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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단상
롤랑 바르트 / 문학과지성사 / 199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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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글로 쓰여질 수 있는 이야기는 어떤 것일까. '글'이라고 하는 '내 것이 아닌'소유물. 글이 '내 것이 아닌'이유는 단지 그것의 존재가 나보다 앞서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글은 고분고분 나의 애무를 받아들이다가도 불쑥 난폭하게 나의 신원 증명을 요구해 와 날 당황하게 하기도 한다. 글은 익명성의 유혹적인 품안으로 나를 손짓하지만, 때론 난폭하게 나의 알몸을 드러내 버리기도 한다. 그것의 '까다로움'으로 인해, 그러나 그것의 뿌리치기 힘든 매혹으로 인해, 글은 날 혼란 속으로 빠뜨려버린다. 난 나의 이야기를 글로 쓸수없다! 글은 나의 이야기를 아니, 날 받아주지 않는다. 쓰여진 난, 어느새 낯선 공포가 되어 날 공격해 온다. 날 물어뜯고, 할퀴곤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찢어진 나의 조각 속에서 그러나, 난 날 찾을 수 없다. 그것은 찢어진 세상 만큼의 파편들, 떠돌아 다니던 세상들, 익명성의 조각들일뿐.

사랑한다고 아무리 외쳐도 사랑은 드러나지 않는다. 고통이라는 말은 도무지 고통스럽지 않다. 난 그 말로 나의 고통을 '이야기'할 수 없다. 프로이드가 자신의 꿈이야기를 할때 그는 이중적 담론의 질곡에 빠져 있었다. 자신의 꿈 이론의 설명을 위해선, 자신의 꿈의 모든 의미를 완전히 밝혀야 하는 반면, 그것이 어쩔수 없이 드러내 보여줄 자신의 은폐하고픈 욕망을 검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은 모든 글쓰기에도 마찬가지다. 난 날 이야기하지만 또한 그럼으로써 날 은폐시킨다. 글은 검열의 흔적이다.

바르트는 내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이러한 글쓰기의 강제로부터 자유로왔다. 그 자유는 글이 이미 하나의 기호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서 나오는 여유였다. 글은 하나의 표지이며, 표정이고 포즈이다. 카메라 앞에 서게될 때 우린 더 이상 자연스러운 나이기를 멈추고 하나의 포즈를 흉내내게 되듯이, 글을 쓴다는 것은 그것이 일으킬 의미 작용의 파문들에 대한 예견이자 기대인 것이다.

바르트는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있다. 그의 글에는 기호로서의 숙명성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는 기호의 초월성속으로 자신을 은폐하려 들거나, 그것의 자의성에 괴로와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기호로서의 글을 배열하여 그 기호를 통해 읽는 사람들이 얻게될 즐거움 - 그것도 일의적이지 않은 - 만을 말한다. 이러한 '표류적 글쓰기'를 통해 생산된 그의 글을 읽는 것은 즐겁다. 그건 그가 늘 '즐거운 이야기'만을 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것들이 즐겁게 쓰여졌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이 문장, 이 이야기, 이 단어를 즐겁게 읽고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즐겁게 쓰여졌기 때문이다.' 즐겁게 쓰여진 그의 글은, 놀랍게도 너무나 예민하게 우리 삶의 미세한 결들까지도 포착해낸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그의 글이 주는 '환희'는 고요하지만 깊게 울린다. 이것이 바르트 텍스트의 매력이다.

그의 글의 울림은 그의 예민한 감성이 자유롭게 활동하게 한 '자유로운 글쓰기'에서 기인한다. 그는 어떠한 언어의 규칙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그는 문법도,심지어는 없는 단어조차 그의 필요성을 위해서라면 만들어 내기까지 한다. 그의 텍스트는 텍스트의 순서라는 것이 없다. 짤막짤막하게 이루어진 그의 글들 어디서부터 읽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독자에게 달렸다. 이러한 자유로운 공간을 확보해놓은 후 그의 감성은 그것이 이끄는대로 마음껏 표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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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 창비신서 143
노마 필드 지음, 박이엽 옮김 / 창비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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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오카나와의 한 슈퍼마켓 주인이 행사장 국기 게양대에서 일장기를 끌어내려 태워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흥분한 우익들은 그의 가게에 불을 지르려 하였고, 테러에 대비,그는 경찰의 보호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인들은 일장기와 기미가요가 헌법상 규정된 정식 국기와 국가가 아니라는 것과 이 국기와 기미가요가 일본 젊은이들을 전쟁으로 몰아대 희생시켰던 천황주의 이데올로기의 산물임을 알았다.

