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지식인들은 나르시스트다. 아니, 나르시스트가 되지 않고서는 자신의 자아감정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오늘날의 사회적 조건 속에서 지식인으로 살아가기 힘들다. 나르시즘을 받아들이지 않은 지식인들은 일찌감치 지식인이기를 그만두고 자신의 상상적 자아를 현실적 자아와 공존할 있게 주는 다른 직업들을 찾아 정치가 아니면 사업가가 되었다. 그렇지 못한 지식인들은 여전히 나르시즘을 동력으로 살아나간다. 나르시즘은 책을 쓰고 출판하면서 자신의 자아 대상물 만들고, 다른 이들에 대해 부러움과 경멸이 섞인 시선을 던지고, 스스로를 비하하고 연민하는 숭고한 감정속에서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다.    

 

                Thomas Ziehe 나르시즘 다음과 같이 네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1]  

첫째, 유아의 심리 발전과정의 단계

둘째,  대상에 대한 인간의 특정한 관계맺음의 양상

세째,  개인들의 특정한 신경증적 특징들을 지칭

네째,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사회변동의 조건들에 의해 야기되는 특정한 심리적 주관성의 특징을 지칭하는 개념

 

주지하듯 인간 심리발달의 중요한 첫단계를 이루고 있는 나르시즘적 시기 유아는 자기 자신을 대상인 엄마로부터 객관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지각하거나 체험하지 못한다. 아이는 자기 자신을 따뜻함과 만족을 주는 어머니의 육체와 자신이 하나로 융합되어 있는 “(708)으로, 그와 하나의 존재인 Eins-Seins것으로 체험한다. 말하자면 아이는 실제로 엄마의 육체와 결합되어 있던 출생 모체 내에서의 감정상태에 아직 머물러 있는 것이다. 나르시시즘적 단계는 이후 정상적인 심리적 발전 과정을 거치게 되었을 획득하게 주체와 객체의 분리, 자신의 심리적 내부psychisches Innen 사회적 외부 soziales Aussen“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  특징을 지닌다. 

 

자신의 육체의 독립성을 자각하면서 동시에 어떤 트라우마적인 좌절과 실망의 체험없이“(708) 어머니라는 대상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켜 내는데 성공한 아이는 정상적인, 말하자면 병리적이지 않은 심리적 발달 단계를 밟아 나갈 것이다. 그는 이제, 울음, 행동, 나아가 말이라는 소통적이고 상징적 질서를 매개로 자신의 욕구를 사회적으로충족시키는 방법을 배워 나갈 것이고, 나아가 사회의 상징적 질서들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욕구들을 그러한 사회적 질서에 따라 규제하고 변화, 승화시키는 방법 또한 배워나갈 것이다. 

               

모체로부터의 심리적 분리의 과정이 이처럼 말끔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면 바로 두번째의 나르시즘적 문제 발생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심리적 구조의 발전과정 속에 이전의 (모태와의) 융합과 속에서 느끼던 전능함 Allmacht 계속 유지하려하거나 반복하고자 하는 총족되지 않는 갈망이 자리잡게 된다. 이러한 갈망은 그러나 무의식적인 기억의 침전물에 들러붙어있는 것이기 때문에, 말로 표현되어 없고 다만 내적인 불안감, 공허함 그리고 우울증의 감정으로 출현하게 된다.“(708) 프로이드는 이러한 상태를 리비도가 대상으로부터 물러나 자아로 회귀하는 Abzug der Libido von den Objekten und als Rückzug ins Ich“ 이라고 특징지운 있다.

 

                자기가 원하던 , 자신의 욕구와 욕망이, 좌절과 오해와 그로인한 트라우마의 위험부담이 가득한, 귀찮고도 힘든 사회적, 상징적 소통의 개입 없이도 충족되던 원초적 대상 (어머니의 육체) 계속 들러붙어있고 싶어하는 심리, 나아가 그것과 분리되지 않으려는 최초의 나르시즘적 경향은, 어쩌면 우리 지식인들에겐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취업 등을 통해 사회 삭막한 현실세계’ - 진출하기 보다 대학원에 남아있기  원했을때 부터 작용하고 있었다. 우린, 그래도 속에선 젊음의 에너지와 욕망이 실험되고 실수가 용인되던, 어떤 이에게는, 현실적 부담감이 적은 연애와 낭만이 존재했었던 모체 같던 캠퍼스와 자신을 분리시키지 못했고 거기에 계속 들러붙어있길 선택했던 것이다.   

