거움 속에서 애정이 가득한 모습으로, 먹구름 회색 옷을 잘 차려입은 그 여자 말이야.

p.24, 「남아서 싸우는 사람들」 中


부자들이 의뢰하는 조각상도 그녀의 입술처럼 탐스럽지 않았고, 그녀의 뼈대처럼 우아하지 않았다. 설탕을 입힌 건포도도 그녀의 피부처럼 유혹적으로 검지는 않았다.

p.434, 「수면 마법사」 中


다름에 대한 배제와 차별은 과거에도 지금에도 문제지만 아주 먼 미래에도 여전히 해소되지 않을 모양이다. 미래를 그리는 소설들에서 작가들이 끊임없이 그 문제를 다룬다. SF 라는 장르가 가상의 미래를 배경으로 할 뿐 현재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일까. 다양한 차원의 차별은 지금의 세계가 풀어야할 중요한 문제다. 아니면 배제와 차별의 문제가 그 근원이 언제인지도 모를만큼 오래 전부터 인간의 무의식에 잠재해 있는 것이기 때문일까. 그 해소나 소멸이 가능하기 위해선 인간 존재가 먼저 중대한 변화를 맞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지늘은 이제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하는지 이해한다. 존재함으로써, 지늘은 그들이 자신이 대수롭지 않음을 상기하게 만든다. 다름으로써, 지늘은 그들이 "적"을 재정의하게 만든다. 스스로 최선을 다함으로써, 지늘은 그들에게 가진 잠재력을 다 활용하라고 부추긴다.

p.246, 「졸업생 대표」 中


"생김새가 참 반반하시군요, 마드무아젤 두몬드. 그런데 당신 같은 검은 여인들이 과거에 제 조상들을 꾀어 아주 저질스런 짓을 하게 했고, 그래서 제 조상들은 혼혈 자녀를 명예롭게 키워 그 일을 속죄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군요.

어차피 백인들에게 우리는 전부 비슷하니까요. 비록 나는 혈관 속에 가장 순수한 프랑스인의 피가 흐르고, 당신은 아프리카 정글에서 곧바로 넘어온 사람이나 다름없다 하더라도!"

p.129, 「폐수 엔진」 中


작가는 정신을 시스템으로 다운로드, 업로드 할 수 있는 세상을 그린다. 그 정신은 인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 네트워크의 카오스에서 태어난 존재 혹은 변칙적 진화를 통해 생겨난다. 생물학적인 실체에서 유래한 인간은 자신들과 구분할 수 없게 진화한 그 존재와 공생할 것인가 혹은 배제할 것인가. 이것은 현실의 인종적, 계층적 차별과 배제의 문제에 대한 은유인 동시에 미래에 대한 작가의 질문이다.


N.K. 제미신의 단편집 읽기는 상상력의 바다를 헤엄치는 일이자 22개의 세계를 여행하는 일이었다. 하나의 세계를 읽고 이해해 머리 속에 그리는데 일정의 시간이 걸리는 독자에게는 22개의 세계가 무한에 가깝게 느껴졌다. 작품의 배경은 IT 네트워크 내부에서 인간화된 전기 신호가 창조한 세계에서 화성 너머 소행성대의 우주 서식지를 지나 게센인이 사는 우주 연합에 이르는 공간을 넘나든다. 시간의 파노라마는 근대의 제국주의 시대부터 추측 불가능한 미래의 어느 시점까지 펼쳐진다. 하나의 단편이 끝나고 그 세계를 머리 속에 배치하기 무섭게 다음 순서의 낯선 세계가 닥쳤다. 새로움에 대한 기대로 마음이 부풀었지만 그것을 해독해야 하는 머리는 종종 어지러움을 호소했다.