1992년(?) 나가사키 시장이 '천황은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책임이 있다'고 발언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더구나 그때는 천황의 임종을 앞두고 전 일본에 '엄숙한 자제'의 분위기가 요구되던 때였다. 역시, 분개한 우익들은 시장에 대한 위협과 테러를 도모, 급기야 그를 저격하기에 이른다.

1993(?)년 오사카의 한 평범한 주부가 국가를 상대로 재판을 벌였다. 국가가 자위대 출신 남편의 위패를 그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신사'에 봉안하기로 결정한 때문이었다. 전후 일본은 전쟁에 참전했다 죽은 일본인들의 위패를 신사에 봉안, '국가와 천황을 위해 희생한 애국적 인물'로, '일본을 보호해주는 혼령'으로 신격화시켰다. 희생자 가족들은 그러한 국가 종교적 배려로 전쟁의 상처를 자위하고자 했고, 국가는 전쟁에 대한 국가적 책임을 개인적 충성심과 열정으로 환원시켜 버렸다. 이 사건으로 많은 일본인들은 종교적 외피를 쓰고 마을마다 하나씩 존재하는 '신사'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배후를 보았다.

전쟁을 둘러싼 피해와 가해의 논리는 늘 우릴 당혹케 한다. '베트남전의 피해자는 베트남이고 가해자는 미국이다'고 간단히 말할수 있는가. 우린 미국의 국가정치적 이데올로기의 희생물이 된 미국 젊은이들 역시 그 전쟁의 피해자였음을 안다. <플래툰>, <7월4일생> 등이 미국의 정신적 피해를 강조함으로써 베트남 침략을 정당화하는 불순한 영화들이라고? 좋다, 그렇다하더라도 여전히 찜찜함은 남는다. 죽어간 '인간'들의 '실존적 고통'은 그 대답에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의 직접적 피해자라는 입장이, 우리에게 전쟁의 그늘에 가려진 인간들의 '실존적 고통'을 있는 그대로 보기 힘들게한다. 우린 피해자였으며, 가해자인 일본은 오늘날 경제, 문화적으로 우릴 위협하고 있고, 남아있는 전쟁의 흔적들이 우릴 가해자에 대한 분노와 피해의식에 사로잡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칫, 일본'인'들이 감내하고 있는 전쟁의 휴유증에 대해, 그들의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삶과 투쟁들에 대해 간과하기 쉽다.

'국가'로서의 일본과 피해자로서의 '일본인'은 전쟁을 매개로 우리와 곤혹한 관계를 갖는다. 우린, 일본정부가 정신대 문제에 대한 국가적 배상을 회피하고 있음을 알지만, 일본내에서 정부에 반대해 외국인 지문날인 거부운동을 벌이는 일본인들도 안다. 자위대 해외파병을 계기로 군비를 늘리려는 정치인들과 일본의 비핵화운동을 위해 싸우는 일본인들...'국가'로서의 외교적 면면이 나의 실존적 면면을 대변하지 못하고, 우리 또한 '자랑스러운 한국인' 따위의 국가적 정체성을 수용하려 하지 않는 한, 우린 일의적으로 한 국가를 국민 모두를 포함한 국가일반으로 귀속시켜 감정적으로 판단해버릴수는 없다. 이 책은 그를 깨닫게 해준다.

전후 일본에 진출한 미국은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는 보수 정치가들과 합작, 자국의 이득을 취하고 있으며, 오키나와엔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재외 미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일본의 경제성장엔 전후세대들의 강제된 헌신과 피땀이 녹아있으며, 일본은 아직도 직장인 사망률이 가장 높은 국가중 하나다. 이 모든 사실들은 이 책에 소개된 세 사건과 세 인물들과 얽혀 드러난다. 저자는 섬세한 문체로 현재까지 드리워져 있는 일본사회의 모순과 갈등,그 속에서 투쟁하는 인간들을 찾아낸다. 전후 일본역사의 산물인 자신의 실존- 그녀는 미군과 일본여자 사이의 혼혈인이다- 이 어떻게 일본의 현재와 관계맺는지, 그리고, 그 사람들이 어떻게 싸우며 살아가고 있는지 담담히 이야기한다. 우린 그녀를 통해 일본이라는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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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19
프란츠 카프카 지음, 박환덕 옮김 / 범우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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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가 태워버리기를 원했던 유고를 고스란히 출판해낸 친구, 막스 브로트는 이 소설은 인간이 어떻게 해서도 들어갈 수 없는 '은총'과 신에 의한 인간운명의 지배,곧 심판과 은총에 관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내게 이 소설은 <심판>과 더불어 지배적 관료주의 사회에 대한 패러디로 읽힌다. <심판>에서 K는 자신이 무슨 죄로 인해 기소되었는지 조차 모른 채, 보이지 않는 관료주의의 말단 조직 속을 헤매다 결국 '개 같은'죽음을 맞는다. 그에게 있어 보이지 않는 그 조직에 접근하는 길은 수많은 절차와 우회로로 둘러싸인 채 그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관료제라는 것이 원래, 그 내부에 접근해 들어가면 갈수록 모두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체계자체의 명령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껍질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은가. 그 누구도 인간을 지배하는 그 무형의 힘의 소재와 책임에 대해서 답변할 수 없다. 그 무형의 체계들이 만들어내는 유형의 억압.