 

                위의 <심리학의 근본개념들> 의하면 나르시시즘에 대한 이러한 고전적 정신분석학적 이해는 Jacobson 비롯한 이후 연구가들에 의해 새롭게 정식화되게 된다. 이에 의하면, 이제 리비도적으로 점유된 besetzen 것은 대상 자체가 아니라우리가 내적-심리적으로 만들어 내는 대상에 대한 표상 Repraesentanzen’ 것으로 이해되고, 이는 우리 스스로가 심리적이고 육체적으로 체험하는자기자신에 대한 자아표상 Selbstrepraesentanzen’ 결합하여 나르시즘을 만들어낸다. 대상 표상과 자아 표상이 나르시즘적 리비도에 의해 점유된 사람들은 이제 고양된 자아 가치 감정을 체험하는 심리적 목표로 삼게된다. (709) 그리고 이것은 최초의 나르시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기억 침전물들에 연결되어 있다.“  말하자면 초기 나르시즘 단계의 특징인 대상과 주체의 분리되지 않은 융합의 상태 대한 갈망이 영향을 발휘하여, 대상에 대한 표상 자아 표상 분리될 없게 결합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떤 증상이 생겨나는가? 대상 표상을 자신의 자아표상과 분리될 없이 결합시켜 버린 나르시즘적 환자들 가장 커다란 특징은 대상들에 대한 평가를 곧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로 받아들인다는데에 있다. 태극기라는 대상을 자신의 자아표상과 나르시즘적으로 결합시킨 사람은, 누군가 태극기를 훼손하는 것을 자신을 모욕하는 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자신의 자아표상을 자기가 졸업한 학교와 결합시킨 사람은, 학교에 대한 비판을 자신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자신의 자아표상이 민족주의적으로 각인된 국가에 대한 표상과 결합되어 버린 사람들은, 미국에 진출한 포르노 배우가 나라 출신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고양된 자아감정 느낄 것이다. 자기가 전공하는 사상가, 문학자와 자신의 자아표상을 결합시켜 버린 나르시즘 환자 지식인들은 사상가의 이론을 마치 훼손될 없는 자신의 존엄성처럼 다룰 것이다. („니체는 그렇게 했을리가 없어“ – „니체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아니라! – 라며 니체 이론에 대한 비판적 코멘트를 자신의 존엄성에 대한 훼손으로 받아들여 기분 나빠하던 니체 전공자도 있었다.) 자신이 연구하는 대상으로서의 이론 자신의 자아표상과 나르시즘적으로 결합시켜 버린 지식인들은, 외부의 모든 위협과 비판들과 맞서기를 유아적으로 거부하며 이론의 안락한 모태 Mutterleib’속에 언제까지나 머무르고 싶어한다. 그들은 이론의 사회적 흥망을 자신 자아의 고양과 몰락으로 체험하며, 이론들 간의 이론적논쟁을 개인들 사이의 인격적 싸움으로 받아들인다.  

 