단편집 『검은 미래의 달까지 얼마나 걸릴까?』는 총천연색 초콜릿이 담긴 상자같다. 당신이 무엇을 고를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이 가지각색의 맛으로 당신의 혀끝을 자극할 것임을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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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야의 초록 리본 사계절 아동문고 97
박상기 지음, 구자선 그림 / 사계절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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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랑은 자동차가 몇 대 지나가는 걸 지켜본 다음, 왕복 6차선 도로를 급히 내달렸다. 하지만 중앙선에는 솔랑의 키보다 높은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망설일 여유 따윈 없었다. 솔랑은 네 발에 힘을 모아 스프링처럼 튀어 올라서 중앙 분리대를 넘었다. 양옆으로 길게 뻗은 고속 도로가 한눈에 보이는 순간이었다.

p.14


고라니 솔랑은 호기심이 많다. 어린 고라니는 태어나 자란 잣나무 숲에서 고속도로 건너에 보이는 붉은 산이 궁금했다. 어머니를 떠나 동생과 함께 둥근 발 괴물이 전속력으로 달리는 그 도로를 넘기로 결심했다. 어린 짐승의 용기는 따뜻한 응답을 받을 수 있을까.


몇 년전 따스한 봄날 아파트 화단에서 만난 새끼 고라니가 떠올랐다. 따사로운 아침햇살이 비치는 산 아래 산책길이었다. 염소 울음 소리 비슷한 짐승 소리가 가냘프게 길 앞쪽에서 흘러나왔다. 길고양이가 아픈가. 발걸음을 옮겨보니 작은 사슴이 산 비탈을 오르려 애쓰고 있었다.(나중에 알고 보니 고라니였다.) 단지 뒷산에 들짐승이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고라니가 살 줄이야. 어린 고라니는 어쩌다 어미와 떨어져 축대 옆 비탈로 미끄러진 모양이었다. 산으로 돌아가면 좋을텐데 어린 것이 기어오르기엔 비탈 경사가 가팔랐다. 가까이 다가가자 새끼 고라니는 바들바들 떨며 화단 나무 사이로 몸을 숨겼다. 호기심에 탐험을 나섰다가 위험에 빠진 걸까 하고 애처로운 마음이 들었었다. 호기롭게 고속도로를 건너려는 솔랑도 그렇게 작은 고라니였을 것이다. 겁도 나고 낯설지만 책 속의 어린 고라니는 붉은 산으로 향한다.


산 아래 살다보니 종종 짐승과 마주친다. 청설모는 자주, 산뱀도 가끔, 고라니는 한 번. 산 뒷편에는 멧돼지가 출몰하기도 했다. 불편함을 느끼기 보다는 인간이 차지하는 땅이 넓어질수록 그 땅에 발붙이던 짐승들의 터전이 줄어들겠다 싶어 미안한 마음이다. 인간과 마주쳐서 피해를 보는 것은 언제나 짐승들이니까 말이다. 붉은 산으로 간 솔랑은 그 곳이 잣나무 숲과는 다르다는 걸 깨닫는다. 짐승들은 언제나 굶주려 먹이 구하기에 혈안이 돼 있다. 인간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짐승들의 터전을 황폐화시키는 것도 모자라 먹이까지 동내고 있었다. 청설모 청서의 말이다.


"요즘 땅에 사는 짐승들이 보통 날카로워진 게 아니야. 두 발 괴물들이 사냥만 하는 게 아니라 땅에 떨어진 먹이까지 다 가져가 버리거든."

"그래 놓고 다람쥐가 사라지는 게 우리 탓이래. 기막혀!"

pp.27-28


인간은 자신들이 한 일은 생각안하고 문제 없이 공생하는 짐승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린다. 청설모뿐 아니다. 유해조수로 지정된 늪너구리(뉴트리아)는 더 억울하다. 애완동물이라고 데려와 놓고 아무데나 버려놓고는 해를 끼친다며 사냥하고 있다. 기후가 맞지 않아 늘 감기를 달고 사는 늪너구리 죠니가 하소연한다.


"말도 말앙! 눈에 띄었다가 죽지 않으면 다행이징. 이렇게 먼 나라에 버려졌어도 겨우겨우 살아남았더니 우리가 자연의 질서를 파괴한다나 뭐라낭. 들리는 소문에는 우리한테 현상금까지 걸었댕!"

p.52


붉은 산에서 먹이를 찾지 못한 솔랑은 인가에 내려갔다가 덫에 물린다. 상처입은 솔랑을 늙은 멧돼지 도야가 감싸준다. 배가 고파지면 먹어버리겠다고 호통을 치면서도 도야는 솔랑을 치료해주고 먹이에 잘 곳까지 챙겨준다.


