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루이 알튀세르 지음, 권은미 옮김 / 돌베개 / 199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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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를 읽으며 아니 그의 자서전을 읽으며 그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대상은 과연 누구일까를 생각한다. 그는 소위 정신병자이다. 정신병으로 자기 아내를 교살한 그러한 인물이다. 그러한 그가 자기자신에 대한 그래서 그렇게 살수 밖에 없었던 자신에 대한 해명을 하고있다. 그렇다면 해명당하는 대상은 누구고 해명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정신병자인 알튀세르가 정신병자인 자신을 해명하는 것이라면 그건 결코 해명의 구실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병자인 알튀세르를 정상인인 그가 해명하고 있는 셈이 되는데, 그렇다면 그는 진정 정신병자가 아니지 않은가!

어쨋든 그는 그의 모든 생을 규정하고 있던 자신의 무의식과 그것으로 인해 드러났던 자신의 이중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존재하고 싶었다. 존재한다는 것은 사유함으로서라기 보다는 사유받음으로서 더 가능한 것이다. 생각되어진다는 것은 그가 이미 존재한다는 것이다. - 데카르트의 코기토 에르고 섬은 그런 의미에서 중복된 의미를 지닌다. 즉, 나는 나를 사유한다. 곧 나는 나에 의하여 사유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사유받는 내가 존재한다. 그것은 당연히 사유하는 나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는셈. 이렇게 되면 그것은 이중적 존재다. 한번의 사유로 두개의 주체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사유받는 주체로서의 나는 사유하는 나만큼의 활성을 능동성을 고정된 것을 변화시키는 능동성을 지니지는 못할 것이다. 사유받는 것은 사유받음 을 통해 규정되기에 그는 사유받는 그 상태로만 존재할 수 박에 없다. (사진이 우리에게 주는 돌이킬수 없음의 그 부담감!) -

그러나 알튀세르를 내가 사유한다는 것은 아니 그가 그러기를 바라고 있는 그의 글은 한편으로는 그를 거부하게도 한다. 유명한 사상가가 일생을 통해 전개한 자신의 논의들과 저작들을 그것의 근거와 이유를 그렇게 논의할 수 밖에 없었던 내적 필연성을 이야기 한다면 우리가 느끼는 당혹감은 이런 것이다. 마치 어떤 지식의 이데올로기적 의도에 의해 그것의 정당성이 단지 하나의 입장으로 축소되듯이 그가 벌인 수많은 문제점과 논쟁들이 바로 그러한 그의 내적 이유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우린 '그''를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의 논의'의 적실성과 정당성을 그 댓가로 치루고서이다. 알튀세르는 이로써 그의 전략을 달성시킨 셈이다. 그의 죽음과 더불어 그의 전 논의를 함께 가지고 가려는 그의 심술. 그를 그토록 도저한 고독속에 남겨두었던 세상에 대해 그가 마지막으로 던지는 복수. - 세상 사람들아, 너희들은 지금의 나를 있게한 나의 저작들을 읽지만 그것은 결국 너희들이 비난하는 지금의 나의 필연적인 일부분이자,결과이다!

섬뜩! 역시 글은 무언가 남기기 위해서 그리고 무언가 보이기 위해서 쓰는 것. 글쓰기는 날 보존하는 그래서 날 존재케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거기에 대한 포기도 이렇듯 담대할 수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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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여 침을 뱉어라
이효인 / 예건사 / 199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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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난, 충무로 판에서도, 정확하게 말하면 영화비평판에서도 운동권 출신과 비운동권 출신사이의 묘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과 - 그중에서 이효인은 전자를 대변하고, 정성일은 후자를 대변한다.- 그 역시, '한국적인 것'이라는 화두가 한국영화를 둘러싸고 논점이 되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더구나 놀라왔던 것은, 이효인 처럼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마구 하면서도, 글이되고 책이 될수 있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다.

