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가 과거를 머리 속에 쑤셔넣고 사는 자신의 시대를 향해 '잊어버릴 수 있는 힘'을 갖도록 권고했다면, 그리하여 소화불량을 일으키고 있는 과거에 대한 병적인 기억에, 현재에서 새로운 것을 보는 대신에 과거의 되풀이만을 보는 저 늙어버린 정신에게 '망각'과 잊어버림의 미덕을, 그를통해 낡은 것 대신에 새로운 것에 대한 희망과 의지를 외쳤다면, 벤야민은 역사와 진보의 몰아쳐오는 바람 속에서 잊혀져버리고 있는 과거에 대해 '기억'하기를 요청한다.

과거는 지금 우리의 현재와 마찬가지로 고통으로 가득차 있던, 아직 구원되지 못한 고통의 시간이었다. 고통의 시간을 살고있는 우리가 언젠가 도래할 구원을 갈구하며 살아가고 있듯이, 지나가버린 과거의 시간 또한 구원의 도래를 갈구하며 지나갔던 현재 시간이었다. 지금 현재에, 저 과거에 살았던 이들이 갈구했던 그 미래의 시간을, 여전히 도래하지 않고있는 구원과 해방을 갈구하며 살고있는 우리에겐 저 과거의 시간을 기억하고 상기해야할 책임이 떠맡겨져있다. 해방된, 구원된 시간에 살아갈 후손을 꿈꾸었던 저 과거의 사람들에게 우리들, 바로 그들의 후손인 우리들은 그들의 바램과 갈구를 실현했어야 할 „이 땅에 기다려졌던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역사는, 소위 진보를 향해 뒤돌아보지 않고 나아가는 역사는 우리 자신이 바로 이 과거의 외침과 고통스러운 갈구로부터 나온 존재라는 것을 보지않게 만든다. 기억되지 않고 상기되지 않는 과거는 우리 눈 앞에서 폐허로 무너져내리고 우리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진보라고 하는 미래를 향해 떠밀려 간다. 과거의 한순간 한순간이 도래하지 않은 메시아를 갈구하던, 구원을 바라던 고통의 시간이었던 한, 그 모든 한순간 한순간은 우리에 의해 기억되고 상기되어야 할 요구를 가지고 있다. 바로 그것이 „과거의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저 비밀스런 묵계“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로 하여금 기억되기를 갈구하고 있던 저 과거는 도대체 우리에 의해 어떻게 기억되어야 하는가? 벤야민에 의하면 과거가 한때 우리에게 요청했었던 '기억되고자 하는 요구'는 그 과거가 '본래 어떠했던가'를 그 과거의 한순간 한순간들의 모습을 그대로 기록하고 기억하고자 함으로써 해소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역사주의의 방식을 채택해 과거를 역사의 진보라고 하는 목적론 하에서 현재의 상태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채택해서도 안된다. 그것은 지배자들이 자신의 현재를 과거의 목표로써 정당화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 속에서 과거는 현재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선 필요 불가결했던 이전 단계로 수단화된다. 이러한 역사주의는 역사를 '이야기'로 만듦으로써 역사에 인과적 사슬을 부여하고, 후대에 일어난 사건들을 이전의 사건들과 목적론적으로 연결시킨다. 이러한 역사주의는 결국 그 역사 서술에 있어서 현재의 승리자의 입장을 취한다. 곧, 현재의 시간, 승리자의 시간의 현재를 과거로부터 일관적이고 연속적인 결과로써 이해하고 서술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과거는 어떻게 기억되어야 하는가?