    개인들의 특정한 신경증적 특징으로서의 나르시시즘은 자신의 자아상 문제가 생김으로써 발생한다. 그리고 문제는 현실적으로 부풀려진 거대자아 Groessen-Selbst’ 자신이 체험하는 실제적 자아 Real Selbst“ 사이의 간극에서부터 생겨난다.(709) 현실적 조건들과 실제적 자아에 대한 실제적 평가에 근거해 있지 않은 거대자아 요구로부터 자신의 실제적 자아가 위축되고 비하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실제적 자아 외부로 부터의어떤 지지대를, , „자기체험의 부분으로써 자아 표상을 고양시켜줄 나르시즘적인 대상“(710) 요구하게 된다. 실제적 자아는 그러한 나르시즘적인 자아 대상물 Selbstobjekte“ 거대자아의 요구에 상응할 만한 상상적 자아를 투사하고, 이를 자기 체험과 자기 자신으로 동일시함으로써 심리적 위기를 빠져 나가려 하는 것이다. 이때 나르시즘적 자아 대상물 단지 상상 속의 산물이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누구나 현실적으로 지각할 있는, 그리하여 나르시즘적 개인 또한 그를 자신의 외부에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으로, 그리하여 자신의 나르시즘적 환상이 실지로 현실적으로 실제하는 으로 체험하고, 나아가 그를통해 자신의 실제적 자아의 고양을 체험 있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어떤 이들에게 그건 외제 승용차나 나이키 운동화, 리바이스 청바지나 모피 코트 수도 있고, 다른 이들에겐 섹시한 애인이나 클래식 음반 컬렉션,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멋진 서가일 수도 있다. 나르시즘적 지식인들의 자아 대상물은 그가 쓰는 글과 책이다. 글과 책은, 현실 속에선 초라하고 별볼일 없으며 무능한 실제적 자아를, 지식인이 가지고 있는, 유난히도 이상적으로 부풀어진 거대자아와의 위협적인 대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낸 자아 대상물들이다. 글과 책은 단지 우리의 심리적 내면 속에만 존재하는 상상적 산물이 아니라, ‚외부에실제적이고 물리적으로 존재한다. (우린 책을 보고, 만지며, 들고 다닐 수도 있다!) 자신의 체험, 생각, 감정들을 글을 통해 외화시키면서 지식인들은 동시에 거기에 자신을 나르시즘적으로 투사시킨다. 그렇게 외화되고 물질화된 내면으로서의 글과 책은 그리하여 지식인들의 자아표상 쉽게 동일시되고, 그들은 그렇게 만들어진 자아 대상물 통해 자신의 자아 감정을  나르시즘적으로 고양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있는 사회가, 특히 근대 이후 자본주의적 사회화 속에서, 이전의 전승된 문화적 가치, 정체성, 집단들을 해체시키고 재구성하며 그를통해 이전까지의 의미 연관들을 파괴시킴에 따라 이러한 나르시즘적 자아 대상물에 대한 의존은 강화된다. 이것이 네번째로 언급된, 사회적 변화 속에서 생겨나는 주관성의 특징을 지칭하는 나르시즘의  의미이다. 이전까지 안정되어 있었던 사회적 계급, 집단, 종교, 혹은 확립되어 있던 사회 문화적 담론에 의거해 있었던 사람들의 자아표상은 급격하게 붕괴되어 버렸다. 급격한 변화에 발빠르게 적응하지 못한 많은 이들에겐, 다만 나르시즘적으로, , 특정한 자아 대상물들을 만들어 그를 자신의 자아표상과 동일시함으로써 정체성의 심리적 위기를 피해갈 방법 밖에는 없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제 자신만의 취미와 선호의 대상들을 만들고 [2], 다른 모든 이들로부터 구별되는 개인을 모든 사회적 실천의 중심에 놓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은, 특히 변화가 지식과 지식인 자체의 사회적 위상을 급격하게 변화시킴으로써 지식인들의 심리적 위기를 가중시키는 것이었을때는 더욱, 지식인들을 중증 나르시스트로 만든다.

 

우리는 로버트 버튼과 그의 주저 멜랑코리의 해부 이러한 사회적 변화 속에서 생겨난 지식인의 자아 심리적 위기를 나르시즘적 방법으로 극복하려했던 시도라고 이해할 있다.