<심판>에서 주인공은 성 - 이는 보이지 않는 익명의 권력 덩어리를 부르는 이름에 다름아니다 - 에 의해 측량사로 임명되어 낯선 마을로 이주해오지만, 그건 빈틈없이 짜여진,그래서 그 견고한 복잡함에 의해 전체를 조망할 수 없게 되어버린 관료 조직 내부에서 발생한 작은 착오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그 누구의 '착오'도 아니다. 착오란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인격적 책임'의 존재를 전제 하지만, 도구화된 관료조직 체계에는 이미 그러한 책임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야기된 '사건'은 단지,그 조직체계의 불필요한 부산물일 뿐이다. 성으로 접근하기 위해 주인공이 겪어야 하는 수많은 관리들 역시 어떤 일에 대해서 책임질 수 있는 인격적 개체가 아니라,그 세분화된 조직의 한 통로일 뿐이다. 그들은 주인공의 소환과 무응답에 대해 입장을 표명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닌 것이다.

관료제는 그 체계 자체에 인위적 위엄과 권위를 부여함으로써만 지속된다. 그것은 관리라는 이름으로 지칭된 개인들에 강요된 존경에서부터, 복잡하게 꼬여있는 체계 자체에 대한 신격화에 이르기까지 이어진다. 무형의 체계는 그를통해 '함부로 지칭할 수 없는 것'으로 '감히 도전해서는 안되는'금기의 영역으로 고양되며, 이러한 체계의 신화화는 주인공이 그에 접근하기를 더욱더 질곡시키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권력은 그 익명성으로 나의 익명성을 파괴한다. 난 그 체계에게 속속들이 알려져 있으며, 파악되어 있다. 난 그것이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날 보고 있다!! 그건 마치 자신의 눈은 보여주지 않으면서 상대의 노출된 모습만을 바라보는 색안경의 위압감과 같다. 보이지 않는 권력의 체계 앞에서 개인이 느낄 수밖에 없는 무력감은 이러한 일방적 시선의 관계에서 기인한다. 그는 차단된 자신의 시선 앞에서 위축되고,잦아들은 자신이 거대한 시선 앞에서 피할 수 없이 발가벗겨져 있다는 것을 느낀다. 강한 불빛 아래 노출된 무대에 쓰러져 있는 벌거벗은 인간 한 마리,..

그래서,진정인들의 삶은 그것을 결정할 관료들의 수첩과 펜 끝 하나에 종속된다. 관료제의 그 형식적 어감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관료 일개인의 일시적 변덕이나 기분상태에 의해 결정되어 버리곤 한다. 사적 자의의 공공화랄까.

진정인이 자신의 조서를 꾸며줄 관료에게 호의적으로 보여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엄밀한 조사와 객관적 판단이라는 공공성의 명분 속에 침윤되어 있는 이러한 자의적 성격들은 이미 그 자체가 관료제의 본질을 이룬다. 엄정한 중립성과 객관적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려는 공공성의 요구에 의해 발생한 관료제는 루카치가 말했듯, '물신화된 객관성'일 뿐이다. 관료들은 자신들의 자의를 공공성이라는 이름으로 위엄있게 행한다.

