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창1 / 정지용 

 

유리(琉璃)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린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 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寶石)처럼 백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肺血管)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山)ㅅ 새처럼 날러 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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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지용 시인이 사랑하는 어린 아들을 잃고서 지은 작품이다. 죽은 아이를 직접 표현한 시어가 하나도 없지만 참신한 이미지와 절제된 시어의 선택이 오히려 시적 화자가 감추려고 하는 슬픔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시인 자신임이 분명한 시적 화자는 밤의 유리창에 서리는 입김과 눈물 고인 눈에 보이는 밤하늘의 별을 통해 죽은 자식의 영혼을 느끼고 있으며, 그와 같은 자신의 심리 상태를 '외로운 황홀한 심사'라는 모순 형용을 통해 전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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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 부근 / 김광균 

 

양철로 만든 달이 하나 수면(水面) 위에 떨어지고 

부서지는 얼음 소래가 

날카로운 호적(胡笛)같이 옷소매에 스며든다. 

 

해맑은 밤 바람이 이마에 나리는 

여울가 모래밭에 홀로 거닐면 

노을에 빛나는 은모래같이 

 

호수(湖水)는 한 포기 화려한 꽃밭이 되고 

여윈 추억(追憶)의 가지가지엔 

조각난 빙설(氷雪)이 눈부신 빛을 발하다. 

 

낡은 고향의 허리띠같이 

강물은 길―게 얼어붙고 

 

차창(車窓)에 서리는 황혼 저 멀―리 

노을은 

나어린 향수(鄕愁)처럼 희미한 날개를 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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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아실 이 / 김영랑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그래도 어디나 계실 것이면, 

 

내 마음에 때때로 어리우는 티끌과 

속임 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 밤 고이 맺는 이슬 같은 보람을 

보밴 듯 감추었다 내어 드리지. 

 

아! 그립다.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 맑은 옥돌에 불이 달아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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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바다 / 신경림

친구가 원수보다 더 미워지는 날이 많다.
티끌만한 잘못이 맷방석만하게
동산만하게 커 보이는 때가 많다.
그래서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남에게 엄격해지고 내게는 너그러워지나 보다.
돌처럼 잘아지고 굳어지나 보다.

멀리 동해 바다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널따란 바다처럼 너그러워질 수는 없을까.
깊고 짙푸른 바다처럼.
감싸고 끌어안고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스스로는 억센 파도로 다스리면서.
제 몸은 맵고 모진 매로 채찍질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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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제 / 김종길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따.
그 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새 나도
그 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라곤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聖誕祭)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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