그에대한 벤야민의 대답을 우리는 그의 8번째 역사철학 테제에서 엿들을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지금의 시간이 과거 역사의 연속성 속에 있는 그것과의 일관성 속에 있는 시간이 아니라 그 역사적 연속성으로부터 벗어난 '예외적 상태'라는 것을 이야기 해주는 역사 개념에 도달해야만 한다. 그것은 역사를 진보의 연속성으로 보는 역사주의로부터 탈피하는 것을 의미한다. 저 진보라는 역사적 규범은 파시즘과 좌파가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를 하나의 연속적인 것으로, 곧 과거의 것이 현재의 것의 밑거름이 되고 현재는 그 과거보다 더 '진보적'이라고 하는 역사에 대한 표상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과거의 진정한 상에, 곧 과거에 대한 진정한 기억에 도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역사에 대한 이러한 표상 속에서 과거는 다만 현재를 위한 발판으로 수단시되기 때문이다. 진정한 과거에 대한 상은 어느 순간 섬광처럼 우리에게 스쳐 지나가는 순간적인 그림으로 기억된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던 우리에게 어느 순간, 저 과거의 한 장면의 의미가 비로소 분명해지는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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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역사를 직접적 생의 발양을 가로막고 현존하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이데올로기로 보았다. 소위 교양의 이름으로 강요되던 넘쳐나는 과거역사에 대한 지식과, 현존하는 것을 역사적 필연성이라는 목적론을 통해 정당화시키던 헤겔식의 목적론적 역사관은 니체에겐 현존하는 권력에 대한 냉소적 긍정으로 이어지는 숙명론을 낳는 시대의 질병이었다. 19 세기를 지배하던 역사의 진보와 목적에 대한 믿음은 현재의 사건과 삶들을 저 목적실현을 위한 수단이자 과정으로 격하시켜 버리고, 현재에 대한 비판을 무력화시킨다. 과거에 대한 강요된 기억으로서의 역사적 지식은 생의 직접성을 가로막고, 새로운 것과 창조적인 것을 .어차피 과거에 이미 있었던 것’이라는 냉소주의를 통해 부정하게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필요한 것은 이제 직접적 생에로의 진전을 가로막는 역사와 기억이 아니라, 삶에의 새로운 관점을 열어주며 우릴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비 역사와 망각이다. 망각하지 못하는, 그래서 철두철미 역사적이기만 한 인간은 마치 .잠을 자지 않도록 강요된 사람“이나, .되새김질을 통해서만 계속해서 되새김질을 통해서만 살아야 하는 짐승“ 과 같다. 역사는 삶에 기여해야지 삶이 역사의 제물이 되어서는 안된다. 지나친 역사는 오히려 삶을 해친다. 기억으로 자신을 괴롭히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짐승들이 보여주듯 아무런 기억없이 행복하게 사는 것은 가능하지만 망각이 없이 산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러한 점에서 니체는 망각을 우리의 에너지를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삶에로 집중하게 하는 적극적 능력이자 힘이라고 말한다. 

 

영화 <올드보이>의 오대수는 이러한 기억의 소화불량으로 고통받지 않는 건강한 망각의 인간이었다. 그에겐 술을 먹고 경찰서에 가고,행패와 패악을 부려도 그를 잊고, 다시 삶에 매진하게 하는 망각의 힘이 있었다. 그는 기억을 되새김질하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다른 많은 사람들에겐 결핍되어 있는 저 망각의 능력을 통해 늘 현재에, 삶에 충실할 수 있는 그런 인간이었다.

 

 이 망각의 힘은 그러나, 이유를 알지 못하던 고통스 15 년의 감금생활을 통해 점점 쇠퇴해간다. 그는 점점 이전의 망각의 힘을 잃고 기억의 노예로 변한다. 그는 자신의 과거의 삶들을 하나 하나 떠올리면서 누가 자신을 이렇게 증오했었는지 기억하기를 강요받는다. 그래도 떠오르지 않는 과거로 인해 그는 점점 자신의 과거에 대한, 자신의 기억에 대한 막연한 복수를 꿈꾸는 과거의 노예가 된다. 감금방에서 풀려난 후에도 오대수는 여전히 자신의 과거를, 자신의 기억을 쫓도록 강요된다. 15년간 먹었던 만두에 대한 기억을 통해, 그리고 치밀한 계획에 따라 그에게 주어지는 작은 실마리들을 통해 그는 자신의 과거를 하나,하나 쫓아다녀야 한다. 망각의 힘을 잃고 과거에 묶인 그는 이제 더 이상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괴물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이진우의 복수의 핵심이 있었다.

