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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 ㅣ 창비신서 143
노마 필드 지음, 박이엽 옮김 / 창비 / 199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1989년 오카나와의 한 슈퍼마켓 주인이 행사장 국기 게양대에서 일장기를 끌어내려 태워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흥분한 우익들은 그의 가게에 불을 지르려 하였고, 테러에 대비,그는 경찰의 보호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인들은 일장기와 기미가요가 헌법상 규정된 정식 국기와 국가가 아니라는 것과 이 국기와 기미가요가 일본 젊은이들을 전쟁으로 몰아대 희생시켰던 천황주의 이데올로기의 산물임을 알았다.
1992년(?) 나가사키 시장이 '천황은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책임이 있다'고 발언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더구나 그때는 천황의 임종을 앞두고 전 일본에 '엄숙한 자제'의 분위기가 요구되던 때였다. 역시, 분개한 우익들은 시장에 대한 위협과 테러를 도모, 급기야 그를 저격하기에 이른다.
1993(?)년 오사카의 한 평범한 주부가 국가를 상대로 재판을 벌였다. 국가가 자위대 출신 남편의 위패를 그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신사'에 봉안하기로 결정한 때문이었다. 전후 일본은 전쟁에 참전했다 죽은 일본인들의 위패를 신사에 봉안, '국가와 천황을 위해 희생한 애국적 인물'로, '일본을 보호해주는 혼령'으로 신격화시켰다. 희생자 가족들은 그러한 국가 종교적 배려로 전쟁의 상처를 자위하고자 했고, 국가는 전쟁에 대한 국가적 책임을 개인적 충성심과 열정으로 환원시켜 버렸다. 이 사건으로 많은 일본인들은 종교적 외피를 쓰고 마을마다 하나씩 존재하는 '신사'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배후를 보았다.
전쟁을 둘러싼 피해와 가해의 논리는 늘 우릴 당혹케 한다. '베트남전의 피해자는 베트남이고 가해자는 미국이다'고 간단히 말할수 있는가. 우린 미국의 국가정치적 이데올로기의 희생물이 된 미국 젊은이들 역시 그 전쟁의 피해자였음을 안다. <플래툰>, <7월4일생> 등이 미국의 정신적 피해를 강조함으로써 베트남 침략을 정당화하는 불순한 영화들이라고? 좋다, 그렇다하더라도 여전히 찜찜함은 남는다. 죽어간 '인간'들의 '실존적 고통'은 그 대답에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의 직접적 피해자라는 입장이, 우리에게 전쟁의 그늘에 가려진 인간들의 '실존적 고통'을 있는 그대로 보기 힘들게한다. 우린 피해자였으며, 가해자인 일본은 오늘날 경제, 문화적으로 우릴 위협하고 있고, 남아있는 전쟁의 흔적들이 우릴 가해자에 대한 분노와 피해의식에 사로잡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칫, 일본'인'들이 감내하고 있는 전쟁의 휴유증에 대해, 그들의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삶과 투쟁들에 대해 간과하기 쉽다.
'국가'로서의 일본과 피해자로서의 '일본인'은 전쟁을 매개로 우리와 곤혹한 관계를 갖는다. 우린, 일본정부가 정신대 문제에 대한 국가적 배상을 회피하고 있음을 알지만, 일본내에서 정부에 반대해 외국인 지문날인 거부운동을 벌이는 일본인들도 안다. 자위대 해외파병을 계기로 군비를 늘리려는 정치인들과 일본의 비핵화운동을 위해 싸우는 일본인들...'국가'로서의 외교적 면면이 나의 실존적 면면을 대변하지 못하고, 우리 또한 '자랑스러운 한국인' 따위의 국가적 정체성을 수용하려 하지 않는 한, 우린 일의적으로 한 국가를 국민 모두를 포함한 국가일반으로 귀속시켜 감정적으로 판단해버릴수는 없다. 이 책은 그를 깨닫게 해준다.
전후 일본에 진출한 미국은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는 보수 정치가들과 합작, 자국의 이득을 취하고 있으며, 오키나와엔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재외 미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일본의 경제성장엔 전후세대들의 강제된 헌신과 피땀이 녹아있으며, 일본은 아직도 직장인 사망률이 가장 높은 국가중 하나다. 이 모든 사실들은 이 책에 소개된 세 사건과 세 인물들과 얽혀 드러난다. 저자는 섬세한 문체로 현재까지 드리워져 있는 일본사회의 모순과 갈등,그 속에서 투쟁하는 인간들을 찾아낸다. 전후 일본역사의 산물인 자신의 실존- 그녀는 미군과 일본여자 사이의 혼혈인이다- 이 어떻게 일본의 현재와 관계맺는지, 그리고, 그 사람들이 어떻게 싸우며 살아가고 있는지 담담히 이야기한다. 우린 그녀를 통해 일본이라는 상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