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시엥레짐의 중세적 유산과 깊이 연루되어 있던 형벌 및 처형제도를 인간적이고 근대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길로틴에 의해 제안된 길로틴이 갖는 문화적, 정치적, 나아가 심리적 의미를 탁월하게 분석하고 있는 책.

몸둥이를 찟어 죽이거나, 형리에 의해 도끼나 칼로 목이 내려치거나, 화형시키거나, 아니면 목을 매달아 죽였던 이전 시대의 형벌들이, 푸코가 지적했듯이, 형리와 사형수 간의 ‚싸움’의 장으로, 그 속에서 사형수라는 개인의 개성과 삶을 향한 충동과 혹은 그에 대한 신의 은총등이 드러날수 밖에 없었던 개별성의 발현의 장으로 받아들여졌다면, 이제 단 몇초 만에 몸뚱이와 머리를 잘라내 버리는 ‚기계’ 길로틴은, 사형수의 개체성을 사형이라는 국가적 메카니즘의 작동 속에서 하나의 형법적 기능으로 만들어버렸다.

살이 찟기고, 피가튀고, 살갗이 불태워지거나 벗겨지는 카니발적 광경에 열광했던 중세의 유럽인들은 이제, 권력의 정치적 상징이 된 길로틴을 통해 익명성으로 화해버리는 혁명의 반역자들을 하나의 일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내게 관심을 끄는 것은 길로틴이 지니고 있던 정치적 성격보다 오히려 공개 처형이 보여주고 있었던 미학적 효과다.

죄를 속죄하게 하는 육체적 고통과 그를 통해 도달하게 되는 죽음이 극적으로 몇시간 내에 펼쳐저보여지는 무대로서의 공개처형은, 당연하게도 죄의 댓가에 대한 본보기로서의 교육적 효과를 노리고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길로틴을 통해 단 몇초만에 '끝나'버리는 공개처향은 본보기로서의 공개처향이라는 제도 자체의 유의성을 상실시키고, 급기야 비공개처형 제도를 불러일으키는 발단이 되었다.

육체에 대한 즉물적, 카니발적, 패티시즘적 집착은 유럽에서 육체에 대한 이들의 태도와 관련이 있다. 찟기고, 불태우고, 자르고, 벗기고, 뚫고, 동강내는 육체의 이미지가 이들에게는 결코 낯설지 않을 것이다. 다른 글(육체와 신성)에서도 지적했듯이, 유럽인들은 이미 이러한 육체적 패티시즘에 지극히 익숙해있었다.  

조선에서의 공개처형은 어떻게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 장면은 어떻게 연출되고,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그것은 어떤 종교적 혹은 전통적 믿음과 결부되어 있으며, 어떻게 그 믿음을 강화 혹은 변화시켰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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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의 논리는 대화의 논리와 구분되어야 한다. 분석이 대상의 표면적 외관을 뚫고 들어가

 그 대상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심층과 무의식 까지를 밝혀내어야 하는 것이라면,

 구체적인 상대와의 대화나 논쟁은, 그의 진술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감추어진 이해관계,

 무의식적 욕구와 권력에의 의지를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와 더불어 '강제없는,

 자발적 동의'에 도달하는 걸 목표로 삼아야 한다.

 

우리가 우리와 대화나 논쟁을 벌이는 상대의 진술 Mitteilung의 배후를, 그 진술의 외면 속에

 감추어져 있을 무의식적 욕구를, 권력에의 의지와 계급적 이해 관계를 '들여다보려'는 순간,

상대는 더 이상 우리에게 대화의 상대자가 아니라, 우리가 분석하는 대상 Objekt 으로

사물화되고, 낯설어 entfremdet 진다.