작가는 1960년생으로, 이제 거의 40대가 다 되어가는 세대다. 우린 그의 생년월일로 그가 대학1-2학년 쯤에 광주를 맞이했고, 그것이 그의 삶에 결정적 전환을 안겨주었으리라는걸 직감한다. 그는 당시 운동권출신으로는 진귀하게도 영화운동에 일찍부터 발을들여, '서울영화집단' 에서 박광수, 김홍준 등과 활동하다.'서울 영상집단,', '민족영화연구소'등을 전전한 인물이다. '영화평론가' 라는 우릴 주눅들게 하는 '멋진' 표찰아래 그의 이름이, 한겨레 신문 등에 간혹 등장한 걸 우린 발견할 수 있었다. 영화판에 조금 관심이 있던 사람이라면, 그가 한때 한국영화에 대한 비평때문에, 영화판에선 이단자 쯤으로 취급되게 된 작은 사건의 장본인임도 기억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강수연, 안성기, 문성근, 정성일 등 내노라하는 인물들과 어울려 다니며 영화평론을 한다는 그의 생활은 우리 예상과는 다르게 '지긋지긋한' 것이었다. 아내와 아들, 그리고 체제 4명이 삐질삐질 비비며 사는 10평짜리 아파트와 티코 한대가 40대가 가까화가는 영화평론가 이효인의 집안꼴이었다. 그는 자신의 책-지금 이책-을 낸 출판사(영화언어)에 근무하며, 부정기적으로 영화평을 '팔아' 생활한다.

그의 글은 조악하다. 그는 자신의 문체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하다. 하고싶은 말만 하자는 식이다. 더우기 그의 글에는 친절하지 않은 세상에 대한 냉소와, 학위가 없어서 대학교수가 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피해의식이 걸러져 있지 않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그의 피해의식엔 칼이 숨겨져 있다. 난 너희가 유학가고 학위받는 동안, 대한민국에서 허덕이며 운동하고 있었다! 너희가 '진보와 운동의 이름으로' 수사적 문체와 화려한 학위를 팔아먹고 있을때, 난 고통스럽게 한국영화의 미래와 전망에 대해 고민하였다. 사실, 이런 식의 '칼달린' 피해의식은 왜곡되고 부정적 방식으로만 드러나기 십상이다. 그를 백안시하는 영화판의 인물들 (정성일 등)은 그의 이런 자의식을 지적하고 나선다. 이건 마치, 운동권들은 모두 결손가정의 자녀들이거나,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이문열 식의 중상과 같다. 90년대 들어 재생산 된 그것은 더욱 공격적 양상을 띤다. 그것봐, 운동권 출신들은 저래서 안된다니까. '적응'하지도 못하고 있잖아. '적응'과 '지탱'의 힘겨운 줄다리기. 그의 글은 그래서 잘 읽힌다.

이 책은 영화평론 모음집이 아니다. 이책은 이효인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 영화판,영화적 삶-'영화같은'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 밥먹고 살아가는'이라는 의미의 - 속에서 풀어나간다. 80년대를 힘겹게 살아남은 사람과 '영리하게 대처한 사람들' 간의 위화감을 고스란히 느끼며 90년대를 살아가는 그의 삶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그는 '전투성'을 잃지 않는다. 참 용하다. 40이 다 되도록 버티어내는 그의 견고함은 어디에 뿌릴두고 있을까. 죽을때까지 세상에 침을 뱉으며 살아갈 용기 있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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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2-07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놀랐어요.
특히 정성일에 대한 적개심을 숨기지 않는 부분이......
책을 읽고 1년 후인가, 경희대 졸업생인 친구의 결혼식에 갔더니
하객으로 참석했더군요.^^

