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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19
프란츠 카프카 지음, 박환덕 옮김 / 범우사 / 199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카프카가 태워버리기를 원했던 유고를 고스란히 출판해낸 친구, 막스 브로트는 이 소설은 인간이 어떻게 해서도 들어갈 수 없는 '은총'과 신에 의한 인간운명의 지배,곧 심판과 은총에 관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내게 이 소설은 <심판>과 더불어 지배적 관료주의 사회에 대한 패러디로 읽힌다. <심판>에서 K는 자신이 무슨 죄로 인해 기소되었는지 조차 모른 채, 보이지 않는 관료주의의 말단 조직 속을 헤매다 결국 '개 같은'죽음을 맞는다. 그에게 있어 보이지 않는 그 조직에 접근하는 길은 수많은 절차와 우회로로 둘러싸인 채 그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관료제라는 것이 원래, 그 내부에 접근해 들어가면 갈수록 모두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체계자체의 명령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껍질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은가. 그 누구도 인간을 지배하는 그 무형의 힘의 소재와 책임에 대해서 답변할 수 없다. 그 무형의 체계들이 만들어내는 유형의 억압.

<심판>에서 주인공은 성 - 이는 보이지 않는 익명의 권력 덩어리를 부르는 이름에 다름아니다 - 에 의해 측량사로 임명되어 낯선 마을로 이주해오지만, 그건 빈틈없이 짜여진,그래서 그 견고한 복잡함에 의해 전체를 조망할 수 없게 되어버린 관료 조직 내부에서 발생한 작은 착오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그 누구의 '착오'도 아니다. 착오란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인격적 책임'의 존재를 전제 하지만, 도구화된 관료조직 체계에는 이미 그러한 책임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야기된 '사건'은 단지,그 조직체계의 불필요한 부산물일 뿐이다. 성으로 접근하기 위해 주인공이 겪어야 하는 수많은 관리들 역시 어떤 일에 대해서 책임질 수 있는 인격적 개체가 아니라,그 세분화된 조직의 한 통로일 뿐이다. 그들은 주인공의 소환과 무응답에 대해 입장을 표명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닌 것이다.

관료제는 그 체계 자체에 인위적 위엄과 권위를 부여함으로써만 지속된다. 그것은 관리라는 이름으로 지칭된 개인들에 강요된 존경에서부터, 복잡하게 꼬여있는 체계 자체에 대한 신격화에 이르기까지 이어진다. 무형의 체계는 그를통해 '함부로 지칭할 수 없는 것'으로 '감히 도전해서는 안되는'금기의 영역으로 고양되며, 이러한 체계의 신화화는 주인공이 그에 접근하기를 더욱더 질곡시키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권력은 그 익명성으로 나의 익명성을 파괴한다. 난 그 체계에게 속속들이 알려져 있으며, 파악되어 있다. 난 그것이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날 보고 있다!! 그건 마치 자신의 눈은 보여주지 않으면서 상대의 노출된 모습만을 바라보는 색안경의 위압감과 같다. 보이지 않는 권력의 체계 앞에서 개인이 느낄 수밖에 없는 무력감은 이러한 일방적 시선의 관계에서 기인한다. 그는 차단된 자신의 시선 앞에서 위축되고,잦아들은 자신이 거대한 시선 앞에서 피할 수 없이 발가벗겨져 있다는 것을 느낀다. 강한 불빛 아래 노출된 무대에 쓰러져 있는 벌거벗은 인간 한 마리,..

그래서,진정인들의 삶은 그것을 결정할 관료들의 수첩과 펜 끝 하나에 종속된다. 관료제의 그 형식적 어감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관료 일개인의 일시적 변덕이나 기분상태에 의해 결정되어 버리곤 한다. 사적 자의의 공공화랄까.

진정인이 자신의 조서를 꾸며줄 관료에게 호의적으로 보여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엄밀한 조사와 객관적 판단이라는 공공성의 명분 속에 침윤되어 있는 이러한 자의적 성격들은 이미 그 자체가 관료제의 본질을 이룬다. 엄정한 중립성과 객관적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려는 공공성의 요구에 의해 발생한 관료제는 루카치가 말했듯, '물신화된 객관성'일 뿐이다. 관료들은 자신들의 자의를 공공성이라는 이름으로 위엄있게 행한다.

