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독일의 대표적인 좌파 독립신문인 Taz사람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 특별 기획으로 세계의 좌파 독립신문들을 취재하려는 한국의 한 신문사가 의뢰한 인터뷰에서 통역을 하게된 것이다. 우리가 만난 사람은 현재 Taz의 편집국장인 Frau. Basha Mika와 Taz의 운영 전반을 책임지고 있는 Herr. Karl Heinz Ruch 이었다. 많이 알려져있듯, Taz는, 현 독일의 외무장관 Joschka Fischer, 프랑프크르트 학파의 이론가 아도르노 등이 깊이 연루되어 있는 60년대 독일 사회 운동 세대들에 의해 만들어진 신문이다. 1978 년 베를린 공과대학 대형강의실에 모인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자본도, 언론 경험도 없이 생겨났던 당시 운동 소식지가 이 신문의 출발이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도 거대 기업들의 광고도 받지않고, 환경보호를 위해 (물론 그럴 돈도 없기도 하지만) 컬러 화보도 싣지 않고 있는 Taz는, 다른 언론사의 절반 수준의 봉급을 받으면서도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인 신문에 참여하고 있다는 자신감으로 버티는 많은 좌파들에 의해 지금까지 이끌어져 오고있는 신문사다. 다른 거대 언론사와의 경쟁, 경제위기, 권력과 자본과의 갈등 등으로 인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들 Taz인들이 가지고 있는 자부심은 우리에게 신문사 곳곳을 안내해준 비서에게서도 느낄 수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편집국장 Basha Mika 사무실 서가에 꽂혀있던 독일어 판 „모택동 선집“이었다. 대부분의 타쯔 종사자들과 마찬가지로 60년대 이후의 독일의 사회운동과 그 이후 환경운동의 실천가였던 그녀는, 체 게바라, 호치민 등과 더불어 당시 운동의 사회, 이념적 토대를 제공했던 중국 혁명가 모택동의 책을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신의 사무실 서가에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유럽인들이 저 먼 동 아시아에서 나온 사상에 심취했었던 적은 역사적으로 크게 세 차례 있었다. 18세기 계몽주의자들에 의해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수용되었던 유교와 20세기 초 문명비판과 평화주의 운동의 맥락에서 받아들여졌던 도가사상, 그리고 1960년대 새로운 사회운동의 이념적 대안으로서 수용되었던 중국화된 맑스주의가 그것이었다.
18세기 볼테르, 디드로를 위시한 계몽주의자들은 변화된 사회, 정치적 상황 속에서 어떻게 물리적인 억압과 폭력이 아닌 이성적인 방식으로 국가가 통치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유교의 정치 이념으로 통치되고 있던 중국은, 그 이념을 통해 군주에서부터 관료들에 이르기까지 자발적이고 조화로운 이성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나라로 보였다. „도덕과 법, 아버지들에 대한 자식들의 존경“에 근거하고 있는 중국의 통치방식을 유럽 계몽군주들의 통치 모델로 제시했던 볼테르, 중국을 „완벽하게 통치되고 있는 국가“로 보았던 프랑스와 퀴스나이 Quesnay등에 의해 중국의 정치체제와 그 이념인 유교는 계몽주의의 유럽 정치체제가 도달하여야 할 이상향으로 받아들여졌고, 이로인해 계몽 군주임을 자처하던 많은 유럽의 통치자들은 스스로를 ‚쟁기를 손에 들고있는’ 옛 중국 성왕들의 모습으로 그리기도 했고[1], 중국식 가구, 차, 건물, 도자기, 그림, 복식 등의 Chinoiserie 는 당시 유럽 바로크 시대 예술양식을 특징지우게 된다.
20세기 초 유럽 국가들이 포화상태가 된 식민지 쟁탈과 자본주의적 경쟁을 통해 전쟁을 향해 치닫고 있을때 많은 유럽의 지식인들은 또한번 저 동아시아의 이념을 받아 들인다. 이때 수용된 것이 „도덕경“을 중심으로하는 도가사상이었다. 되블린, 헤르만 헤세, 베르톨트 브레히트 등에게 이 도가사상은, 치열한 경쟁과 투쟁, 대립과 싸움으로 특징지워지는 유럽적 이념과 정신과는 달리, 음과 양의 조화, 대립과 싸움의 상호 의존성 등을 이상적인 방식으로 구현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고, 이는 이들 지식인의 평화주의적 이념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915년 출판된 Alfred Döblin의 Die drei Sprünge des Wang-Lun. Chinesischer Roman 과 1919년 출판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1923년에 출판된 브레히트의 희곡 Im Dickicht der Städte 등은 모두 1911년 Richard Wilhelm에 의해 독일어로 번역된 „도덕경“을 통해 받아들여진 도가사상에 대한 탐닉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20세기 초 문명 비판적 지식인들의 도가 이념의 수용이 이전시대 계몽주의자들에 의해 찬탄되던 유교 이념에 대한 비판과 거부와 결합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유가사상은 전제주의적 통치와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비판되었고, 이는 당시 유럽 제국주의 각축의 틈바구니 속에서 일어났던 많은 민중 반란을 제국주의 세력과 연합해 폭력적으로 진압했던 중국정부에 대한 거부감과 결합되어 더 드세어졌다. (오늘날 중국내 정치에 대한 중국 정부에 대한 유럽 지식인들의 비판적 시각은 어쩌면 이때부터 형성된 것인지도 모른다. 베를린에선 중국 정부의 파륜공 억압을 중단하라는 가두 시위가 심심치 않게 열린다. )
다른 한편 20세기 초 이러한 문명 비판적 지식인들에 의해 수용된 도가사상은 이후부터 지금까지 유럽인들에게 중국 및 아시아인들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을 형성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소극적이고, 말이 없으며, 매사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나서기 보다는 뒤로 물러서 있기를 좋아하며, 다툼과 경쟁보다는 체념과 포기를 택하는 동양인의 이미지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중국인, 나아가 아시아인들에 대한 이미지는, 러시아인들이 시간을 과도하게 풍족하게 쓰며 그를통해 삶을 순간으로 만드는 시간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최후까지 „아시아적“( „모스크바“) 이라고 말하는 발터 벤야민에게서도 발견된다. 그에게 아시아적인 것은 „한 없이 교활하고 verschlagen, 한 없이 과묵하며 verschwiegen, 한 없이 예의 바르고, 한없이 오래되고, 한없이 순응적“[2] 이다.
[1] David Marin Jones : The Image of China in Western social and political Thought, Newyork 28.
[2] Walter Benjamin : GS II/2, 6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