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가 원하는 것을 원해“. 니클라스 루만이 말하는 현대 사랑의 의미론의 정식이다. 어느 시대나 사랑이 있었다고 해서 어느 시대나 다 동일한 방식으로 사랑을 했었던 것은 아니다. 인간의 다양한 소통의 한 형태로서의 사랑은 그 시대가 가지고 있던 소통방식에 따라 늘 서로 다른 의미론을 지니고 있었다. 그 의미론은 상대의 어떤 행동이나 말을 나를 향한 사랑의 기호로 받아들일 것인지를 규정해 줄 뿐만 아니라, 저 복잡하고도 독특한 사랑이라는 소통관계가 각자의 삶 속에서 어떤 의미와 역할을 할 것인지까지도 규정해왔다. 서로 다른 시대의 사람들은 그 시대를 지배하는 사랑의 의미론에 따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고백해왔고, 그 사랑이라는 관계를 둘러싼 사태들을 다른 방식으로 대하고 받아들여 왔다. 이러한 서로 다른 사랑의 의미론들은 그 사랑이라는 소통에 참여하는 당사자들이 그 속에서 느끼는 감정과 그에대한 반응까지도 다르게 규정해왔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유부녀에 대한 사랑을 자살이라는 방식으로 해결할 수 밖에 없었던 젊은 베르테르는 오늘날과는 다른 사랑의 의미론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방의 사회적, 정치적 지위, 계급과 재산을 초월한 사랑이라는 저 열정과 낭만적 사랑의 의미론은, 루만에 의하면, 18세기 이후 커뮤니케이션의 개인화가 진행되면서 비로소 출현한 것이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개인의 사회적, 계급적 지위 등 눈에 보이는 사회적 기호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사회에선 사람들 사이의 소통은 복잡하고도 위계적인 질서와 규칙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그 시대엔 기사가 백작 부인을, 농노가 영주의 딸을, 평민이 귀족들을 대할 때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떤 말과 행동은 허용되고 어떤 건 금지되어 있는지, 어떤 제스쳐와 말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등이 사회의 모든 계급과 계층들 사이의 소통규칙으로 정식화되어 있었고, 이를통해 이들 사이의 원활한 소통- 하버마스가 말하는 이상적 소통이 아닌! - 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 속에서 만일 계급과 계층을 초월한 사랑이 발생한다면 그건 전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저  소통규칙을 일순간에 위기에 빠뜨릴 것이며, 따라서 이는 이 시대엔 좀처럼 생겨날 수 없는 것이었다.            

 

            18세기 말 이후 타인에 의해 인정받을 수 있는,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계급적, 사회적 지위 대신 개인들의 내적인 세계, 그의 교육과 교양수준, 내면의 깊이 등이 더 중요한 가치로 부상되기 시작하자, 이전의 소통적 규칙들만으로는 사람들 사이의 원활한 소통이 점점 힘들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이제 누군가에게 호감을 사려는 사람은 그 상대의 개인적 취향과 선호, 그의 세계관 및 가치, 윤리기준 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소통의 개인화와 그를통한 소통 방식의 변화가, 루만에 의하면, 소위 사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의 의미론을 낳게했던 사회적 원인이었다. 객관적으로 관찰수 있는 상대의 사회적 지위와 관련된 정보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그의 체험의 차원을 고려해야 함에 따라 이제 소통은 상대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외적 관찰이 아니라, 그의 내면과 개인적 체험에 대한 추측과 배려에 의존하게 된다. 이러한 개인화된 소통의 조건 속에서 이제 서로가 자신의 사적 체험의 세계에 상대가 함께 참여할 것을 요구하는 근대적 사랑의 의미론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나의 연인이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상태에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의 체험의 세계, 곧 나의 감정과 느낌을 배려하지 않고 행동한다면 이기적이며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낀다. , 우리는 사랑의 상대의 체험의 세계에 끊임없이 주위를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가 생일 선물로 무엇을 좋아할지, 어떤 영화를 보고 싶을지, 특정한 사건이나 대상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등 저 눈에 보이지 않는 상대의 내면은 내가 그와의 관계를 지속하고자 하는 한 늘 추측하고 탐색해야할 판도라의 상자다.