 

버튼이 책을 출판했던 1621년은 유럽사회가 사회, 정치, 역사, 문화, 사상 등의 영역에서 커다란 이행과 변화를 맞이하던 시기였다. 종교적으로는 프로테스탄트적 개혁이 사회, 정치적 세력을 확장해가며 카톨릭과 대립하고 있었고, 놀랄만한 속도로 발전을 거듭하던 천문학, 역학, 의학(1618 하비의 혈액순환 발견) 등의 자연 과학은 이전의 신학적 믿음들에 하나씩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갈릴레이는 자신이 발명한 망원경(1609) 으로 중세를 지배했던 아리스트텔레스 우주론에 의문을 제기하는 발견(1610 달의 산과 계곡, 태양의 흑점) 거듭하고 있었고, 베이컨은 Novum Organum(1620) 에서 이러한 자연과학의 경험적 방법들을 철학적 방법론으로 수용할 것을 주장했다. 정치, 경제적으로 네덜란드와 영국을 위시한 유럽 국가들은 이미 1600년대 초부터 인도(1605), 북아메리카(1607), 카나다와 파라구아이(1608), 남아프리카 (1618)등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있었고, 식민지 특산품들을 위주로한 국가간 교역을 위해 최초의 은행이 설립되기도(1609) 했다.

 

 말하자면 사회의 구조는 경쟁적인 부의 축적이라는 실천적 과제로 집중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전까지의 중세적 지식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자연과학적 지식에 의해 흔들리고 (1613 갈릴레이는 성경이 자연과학의 문제들을 결정할 수는 없다고 주장, 1615 종교재판에 회부된다.) 있던 상황 속에서  이상 이전의 안락한 신학적 믿음 속에 자신의 이론을 쌓을 없었던 지식인들의 지위는 흔들리고 있었다. 사회적 부를 향한 실용적, 실천적 과제에 몰두하던 국가와 새로운 자연과학적 인식들에 자극받은 사람들은 어떤 현실적 이익도 가져다 주지 않고, 다만 이전시대의 구태한 신학원론만을 반복하는 듯한 인문학적 탐구를 불신하게 되었고, 속에서 인문학적 지식인들은, 마치 오늘날의 인문학자들처럼 지식과 실존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버튼은 지식인들의 이러한 심리적 위기를 책이라는 나르시즘적 자아 대상물 통해 극복해 보고자 했다. 그의 책의 나르시즘적 경향은 이미 구조와 형식 속에서도 모습을 드러낸다. 옥타브 판으로 페이지가 넘는 두께,  라틴어 이름으로 - Democritus Junior ! - 자신을 소개하는 저자, 그의 논지 파악하기를 힘들게 만들 정도로 텍스트 전체에 가득 있는 수많은 라틴어, 희랍어 인용문과 각주, 수많은 고전 고대 시대의 일화들[3] 그가 고대와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적 지식과 지식인들을 자신의 전범으로 삼고 있었음을 있게 해준다. 모든 학문들이 인문학을 기본으로 삼고, 모든 사회적 실천들이 인문학적 원천에 의거하며, 그리하여 모든 사회, 정치적 기구들이 인문학과 인문학자들을  떠받들던 인문학의 최전성기에 대한 향수는 인문학자로서 버튼의 자아 이상이었다.    

 

그와 비교해 본다면 버튼의 시대는 얼마나 학자와 지식인들을 푸대접하고 있는지. 세상은 모두 세속적 이익만을 쫓고, 인문학자들은 실용적인 이익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천대 받으며 가난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버튼은 불평한다. 버튼에게 그건 한번도, 급속하게 변화하는 사회, 역사적 조건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문학의 무능함 때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버튼은 지식인 특유의 나르시즘을 발휘, 그를 자신의 시대가 앓고 있는 질병 (멜랑코리!) 탓으로 돌렸다. 그리곤 바로 그러한 주장을 하는 자신의 책을 시대에 인기없고, 쓸모없는 것으로 비난 받으며, 사라져가고 있던 바로 인문학 전성시대의 형식을 빌어 만들어 냈다. 그리고 책은 바로 시대적 질병을 해부 Anatomy’[4]하고 궁극적으로는 치유할 것을 암묵적 목표로 삼고 있었다. 