 

이진우에겐 오대수가 가지고 있던 망각의 힘이 없다. 그는 과거를 망각하지 못하고, 의 삶 전체는 과거의 기억으로, 그 과거에 대한 복수를 향해있다. 그의 현재는 다만, 저 과거를 위한, 기억의 복수를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리고 그 복수는 오대수가 가지고 있던, 그래서 그를 더욱 분노케하는 망각의 힘을 파괴시키고 그로 하여금 과거의 기억을 쫓, 나아가 그 기억으로 인해 스스로를 파괴시키도록 하는데 있었다. 오대수를 자신과 같은 기억의 노예가 되게 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 복수는 성공한다. 아니, 지나치게 승리해 버린다. 이미 고통스런 감금을 통해 기억과 복수의 괴물이 된 오대수에겐 또 하나의 기억, 그의 마지막 남은 복수에의 의지 그리고 이는 그나마 살아 남아있는 삶에의 의지이기도 한데 - 마저 파괴시키는 결정적인 기억이 부과된다. 자신의 딸과 성관계를 맺었다는 기억. 이제 오대수는 최면술로 그 기억을 지워버리고서야 살아나갈 수 있는 폐인이 되고, 철저하게 자신의 복수를 완수한 이진우는, 자신의 현재를 지탱시켜 주던 과거와 기억을 잃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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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가 말의 자리를 차지하고 등장하면서 부터 가장 뚜렷하게 변화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음성을 통해 울려나오는 말이 가질 수 밖에 없었던 말하는 자의 육체성이 문자에서는 지워져버리게 되었다는 거다. (음성의 육체성과 문자와의 관계에 대해선 본 컬럼의 „플라톤에서 HTML까지“ 참조)

말하는 자 스스로의 육체를 울려서 발화할 수 밖에 없는 말이 당연하게도 그 말의 발신자를 동시에 드러낼 수 밖에 없는데 반해, 문자에서는 그렇지 않다. 문자는, 그리고 그 문자로 쓰여진 텍스트는 말/음성과 필연적으로 결합하고 있었던 말화는 자의 육체성(그의 성별, 나이, 나아가 그의 육체와 목소리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화자에 대한 모든 정보들)을 그의 말로부터 걸러냄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이제 ‚말하는 사람’이 아닌 ‚말하는 사람이 하는 말’에만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도록 하였고, 이를통해 이제 말은 그 육체성을 상실한 채, 보관되고, 전달되고, 이동되며, 나아가 다양한 방식으로 처리될 수 있는 ‚정보’로 변환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날의 정보사회의 인프라 디지털 코드는 인류가 최초로 만들어 사용한 기초적 문자 속에서 이미 예견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말이 지니고 있었던 육체성이 완전히 사라져버리기 까지에는 아직 거쳐야 할 중간과정이 있었다. 구텐베르크에 의해 활자 인쇄술이 보편적으로 확산되기 이전에 인류는 문자를 직접 손으로 쓰는 수 밖에 없었다.

개개인에 의해 손으로 쓰여진 문자는, 말이 지니고 있던 화자의 육체성 만큼 개방적이고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 문자를 쓴 사람의 육체적 흔적을 지니고 있었다. 개인의 필체 혹은 필적이 그것이다. 누군가가 손을 움직여 써내려간 문자는, 말이 그러했던 것처럼 글쓴이의 개별성을 어쩔 수 없이 드러내 보여준다. 필적 감정을 통해 글쓴이의 신원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 나아가 그의 성격과 성장환경, 그가 그 글을 쓸 때의 심리상태 등까지도 간파해내는 범죄수사 기술은 글씨가 지니고 있는 이러한 육체성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직접 손으로 쓴 글씨가 지닌 육체성이 범인검거 등의 부정적 차원에서만 활용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여전히 타자기나 컴퓨터로 쓰여진 편지보다는 직접 손으로 써서 보낸 편지가 더 인간적이고 친밀감을 준다고 느낀다.