 

루만에 따르면, 이러한 근대적 사랑의 의미론은 이전 시대의 소통의 비 개연성 (Unwahrscheinlichkeit)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하기는 했지만 그 자체로 또한 해결하기 힘든 딜레마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이 현대의 사랑을 힘들고 모순적으로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첫째, 근대에 등장한 이 사랑의 소통은 눈에 보이지 않는 상대의 내적 체험의 세계에 기초하고 있다. 구체적인 삶의 상황들에 요구되는 소통 규칙들이 상대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분명하게 정식화되어 있던 이전시대와는 달리, 이제 서로의 내적 체험의 세계를 공유하고자 하는 두 명의 개인들은 다만 상대의 주관적 내면에 대한 추측에 기초해 자신의 행동방식을 결정해야만 한다.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내가 어떤 행동이나 말을 해야 할지가 전적으로 그 순간 상대의 내면상태가 어떠할 것인지에 대한 나의 추측과 판단에 달려있다. 만일 내가 상대의 체험세계를 잘못 추측했다면 나의 어떤 행동이나 말은 도리어 그를 화나게 하거나 기분 나쁘게 만들 수도 있다. 

 

  둘째, 눈에 보이지 않는 상대의 체험세계를 잘못 판단함으로써 생기는 소통의 위험성은 그러나, 그 상대의 체험 세계 자체를 소통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시도를 통해서 감소되지 않는다. „너가 원하는 것이 무언지 말해봐라고 말하는 상대는 그를통해 그가 그만큼 상대의 내적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그리하여 저 사랑의 의미론에 의하면, 상대를 제대로 사랑하지 않고 있었음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이 된다. 

 

세째,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기를 요구받은 사람 역시 모순적 상황에 빠져들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아무 생각없이 말함으로써 자신이 상대의 선호나 감정을 배려하지 않는 이기적 인간으로 보여지기를 원치 않는다. 상대가 싫어하는 SF영화를 내가 보고 싶다고 해서 함께 보자고 한다면 난 상대의 체험의 세계를 배려하지 않는 나쁜 사랑 소통의 상대자가 되는 것이다. 저 근대적 사랑의 의미론에 충실한 사람이라면 그리하여,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을 원해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 상대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향해 열어둠으로써 두 명의 파트너는 결과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도 상대가 원하는 것도 아닌 모두에게 불만족스런 제 삼의 결정을 하게되기 쉽다.  

 

 네째, 이러한 현대 사랑의 딜레마는 사랑 관계에 있어서의 관찰자와 행위자라는 역할 수행을 통해 더욱 심화된다. 오늘날의 사랑관계 속에서 우리는 상대방에게 그의 주관적 세계, 그 만의 내적 체험특수성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는 것을 관찰가능한 행위를 통해 보여주어야 한다. 이때 그 상대방은 자신의 내적 세계가 나에 의해 받아들여졌는지를 관찰하고 판정하는 관찰자가 된다. 사랑 관계 속에서 연인들은 서로 관찰가능한 행위를 통해 상대에게 서로의 내적 세계를 수용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또 상대의 행위를 보고 그를 판단하는 행위자이자 관찰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게 된다. 그런데, 루만에 의하면  행위와 관찰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한다. 그것은 행위자가 자신의 행위를 주로 상황의 조건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 보는 반면 관찰자는 그를 행위자 개인의 특성으로 귀속시키기 때문이다. 루만은 자동차 운전의 상황을 예로든다. 를 운전하고 있는 자는 운전하고 있는 상황의 조건들에 따라 움직이고 그 속에서 자신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차에 함께 타고있는 파트너는 그의 불만스러운 운전방식상황의 조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가 자신의 특수성 너무 빨리 혹은 천천히 가면 멀미를 한다거나 하는 - 을 고려하지 않고 행동하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이를통해 행위자의 입장에선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행했던 행위들이 관찰자 파트너에 의해선 그의 무관심과 배려없음,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음의 징표인 것으로 비난받게 되는 것이다

 

