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꿈1-나무의 꿈 / 정현종 

 

그 잎 위에 흘러내리는 햇빛과 입 맞추며 

나무는 그의 힘을 꿈꾸고 

그 위에 내리는 비와 뺨 비비며 나무는 

소리 내어 그의 피를 꿈꾸고 

가지에 부는 바람의 푸른 힘으로 나무는 

자기의 생(生)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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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존재에 대한 자의식을 드러냄. 

시적 대상인 나무를 통해서 

우주적인 공동체 안에서 생명의 자기 실현에 관한 꿈을 꾸는 

화자의 열망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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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기(路程記) / 이육사 

 

목숨이란 마치 깨어진 뱃조각 

여지거지 흩어져 마을이 구죽죽한 어촌(漁村)보담 어설프고 

삶의 티끌만 오래 묵은 포범(布帆)처럼 달아 매었다. 

 

남들은 기뻤다는 젊은 날이었건만 

밤마다 내 꿈은 서해(西海)를 밀항(密航)하는 정크와 같아 

소금에 절고 조수(潮水)에 부풀어 올랐다. 

 

항상 흐릿한 밤 암초(暗礁)를 벗어나면 태풍(颱風)과 싸워가고 

전설(傳說)에 읽어 본 산호도(珊瑚島)는 구경도 못 하는 

그 곳은 남십자성(南十字星)이 비쳐 주지도 않았다. 

 

쫓기는 마음 지친 몸이길래 

그리운 지평선(地平線)을 한숨에 기어오르면 

시궁치는 열대 식물(熱帶植物)처럼 발목을 오여 쌌다. 

 

새별 밀물에 밀려온 거미이냐 

다 삭아 빠진 소라껍질에 나는 붙어 왔다. 

먼 항구(港口)의 노정(路程)에 흘러간 생활(生活)을 들여다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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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의 어두운 삶을 회고함. 

조국을 잃고 세계와 단절되어 빛을 잃었던 시인 이육사가  

자신의 삶의 역정을 노래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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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눈발이라면 / 안도현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살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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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다운 따뜻한 삶, 상처 입은 사람들을 도와주는 함박눈 같은 삶에 대한 의지가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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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가 / 박목월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뭐락카노, 바람에 불려서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뭐락카노 뭐락카노 

썩어서 동아 밧줄은 삭아 내리는데 

 

하직을 말자, 하직 말자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 

니 흰 옷자라기만 펄럭거리고……. 

 

오냐, 오냐, 오냐.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음성은 바람에 불려서 

 

오냐, 오냐, 오냐.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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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느끼는 그리움과 정한. 

경상도 방언으로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과 성숙한 시각을 표현한 시. 

화자는 사별과 한의 정서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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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 도종환  

 

견우 직녀도 이 날만은 만나게 하는 칠석날 

나는 당신을 땅에 묻고 돌아오네. 

안개꽃 몇 송이 땅에 묻고 돌아오네. 

살아 평생 당신께 옷 한 벌 못 해 주고 

당신 죽어 처음으로 베옷 한 벌 해 입혔네. 

당신 손수 베틀로 짠 옷가지 몇벌 이웃에게 나눠 주고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돌아오네. 

은하 건너 구름 건너 한 해 한 번 만나게 하는 이 밤 

은핫물 동쪽 서쪽 그 멀고 먼 거리가 

하늘과 땅의 거리인 걸 알게 하네. 

당신 나중 흙이 되고 내가 훗날 바람 되어 

다시 만나지는 길임을 알게 하네. 

내 남아 밭 갈고 씨 뿌리고 땀 흘리며 살아야 

한 해 한 번 당신 만나는 길임을 알게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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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별한 임에 대한 그리움. 

재회를 준비하겠다는 화자의 마음가짐을 통해 인간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자세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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