이메일이 보편적인 문자적 통신수단으로 등장한 오늘날에도 우린 연말연시가 되면, 카드에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쓴 짤막한 글(씨)들을 주고받는다. 그 길지않은 글씨들이 나의 육체성(진실성?)을 상대방에게 전달해주길 기대하면서. 컴퓨터나 타자기로 작성된 공적인 편지들에도 그 끝머리에 여전히 직접 손으로 휘갈겨 쓴 개인의 싸인이 첨부된다. 이를통해 그 편지는, 비록 비서에 의해 작성되었을지라도, 친필 싸인을 한 그 편지 발신인 ‚개인의 것’으로 간주된다. 이 모든 관행들은 컴퓨터를 통한 익명적 글쓰기에 익숙해진 오늘날에도 저 오래된 ‚글씨의 육체성’이 사회적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개인적 필체가 지니고 있던 육체성마저 규격화된 활자를 통해 말끔히 제거해버린 책이 보편적 매체로 등장하면서, 이제 애초에 말과 음성이, 이후엔 개인의 글씨가 지니고 있었던 육체성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져버린 듯하다. „활자화된 말“은 그야말로 ‚말하는 사람’과 ‚그의 말’을 최종적으로 분리시켰다. 활자화된 말은 그를통해 하나의 ‚사상’ 이나 ‚생각’, 아니면 ‚감정’등을 드러내지만 그것이 누구의 생각, 감정, 사상인가 하는 것은 다만, 활자로 찍혀진 그 책 저자의 이름을 통해서야 알 수 있다. 우리가 그 책 저자의 이름과 그의 간단한 약력 등을 확인하기 전에는 활자로 찍혀진 그 책의 내용은 사실상 우리에겐 익명적인 것에 다름 아니다. 동일한 내용이 이 저자가 아닌 다른 저자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쓰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이 감추어버리는 말하는 자의 육체성에 대한 향수 때문일까? 사람들은 책방이나 출판사 등에서 주최하는 ‚저자 싸인회’에 몰려가 그 저자가 직접 쓴, - 그리하여 그의 육체성의 최소한의 흔적을 보여주는 -, 글씨(기껏해야 그의 이름)를 책표지에 받아두고 싶어한다.

문자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잠재적 익명성은 또한 다른 정치적 문제와 관련되어 있기도 하다. 한 국가의 왕이나 임금이 자신이 다스리는 어떤 지역에 대해 특정한 정치적 결정을 내리고자 한다고 해보자. 그는 자신의 정치적 결정을 문자를 통해 작성하여 그것을 그 지역의 담당관리에게 나아가 그 지역 백성들에게 알리고 그들에게 그를 따를 것을 강제해야 한다. 그런데, 서한을 받아본 관리나 백성들은 그것이 정말 왕에 의해 쓰여진 것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확신하는가? 왕이 그 지역에 직접 행차해서 관리와 백성 앞에서 자신의 정치적 결정에 대해 포고한다면 전혀 발생하지 않을 문제가 여기에 등장한다. 바로 문자의 익명성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의 임금들은 ‚옥쇄’를, 유럽의 왕들은 ‚봉인 혹은 인증’(Siegel)을 사용했다. 이제 왕은 자신의 정치적 결정이 쓰여져 있는 편지에 도장을 찍거나, 문장을 통해 봉인함으로써 그 편지가 다름 아닌 최고 통치자에 의해 발신된 것임을 보증하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해선 왕의 옥쇄나 문장은 왕만이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어야만 했다. 만일 동일한 도장이나 문장을 다른 누군가가 도용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발신인의 신분확인을 위해 사용되었던 이러한 방법은 실효를 상실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나 유럽에서나 임금의 옥쇄나 문장은 그 어떤 왕가의 물품보다도 엄중히 관리되었던 거다. 어쨋든, 옥쇄나 봉인은 누군가가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특정한 징표를 통해, 문자가 갖는 익명성을 극복하고자 한 시도였다. 곧, 이전 시대의 말이나 손으로 쓴 글씨가 지니고 있던 육체성을, 왕이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옥쇄나 봉인을 통해 대체하고자 한 것이다. 임금의 옥쇄를 임금의 몸, 옥체처럼 취급했던 것은 이처럼, 저 옥쇄나 봉인이 말하는 이의 육체성과 그와 결합되어 있는 발신인의 진품성(Authenticity)을 보증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제는 우리의 친숙한 커뮤니케이션 매체가 되어버린 이메일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메일은 기본적으로 컴퓨터 자판을 통해 입력되는 문자로 쓰여진다. 누구의 손이 자판을 치건, 그가 분당 500타의 고수이건, 두 손가락의 독수리 타법 소유자건 상관없이, 모니터에 나타나는 문자는 모두 동일하다. 말하자면, 글쓰는 이, 곧 발신자의 육체성은 그렇게 입력된 문자 속에선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친구와 혹은 동료들과 일상적으로 소식을 주고받는 데는 사실 이것은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떨 때 우리는 심지어 한꺼번에 여러 사람에게 동일하게 입력된 이메일을 보내기도 하고, 컴퓨터의 간단한 복제 테크닉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이 입력해놓은 문자들을 복사해서 내 이름으로 보내지는 편지에 갖다 붙이기도 한다.