열정적인 사랑 말고는 그 아무 것도 필요없다라고 말하는 근대적 사랑의 의미론이, 일견 모순적으로 보이는, 이다지도 많은 사랑에 관한 지침서와 충고들, 소위 남자 혹은 여자의 본심에 관한 수 많은 보고서들, 나아가 연애 혹은 파트너 관계 전문 상담사들을 필요로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P.S : 이전에 올렸던 니클라스 루만 <열정으로서의 사랑>을 다시 정리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기독교적 전통에서 부부는 종교개혁 이전까지는 성스러운 대상이었다. 부부의 관계를 예수와 교회와의 관계와 비교하기도 했던 신약성서의 우화가 그를 보여준다. 부부의 평생가약은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때까지라는 결혼예식의 전형구를 통해 정의되었고 그러한 부부의 본래적 목적은 다만 아이를 낳는 것에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칸트가 1797년 출간한 도덕 형이상학„Die Metaphysik der Sitten“에서 전개하고 있는 부부에 대한 그의 생각이 얼마나 과격하고도 센세이셔널한 것이었는가가 분명해진다.  칸트는 이 책에서 부부에 대한 전통 기독교적 가르침을 명백하게 거부하고, 새로운, 당시의 관점에서 보자면 거의 혁명적인 부부관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칸트는 이미 오래전부터 종교적으로 확립되어왔던 부부 관계의 목적에 의문을 제기한다. 부부란 정말 다만 아이를 낳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인가? 이에대해 칸트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은 항상 자연의 목적일 수 있을지는 모른다...그러나 부부관계를 맺는 인간이 이 목적을 전제해야만 한다는 것은 이러한 인간의 관계 맺음의 정당성을 위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더 이상 아이를 낳지않게 된다면 부부관계는 곧바로 스스로 해체될 것이기 때문이다.“   "Kinder zu erzeugen und zu erzielen mag immer ein Zweck der Natur sein...aber dass der Mensch, der sich verehelicht, diesen Zweck sich vorsetzen müsse, wird zur Rechtmäßigkeit dieser seiner Verbindung nicht erfordert ; denn sonst würde, wenn das Kinderzeugen aufhört, die Ehe sich zugleich von sich selbst auflösen."[1]

 

기독교가 부부의 존립 목적을 아이의 산출로 국한시킨 이유는 분명하다. 바로 성이 갖고 있는 저 복잡한 문제들 때문이다. 충실한 기독교인이라면 비록 그들이 부부, 곧 서로 다른 성사이의 관계를 맺고 있다 하더라도 결코 육체적 쾌락에 빠져들어서는 안된다. 부부사이의 성교는 다만 후대를 잇기 위해서만 허용될 뿐이며, 오직 그것만이 부부의 목적이어야 했다. 

 

정언명법의 철학자인 칸트에게 이러한 종교적 가르침이 너무나 위선적으로 느껴졌던 것일까.  칸트는 부부를 성적인 것에 그 목적을 갖는 공동체의 하나로 본다.  성 공동체   Geschlechtsgemeinschaft (commercium sexuale)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성기관과Geschlechtsorgane 성적 능력들을 상호적으로 사용„wechselseitigen Gebrauch, den ein Mensch von eines anderen Geschlechtsorgane und Vermögen macht."[2]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동체이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인간들은 다른 인간의 성기를 사용하는가? 말할 것도 없이 그건 성적 쾌락과 향유를 위해서다. „한 성이 다른 성의 성기를 사용하는 자연적인 성기의 사용은 곧 향유이다.“ „der natürliche Gebrauch, den ein Geschlecht von den Geschlechtsorganen des anderen macht, ist ein Genuss“[3].

 

무척이나 흥미로운 사실은 칸트가 이러한 성 공동체에 서로 다른 성, 곧 이성관계 뿐 아니라, 동성관계, 나아가 인간과 동물과의 성적관계까지도 포함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에게 이 후자, 즉 동성 관계와 수간은 비자연스러운것으로 여겨지긴 하지만 말이다. „성 공동체에는...자연적인 (그를통해 자신과 동일한 존재를 산출해낼수 있는) 성기의 사용과  비 자연적 사용이 있다.  동일한 성을 가진 사람에 대한 성기의 사용이나 인간-종과는 다른 동물에 대한 성기의 사용은 비 자연적 성기의 사용이다.“ „Geschlechtsgemeinschaft ist ...entweder ein natürlicher (wodurch seines Gleichen erzeugt werden kann), oder unnatürlicher Gebrauch, und dieser entweder an einer Person eben desselben Geschlechts, oder einem Tiere von einer anderen als der Menschen-Gattungen“[4].이를 통해 우리는 이미 당시 칸트가  이미  동성적 성관계 뿐만 아니라 인간과 동물과의 성적관계도 알고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동성관계와 동물과의 성관계를 비 자연적 성기 사용이라고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기에서 칸트는 부부 관계라는 것이 다름아닌 성적 공동체임을,  말하자면 성적 향유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관계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를통해 부부는 칸트에 의해 서로 다른 성을 가진 두 사람 사이에, 그들의 성적 특성들을 평생동안 상호적으로  소유하기 위한 목적으로 맺어진 관계  "die Verbindung zweier Personen verschiedenen Geschlechts zum lebenswierigen wechselseitigen Besitz ihrer Geschlechtseigenschaften."[5] 로 정의된다.  