 

Sloterdijk 이 지적하듯, 그를통해 낯설고 사물화된 상대와의 논쟁은 더 이상 계몽과 비판의

본래적 이상이었던 '자발적 동의'의 이념을 좇지 않는다. 무의식적 욕망, 계급적 혹은 

물질적 대립, 맹목적인 권력에의 의지로 환원되어버린 상대와의 논쟁은 이제,

더 이상 언어적 논쟁과 대화를 통해선 해소될 수 없는 욕망과 이해 관계와 힘의 대립으로

변하며,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정치적 선택이 중요한 것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대화와 비판, 논쟁의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선,

상대가 자신의 진술로 제기 mitteilen 하지 않은 모든 진술 외적 의미들 Signifikation 을 

상대의 제기된 '진술'과 구분할 줄 아는 날카로운 참을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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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푸트니크의 연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정환 옮김 / 자유문학사 / 199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에서 부쳤던 책들이 도착, 읽었다. 무라까미 하루끼의 최근 소설 스푸트니크의 연인과 호머의 오디세이아, 68년 격동의 세계사를 정리한 1968년, 책 그림책이 그것이다.

   하루끼 소설이 내게 갖는 매력은 여전하지만, 웬지 그의 소설이 기반하고 있는 저 상류층 생활의 지반이 날 꺼림직하게 한다. 분노, 울분, 저주, 앙갚음 등을 알지 못하는 하루끼 소설의 주인공들은 그래서 깔끔하고, 가볍게 삶을 살며 예민한 감성이 느낄 수 있는 미세한 감정과 삶의 결들을 호소한다.

그 깔끔함, 그 낯선 그러나 낯익은 거리감, 그로부터 생겨나는 삶에 대한 관조적 태도, 감정에 따라 살면서도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포자기 하지는 않는 저 주인공들의 일상적 견고함, 칸트와 혁명을 비틀즈나 스파게티처럼 들먹일 수 있는 자유로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아무런 장애도 없는 그들의 경제적 기반, 그 특권감...

기묘한 사랑과 충동적 감정, 무해한 방황과 멋진 여행 등으로 이루어져있는 그들의 삶엔, 노동의 피로, 권력으로부터의 피해, 가진 자에 대한 박탈감, 생존을 위한 노고, 그로부터 생겨날 피해의식 등이 깔끔히 씻겨져있다. 그의 소설이 내 속에서 울리는 감흥엔 그래서 무언가 꺼림직한 것이 있다. 

  

나의 이러한 생각은 어쩌면 하루끼 다음에 읽었던 {1968년}으로부터 기인한 것일 확률이 크다. 왜 억압과 차별, 저항과 진압의 이야기들은 언제나 나를 흥분시키는 것일까. 1968년 전 세계적으로 이루어졌던, 단지 지리적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미국의 베트남 침공을 통해 불러내어진 저 전세계적 혁명의 분위기를 이 책은 연대기적으로, 그러나 생생하게,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그려내고 있다.

베트남에 퍼부었던 미국의 저 엄청난 폭탄들만큼이나 전 세계에서 흑인과 여성, 학생과 노동자, 민중들을 향해 내리꽂혔던 지배와 학정의 치밀한 잔인함, 그에 대한 저항, 폭력적인 진압, 이데올로기, 죽임... 세계가 아직 미래를 향해 꿈틀거리고 있을 때, 그들이 아직 혁명의 희망을 가지고 있을 때, 그리고 그 혁명을 그들의 삶과 투쟁 속에서 실현시키려 하고 있을 때...

"우리가 우리의 집단적 자아를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전망에 쏟아 부을 수 있었을 때 우리는 행복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세계의 억압받는 사람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을 위해 그럴 수 있었을 때 말이다. 우리는 그러한 희망을 통해 무엇을 먼저 해야 할 것인지를 결정했다. 우리의 행복은 달콤한 행복이나 황홀경이 아니라 인간의 대의를 향상시킬 수 있다면 위험을 무릅쓰거나 자기 자신의 삶도 희생할 수 있는 행복이다."