컴퓨터를 통한 사업과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그러나 이메일 문자가 가지고 있는 저 극단화된 익명성은 이제 새로운 문제로 떠오른다. 이메일을 통해 확인되지 않는 발신인의 진품성(Authenticity)의 문제가 그것이다. 얼마든지 ‚이름(아이디)’를 바꾸어가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메일을 보낼 수도 있고, (난 하루에도 수십통씩의 스팸메일을 받는다!), 원한다면 발신인의 신분을 얼마든지 가장할 수도 있으며, 그도 여의치않으면 그저 인터넷 상에서 잠적해버릴 수도 있는 이메일의 ‚무육체성’은 인터넷을 통한 금전거래의 가장 큰 허점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도입한 여러가지 방식이 위에서 말한 임금의 옥쇄나 문장의 기능방식과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특정한 컴퓨터에 단 한번만 발행함으로써 그 컴퓨터 소유자의 신분을 확인하게 해주는 소위 ‚디지털 인증서’ 는 독점적 소유를 통해 그 소유자의 신분을 확인하려던 옥쇄의 기능방식과 같다. 개개인에게 고유하게 부여된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주민등록번호는 한국사람 모두가 가지고 있지만, 내 번호는 나만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자가 억압해버린 말하는 이의 육체성은 이렇게 다른 모습을 띠고 귀환한다. 다만 그 모습이 달라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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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사실일 수 있을까?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신화는 뉴스나 제보와는 다르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들에 대한 다른 방식의 언어적 기록이지 않을까?

„번역과 일본의 근대“에서 언급된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주장은 이 생각의 연장선 속에 있다. 그가 신대에 쓰여있는 신화를 실제로 일어난 사실로 받아들이기 위해 사용하는 논증은 오늘날의 현대 언어철학적 관점에서 보아도 여전히 흥미롭다. 그에 의하면, 신대에 쓰여있는 신화들을 오늘날의 사람들이 일어날 수 없는 황당무계하고 불합리한 환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현재의 언어를 가지고 옛 언어를 해석해서 옛 일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대에 묘사되어 있는 신화를 그 일이 발생했었을 과거의 언어를 통해 바라본다면 그 신화들은 특정한 사실들을 묘사하고 있는 것에 다름아닌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라는 거다.

예를 들어보자. 비행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원시사회의 부족장이 굉음을 내며 날아가는 비행기를 처음 보았을 때 그 사태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그는 자신이 난생 처음 접한 그 경험을 자신이 알고 있는 단어를 통해 표현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예를들어 그는 그 비행기를 „소리를 지르며 날아가는 거대한 독수리“라고 말할 것이다. 나와 그 부족장은 모두 하늘 위로 스쳐 지나간 비행기를 함께 바라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비행기“라고 말하는데 반해, 그 부족장은 „독수리“라고 말한다. 나와 그가 눈 앞에서 마주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동일한 사태 곧, 하나의 동일한 실재임에도 불구하고, 나와 그는 그 동일한 사태를 서로 다른 언어적 표현을 통해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표현된 서로 다른 언어적 표현을 읽고 대하는 오늘날의 사람들은 그 두 개의 언어적 표현이 서로 다른 사태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곧, 나는 ‚비행기’에 대해 말하는데 반해, 저 부족장은 ‚독수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테레비젼을 처음 본 우리의 선조들은 아마도 그를 ‚조그만 사람들이 들어가 살고 있는 상자’라고 말했을 것이며, 전기불을 처음 켜 본 사람들은 그를 ‚도깨비 불’이라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우리와 우리의 선조들은 모두 동일한 하나의 대상 곧, 테레비젼과 전기불을 보고 다만 다르게 말했을 뿐이다.

