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3부작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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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의 도시(City of Glass)’ ‘유령들(Ghosts)’ ‘잠겨 있는 방(The Locked Room)’이란 세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유리의 도시’를 읽으며 ‘유리’라는 것이 유리(琉璃)일까 유리(遊離)일까 궁금해져서 아마존에 가 확인해보니 Glass, 곧 유리(琉璃)가 맞았다. 유리(遊離)였다면 더 이해하기 쉬울 뻔했는데.

‘유리의 도시’에는 ‘작가’로 지목되는 사람이 네 명 나온다. 퀸, 폴 오스터, 나, 그리고 실제 인물인 폴 오스터. 작중에 폴 오스터가 한 말에 따르면 [돈키호테]의 작가도 세르반테스 → 시드 아메테 베넨겔리 → 산초(와 그를 도운 이들), 돈키호테 그 자신으로 짐작된다. 돈키호테가 왜 이런 복잡한 경로를 거쳐 소설을 발표했을까? 결국은 ‘재미’ 때문이라는 게 작중 폴 오스터의 말이다. 그렇다면 뉴욕 3부작의 돈키호테는 퀸, 산초 판사는 (작중) 폴 오스터, 시드 아메테 베넨겔리는 나, 세르반테스는 실제 인물인 폴 오스터가 되나?

‘잠겨 있는 방’의 팬쇼는 여러모로 퀸과 중첩된다. 퀸은 자기 이름으로 꽤 주목받는 작가가 되었지만, 아내와 아이가 죽은 뒤로는 정체를 숨기고 필명으로 추리소설을 발표하며 살아간다. 팬쇼는 친구인 ‘나’에게 자기 아내와 아이, 자신이 그동안 써온 작품들을 ‘맡기고’ 사라진다. 퀸은 빨간 공책을 남긴 채 사라지고, 팬쇼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넘긴 것도 빨간 공책이다.

‘유리의 도시’의 주인공 퀸과 ‘유령들’의 주인공 블루는 어쩌다 사건에 휘말려 스스로 사라지기를 택하게 된다. 그런데 사라지는 곳이란 게 그냥 도시의 부랑자가 되는 것, 평범하고 아늑한 방을 계속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그저 생활 터전을 옮겼을 뿐인데, 그것이 그들을 아는 사람에게는 ‘사라짐’이 된다. ‘잠겨 있는 방’은 거꾸로 사라져버린 팬쇼를 ‘나’가 추적하는 이야기다.

‘유령들’과 ‘잠겨 있는 방’에 공통되는 장면, 사라진 당사자, 곧 블루, 팬쇼는 길거리를 당당히 활보하고, 활보하다가 잘 아는 사람(약혼녀, 팬쇼를 추적하는 ‘나’)과 마주치는데, 약혼녀와 ‘나’는 그들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유리의 도시’에서도 퀸은 사람들이 자주 오가는 길거리에 은신했는데,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라진 사람은 어디 먼 섬나라나 오지가 아니라 도시 속에 있었다.

폴 오스터라는 사람을 찾는 전화가 집에 자꾸 걸려 오는 바람에, 퀸이 어쩌다가 폴 오스터라는 ‘탐정’ 행세를 하게 되었다는, 정체성의 혼란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이야기 속으로 사라진 작가(그런데 퀸은 추적자인가 도망자인가?), 작가의 조종과 감시를 거부하는 주인공(그런데 과연 ‘유령들’의 작가는 블루인가 블랙인가?)을 거쳐, 실제 폴 오스터의 젊은 날 행적([빵굽는 타자기]와 [고독의 발명]에 나오는)을 연상케 하는 팬쇼의 삶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팬쇼가 문을 잠그고 세상을 피해 들어가 있었던 방은, ‘나’의 머릿속이라지 않는가? ‘나’는 팬쇼를 가두어버리고, 이제 벗어나고 싶었나 보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남은 것도 정체성의 문제. 한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사람이 아닌 것.

이 책을 샀을 때(2003년 9월 5일 알라딘에서 택배로 받았다)는 정가가 9500원이었는데 그동안 300원 올랐군. 저작권 표시를 보니 원작은 1985, 1986년에 씌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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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11-05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스터리로 읽었다가 머리를 쥐어뜯었는데 다시 만화까지 봤다는...

가랑비 2006-11-06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오, 만화도 있는 줄 몰랐네요. 건 그렇고, 춤추는 만두 이름표 구여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