  역사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고 느꼈을 때 난 기뻤는가? 난 안다. 집회와 가두 투쟁의 무질서, 혼잡스러움, 제어되지 않는 무분별과 발산되는 유치함을. 그 속에서 난 피로했으며, 이것이 진정 혁명의 진실인가하고 회의했었다. 그럼에도 내겐 저 무질서, 저 피로함, 저 유치함, 저 열정이 보여주는 피 빛 혼란에 두근거리는 가슴이 남아있다. 베트남 민중들에게, 시위대에게, 학생들에게 내리쳐졌던 총탄과 최루탄, 폭력적 진압의 섬뜩함에 치를 떠는 분노가 남아있다.

이 '낡은 감정'들은 도대체 무엇을 어디를 향해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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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2-07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무질서, 저 피로함, 저 유치함, 저 열정이 보여주는 핏빛 혼란에
두근거리는 가슴이 남아있다.

저도요.


딸기 2006-05-25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헷 남시오빠다아아아아

김남시 2006-05-25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하하하, 그래 나 다아아아아!!!

딸기 2006-05-27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빠 방가방가 *^^*
언제 함 안 오나요, 서울엔?
 

1927 2 1 "무릎 위에 큰 가방을 올려놓은 채 울면서 어두워져 가는 거리를 지나 역으로 향했다"라는 문장으로 끝나는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를 읽은 독자들은, 그렇게 모스크바에서 베를린으로 돌아온 벤야민의 이후의 삶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궁금해 할 지도 모른다. 근 석달간의 일기를 통해 모스크바에서의 벤야민의 하루 하루를 쫓고, 그의 생각과 감정과 생활을 들여다 볼 수 있었던 우리들에게, 저 2월 1일 이후 벤야민의 삶은, 여전히 저 모든 숫자와 사실과 연표 속에서 추상적이고, 어두우며, 지리한 익명적 기간으로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선, 시간과 능력이 허락한다면 다음 글에서도, 나는 모스크바에서 보낸 석달 이후의 벤야민의 삶을 저 어둡고 지리한 숫자와 연표들로부터 발굴해내어, 그를 우리의 하루 하루의 삶처럼, 그리고 <모스크바 일기>에서의 그것처럼, 살아있고, 느끼며, 생각하는 인간의 삶으로 만들어 보려고 시도하려 한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벤야민이 한동안 독감에 걸려 앓았어야 했다는 것을, <모스크바 일기>를 읽은 독자들이라면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건, 벤야민이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모스크바를 떠나기 전날 추위에 떨며 구경했던 수도원에서 얻은 것이었다.  그 사이에 그는 베를린에 도착한,  모스크바에서 떠나기 전 부쳤던 짐을 받았을 것이다. 거기엔 그가 모스크바 시내를, 떠듬 떠듬, 실수와 추위와 슬픔에 차서 돌아다니다가 구입했던 장난감, 우편엽서, 그리고 검은 칠을 한 상자,  그리고 어쩌면 아샤의 친구, 벤야민이 호의적으로 보았던 그녀 - 이름이 뭐였더라? - 에게 받았던 작은 칼도 들어 있었을 것이다.  이 모두가 저 먼 러시아 대륙을 거쳐 다 제대로 도착했을까. 어쨋든 수집가 벤야민은, 소포로 도착한 저 물건들을 하나 하나 열어보며, 다시 그 물건들과 결합되어 있었을 모스크바에서의 추억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두 달 정도의 기간을 쉬면서, 독감에서 어느정도 몸을 회복한 벤야민은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부터 시작하고 있었던 프르스트 번역 작업을 계속 진행해야 했다. 그를 위해 그는 4월 1일 파리로 떠난다.  파리시  Avenue du Parc Montsouris 4 번지에 있는 호텔 Hotel du Midi에서 벤야민은 '창가 방'에 장기 투숙하면서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부터 번역 작업을 해왔고, 이제 글쓰는 작업을 위해 늘 '장소와 도구들'을 까다롭게 가리는 벤야민은 이전에 자신이 작업을 해왔던 바로 그 방을 고집한다.  그리고 그 방에서 그는 그해 10월 20일까지 투숙하며 번역일을 계속했다.  