도야는 누구나 겁먹을 만한 겉모습이다. 무지막지한 덩치에 한쪽 눈이 흉측하게 상처가 나있다. 말투도 거칠다. 그러나 툭툭 내뱉는 말에는 온기와 보살핌이 들어있다. 그래서인지 붉은 산 짐승들은 도야를 따른다. 도야는 각각의 동물들이 살 구역을 정해주고 서로간의 분란을 조정한다. 사나운 들개떼 무리의 대장 대발도 도야와 한 약속은 지킨다.


"대발의 몸에 조금이라도 야생의 피가 흐른다며 이번 약속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킬 거다. 인간이 쳐들어오면 우린 결국 같은 편일 수밖에 없거든."

솔랑은 도야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방금까지 싸웠던 대발 패거리마저 감싸 안는 도야의 마음 때문이었다. 어디서 저런 배포가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pp.77-78


야생의 짐승들은 서로 공생하는 자기들만의 규칙을 가지고 있다. 짐승들은 누군가를 이유없이 공격하거나 해치지 않는다. 배가 고플 때, 생존이 절실할 때 삶을 위해 다른 생명을 필요로 할 뿐이다. 인간이 자연의 법칙을 깨버리지 않는 한 말이다. 인간은 탐욕때문에 자연을 소모한다. 환경 문제가 심각하다면서도 한 쪽에서는 자연보호구역 해제를 외친다. 들짐승들은 살 곳을 잃고 궁지에 몰리거나 사냥이라는 이름으로 학살당한다.


도야는 인간에 대해 연구하고 그들과 소통할 방법을 찾는다. "유해 인간 출입금지". 멧돼지가 인간의 말을 아는 까마귀의 지혜를 빌어 만든 표지판이다. 마지막으로 조니가 구해준 초록 리본을 둘러 만들었다. 도야는 나무 색깔과 비슷한 초록 리본이 인간의 마음을 순화시켜주길 그래서 짐승들의 땅을 넘보지 않길 바랬다. 기적을 바란 것이다.



왼쪽) 도야가 만든 표지판, 오른쪽) 도야의 표지판을 보고 인간이 만든 표지판


"죠니에게 이걸 받았을 때부터 언젠가 꼭 써 보고 싶었어. 왠지 주변의 나무 색깔과 비슷하잖아. 인간들도 이걸 보면 나처럼 마음이 평안해지지 않을까?"

p.115


도야의 표지판을 보고 마음이 통한 인간도 있었다. 소수였고 그들의 힘은 크지 않았다. 도야가 바란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인간들은 총으로 짐승을 위협해 오고 도야는 솔랑을 위한 마지막 결심을 한다. 인간이 변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멧돼지 도야가 기적적으로 만든 일만 남았다.


아파트 단지 산책길에서 만난 새끼 고라니를 어찌해야 할지 몰라 가까운 경비실로 달려갔다. 헛걸음만 하고 다시 와보니 고라니는 사라지고 없었다. 어미에게 갔겠지, 설마 누가 잡아가거나 한 건 아니겠지 생각했지만 바들바들 떨던 가느다란 다리가 자꾸 떠올랐다. 다음 날 아침 산에서 어제 어린 것이 냈던 소리보다 힘찬 울음 소리가 들렸다. 어미와 아기 고라니가 사이좋게 지나가는 소리려니 하고 생각했었다. 잣나무 숲으로 돌아가 새로원 삶을 다짐한 솔랑의 울음 소리가 그 아침에 들었던 소리와 닮았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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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에렉투스의 유전자 여행 - DNA 속에 남겨진 인류의 이주, 질병 그리고 치열한 전투의 역사
요하네스 크라우제.토마스 트라페 지음, 강영옥 옮김 / 책밥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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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에서 발굴된 작은 손가락 하나가
우리를 새로운 원시 인류의 세계로 안내한다.

황금광이라도 발견한 양 들떠 있는 유전학자들은

이제 만능기계를 손에 쥐고 있다.

아담과 이브는 따로 살았다.