 

물론 칸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부관계는 종교적으로까지는 아니더라도 사회적인 책임을 갖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쾌락을 위한 목적으로 서로의 성적 특성들을 상호적으로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부부간의 계약은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성의 법칙에 의해 필연적인 계약이다. 다시말해 남자와 여자가 서로의 성적 특성에 따라 상호적으로 즐기려고 한다면 그들은 반드시 부부관계를 맺어야 하며, 이는 순수 이성의 정당한 법칙에 따라 필연적인 것이다.“ "Es ist nämlich, auch unter Voraussetzung der Lust zum wechselseitigen Gebrauch ihrer Geschlechtseigenschaften, der Ehevertrag kein beliebiger, sondern durchs Gesetz der Menschheit notwendiger Vertrag, d.i. wenn Mann und Weib einander ihren Geschlechteigenschaften nach wechselseitig genießen wollen, so müssen sie sich notwendig verehlichen, und dieses ist nach Rechtsgesetz der reinen Vernunft notwendig."[6]

부부가 더이상 신에 의해 맺어진, 그리하여 인간의 손으로는 해체되지 못할 그런 관계가 아니라 다만 성적 향유를 위해 만들어진 공동체라고 한다면,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부는 인간성의 법칙에 따라 필연적인 계약의 관계가 되어야 할까? 혹 칸트는 이 지점에서 다시 기독교적인 부부윤리에도 후퇴하는 것은 아닌가.

 

부부 계약에 관한 칸트의 요구는 그러나 신에 의해 맺어진 부부의 불가침성이라는 종교적 가르침에 기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침해해선 안될 인간의 개체성이라는 칸트의 이념으로 부터 도출되어 나온 결론이며, 바로 이것이 칸트의 부부에 대한 생각을 종교적 윤리와 구별시켜 주는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다른 이의 성기를 사용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사물화가 일어나는데, 이는 상호적인 사용과 소유를 보장하는 계약을 통해서만 상쇄될 수 있는 것이다. 칸트는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조금은 패티시즘적으로 들리는 논증을 통해 펼쳐나간다. 

 

칸트는 우리에게 성적 쾌락을 가져다 주는 대상이 사실상 한 명의 완전한 개인이 아니라 다만 그가 가지고 있는 성기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이는 위의 성공동체에 대한 정의에서도 드러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성적인 향유를 목적으로 하는 성 행위시에 우리는 성 행위 파트너의 성기만을 사용하는 것이다. 거꾸로 보자면 여기서 파트너의 성적 쾌락을 위해 자신의 성기를 제공하는 개인은 이를통해 자신 육체의 한부분으로 환원되어 사물화되는 것이다. „한 성이 다른 성의 성기를 사용하는 자연적인 성기의 사용은 곧 향유이다.  이때 한 명은 다른 이에게 자신 육체의 한 부분을 제공한다. 이 행위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사물로 만들게 되는데, 이는 자신의 개인에 대한 인간성의 권리와 모순을 일으킨다. „ „Der natürliche Gebrauch, den ein Geschlecht von den Geschlechtsorganen des anderen macht, ist ein Genuss, zu dem sich ein Teil dem anderen hingibt. In diesem Akt macht sich ein Mensch selbst zur Sache, welches dem Rechte der Menschheit an seiner eigenen Person widerstreitet.“[7]  

 

