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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조너선 프랜즌 지음, 홍지수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5월
평점 :
미국 소설에 관심이 있어서 “자유”라는 소설책을 보게 되었다. 두꺼운 책에 놀랐고, 방대한 내용에 놀랐고, 사랑으로 마지막을 장식한 부분에 감동을 받은 소설이다. 유년 시절의 아픔을 간직한 채 아픔을 극복해 가는 3대에(버글런드 부부 그리고 자식, 그들의 부모님)에 걸친 가족 소설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체면이나 명예나 가문의 영광과 목적을 위해 가족의 한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는다. 그러한 면은 세계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즉, 어느 부유층은 정략결혼을 해야 하고, 패티와 같은 경우는, 차기 시의원 출마를 위해 부모는 자식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 지역의 최고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의원의 아들에게 딸이 강간을 당하는데, 패티 부모는 그냥 묵인하고 지나가게 되는 장면이다. 물론 가해자가 힘없는 누군가의 아들이었다면 사정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파티 문화 때문인지, 미국이라는 사회가 술과 담배와 마약에 많이 노출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패티의 룸메이트와 월터의 룸메이트는 마약과 담배와 술에 취해 살았는데, 병적으로 심각한 모습을 보였다. 그런 반면 같이 살면서도 패티와 월터는 술과 담배와 마약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결국 청소년기에 어떤 정신적 의지력을 길렀느냐에 달려 있음을 패티와 월터를 보면서 알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하게 된 패티와 월터의 중년은 지금 우리나라에서 겪는 중년들의 아픔과도 비슷해 보였다. 아이들은 다 자라고, 그 빈 공간에서 우울증을 앓는 전업주부인 패티는 가보지 않은 다른 길에 호기심을 갖는다. 결국 가지 말아야 할 그 다른 길을 가고 만다. 월터와는 그것으로 인해 헤어져 살게 된다. 그런 와중에 친정 부모들도 돌아가신다. 사이가 멀어졌던 딸과 다시 좋아지고 또, 일을 하게 된다. 열심히 살아가면서 월터에 대한 그리움과 그녀가 죽을 때까지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은 월터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다. 단숨에 사랑만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면 고통과 상처가 덜할 텐데, 그렇지 못한 것이 사람인가 보다. 그러기에 사랑은 많은 아픔을 겪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 용서하고, 화해하며 시간이 흘러간 뒤에 깨달아지는 것인가 보다.
소설을 보면서 느낀 것은 미국이라는 사회가 다른 어느 나라보다 생활자체에 정치성을 띤다는 것이다. 그들의 대화는 민주당이니, 공화당이니, 보수적이니, 진보니, 하면서 가족끼리도 그 편이 나누어져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 부부싸움을 하다가도 이슈가 되는 시사에 빗대어 말을 한다. 그리고 어수선한 구조 속에 맑고 깨끗한 이미지를 가진 월터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혼탁한 정치를 비웃게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고, 월터의 이미지는 아마 미국이란 나라의 이상향을 심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세계를 정화 시키고 보호하는 착한 천사 같은 미국의 이미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