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지나가다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3
조해진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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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넘게 이어지는 장마 속에서 『여름을 지나가다』를 읽었다. '8월이 되면 쨍쨍한 해를 볼 수 있겠지. 그 한 여름 속에서 읽을 만한 책일까'하는 생각을 했었다. 시간은 지나갔지만 그다렸던 그런 여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책 속에는 6월, 7월, 8월과 여름의 끝이 지나갔다. 비가 오고 습하고 숨막히는 햇살이 내리 쬐는 도시에서 서로를 모르는 그러나 삶의 한 시기에 중대한 의미를 주고 받는 사람들이 있다.




민은 다른 사람의 생을 궁금해 한다. 그래서 타인의 삶 속에서 잠시 그들의 생을 산다. 정해진 시간은 30분. 타인의 생활터에서 타인의 옷을 입고 그 삶을 밟아본다. 타인의 짧은 생의 끝은 죽음이다. 옷을 벗어두고 문을 닫고 그 삶에서 나온다. 조용히 그 짧은 삶을 애도하면서.

공인중개사 사무소에서 일하는 민은 몰래 매물로 나온 집을 방문한다. 마음에 남았던 집의 주인이 외출한 사이 몰래 집에 들어가 그 집의 옷을 입고 30분간 다른 삶을 산다. 불법 주거 침입에 해당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타인의 삶으로 들어가는 행동을 멈출 수 없는 건 민의 현재 삶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약혼자와 헤어지고 직장을 그만둔 후 우발적으로 공인중개사 사무소 일을 시작했다. 습관처럼 일하고 있지만 그녀의 삶은 그녀의 생각, 마음과 유리되어 있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게 의심될 때마다" 드나들던 문닫은 가구점에서 누군가를 만날 때까지.


수호는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한 후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생계를 잇는다. 온가족이 아버지의 대출 빚에 쫒겨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지만 끝은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로 앞만 보며 달리는 세 명의 동행자가 마음속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수호는 반사적으로 몸서리쳤다.…

아버지처럼 살지 않는 것, 그것이 지금 수호가 꿈꾸는 미래의 전부였다.

p.21


수호는 우연히 얻게 된 타인의 신분을 도용한다. 신용불량자라는 제약을 벗기 위해서다. 타인의 이름으로 얻은 아르바이트 자리에서 한 사람을 만난다. 자신의 자리에서 끝없이 노력하는 사람, 누굴 도울 처지가 아님에도 다른 사람을 감쌀 줄 아는 사람, 이연주다. 수호는 연주 덕분에 자신에게만 말하는 사람에서 다른 사람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 된다. 연주와 보낸 시간은 숨막히는 수호의 삶에 시원한 바람이 되었다.


손님의 발길이 뜸해졌을 땐 골목 바닥에 전단지를 깔고 그녀와 나란히 앉아 흘러가는 여름을 지켜보기도 했다.

p.78


그러나 수호는 그런 안온함이 불안했던 모양이다. 연주의 믿음을 스스로 깨고 고통에 빠져든다. 불안한 세계를 기본값으로 살아온 사람에겐 타인에게서 비롯된 안온함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걸까. 불안하고 숨막히는 일상으로 돌아가기위해 수호는 연주를 배신한 걸까. 수호의 바람과 달리 연주는 그를 몰아 붙이지 않는다. 그의 삶을 흔들지 않고 제자리에 그대로 둔다. 그것만으로도 막다른 자리라는 걸 알기 때문일 것이다. 수호는 다른 이름으로 일했기 때문에 연주가 수호에 대해 아는 것은 모두 가짜다. 연주는 수호가 누군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가 자신을 인정하는데 가장 큰 몫을 했다.


"실은 제가 그 친구를 전혀 몰라요. 알고 보니 알았던 게 진짜 아는 게 아니더라고요."