지금까지 우리가 네안데르탈인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은 허상이었다.

쥐라기 공원은 모든 것을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갔다.

p.19


수수께끼 같기도 하고 시 같기도 한 문장으로 첫 장을 시작한다. 손가락 하나에 이끌려 가게 될 새로운 세계는 어디며 영화 <쥐라기 공원>은 무슨 일을 벌인 걸까. 요하네스 크라우제와 토마스 트라페의 책 『호모 에렉투스의 유전자 여행』은 스무고개 놀이를 하는 것 같다.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고고학 또는 진화인류학의 지식들이 과연 진실일까를 물은 후 최신 유전학 기술 분석 결과를 보여준다. DNA 분석 기술은 기존의 고고학 연구 결과를 뒤집는 놀라운 결과를 드러내기도 하고 근거가 부족했던 이론을 확정하는 증거가 되기도 했다.


의학 기술로 발명된 DNA 분석기술은 고고학 분야에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인간의 유전자를 분석하는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삶과 관련된 거의 모든 생물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오랜 세월 인간의 삶에 영향을 준 개와 말, 질병의 매개가 된 박쥐, 곰쥐, 물개, 아마딜로 같은 동물, 질병의 원인이 되는 박테리아와 바이러스의 DNA도 실험대에 올랐다. 고고학과 유전학이 결합한 '고고유전학'이라는 학문은 마치 시간이 파묻어버린 모든 비밀의 문을 열 수 있는 신비로운 열쇠같다.


고고유전학이라는 신생 학문은 우리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근원적인 질문들 중 일부에 새로운 답을 찾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인간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인간은 어디에서 왔는가? 인간은 어떻게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되었는가?

p.21


요하네스 크라우제는 분석했던 손가락은 데니소바인의 것이었다. 일명 '데니'라고 불리우는 이 소녀의 유전자는 원시 인류에 대한 기존 지식을 상당부분 수정했다. 네안데르탈인과 같은 시대를 산 또다른 인류 종이 있다는 것이 밝혀짐과 동시에 두 종의 유전자가 섞여 있음을 드러냈다. 또 이후의 연구에서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이 현생 인류와도 DNA를 교환한 것으로 나타났다. 90년대만 하더라도 현생 인류가 다른 인류종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가설은 배척됐다. 있을수 없는 일로 여겨졌다. 게놈 비교 결과 현생 인류는 네안데르탈인은 물론이고 데니소바인의 유전자도 일부 가지고 있었다. 2005년 이후 고고유전학은 비약적인 발전을 해왔고 이 책에서는 최전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학자의 연구 결과물이 담겨 있다.


책의 주요 내용을 기술하면서 추가로 알아야 할 정보는 따로 파란색 문자의 단락으로 인쇄되어 있다. 예를 들어 3장에서는 인류의 이주에 대해 큰 그림을 그린다. 이주의 가장 큰 원인으로 기후가 꼽히므로 기후 변화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저자는 친절하게 '과거와 현재의 기후 변화'라는 단락을 추가해 기후 변화와 이주의 관계를 설명한다.

책에는 유전자 연구를 통해 밝혀진 새로운 정보들이 가득하다. 사르디니아 섬 사람에게는 수렵민과 채집민의 유전적 요서가 섞이지 않은 초기 농경민의 순수한 유전자가 남아있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유전 정보는 아시아인의 것보다는 유럽인의 것과 더 가깝다. 시궁쥐는 페스트로부터 유럽인을 구했다. 한센병은 유럽에서 아시아로 전파된 것이다. 결핵균은 소가 인간을 감염시킨 것이 아니라 인간이 소를 감염시킨 것이다. 이런 결과를 얻기 위해 수행한 일련의 유전정보 분석 과정과 논리적 맥락이 찬찬히 서술되어 있다.