칸트에 의하면 성행위에 있어서의 이러한 인간의 사물화, 그를통해 일어나는 개체성의 훼손은 다음과 같은 조건을 통해서만 보상되고 상쇄될 수 있다. , „한 개인이 다른 개인에 의해서 사물처럼 소유되고, 바로 이 개인이 다시금 그 상대를 소유함을 통해. 이렇게 함으로써만 개인은 다시 자기 자신을 되찾고 그의 개체성은 회복되게 된다.“  "dass, indem die eine Person von der anderen, gleich als Sache, erworben wird, diese gegenseitig wiederum jene erwerbe ; denn so gewinnt sie wiederum sich selbst und stellt ihre Persönlichkeit wieder her."[8]  

 

성적 향유를 위한 성 행위란 자신 육체의 일부를 상대에게 제공하고, 자신은 또한 상대의 그것을 제공받는 상호적인 성기 소유의 과정이다. 바로 이러한 상호적이고 평등한 소유만이 성행위 시 발생하는 인간의 패티시즘적인 사물화를 극복하고 그를통해 손상된 인간성과 개인의 개체성을 회복하게 하는 가장 결정적 조건인 것이다. 부부계약은 바로 이러한 상호성과 평등성을 사회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상대의 향유를 위해 한 성이 자신을 제공하고 제공받는 행위는 부부라고 하는 조건하에서만 유일하게 허용될 수 있는 것이며, 나아가 바로 이 조건하에서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folglich ist die Hingebung und Annehmung eines Geschlechts zum Genuss des andern nicht allein unter der Bedingung der Ehe zulässig, sondern auch allein unter derselben möglich.“[9]    

 

 

 



[1] I. Kant : Die Metaphysik der Sitte, § 24.

[2] I. Kant : Die Metaphysik der Sitte, § 24.

[3]  I. Kant : Die Metaphysik der Sitte, § 25.

[4] I. Kant : Die Metaphysik der Sitte, § 24.

[5] I. Kant : Die Metaphysik der Sitte, § 24.

[6]  I. Kant : Die Metaphysik der Sitte, § 24.

[7]  I. Kant : Die Metaphysik der Sitte, § 25.

[8]  I. Kant : Die Metaphysik der Sitte, § 25.

[9] I. Kant : Die Metaphysik der Sitte, § 2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칼 마르크스의 위대한 점은 그가 저 필연의 영역, 경제에 대해 비판을 시도했다는 점, 그것도 필연의 영역에 대한 힘없는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자본의 필연적 법칙 그 자체를 끝까지 밀어붙여 결국 저 자본의 운동이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의 붕괴에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밝히는 방식의 비판을 시도했다는데에 있다.

 먹고 사는 문제로서의 경제의 영역이, 그 어떤 비판으로부터 면제받고 있는 오늘날 마르크스의 '비판'의 방법은 그 어느때보다 더 음미해 볼 만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프랑프르트에 있던 발터 벤야민 아키브가 베를린에 있는 예술 아카데미로 옮겨오고 난 후 처음으로 5월 30일 월요일 베를린 예술 아카데미에선 발터 벤야민 아키브가 처음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거기엔 발터 벤야민이 프랑스로 떠나면서 베를린에 남겨두어야 했던, 그리하여 1933년 게스탸포에 의해 압수된 원고들과 1945년 베를린에 진주한 소련군에 의해 모스크바로 이송되었다가 이후 1957년 동 베를린에 보관되어오던 원고들, 그리고 1940년 벤야민이 파리에서 스페인 국경을 넘을때까지 지니고 있다가 이후 그가 죽은 이후 우여곡절 끝에 아도르노에게 도달된 원고들, 또한 아래에서 소개한 바 있는, 1940년 조지 바타이유에 의해 파리 국립도서관에 숨겨져 있다가 전후 부분적으로 발견된 원고와 이후 1981년 이탈리아 철학자 죠르지오 아감벤에 의해 발견된 원고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벤야민 아키브에 근거해 베를린 예술 아카데미는 2007년부터 매년 두권씩 총 20 권에 해당되는 벤야민 전집 Kritische Gesamtausgabe를 발간할 계획을 발표하였다. 새로 발간되는 벤야민 전집 역시 Shurmap 출판사에서 출간되며 Christoph Gödde,와 Henri Lonitz 가 편집과 발간을 맡게된다. 새롭게 발간될 이 벤야민 전집은 이전의 Rolf Tiedemann과 Hermann Schweppenhaeuser에 의해 발간된 벤야민 선집 Gesammelte Schriften 과는 달리 판형을 확대하고,모든 페이지마다 벤야민이 손으로 쓰고 또 고쳐쓴 수고를 직접 함께 인쇄함으로써 벤야민 원고의 육체적 흔적을 살펴볼 수 있게 한다고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독일에 사는 외국인으로서 내게 독일어는 나를 전 세계의 사람들과 연결시켜 주는 ‘만국 통용어’다.