"실은 저도 잘 몰라요. 그냥 어딘가에서 만났고 어쩌다 보니 심부름을 하게 됐어요."

pp.166-167


연주의 믿음을 잃었다고 생각한 수호는 병이 나 아버지의 가구점에 숨어들었다가 그곳을 찾은 민을 만난다. 일면식도 없었지만 민은 앓아누운 수호를 간호한다. 자신이 누군가를 모른 척했기 때문에 일어났던 일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민은 수호를 돌보면서 진짜의 삶을 느낀다. 자신의 삶을 벗어나 타인의 삶 속으로 숨고만 싶었던 민에게 진짜의 삶이 돌아온 것이다.


어쩌면 진심이란 단순한 것인지도 몰랐다. 살아 있는 것 같아. 민은 속으로 말했다. 사는 게 진짜 같고 아무것도 부끄럽지 않아, 너를 돌보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이.

p.157


폐허같은 이 세상에서 다른 삶을 외면하지 않는 일은 누구에게도 쉽지 않다. 구경꾼으로 지나치지 않고 누군가의 지난함을 들여다보는 일은 그 자체로 고통일 수 있기 때문이다. 민은 타인의 고통에 원인을 제공했다는 죄책감에 내부고발자가 돼버린 약혼자를 방관했었다. 자신들이 부도덕함이 드러내지 않기 위해 한 사람을 부정하는 일에 동참했던 것이다. 그 사람이 자신의 약혼자임에도. 그 일은 민에게 회복할 수 없는 상처가 됐다. 당시에 느끼지 못했던 죄책감이 그녀를 타인의 삶으로 몰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세상에 폐허는 흔하고 그 사실에 진지하게 공감하면서 지켜보는 부류는 별로 없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이곳을 찾아온 것일까. 적어도 배타심이나 적대감은 없는 구경꾼이란 걸 인정받고 싶었던가.

p.64


그의 행동은 정의가 아니라 비상식으로 받아들여졌다. 혹은 만들어진 허상, 아니면 유치한 과대망상. 그의 정의를 인정하면 자동으로 처하게 되는 상황, 그러니까 부도덕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그 상황은 모두에게 껄끄럽고도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옳은 것, 그리고 옳지 않은 것이 종우의 믿음만큼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도 아니었다.

pp.94-95


견고한 사회 체제는 그 사회 구조의 밑바닥을 떠받치는 사람들을 옥죄고 있다. 비정규직, 임차인, 장애인, 노인, 이들 모두는 빛나는 성채의 바깥에 존재한다. 그 벽은 점점 더 높고 단단해져서 이 쪽의 사람들이 넘어다 보기도 어려운 장소가 돼가고 있다. 바깥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테두리가 흩어지지 않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그 노력이 매번 보답을 바랄 수 없는데도 말이다.


서울은 거대한 유리 감옥 같았고 살아 있는 한 어디로도 가지 못하리란 예감은 점점 더 뚜렷하게 수호의 마음에 새겨졌다.

p.108


삶은 결국에는 모두 공평해지는가, 아플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지만 기쁠 때도 행복할 때도 있으니 공평한 걸까. 어떤 상처는 치유되지 않고 삶 전체를 바꾼다. 민은 "아픈 것도 없고 억울할 것도 없는" 삶이라는 환상을 버린다. 이전의 삶으로 돌아오라는 손길을 외면한다. 그런 삶을 믿기엔 "몸집이 너무 커져 버렸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아이가 어른이 되고 어른은 노인이 되는 동안 결핍은 보완되고 상처는 치유되는 것, 혹은 삶이란 둥근 테두리 안에서 부드럽게 합쳐지고 공평하게 섞이는 것이므로 아픈 것도 없고 억울할 것도 없는 것, 그런 환상이 가능할 까.

p.188


모르는 사람의 삶을 존중하는 일, 그들의 삶을 외면하지 않아야 함을 새기면서 민과 수호의 여름은 끝난다. 그들은 서로 눈맞춤을 하진 않았지만 둘 사이를 지나간 서늘한 바람으로 악수했다. 뜨겁고 습했던 그 여름 이후의 그들을 생각하니 마음 한 구석에 온기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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