카프카의 인물들은 말이 많다. 소설의 대부분은 인물들의 감정이나 행동을 묘사하는 것보다는 각 인물들의 대화에 할당되어 있다. 소설은 이처럼 그 누구의 입장이나 견해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삶의 비극적 다원성을 효과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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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의 아이들 - 21세기문화총서 1
더글러스 러시코프 지음, 김성기 외 옮김 / 민음사 / 1997년 8월
평점 :
절판


영화나 드라마, 게임과 스포츠 나아가 아이들 장난감에서 '인류 진화의 새로운 방향'을 읽어내는 저자의 시각은, 그가 직접 그들을 체험해보지 않고는 얻기 힘든 것이었다. 저자는 수많은 영화와 TV 프로를 보고, 오락과 놀이들을 즐기며, 아이들 장난감을 가지고 놀아보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뿐 아니라, 실제로 이러한 아이들의 문화야말로 인류가 진화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며, 새로운 질서를 담고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에겐 이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인류의 진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마치 주라기 시대의 공룡처럼 도태의 운명을 같이할 것이라고 믿는다.

여기서 알수있는 것은 저자는 인류가 계속 진화해 가고 있으며, 아이들의 문화속에 반영된 진화의 방향은 틀림없이 지금의 질서보다 '좋은'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 그의 세계관의 문제에 시비를 거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어쩌면 그가 탁월하게 분석해낸 구체적 문화들 지도 모르며, 그의 말대로 거기에 우리가 적응해나가야만 할 인류미래의 청사진이 숨겨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체적인 하나의 문화현상을 보고 내릴 수 있는 평가의 방향은 그가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비종말론적 낙관론자인 그에겐 '진짜 나이키'와 '오리지날'을 찾으려는 것이 사이버화된 세계 속에서도 현실계와의 연관성을 잃지 않으려는 새로운 문화의 긍정성으로 보이지만, 새로운 진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나같은 '비관주의자'에게 그것은 '물신화'의 변형된 현상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인류 역사상 세계에 대한 낙관론과 비관론은 다양한 형태로 등장했었다. 여기에,세계가 계속해서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해 나갈 것이라는 진화론과 이 세계엔 언젠가 종말이 도래할 것이라는 종말론이 더해져 복잡하게 조합을 이루는 세계관의 역사는 인류의 문화와 사상에 각인되어있다.(기독교적 세계관은 낙관적 종말론을 대표한다.)

인류는 발전적 진화의 산물이라는 진화론은 종말론을 설파하던 종교적 속박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켰다. 진화론은 종말에 대한 불안없이 마음껏 발전을 구가할 자유를 인간에게 던져주었고 계몽주의를 거쳐 비약적 '발전'을 이루는 세계관을 제공하였다. 이는 또한 진화에 적응한자와 그렇지 못한자를 구분하고, 적응한자가 살아남고 부적응자가 도태하는 서구적 발전관의 토대가 되었다. 진화한 서구인들은 미개한 종족들에게 인류 미래의 진화방향을 제시해주고 이끌 책임이 있었다! 거기에 이끌려오지 못한 자들에겐 도태라는 필연적 결과만이 남겨질 것이다.

다른 한편, 종말론은 이러한 발전의 신화에 대한 제동장치의 역할을 해왔다. 핵전쟁으로 인류전체가 절멸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인류의 생존을 위한 군축요구의 목소리를 낳게 했으며, 자연 생태계의 훼손이 가져올 종말의 예감이 생태계 보존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종류의 종말론은 낙관적 진화론에 근거, 세계를 '활용'하려는 자들에게는 눈엣 가시같은 방해물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들에겐 세계는 결코 멸망하지 않으며, 지금의 문제와 혼란들은 더 큰 차원의 진화의 하부질서에 다름아니라는 새로운 낙관적 진화론이 요구되었다.

내가 보기에 '가이아'와 '카오스' 이론은 이러한 요구에 부응해 생겨난 것이다. 그들은 생명체로서의 지구는 웬만한 오염이나 핵폭발 정도는 거뜬히 처리하는 자정능력을 통해 종말없는 미래를 보장할수 있으며, 혼란이란 더 큰 차원에서의 '질서'에 다름 아니라고 말한다.

저자가 강하게 믿고있는 비종말적 낙관론의 근거가 여기에 있다면 그가 말하는 '새로운 문화'는 어쩌면 모습을 바꾼 '발전의 신화'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것과 발전에의 신화가 어떻게 다정했던 한 공동체를 파괴시키는가를 우린 <오래된 미래>에 등장하는 마을의 사례에서 본다. 우리에게 초가집을 없애고 시멘트 집을 만들게 했던 발전이 그를 통해 얻을 것과 잃을 것에 대한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면, 그건 '발전된' 서구적 질서에 대한 맹목적 추종에 다름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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