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 창가에서 / 김용택 

 

아이들은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왁자지껄 떠들어 대고 

교실 창 밖 강 건너 마을 뒷산 밑에 

보리들이 어제보다 새파랗습니다. 

저 보리밭 보며 창가에 앉아 있으니 

좋은 아버지와 좋은 스승이 되고 싶다 하시던 

형님이 생각납니다. 

 

운동장 가에 살구나무 꽃망울은 빨갛고 

나는 새로 전근 와 만난 

새 아이들과 정들어 갑니다. 

아이들이 내 주위에서 

내게 다가왔다가 저만큼 멀어지고 

멀어졌다가는 어제보다 더 가까이 다가오는 모습들이 

마치 보리밭에 오는 봄 같습니다. 

 

형님, 

이렇게 저렇게 

아이들과 부딪치고 싸우며 

정들어 가는 이 사랑싸움을 나는 좋아합니다. 

다치고 상처받고 괴로워하며 

자기를 고치고 마음을 새로 열어 가는 

이 아름다운 마음의 행진이 

이 봄날에 한없이 눈물겹습니다. 

세상이 새로워지면 사랑이고 행복이지요. 

 

들어갈 벨이 울리자 

아이들이 일제히 내 쪽으로 

붉은 얼굴을 돌립니다. 

저럴 땐 얼굴들이 나를 향해 피는 꽃 같습니다. 

봄이 오는 아이들의 앞과 등의 저 눈부심이 좋아 

이 봄에 형님이 더욱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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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석날 / 곽재구 

 

우리 할머니 

채송화 꽃밭에서 

손금 다 닳아진 손으로 

꽃씨 받으시다가 

 

이승길 구경 나온 

낮달 동무삼아 

하늘길 갔다. 

 

반닫이 속 

쪽물 고운 모시 적삼도 

할머니 따라 

하늘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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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룻배와 행인 / 한용운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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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 박목월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 문 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 문 삼(六文三)의 코가 납작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 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 문 반. 

 

아랫목에 모인 

아홉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 문 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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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 정현종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 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 때 그 사람이 

그 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 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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