좀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유전학에 관한 지식도 고고학에 관한 지식도 일천한데다 계속 등장하는 '무슨무슨 인'과 같은 낯선 단어들이 헷갈렸다. 수시로 등장하는 세계 각지의 지명도 대략의 위치를 알지 못하면 내용을 따라가기 어려웠다. 유전자가 어떤 경로로 이동했는지를 설명하는데 지리를 모르면 당연히 알기 쉽지 않다. 물론 이해를 돕는 지도가 각 장 앞에 제시되어 있다. 공들여 만든 인포그래픽이다. 해당 장에서 설명하는 동선을 지도에 표기해주고 있다. 심도 있는 읽기를 원하는 독자는 각 장의 지도를 수시로 참고하면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는 중간중간 문장이 잘 읽히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앞뒤 문장과 논리적으로 맞지 않거나 문장 자체가 난해했다. 아마도 고고유전학이라는 전문분야에 대한 배경 지식이 번역에 영향을 준게 아닌가 싶다. 이런 책의 경우 번역만 전문으로 하는 번역자보다는 해당 분야에 대한 전공 지식이 어느 정도 갖춰진 번역자가 참여했으면 어땠을가 싶다. 상당히 재미있을 법한 책이 문장의 난해함으로 어렵기만 한 책으로 묻히는 게 아닌가 싶어 아쉬움이 남았다.


그럼에도 고고유전학에 남다른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각 장의 첫머리에 수수께끼 질문처럼 제시된 문제들이 어떻게 풀려가는지를 차근차근 따라가다 보면 DNA 염기 서열 분석이 밝히는 세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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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개 도시로 읽는 세계사 - 세계 문명을 단숨에 독파하는 역사 이야기 30개 도시로 읽는 시리즈
조 지무쇼 엮음, 최미숙 옮김, 진노 마사후미 감수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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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문명을 단숨에 독파하는 역사 이야기

수천 년 세계사의 주요 흐름을 도시 이야기를 통해 한눈에 펼쳐내다!

표지 문구 中


5천 년 인간 역사를 표지의 말처럼 "단숨에" 알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있을까. 아쉽게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남긴 역사는 350페이지의 책 한 권에 담을 수 있지도 않을 뿐더러 속속들이 다 밝혀져 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길고 넓고 많은 세계사를 짧게 줄여서 알려준다는 책들에 끌린다. 인간사를 한 줄로 꿰어보고 싶은 욕망, 어차피 속속들이 알지 못 할 거라면 줄거리라도 더듬어보고 싶은 욕심때문이다. 나아가 역사의 얇은 줄기들을 거듭해 모으다 보면 제법 굵은 세계사의 타래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부질없는 소망도 있다. 수없이 등장하는 연대와 동서양이 맞물리는 시기를 꿰어맞추다보면 과거 어느 시절에서 미아가 되어 버린 기분을 종종 느낀다. 그럼에도 과거를 잃는 일에서 현재를 보는 시각이 가장 많이 넓어짐을 느끼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다. 조금 더 헤매보는 수 밖에.


'조 지무쇼'라는 저자는 단일 인물이 아닌 '기획·편집 집단'이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복잡하고 어려운 전문 지식에서 꼭 알아야할 핵심만 추려 단순 명쾌하게 풀어내자는 목표"에서 모였다고 한다. 그러니 이 책은 한 사람이 쓴 책이 아니고 다수가 '엮은' 책이다. 여럿이 쓰다보면 장 별로 다루는 내용의 깊이가 차이나거나 중복이 있지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세계사 강의로 유명한 입시학원 강사분의 감수로 오류의 위험을 피했다.


『30개 도시로 읽는 세계사』는 30개 주요 도시의 역사를 훑으며 세계사의 흐름을 정리한다. 나라나 왕조가 아닌 '도시'를 중심 주제로 삼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기원전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세계사를 총 30개 도시의 역사를 통해 단순하고 명쾌하게 풀어냅니다. 세계사는 도시 문명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기 때문에, 세계 주요 도시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 모습에 이르렀는지 살펴보는 것은 세계사의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p.5


바빌론에서 시작해 두바이로 끝나는 구성은 책의 의도에 충분히 부합한다. 나머지 28개 도시들은 대략 시간 순서에 따라 배열되어있는 듯하다. '듯하다'라는 의미는 정확히 시간 순서대로 도시의 등장 순서를 매긴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기원전 658년에 건설됐다는 '비잔티움'은 기원전 11세기부터 시작된 '장안'보다 앞서 배치돼 있다. 아마도 같은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서유럽의 도시들을 차례대로 이야기한 후 다른 도시로 넘어가기 위한 순서로 보인다. 도시의 순서를 정한 기준을 제시해주었었으면 더 좋았겠다.