 
그리스인들은 신화를 믿었는가 - 솔의신서 4
폴 벤느 / 솔출판사 / 199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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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제목 그대로 그리이스 인들은 신화를 믿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신화를 믿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단지,그리이스인들이 이러저러한 이유와 목적으로 신화를 믿었다'는 전언뿐이라면, 이 책은 그리이스 문화사나 역사 책의 한 종류정도로 치부되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리이스 인들이 신화를 믿었던 방식의 명백함을 인식론의 문제로 제기한다. 그러한 면에서 저자는 대상과 그것의 인식이라는 존재론적 인식론에 대한 시비를 거는 큰 부담감을 걸머지지 않을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나의 진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진실들'이 존재한다. 그 존재라는 것도 객관적 사물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사물들을 바라보는 인간의 프로그램 내에서만 존재한다. 하나의 신화가 허구적이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사람들이 신화를 바라보는 진실 프로그램에 따라 결정된다. 그들이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는다면, 신화는 그 진실 프로그램내에서 힘을 발휘하는 진실이 된다. 진실이란 우리가 결코 단념하지 않고 고수하는 의견들에 붙이는 명칭이다. 그것들을 단념하게 되면 우린 그것들이 틀렸다고 말하리라. 따라서, 신화의 진실은 허위/진리라는 대립법으로 규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이스 인들은 자신들의 진실 프로그램 내에서 신화를 믿었으며, 그것은 절대적인 기준에 의한 진리도 허위도 아니었다. 그리이스 인들의 신화에 대한 태도는 동시적이었다. 그들은 신화를 믿으면서 믿지 않는다. 그들은 신화를 믿으면서 그것을 이용하고,더 이상 이득이 없으면 믿기를 그친다. 서로 상이한 두 프로그램에 상이한 두 진실에 대응하는 것일뿐, 진실/허위의 모순된 대립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진 믿음의 양태들 역시 사실상 이처럼 동시적이며 모순적이다. 우린 영혼,귀신따위의 영적 존재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과학적 규명들을 믿으면서도, 그와는 상관없이 우리의 삶과 생각에 작용하는 영적 존재들의 영향력을 충분히 감지하고 있다. 이 두 믿음은 왜 대립하지 않고 공존하는가? 결국, 진리/허위의 대립만으로 인간의 모든 믿음 체계가 결정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믿음과 진실에 대한 흥미로운 주제들
누군가 어떤 말을 하면, 우린 의심쩍은 눈초리로 질문한다. 어디서 그걸 알았지요? 그가 하는 이야기가 그저, 그 자체로 그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선가 그가 읽었거나 들은 이야기임에 틀림없으리라는 생각, 따라서 그 이야기의 진실성을 그 출처의 권위성에서 찾으려는 의심들이 오늘날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는 프로그램이다. 권위서들을 인용하는 관습, 현학적인 주석을 덧붙임으로써 자신의 발언의 신빙성을 보장하려는 시도들은, 신학적 논쟁에서 유래한 것이다. 신학 논쟁의 모든 귀결점은 절대적 텍스트인 성서로 귀결될 수밖에 없기에, 최후의 결정적인 말은 언제나 성서에서 인용되었음을 밝혀야 했다. 이는, 어떤 절대적 텍스트와 대서사에 의존하여 진술의 진리성을 보장받으려 하는 근대적 학문태도의 기원이 되었다. 그러나, 성서와 같은 절대적 텍스트가 존재하는가. 그것 대신 기능하던 대서사들 - 인간의 본성,자유의 이념 따위- 의 권위 역시 붕괴되어진 지금엔,진실은 어디에 근거하는가.

고대인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가 직접 목격하였거나, 직접 목격한 사람으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뿐이다. 고대 희곡 그 어디에서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 자신이 허위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 거짓말을 하는 장면은 없다. 그의 진술이 과연,실제로 일어난 사실과 부합하느냐 하는 문제는 그의 믿음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이러한 믿음의 방식이 기독교에 오게되면, 진술자의 성실성의 문제로 변화하게 된다. 증인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성실한 양심의 소유자이므로, 사기와 위선을 행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한 말은 진실하다. 이때부터 진술의 진실성을 판단하는데 있어, 진술자의 성실성까지가 고려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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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단상
롤랑 바르트 / 문학과지성사 / 199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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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쓰여질 수 있는 이야기는 어떤 것일까. '글'이라고 하는 '내 것이 아닌'소유물. 글이 '내 것이 아닌'이유는 단지 그것의 존재가 나보다 앞서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글은 고분고분 나의 애무를 받아들이다가도 불쑥 난폭하게 나의 신원 증명을 요구해 와 날 당황하게 하기도 한다. 글은 익명성의 유혹적인 품안으로 나를 손짓하지만, 때론 난폭하게 나의 알몸을 드러내 버리기도 한다. 그것의 '까다로움'으로 인해, 그러나 그것의 뿌리치기 힘든 매혹으로 인해, 글은 날 혼란 속으로 빠뜨려버린다. 난 나의 이야기를 글로 쓸수없다! 글은 나의 이야기를 아니, 날 받아주지 않는다. 쓰여진 난, 어느새 낯선 공포가 되어 날 공격해 온다. 날 물어뜯고, 할퀴곤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찢어진 나의 조각 속에서 그러나, 난 날 찾을 수 없다. 그것은 찢어진 세상 만큼의 파편들, 떠돌아 다니던 세상들, 익명성의 조각들일뿐.