 

이전까지 인간의 인상학적 유형과 체질들을 설명하는데 사용되던 멜랑코리개념은 버튼을 통해 처음으로 시대와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회 역사적 준거로까지 확장된다. „불만족과 일반적인 분노, 불평, 가난과 야만, 구걸, 전쟁, 난동..들을 있는 ...시골엔 인구가 사라지고 사람들은 지저분하고, 추하며 문명적인 , 이러한 왕국, 이러한 나라는 필연적으로 불만족스럽고 멜랑코리적이며 병든 육체를 가지고 있을 밖에 없고 시급하게 개혁되어야만 한다.“[5] 버튼은 그의 시대가 멜랑코리라는 질병을 앓고있는 시대며, 이는 시급히 치유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는 19세기의 마르크스와 같은 비판적 사회개혁가였을까.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우리가 버튼에게 멜랑코리라는 질병으로 가장 고통받는 이들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져 본다면 금새 무너지고 만다. 그에게, 시대의 질병을 통해 누구보다 고통받는 이들은 바로 (인문)학자들이기 때문이다.[6] 그리고 여기엔 아리스토텔레스가 멜랑코리를 특출난 사람들 특성과 관련시킨 이후 19세기 낭만주의에까지 함축되어왔던 소위 천재와의 연관성[7] 암시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말하자면, 버튼이 진단하는 시대의 질병은 시대가 자신의 천재들(인문학자들!)’ 알아차리지도, 그에 맞게 대접해 주지도 못하고, 도리어 그들을 고통 속에서 살도록 만들고 있다는데 핵심이 있는 것이다. 개인적 질병으로서의 멜랑코리는 이를통해 그를 낳게하는 사회의 질병으로 확장되고, 그를통해 지식인들 개인의 멜랑코리는 미학적 정당성 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당성까지 얻는다!

 

버튼의 나르시즘은 바로 지점에서 이후 모든 시대, 모든 지식인들의 보편적 나르시즘의 공식과 연결된다. 천재로서의 지식인은 어느 시대나 힘겹고도 힘들게 살아간다. 그리고, 그러한 고통의 원인은 지식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천재들을 이해하거나 수용하지 못하고, 그에 맞게 대접해 주지도 못하는 외부, 사회와 시대에 있다. 지식인들은 질병을 앓고 있는시대 속에서 신음하며 살아가고 있는 불행한 천재들이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지식인들의 개인적 질병, 멜랑코리의 원인이기도 하다!) 지식인들이여, 당신들이 겪는 멜랑코리는, 당신들 탓이 아니라, 다만 시대가 앓고 있는 질병 탓이다. 그건 지식인이 아니라 시대가 바뀌어져야만 치유될 있다!  

 

