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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두고 읽는 장자 ㅣ 곁에 두고 읽는 시리즈 2
김태관 지음 / 홍익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장자> 추수편에 이런 글이 보인다.
'작은 입장에서 큰 것을 보면 전체를 다 볼 수 없고, 큰 입장에서 작은 것을 보면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전체를 못 보기에 편견이 생기고, 미세한 것을 모르기에 오해가 생기는 법이다. 쓸모가 없다는 생각도 전체를 다 보지 못하는 인간의 단편적인 시각에 불과하다.
나무는 한철의 푸름만으로 빛깔을 논할 수 없다. 한 그루의 나무에는 봄날의 생동도 있고, 가을의 조락도 있으며, 겨울의 침잠도 있다. 겨울을 알지 못하는 여름매미가 삼 년 동안이나 불비불명 하며 때를 기다리는 큰 새를 비웃을 수는 없다.
금이 간 바둑판을 무용지물이라 하여 버리는 것은 천하의 명반을 팽개치는 어리석음일 수 있다. 무엇이 쓸모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직 쓸모를 알지 못한다는 말과도 같다. 그것은 쓸모를 헤아리는 안목을 갖추지 못했다는 자백이기도 하다.
그대에게는 지금 옹이 지고 배배 틀린 나무가 있는가. 그것은 희귀한 관상목일지도 모른다. 짐수레고 못 끄는 말이 있는가. 그것은 전장을 누빌 천리마일지도 모른다. 날개를 접고 잠자는 새가 있는가. 그것은 황혼에 날개를 펴는 올빼미일지도 모른다. 하릴없이 세월을 낚는 사람이 있는가. 그는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천하의 대기일지도 모른다.
그대의 인생에서 쓸모없는 것들은 무엇인가. 그대가 버리고 싶은 것들 중에는 보배가 감춰져 있을지도 모른다. 쓸모가 없는 것들은 단지 쓸모가 다를 따름이다. 쓸모를 찾기 전까지는 그 어떤 것도 쓸모가 없다. 짐수레를 못 끈다고 천리마를 버리겠는가. (본문 173)
한동안 <곁에 두고 읽는 장자>를 읽으면서 마음의 비움에 관해 생각해보았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짓누를 듯한 현실의 무게가 느껴지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느끼는 현실의 무게는 내가 품은 지나친 욕심 탓이 아닌가 싶다. 분명히 그럴 것이다.
나는 간절히 '성공하고 싶다'는 마음을 품은 적이 있었고, 그 마음은 지금도 커다란 짐이 되고 있다. 어릴 적에 항상 제대로 인정을 받아본 적이 없었던 나는 '쓸모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인정받지 못했던 삶에서 벗어나 칭찬을 받고 싶었다.
아마 그게 내가 공부를 했던 이유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공부는 결코 그런 인정으로 이어지는 길이 아니었다. 쓸모없는 지식을 쓸모있는 지식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나 다운 일,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즐길 수 있는 일이 필요했다. 찾고자 했다.
그렇게 찾은 것이 블로그 활동과 글쓰기였다. 개인적으로 내가 나를 돌아볼 때 결코 '잘 쓴 글'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조금씩 글을 써가면서 크고 작은 인정을 받는 일은 분명히 쓸모있는 일임을 나타내주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다.
비록 내가 쓰는 이 작은 글이 커다란 물결을 일으키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크기를 넓혀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우리 사회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놀라운 경험을 여러 번 했다.
쓸모없는 삶으로 취급받았던 삶이 그나마 빛을 가지게 되었다. <곁에 두고 읽는 장자>는 우리가 가진 무거운 짐을 버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지금의 최선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나아가 쓸모있는 삶, 그리고 자유로운 삶을 품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