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편지 / 황동규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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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생 / 김광균  

 

향료(香料)를 뿌린 듯 곱다란 노을 위에 

전신주 하나하나 기울어지고 

 

머언 고가선(高架線) 위에 밤이 켜진다. 

 

구름은 

보랏빛 색지(色紙) 위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薔薇). 

 

목장(牧場)의 깃발도, 능금나무도 

불면 꺼질 듯이 외로운 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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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데기는 가라 /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 곳에선, 두 가슴과 그 곳까지 내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괴붙이는 가라. 

========== 

1연에서는 남아야 할 4월 혁명의 순수함을, 2연에서는 남겨져야 할 동학 농민 운동의 순수성을 노래한다. 강건하고 의지적 어조로 쇠붙이(군대,군사정권,38선)에 대항하며, '외세'와 '알맹이를 더럽히는 허위의식과 가식'을 '껍데기'로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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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 신동엽 

 

봄은 

남해에서도 북녘에서도 

오지 않는다. 

 

너그럽고 

빛나는 

봄의 그 눈짓은, 

제주에서 두만까지 

우리가 디딘 

아름다운 논밭에서 움튼다. 

 

겨울은, 

바다와 대륙 밖에서 

그 매서운 눈보라 몰고 왔지만 

이제 올 

너그러운 봄은, 삼천리 마을마다 

우리들 가슴 속에서 

움트리라. 

 

움터서, 

강산을 덮은 그 미움의 쇠붙이들 

눈 녹이듯 흐물흐물  

녹여 버리겠지. 

 

========== 

시인이 노래하는 '봄'은 곧 통일, 또는 통일이 이루어지는 시대를 의미한다. 그것은 "남해에서도 북녘에서도 / 오지 않는다."라고 시인은 분명하게 끊어서 말한다. '남해'와 '북녘'은 모두 한반도를 둘러싼 외세의 힘(남해 = 미국, 북녘 = 소련)을 말한다. 그러면 봄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제주에서 두만까지 우리의 아름다운 논밭, 즉 우리 동포들이 살고 있는 바로 이 땅에서 이루어진다. 

제3연에서 시인은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을 노래한다. 분단된 민족으로서 우리가 겪고 있는 괴로움을 겨울에 비긴다면, 그것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그것은 '바다와 대륙 밖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기다리는 통일을 그 밖으로부터 바란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따름이다. 민족의 분단에 의한 고통은 바로 그 고통을 겪는 사람들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만 풀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찾아올 통일의 미래(그 날)을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그려 본다. 오늘의 우리 강토를 덮고 있는 것은 '미움의 쇠붙이들', 즉 증오와 불신으로 가득 찬 군사적 대립과 긴장이다. 우리 민족 모두의 마음 속에서 싹트고 훈훈하게 자라나는 봄은 마침내 이 '쇠붙이들'을 모두 녹여 버리고 새로운 통일의 문을 열게 될 것이다. 그 때, 제주도에서 두만강까지 펼쳐진 아름다운 논밭과 삼천리 마을은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라는 간절한 꿈이 담겨 있다. 그런 뜻에서 이 작품은 한 편의 시이면서 오늘의 시대적 상황에 관한 예언적 진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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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 김영랑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詩)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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