공터에 „주차되어 있는 차들“을 보고, 아이는 „빠방이 코자자 한다“라고 말한다. 아이에게 아무 소리도 내지않고 죽은 듯 늘어서 있는 자동차들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단어는 „코잔다(잠자다)“ 였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의 세계 – 그것은 곧 아이가 습득한 언어들로 이루어진 세계에 다름 아니다. – 내에선 세계 내의 사태나 대상을 표현하는 적절한 단어였다.

이런 식으로 아이는 신호대기 중인 버스를, „버스가 힘들어서 쉬는“ 것으로, 주유하고 있는 차들을 „차들이 밥먹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며, 그것은 아이의 세계 속에서 실지로 일어나고 있는 사태들이다. 나아가 아이는 자신이 이해한 세계 내의 사태에 걸맞게 자신의 행동을 규제하기도 한다. 아이는 주차되어 있는 차들 옆을 지날 때에는 ‚차들의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서’ 목소리를 낯추며, 신호등 앞에서 ‚쉬고있는 버스’를 독촉하지도 않는다. 차들이 ‚잠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주차되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아이의 저런 행동을 나이브한 것이라 여긴다.

이제 이러한 예들을 우리가 애초에 제기한 신화의 문제와 관련시켜 생각해보자. 신화는 특정한 언어적 표현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속에선 우리의 일상적인 세계 이해와는 달리 인간이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라다니기도 하고, 구름과 다른 동물들로 변신하기도 하며, 마늘을 먹고 곰이 인간으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우린 그 속에서 표현된 사태들이 우리의 세계 이해에 비추어 볼때 ‚비현실적’이며 ‚비실재적’이라고 말한다. 그 표현들은 결코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실재나 세계 내의 사태일 수 없으며 다만 판타지나 꿈 속에서 일어난 것을 나이브하게 표현한 것일 뿐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위의 예에서 지적한 것처럼 신화에 사용된 언어적 표현들이 다만 우리가 마주하는 것과 동일한 실재나 세계의 사태들을 ‚다르게’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 신화를 만들어낸 고대의 인간들은, 자신들의 눈 앞에서 일어나는 사태들을 그들에게 주어져 있는 언어적 표현들을 통해 드러낸 것에 다름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를 ‚실재나 세계의 사태’가 아니라 그저 ‚판타지나 상상’을 묘사한 것이라 여기는 것은, 그들의 언어적 표현을 오늘날 우리의 관점에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신화의 언어적 표현들을 사실상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실재와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받아들인다면, 우린 그 언어적 표현들로부터 실재와 세계의 특정한 사태에 대한 진술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우리는 종종 그렇게 하기도 한다. 인류종말의 예언이 빗나가긴 했지만 저 위대한 예언자 노스트라 다무스의 예언들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그의 예언을 그 이후에 실지로 일어난 사건들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건 그가 자신의 예언에 사용한 언어적 표현들을 오늘날 우리의 언어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언어적 관점에서 받아들이려고 시도하는 해석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가 얼마전 일어난 쌍둥이 빌딩 테러사건을 다음과 같이 예연했다고 한다.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본문은 다음과 같다.

„요크(York)의 도시에 거대한 붕괴가 있어 쌍둥이 형제가 혼란에 의해 갈라진다. 요새는 아픔을 겪고 위대한 지도자는 굴복할 것이며, 큰 도시가 불탈 때 세번째 큰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우리는 위의 언어적 표현을 우리가 경험한 객관적 사태에 비추어 얼추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뉴욕 도시에 거대한 폭발로 인해 쌍둥이 빌딩이 무너진다. 사람들은 슬퍼하고 미 대통령(?)은 굴복할 것이며, 보복 폭격으로 다른 도시를 공격함으로써 삼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이제 이러한 해석방식을 우리가 알고있는 다른 신화들에도 적용해보자. 누가 아는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던 놀라운 발견을 우리가 하게 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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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언어는 때로는 그저 중립적인 소통의 매체이지만은 않다. 그것이 인류의 역사 속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관계 속에서 등장했을때 가해자의 언어와 피해자의 언어는 그 언어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문화적 '작용'을 갖는다.