 

물론, 그 사이 저 "여행 중독자" 벤야민이 계속 파리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그해 6월 5일은 프랑스 투롱 근처에 있는 Pardigon을, 같은 달 15일엔 Nizza를, 그리고 저 '행운의 도시' 니짜에서 룰렛 게임을 통해 딴 돈으로 6월 21일엔 비행기를 타고 코르시카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이해 12월 18일 벤야민은, 첫번째 하시시 프로토콜을 쓴다.  이미 이전부터 프로이드의 무의식 이론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그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스스로 하시시를 투약하고 나서 그를통해 저 초자아의 억압으로 부터 풀려난 무의식이 어떤 언어를 말하는지를 기록하는, 약물 실험을 시작한 것이다. 벤야민의 이하시시 프로토콜은 이로부터 1934년 5월까지 계속 이어진다.  1940년 스페인 국경에서 벤야민이 극약을 먹고 자살하는 방법을 택한 것도 이런 계속적인 하시시 프로토콜을 통해 익숙해진 약물 복용과도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는 이미 몇년 전부터 자살을 위한 약물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1928년은 벤야민에겐 사실상 아주 생산적인 해였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그는 이해에 저 유명한 <파사지 베르크>의 계획을 세우고 그에 "파리의 파사지"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리고 이 해 1월엔 또한 벤야민의 대표적인 두 저서 <독일 비가극의 기원>과 <일방 통행로>가 출간되기도 했다.  (모스크바에서 벤야민은 아샤에게 아직 출간되지 않았던 '일방 통행로'의 구절들을 읽어주고, 그 표지 그림을 아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는 걸 우린 <모스크바 일기>를 통해 알고있다. )

  

알려져있다시피, 거의 동시에 출판된 책은, 표지와 내용, 문체와 작업 방식에 있어서 크게 상반된 성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단 한가지 점에선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두 책 모두 벤야민이 사랑하던 여인들에게 헌정되었다는 것이다. 첫번째 책은 자신의 부인이자, 이후 이혼하게 되는 도라 벤야민에게, 두번째 책, 일방통행로는 <모스크바 일기>의 또 다른 주인공 아샤에게다.  이 책을 출판하는 것과 동시에 벤야민은 자신이 계획한 <파리의 파사지> <일방 통행로> 후속편이 것을 예고한다.

 

이해 2 17 벤야민은 앙드레 지드와의 두 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하고 이를 <문학세계> 싣는다. 그는 이후에도 앙드레 지드와의 이 인터뷰를 스스로 자랑스러워했었다. 이해 3월엔 베를린의 서점 Potsdamer Bruecke에서 벤야민이 출판한 책들을 주제로 전시회가 개최되는데, 바로 여기에 벤야민의 친구 여동생이었던 조각가 Jula Cohn 벤야민의 두상을 제작해 선물한다. 그녀는 도라 벤야민, 아샤 라시스와 더불어 벤야민의 삶에 영향을 미쳤던 세번째 여인이기도 했다.

 

5 31일, 결국은 거절당하고 말았던 자신의 교수 자격취득 논문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던 삼촌 Arthur Schoenflies가 사망했다. 그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프랑크프르트를 방문한 벤야민은 6 2 그곳에서 아도르노를 만난다. 이후 아도르노와의 오랜, 복잡하고도 긴 관계가 바로 이날 시작한다. 벤야민은 아도르노에게 자신이 번역한 <Tableaux Parisiens> 헌정했다. 프랑크프르트에서 베를린까지는 독일에서 제일 빠른 고속전차  ICE로도 근 8시간이 걸린다. 당연히 당시에는 이보다 더 걸렸을 것이다. 벤야민은 저 먼 여행을 한꺼번에 기차안에서 보내기 보다는 오는 길, 베를린에서 가까운 다른 도시를 방문하는데 본낸다. 이때 방문했던 바이마르에 대해 그는 자신의 <도시의 상들>에서 기록하고 있다. 

