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기(路程記) / 이육사 

 

목숨이란 마치 깨어진 뱃조각 

여지거지 흩어져 마을이 구죽죽한 어촌(漁村)보담 어설프고 

삶의 티끌만 오래 묵은 포범(布帆)처럼 달아 매었다. 

 

남들은 기뻤다는 젊은 날이었건만 

밤마다 내 꿈은 서해(西海)를 밀항(密航)하는 정크와 같아 

소금에 절고 조수(潮水)에 부풀어 올랐다. 

 

항상 흐릿한 밤 암초(暗礁)를 벗어나면 태풍(颱風)과 싸워가고 

전설(傳說)에 읽어 본 산호도(珊瑚島)는 구경도 못 하는 

그 곳은 남십자성(南十字星)이 비쳐 주지도 않았다. 

 

쫓기는 마음 지친 몸이길래 

그리운 지평선(地平線)을 한숨에 기어오르면 

시궁치는 열대 식물(熱帶植物)처럼 발목을 오여 쌌다. 

 

새별 밀물에 밀려온 거미이냐 

다 삭아 빠진 소라껍질에 나는 붙어 왔다. 

먼 항구(港口)의 노정(路程)에 흘러간 생활(生活)을 들여다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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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의 어두운 삶을 회고함. 

조국을 잃고 세계와 단절되어 빛을 잃었던 시인 이육사가  

자신의 삶의 역정을 노래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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