카프카의 인물들은 말이 많다. 소설의 대부분은 인물들의 감정이나 행동을 묘사하는 것보다는 각 인물들의 대화에 할당되어 있다. 소설은 이처럼 그 누구의 입장이나 견해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삶의 비극적 다원성을 효과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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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의 아이들 - 21세기문화총서 1
더글러스 러시코프 지음, 김성기 외 옮김 / 민음사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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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나 드라마, 게임과 스포츠 나아가 아이들 장난감에서 '인류 진화의 새로운 방향'을 읽어내는 저자의 시각은, 그가 직접 그들을 체험해보지 않고는 얻기 힘든 것이었다. 저자는 수많은 영화와 TV 프로를 보고, 오락과 놀이들을 즐기며, 아이들 장난감을 가지고 놀아보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뿐 아니라, 실제로 이러한 아이들의 문화야말로 인류가 진화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며, 새로운 질서를 담고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에겐 이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인류의 진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마치 주라기 시대의 공룡처럼 도태의 운명을 같이할 것이라고 믿는다.

여기서 알수있는 것은 저자는 인류가 계속 진화해 가고 있으며, 아이들의 문화속에 반영된 진화의 방향은 틀림없이 지금의 질서보다 '좋은'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 그의 세계관의 문제에 시비를 거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어쩌면 그가 탁월하게 분석해낸 구체적 문화들 지도 모르며, 그의 말대로 거기에 우리가 적응해나가야만 할 인류미래의 청사진이 숨겨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체적인 하나의 문화현상을 보고 내릴 수 있는 평가의 방향은 그가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비종말론적 낙관론자인 그에겐 '진짜 나이키'와 '오리지날'을 찾으려는 것이 사이버화된 세계 속에서도 현실계와의 연관성을 잃지 않으려는 새로운 문화의 긍정성으로 보이지만, 새로운 진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나같은 '비관주의자'에게 그것은 '물신화'의 변형된 현상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인류 역사상 세계에 대한 낙관론과 비관론은 다양한 형태로 등장했었다. 여기에,세계가 계속해서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해 나갈 것이라는 진화론과 이 세계엔 언젠가 종말이 도래할 것이라는 종말론이 더해져 복잡하게 조합을 이루는 세계관의 역사는 인류의 문화와 사상에 각인되어있다.(기독교적 세계관은 낙관적 종말론을 대표한다.)

인류는 발전적 진화의 산물이라는 진화론은 종말론을 설파하던 종교적 속박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켰다. 진화론은 종말에 대한 불안없이 마음껏 발전을 구가할 자유를 인간에게 던져주었고 계몽주의를 거쳐 비약적 '발전'을 이루는 세계관을 제공하였다. 이는 또한 진화에 적응한자와 그렇지 못한자를 구분하고, 적응한자가 살아남고 부적응자가 도태하는 서구적 발전관의 토대가 되었다. 진화한 서구인들은 미개한 종족들에게 인류 미래의 진화방향을 제시해주고 이끌 책임이 있었다! 거기에 이끌려오지 못한 자들에겐 도태라는 필연적 결과만이 남겨질 것이다.

다른 한편, 종말론은 이러한 발전의 신화에 대한 제동장치의 역할을 해왔다. 핵전쟁으로 인류전체가 절멸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인류의 생존을 위한 군축요구의 목소리를 낳게 했으며, 자연 생태계의 훼손이 가져올 종말의 예감이 생태계 보존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종류의 종말론은 낙관적 진화론에 근거, 세계를 '활용'하려는 자들에게는 눈엣 가시같은 방해물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들에겐 세계는 결코 멸망하지 않으며, 지금의 문제와 혼란들은 더 큰 차원의 진화의 하부질서에 다름아니라는 새로운 낙관적 진화론이 요구되었다.

내가 보기에 '가이아'와 '카오스' 이론은 이러한 요구에 부응해 생겨난 것이다. 그들은 생명체로서의 지구는 웬만한 오염이나 핵폭발 정도는 거뜬히 처리하는 자정능력을 통해 종말없는 미래를 보장할수 있으며, 혼란이란 더 큰 차원에서의 '질서'에 다름 아니라고 말한다.

저자가 강하게 믿고있는 비종말적 낙관론의 근거가 여기에 있다면 그가 말하는 '새로운 문화'는 어쩌면 모습을 바꾼 '발전의 신화'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것과 발전에의 신화가 어떻게 다정했던 한 공동체를 파괴시키는가를 우린 <오래된 미래>에 등장하는 마을의 사례에서 본다. 우리에게 초가집을 없애고 시멘트 집을 만들게 했던 발전이 그를 통해 얻을 것과 잃을 것에 대한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면, 그건 '발전된' 서구적 질서에 대한 맹목적 추종에 다름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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