사랑한다고 아무리 외쳐도 사랑은 드러나지 않는다. 고통이라는 말은 도무지 고통스럽지 않다. 난 그 말로 나의 고통을 '이야기'할 수 없다. 프로이드가 자신의 꿈이야기를 할때 그는 이중적 담론의 질곡에 빠져 있었다. 자신의 꿈 이론의 설명을 위해선, 자신의 꿈의 모든 의미를 완전히 밝혀야 하는 반면, 그것이 어쩔수 없이 드러내 보여줄 자신의 은폐하고픈 욕망을 검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은 모든 글쓰기에도 마찬가지다. 난 날 이야기하지만 또한 그럼으로써 날 은폐시킨다. 글은 검열의 흔적이다.

바르트는 내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이러한 글쓰기의 강제로부터 자유로왔다. 그 자유는 글이 이미 하나의 기호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서 나오는 여유였다. 글은 하나의 표지이며, 표정이고 포즈이다. 카메라 앞에 서게될 때 우린 더 이상 자연스러운 나이기를 멈추고 하나의 포즈를 흉내내게 되듯이, 글을 쓴다는 것은 그것이 일으킬 의미 작용의 파문들에 대한 예견이자 기대인 것이다.

바르트는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있다. 그의 글에는 기호로서의 숙명성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는 기호의 초월성속으로 자신을 은폐하려 들거나, 그것의 자의성에 괴로와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기호로서의 글을 배열하여 그 기호를 통해 읽는 사람들이 얻게될 즐거움 - 그것도 일의적이지 않은 - 만을 말한다. 이러한 '표류적 글쓰기'를 통해 생산된 그의 글을 읽는 것은 즐겁다. 그건 그가 늘 '즐거운 이야기'만을 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것들이 즐겁게 쓰여졌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이 문장, 이 이야기, 이 단어를 즐겁게 읽고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즐겁게 쓰여졌기 때문이다.' 즐겁게 쓰여진 그의 글은, 놀랍게도 너무나 예민하게 우리 삶의 미세한 결들까지도 포착해낸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그의 글이 주는 '환희'는 고요하지만 깊게 울린다. 이것이 바르트 텍스트의 매력이다.

그의 글의 울림은 그의 예민한 감성이 자유롭게 활동하게 한 '자유로운 글쓰기'에서 기인한다. 그는 어떠한 언어의 규칙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그는 문법도,심지어는 없는 단어조차 그의 필요성을 위해서라면 만들어 내기까지 한다. 그의 텍스트는 텍스트의 순서라는 것이 없다. 짤막짤막하게 이루어진 그의 글들 어디서부터 읽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독자에게 달렸다. 이러한 자유로운 공간을 확보해놓은 후 그의 감성은 그것이 이끄는대로 마음껏 표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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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 창비신서 143
노마 필드 지음, 박이엽 옮김 / 창비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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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오카나와의 한 슈퍼마켓 주인이 행사장 국기 게양대에서 일장기를 끌어내려 태워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흥분한 우익들은 그의 가게에 불을 지르려 하였고, 테러에 대비,그는 경찰의 보호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인들은 일장기와 기미가요가 헌법상 규정된 정식 국기와 국가가 아니라는 것과 이 국기와 기미가요가 일본 젊은이들을 전쟁으로 몰아대 희생시켰던 천황주의 이데올로기의 산물임을 알았다.