 

9 20 벤야민은  저 조각가 여인 Jula Cohn을 만나기 위해 Lugano 여행을 떠나고, 거기서 다시 Genua Marseille를 방문한다.  모스크바에서 도시에 대한 글들에서 이후의 작업의 가능성을 발견한 그는 이 두 도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인상을 기록한 글을 남긴다. 9월 29일 마르세이유에서 벤야민은 하시시 복용실험을 계속한다.

 

10 7 벤야민은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달, 모스크바에서 약속한대로 아샤가 베를린을 방문한다.  <모스크바 일기>를 읽었던 독자는, 베를린을 방문한 아샤에 대해 벤야민이 느꼈을 저 복잡한 감정 상태를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벤야민은 그녀를 원하고 있었지만, 또 한편으론 그녀의 공격성과 히스테리적 짜증, 혁명적 낭만주의 뒤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던 속물성을 감지하고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혁명활동'을 하면서도, 유럽 사회에 대한 동경을 버리지 못했던 그녀는, 이제 벤야민이 있는 베를린을 방문했고, 그리하여 모스크바에서 헤어진 이 두 사람은 근 1년 반 후에 베를린에서 다시 만난다.

 

모스크바에서 약속했던 것처럼, 벤야민은 그녀를 위해 새로 방을 얻는다.  이들이 11중순 부터 다음해 1월말까지 함께 살았던 곳은 베를린 Duesseldorf 거리 42번지다. 이곳은 벤야민이 이전에 살고있었던 곳과도 그렇게 멀리 떨어져있지 않다. 베를린 출신의 벤야민이 태어났던곳, 그리고 몇 차례의 이사를 통해 옮겨 살았던 곳들은 모두 한 구역 Chrarlottenburg 에 속해있었다. 

 

 

 

 

 

 

 

 

 

 

 

 벤야민과 아샤가 석달 동안 함께 살았던 이 집은 여전히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이들이 함께 살았던 방은 이 건물 3층, 한국식으로는 4층에 있었다. 아래 사진에서 발콘 창가에 꽃들을 가져다 놓은 곳이 그곳이다.


 이곳에서 이들의 삶은 행복했을까.  유감스럽게도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이 집의 위치에서부터 예상할 수 있다. 산책을 좋아하는 벤야민에게 아샤와 함께 살았던 이 곳은 그렇게 쾌적한 곳은 아니었다. 뒤셀도르프 거리 42번지는 그 자체로도,  베를린의 다른 거리들에 비하면 무척이나 긴 거리였고, 그가 살던 집에서 나와 왼쪽으로 약 30미터 정도만 나가면 그보다 더 큰 자동차 도로가 나온다. 그곳을 지나다니던 차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은, 그렇지 않아도 예민한 벤야민과 아샤의 베를린 생활을 그리 행복하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벤야민이 살았던 젤렌도르프의 빌라에서와는 달리 여기선, 산책을 즐길만한 숲이나 공원이 그렇게 가까이 있지도 않다.

모스크바에서 벌어졌던 이 두 명의 복잡한 연인 이의 긴장감은 이들이 이 곳에서 함께 사는 동안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고, 이는 이들 재회한 연인들이 이 곳에서 그렇게 다감하고 아기자기하게만 살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걸 짐작케 한다.  이 시기 벤야민은 숄렘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린 여기서 개와 고양이처럼 살고있다" 고 전한다.  그렇지 않아도 이 둘의 관계를 못마땅해하던 숄렘이 <모스크바 일기>에서 이들의 관계에 대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불평하는 것도 이유가 없지 않았다. 