버튼은 변화하는 시대와 상황의 조건을 생산적으로 수용해, 그에따라 자신을 변화시키는 능동적 지식인이 되지못했다. 그가 진단한 시대적 질병으로서의 멜랑코리는 다만, 그를 포함한 당시 인문학자들의 심리적 위기감을 보상해보려던 나르시즘적 자기투사에 다름 아니었다. 치유되어야 멜랑코리의 대안으로 제시된 그의 유토피아 적지만 엄격하게 적용되는 법률을 가진 군주제 국가, 거기선 재판관, 검사, 변호사, 의사들의 수가 엄격하게 제한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많은 법률과 재판이 존재하고, 많은 검사, 변호사 의사들이 존재하는 곳은 그곳이 멜랑코리적 국가라는 지표[8]이기 때문이다. – 역시 의사, 검사, 변호사들을 인문학자 보다 선호하는 현실에 대한 그의 불만의 표현으로 읽힌다. 이후 그의 책이 여러 판본을 거듭하면서(1624, 1628, 1632, 1638, 1652, 1660, 1676) 동시대와 이후 지식인들의 나르시즘적 자아고양에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유토피아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9] 바로 때문이다. 버튼의 독자들이었던 지식인들   어떤 일반인들이 책을 읽었겠는가! – 원했던 것은 자신의 자아감정의 위기를 모면케 나르시즘적 자아 대상물이지 어설픈  사회적 이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제 오늘날의 한국으로 돌아와보자. 2005 한국에서 번역되어 출판된 <우울증의 해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도대체 정신나간 출판사는 어떤 생각으로 돈벌이가 되지 않을 것이 뻔한 두껍고도 재미없는 고전 인문학 책을 출판했을까. 한국사회가 모든 대학들을 시장경제의 원리에 따라 재편하려고 하는, 인문학의 위기라는 거대담론 협박의 수단으로 삼아 이미 많은 인문학과들을 대학내 교양수업만을 제공하는 서비스 학과로 만들어버린 시점에서 책은 어떤 의미와 효과를 지닐까. 17세기, 인문주의자였던 지식인들의 사회적 위상이 서서히 붕괴하던 시기, 지식인과 학자들이 실용적인 사회 속에서 실용적인 공론을 떠벌리던 기생계급으로 간주되어 가던 시기에 쓰여진 책이 그를통해 지식인들의 나르시즘적 자기 방어라는 심리적 효과를 가졌었다면, 이제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책은, 시장경제의 써비스맨으로 업종전환을 하도록 강요받고 있는 한국의 인문학 지식인들의 심리적 위기를 위로해주는 나르시즘적 자아 대상물Selbstobjekt’ 받아들여지지는 않을까. ‚어느 시대나 인문학자들은 속세적 이익과 실용적 논리만을 쫓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시대와 사회 속에서 힘들게 살아왔으며, 그럴수 밖에 없다 낡은 멜랑코리적-나르시즘적 지식인의 구호를 확인해주면서 책은, 사회적 변화에 무능한 인문학의 자기 한계를 합리화하는 자위수단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도 나르시스트일 밖에 없는, 더구나 더욱더 그들을 나르시즘적 도피로 몰아대는 광포한 한국사회의 변화 속에서, 17세기의 나르시스트 버튼의 멜랑코리는 몰락해가는 현실적 자아가치를  나르시즘적 자기 합리화를 통해 구제해보려는 21세기 한국 지식인들의 멜랑코리로 되살아나는 것은 아닐까. 

 

          


[1] Thomas Ziehe, Narzissmus, in Psychologische Grundbegriffe : Mensch und Gesellschaft in der Psychologie, Ein Handbuch, (Hg. Von Siegfried Grubitzsch & Günter Rexilius, Hamburg 1991, S.708-713

[2] 이전의 어떤 규범적인 판단과 담론들에도 의존하지 않고 전적으로 주체의 자유로운 취미 기준에 의해 자신의 선호를 드러내는 <판단력 비판> 근대적 주체는 이러한 사회적 배경하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나아가 유럽에서 18세기부터 급격히 증가한 소위 아마추어 예술가, 과학자들역시 이러한 사회, 역사적 배경 속에서 등장한 것이다. 이에 대해선 Hans Rudolf Vaget, Dilettantismus und Meisterschaft. Zum Problem des Dilettantismus bei Goethe. München 1971. 참조.

[3] Wolf Lepenies, Melancholie und Gesellschaft, 1998 Frankfurt am Main, S.22

[4]  해부 Anatomy“라는 단어를 제목으로 채택함으로써 버튼은 당시부터, 본격적으로는 18세기부터, 싹을 틔우기 시작한 대상의 시각화에 대한 특정한 자연 과학적 태도를 일지찌감치 인문학적 논의에 적용시켰다. 18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유럽에서 일어난 해부학적 관심은 보이지 않던 육체의 내부를 절개해 시각화시키려는 근대적 에피스테메를 반영하고 있다. 이에 대해선 Philipp Sarasin, Der öffentlich sichtbare Körper : Vom Spektakel der Anatomie zu den curiosites physiologiques in Physiologie und industrielle Gesellschaft, Studien zur Verwissenschaftlichung des Körpers im 19. und 20. Jahrhundert, (Hg.) Philipp Sarasin & Jakob Tenner, Shurkamp 1998 참조

[5] Wolf Lepenies, S.23

[6] 버튼 이전부터 오랫동안 멜랑코리는 학자나 지식인의 질병으로 이해되어왔다. Melancholie, in Historisches Wörterbuch der Philisophie, Basel/Stuttgart 1980.  

[7] Wolf Lepenies, S.24

[8] Wolf Lepenies, S.28

[9] Wolf Lepenies, S.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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