2차 대전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은 지금도 독일어만 들으면 온 몸이 떨릴 정도의 아득한 섬뜩함을 체험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독일어는 단지 무엇인가를 소통시키는 중립적 소통매체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삶의 욕구를 위협하는 가해자와 그가 수반하는 공포와 심리적 압박감, 그리하여 증오와 혐오감까지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음성 복합체이다. 일제시대 한국어를 버리고 일본어만을 사용하기를 강요당한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일본어는 그저 한국어와는 다른 음성적 가치를 가진 다른 하나의 언어가 아니라 그 언어를 통해 다가왔었을 위협과 강요, 나아가 그에대한 증오와 환멸을 불러일으키는 감정적 울림이었을 것이다.

독일어를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우리에게도 2차대전 독일군의 유대인 학살을 다룬 영화에 등장하는 '독일어'의 울림은 그 자체로 가해자의 등장, 위협, 불안과 공포, 긴장과 긴박감을 일으키는 그 어떤 소리보다 더 효과적인 효과음에 다름 아니다. 우린 우리가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 독일군 병사의 '말 음성'을 통해 가해자로서의 독일의 폭력적이고 위협적인 '이미지'를 얻게되는 것이다. 반면 그 독일어의 '울림'을 위협과 긴장, 협박과 생존의 갈림길로 받아들이는 피해자들의 언어는 그 말을 우리가 이해하느냐 마느냐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안도와 발각되지 않았던 어떤 소속감, 공동의 위협 앞에서 존재하게 되는 피해자들 사이의 연대와 자기 희생 등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lifeisb가해자의 언어와 피해자의 언어가 갖는 이러한 대립적인 음성적 이미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준 장면을 우리는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에서 본다. 어린 아들과 함께 아우슈비츠의 포로 수용소로 끌려온 아버지는 포로 수용소의 비인간적이고 엄격한 생활 규칙을 설명해 주는 독일군 병사의 말을 아들을 공포에 빠뜨리지 않기위해 이탈리아어로 하나의 게임 규칙인 것처럼 번역(?)한다. 가차없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비인간적인 수용소의 가혹한 생활규칙을 설명하는 독일군 병사의 말은 그를통해 우승하는 자에게 전차를 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하나의 흥미진진한 집단게임의 규칙으로 번역된다. 이를통해 가해자의 언어인 독일군 병사의 폭력과 위협적인 음성 이미지 피해자의 언어인 이탈리아어의 인간적이며 유희적인 음성적 이미지로 변환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장면은 독일병사의 독일어나 로베르토의 이탈리아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그 두 언어의 음성적 이미지의 대립만으로도 충분히 효과를 발휘한다.

모든 외화를 자막 대신 더빙으로 처리하는 독일 티브이에서 이 영화를 보았던 나는 유감스럽게도 이런 서로 다른 음성적 울림이 낳는 이 장면의 효과를 체험할 수 없었다. 가해자 독일군 병사와는 다른 울림을 가졌어야 할 알베르토 역시 같은 독일어를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명장면은 저 서로 다른 언어의 음성적 울림의 대립의 효과를 잃고 다만 독일 병사의 제스쳐를 응용, 이를 다른 의미의 말로 변화시켜 내는 알베르토의 재치만이 부각되는 평범한 장면이 되어버렸다.

독일군과 연합군이 모두 함께 독일어로 이야기하고(„라이언 일병구하기“), 아우슈비츠의 폴란드 유대인 포로와 독일군 병사가 전부 독일어로 말하는(„쉰들러 리스트“), 심지어 전쟁 중인 일본군과 미군이 모두 독일어로 이야기하는(„펄 하버“) 영화를 떠올려보라. 모든 대사를 독일어로 더빙함으로써 이 영화들은 독일인들에게 이해되기는 하겠지만 서로 다른 언어의 음성적 울림이 주는 극적인 효과를 상실하는, 서투르게 번역된 번안시처럼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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