1992년(?) 나가사키 시장이 '천황은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책임이 있다'고 발언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더구나 그때는 천황의 임종을 앞두고 전 일본에 '엄숙한 자제'의 분위기가 요구되던 때였다. 역시, 분개한 우익들은 시장에 대한 위협과 테러를 도모, 급기야 그를 저격하기에 이른다.

1993(?)년 오사카의 한 평범한 주부가 국가를 상대로 재판을 벌였다. 국가가 자위대 출신 남편의 위패를 그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신사'에 봉안하기로 결정한 때문이었다. 전후 일본은 전쟁에 참전했다 죽은 일본인들의 위패를 신사에 봉안, '국가와 천황을 위해 희생한 애국적 인물'로, '일본을 보호해주는 혼령'으로 신격화시켰다. 희생자 가족들은 그러한 국가 종교적 배려로 전쟁의 상처를 자위하고자 했고, 국가는 전쟁에 대한 국가적 책임을 개인적 충성심과 열정으로 환원시켜 버렸다. 이 사건으로 많은 일본인들은 종교적 외피를 쓰고 마을마다 하나씩 존재하는 '신사'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배후를 보았다.

전쟁을 둘러싼 피해와 가해의 논리는 늘 우릴 당혹케 한다. '베트남전의 피해자는 베트남이고 가해자는 미국이다'고 간단히 말할수 있는가. 우린 미국의 국가정치적 이데올로기의 희생물이 된 미국 젊은이들 역시 그 전쟁의 피해자였음을 안다. <플래툰>, <7월4일생> 등이 미국의 정신적 피해를 강조함으로써 베트남 침략을 정당화하는 불순한 영화들이라고? 좋다, 그렇다하더라도 여전히 찜찜함은 남는다. 죽어간 '인간'들의 '실존적 고통'은 그 대답에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의 직접적 피해자라는 입장이, 우리에게 전쟁의 그늘에 가려진 인간들의 '실존적 고통'을 있는 그대로 보기 힘들게한다. 우린 피해자였으며, 가해자인 일본은 오늘날 경제, 문화적으로 우릴 위협하고 있고, 남아있는 전쟁의 흔적들이 우릴 가해자에 대한 분노와 피해의식에 사로잡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칫, 일본'인'들이 감내하고 있는 전쟁의 휴유증에 대해, 그들의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삶과 투쟁들에 대해 간과하기 쉽다.

'국가'로서의 일본과 피해자로서의 '일본인'은 전쟁을 매개로 우리와 곤혹한 관계를 갖는다. 우린, 일본정부가 정신대 문제에 대한 국가적 배상을 회피하고 있음을 알지만, 일본내에서 정부에 반대해 외국인 지문날인 거부운동을 벌이는 일본인들도 안다. 자위대 해외파병을 계기로 군비를 늘리려는 정치인들과 일본의 비핵화운동을 위해 싸우는 일본인들...'국가'로서의 외교적 면면이 나의 실존적 면면을 대변하지 못하고, 우리 또한 '자랑스러운 한국인' 따위의 국가적 정체성을 수용하려 하지 않는 한, 우린 일의적으로 한 국가를 국민 모두를 포함한 국가일반으로 귀속시켜 감정적으로 판단해버릴수는 없다. 이 책은 그를 깨닫게 해준다.

전후 일본에 진출한 미국은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는 보수 정치가들과 합작, 자국의 이득을 취하고 있으며, 오키나와엔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재외 미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일본의 경제성장엔 전후세대들의 강제된 헌신과 피땀이 녹아있으며, 일본은 아직도 직장인 사망률이 가장 높은 국가중 하나다. 이 모든 사실들은 이 책에 소개된 세 사건과 세 인물들과 얽혀 드러난다. 저자는 섬세한 문체로 현재까지 드리워져 있는 일본사회의 모순과 갈등,그 속에서 투쟁하는 인간들을 찾아낸다. 전후 일본역사의 산물인 자신의 실존- 그녀는 미군과 일본여자 사이의 혼혈인이다- 이 어떻게 일본의 현재와 관계맺는지, 그리고, 그 사람들이 어떻게 싸우며 살아가고 있는지 담담히 이야기한다. 우린 그녀를 통해 일본이라는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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