각 장의 첫 머리에는 해당 도시가 세계사에 자리매김한 가장 중요한 이유를 소개한다. 덕분에 도시의 소개와 역사를 읽기전에 요점을 알고 시작할 수 있다. 또 각 도시가 그 나라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도와 도시의 내부 구조를 알 수 있는 지도도 도시마다 들어가 있다. 역사와 지리는 불가분의 관계다. 지리적 위치에 따라, 위치에 따른 기후에 따라 인간의 역사는 크게 영향을 받는다. 지리를 잘 알면 역사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때문에 역사를 다루는 책에 지도가 없는 경우 난감해진다. 지도를 일일이 찾아보면서 책을 읽기는 번거롭고 그렇다고 위치 정보를 무시할 수도 없어 답답해진다. 그런 점에서 사이사이에 적절한 지도를 보여주는 책을 읽을 때마다 만든이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도시를 소개하는 순서는 우선 도시의 유래와 역사, 그리고 주요 건축물과 유적 순이다. 도시가 처음 시작된 연유를 서술하면서 전설처럼 다뤄지는 이야기를 사실적인 역사처럼 기술한 부분은 좀 아쉽다. 예를 들어 콘스탄티노플을 창건한 사람이 '메가라의 바자스'라는 것은 사실이라기 보다 신화에 가깝다. 신화에 기초한 서술이라는 첨언 정도는 있었으면 싶었다.


책에 등장한 도시들 중 모스크바와 이스파한, 상트페테르부르크가 기억에 남는다. 모스크바는 그저 추운 도시 쯤으로만 인상에 남아있었는데 생각보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제 3의 로마를 지향했던 일이나 '붉은 광장'의 의미도 새로운 지식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와의 비교도 흥미로웠다. "유럽풍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비해 러시아 전통의 분위기가 강"한 모스크바. 또 유럽을 지향한 표트르 대제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기억 속에 『죄와 벌』의 도시로 남아 있다. 소설 속의 음울함과는 달리 유럽의 화려한 문화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장소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성형요새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의 아름다운 사진을 보고 한동안 성형요새 자료를 찾아보기도 했다. 이스파한은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도시다. 주인공이 청년시절 가고 싶어한 도시다. 소설에서 막연한 이상향처럼 그려졌었던 도시를 이번 책을 통해 실체로 만날 수 있었다.


잦은 전란과 정변으로 혼란한 도시를 싫어했던 루이 14세가 파리와 떨어진 베르사유를 건설한 일이 중대한 변화를 초래했다. 국민과 유리된 왕족은 국민의 생활을 알 수 없었고 그들의 고통에도 무심해졌다. 이러한 변화가 프랑스 대혁명의 원인 중 일부가 되었을 것이다. 도시의 형태가 정치와 역사에 미치는 영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싶다.


30개나 되는 도시를 다루기 때문에 내용이 간결할 수 밖에 없다. 이름만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에 대해 모르거나 인물 이름과 같은 배경지식이 없을 경우 그림 구경에 그칠 수도 있다. 그림만 구경해도 호사스러운 독서가 되긴 하겠다. 그러나 조금 품을 들여 정보를 찾아보면서 읽는다면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세계사 지식을 맥락이 있는 지식으로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이야기에 능한 세계사 강사에게 요점 정리를 들은 것같은 기분이 든다. 역은이는 '들어가는 말'에서 "이 책은 첫 장부터 순서대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썼다. "각자 흥미를 끄는 부분부터 시작해서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체감하는 방식으로 역사의 재미를 느껴"보자고 말한다. 책을 완독한 독자로서 여기에 한 마디 덧붙이고 싶다. 가고 싶은 도시가 있다면 또는 특정한 도시에만 호기심이 있다면 해당 부분만 읽으시라고. 그러나 세계사가 궁금하고 인간의 역사가 궁금하다면 첫 장부터 차근히 읽어보시기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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