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의(文義) 마을에 가서 / 고은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시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서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은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 

모친상을 당한 신동문 시인의 고향인 충복 청원군 문의 마을에 가서 장례식을 주관했던 사실을 배경으로 한 시이다. 

고은 초기시의 허무주의를 벗어나 사회적, 역사적 의식을 갖고 민중적 각성을 보이고 있는 중기시의 초기작이다. 

1연은 죽음과 삶의 길이 어떻게 다른가를, 2연은 죽음과 삶의 길이 하나임을 말하며, 

죽음을 통해 까달은 삶의 진지함과 경건함을 노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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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 / 고은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돌고 와 

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 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지나 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서 덮이노라.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 

내리는 눈 사이로 

귀 기울여 들리나니 대지의 고백.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 

안에서는 어둠이노라.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寂莫)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 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 

오랜 방황의 시기를 지내고 얻은 마음의 평화를 노래. 

온 겨울을 떠돌다가 눈 내리는 풍경, 눈 덮인 길을 보면서 처음으로 평화를 느낀다는 내용. 

즉, 작가는 이 시를 통해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오랜 정신적 방황을 거칠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고은의 허무주의적 시적 경향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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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刺繡) / 허영자 

 

마음이 어지러운 날은 

수를 놓는다. 

 

금실 은실 청홍실 

따라서 가면 

가슴 속 아우성은 절로 갈앉고 

 

처음 보는 수풀 

정갈한 자갈돌의 

강변에 이른다. 

 

남향 햇볕 속에 

수를 놓고 앉으면 

 

세사 번뇌(世事燔惱) 

무궁한 사랑의 슬픔을 

참아 내올 듯 

 

머언  

극락정토 가는 길도 

보일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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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를 통한 번뇌의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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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 이해인 

 

손 시린 나목(裸木)의 가지 끝에 

홀로 앉은 바람 같은 

목숨의 빛깔 

 

그대의 빈 하늘 위에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차 오르는 빛 

 

구름에 숨어서도 

웃음 잃지 않는 

누이처럼 부드러운 달빛이 된다. 

 

잎새 하나 남지 않은 

나의 뜨락엔 바람이 차고 

마음엔 불이 붙는 겨울날 

 

빛이 있어 

혼자서도 

풍요로와라 

 

맑고 높이 사는 법을 

빛으로 출렁이는 

겨울 반달이여. 

 

========== 

서정적이면서도 명상적인 어조로 종교와 예술과 삶을 조화시켜 나가고자 하는 작가의 자세가 잘 드러난다. 수녀 시인 이해인의 작품은 독자가 몰래 엿듣는 듯한 내밀한 독백체, 고백체인 것이 특징이다. 

주제는 구원의 존재로 나타나는 임을 찾고자 하는 구도의 길, 불완전한 삶을 극복하고 완전한 삶을 이루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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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 / 이형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 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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