이곳 42번가 건물의 출입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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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08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김남시 2006-02-09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렇습니다. 위 글은 독자들에 대한 일종의 '애프터 써비스'인 셈이지요^^
 

벨이 울린 수화기를 받아들면서 우린 여보세요라고 말한다. 마치 상대를 향해있는 것 같은 이 모호한 언어행위는, 그러나 사실 아직 상대와의 어떤 관계도 맺고있지 않은, 수취인 불명의 발화다. 이 말은 다만 수화기를 들은 내가 지금, 여기현존하고 있다는 것만을 지시하는, 전적으로 주관적인 시그널이다. ‘여보세요라는 을 통해 나는 나의 현존을 지시하며, 내가 말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을 뿐이다. 전적으로 나에게만 속하는 그 말은, 내게 전화를 건 모든 가능한 존재자들에게 다만 나의 현존만을 알리는 순수한 주관적 언어다.

 

여보세요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주관적 성격은 그 말을 하는 순간의 내게, 전화기 저쪽의 보이지 않는 상대가 전혀 규정되지 않은 상태라는 데서도 드러난다. 내가 여보세요라는 말을 통해 나의 현존과 나의 « 말할수 있음 »을 알리는, 그러나  아직 나의 여보세요에 응답하지 않는 저 전화기 바깥의 상대는, ‘지금, 거기에 현존하고 있지 않을 수도, 혹은 말을 하지 못하는 존재일 수도 있다. 그는 어쩌면 자동 기계일지도, 외계인 혹은 유령일지도 모른다. 그가 설사, 나처럼 말할 수 있는 한 명의 인간이라 하더라도, 그가 나의 여보세요에 아직 반응하지 않는 한 그는 어떤 육체적 지표를 통해서도 신원확인 되지않는 익명의 대상이다. 그는 여보세요라는 말을 통해 전달되는 나의 현존만을 확인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릴수도, 침묵해 버릴수도, 아니면 버럭 소리를 지를 수도 있다. 이 모든 상대의 반응을 여보세요를 말하는 순간의 나는 결코 예상하지 못한다. 나는 여보세요라고 말하고는, 무력하게 그저 상대의 반응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아직 반응하기 전의 저 상대는 내게 절대적 타자. 그와 나와의 커뮤니케이션 가능성은 전적으로 그에게 달려있다.

 

상대가 나의 여보세요에 언어적으로 반응하는 순간에 비로소, 나의 여보세요는 구체적인 수취인을 얻는다. 처음엔 전적으로 나의 현존과 말할 수 있음만을 지시하던 주관적 시그널은, 그를통해, 말하는 두 주체 사이의 대화를 선도했던 최초의 호출행위가 된다. 그 반응을 통해 비로소 나는, 상대가 나와같은 말할 수 있는 존재로 전화기 저 편에 현존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나아가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지인인지 낯선이인지, 내게 호의적인지 공격적인지 등, 그와의 구체적인 커뮤니케이션에 진입하기 위한 나의 모드를 결정한다.     

 

전화는 이처럼 우리의 커뮤니케이션에 무규정적 공백의 순간을 만들어내었다. 상대와의 대면적 커뮤니케이션이 그의 육체적 현존을 전제하고 따라서, 그의 육체적 지표 성별, 나이, 인종, 친소 여부 등 를 통해 알려지는 커뮤니케이션 지평의 선 규정성을 제공해주었다면, 전화는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이전의 선이해의 가능성을 차단시켰다. 그로인해 전화는 마치 준비되지 않은 채 불쑥 맞이해야 하는 낯선 침입과 같은 효과를 갖는다. 우린 상대가 누군지도 모른채 걸려오는 전화를,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늘 받아야만한다. 장난 및 음란전화, 전화를 통한 무차별 광고 등은 전화 커뮤니케이션이 만들어 놓은 저 공백의 순간을 악용하는 사회적 결과물이다.

 

걸려오는 상대의 전화번호가 찍히는 핸드폰과 상대의 얼굴을 볼 수 있는 화상 전화 등은 이를 극복하려는 기술적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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