여기서 나는 중국, 일본, 베트남, 대만 등에서 온 아시아인은 물론, 프랑스, 영국, 스페인, 헝가리 등 유럽인, 러시아, 터키, 그리스, 이집트, 수단, 모로코, 페루 등 그야말로 전 세계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과 모두 독일어로 대화를 나눈다.

그러다 보니 독일어는, 어쩌면 죽을 때까지 말 한 마디 나누어보지 못했을 이 다양한 나라의 많은 사람들과 서로 통할 수 있게 해주는 마법의 언어 같다.

나처럼 학업을 위해서건, 일 때문에 머무르는 직업인이건 타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방인이라는 자의식을 통해 같은 처지의 다른 외국인들에 대해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동류의식을 갖는다. 이러한 동류의식은 그러나 그들 사이의 서로 다른 피부색,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의 이질성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 그저 막연한 동정으로만 머물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이질성과 차이를 넘어 서로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게 해주는 공통의 언어가 있을 때 비로소 동류의식은 하나의 구체적인 연대 감정으로 발전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공통의 언어는 그들을 이방인으로 만드는 바로 그 타국의 언어다.

언어가, 한 언어를 사용하는 언어 공동체를 그와는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과 구별시킴으로써 배타적 소속감을 강화시키는 매체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로 인해 언어는 인종과 종교의 차이와 더불어 서로 다른 문화권 사이의 갈등과 대립을 촉발하고 유지시키는 조건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언어는 또한 문화 간 대화와 이해의 매체로 기능하기도 한다. 반목하고 경쟁하며 눈을 흘길지도 몰랐을 서로 다른 나라 사람들이, 태어나 자라난 곳의 모국어가 아니라 현재 살고 있는 나라의 언어를 통해 국경을 초월하는 연대감을 경험한다는 것이 좋은 예다. 여기서 언어는 배타와 차이가 아니라 결속과 통합의 역할을 한다.

케밥 가게의 맘 좋은 터키 아저씨는 독일인에겐 어림도 없는 덤을 아시아인에게 주기도 하고, 베트남 상점 아줌마는 외국인에겐 물건값을 깎아주기도 한다.

주말이면 집 앞 놀이터에선 불가리아의 빅키와 중국아이 올리버, 러시아 출신의 자미르, 포르투갈 태생인 아드리아나, 팔레스타인의 모하메드가 검은 머리칼을 가진 우리 아이들과 평화롭고 사이좋게 뛰논다. 집에선 각자 모국어를 쓰는 저 아이들을 서로 어울려 놀 수 있게 하는 것도 저 마법의 언어 독일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BRINY 2005-05-15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저에게는 마법의 언어가 일본어라서 그걸 못봐주는 인간들도 있지만, 세계 곳곳에 일본어 좀 하는 사람들이 꼭 있더라구요.

김남시 2005-05-15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어와 관련해서 저도 재미있는 경험이 하나 있습니다. 예전 군대시절 청주 근교의 한 허름한 구멍가게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었는데, 군인으로 보이는 미국인들이 그 가게에 들어왔었지요. 재미있었던 건, 그 중 한 명이 영어로 가게 주인 아저씨에게 무언가를 물어보자 50대 중반의 그 가게 아저씨는, 전혀 꺼리낌없이, 거기에 "일본어"로 대답하더군요!! 그 아저씨에게 자신을 다른 외국인들과 통하게 해주는 언어는 바로 "일본어" 였던 거지요. 그 아저씨에겐 자신이 알고있는 유일한 '외국어'인 일본어가 모국인이 아닌 '외국인' 모두와 통할 수 있게 해주는 '마법의 통로'로 여겨졌던 것이지요.
황당해 하던 그 미국인들은 아저씨의 유창한 대답을 듣고는 곧 자리를 뜨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