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덤불 / 신석정 

 

태양(太陽)을 의논(議論)하는 거룩한 이야기는 

항상 태양을 등진 곳에서만 비롯하였다. 

 

달빛이 흡사 비오듯 쏟아지는 밤에도 

우리는 헐어진 성(城)터를 헤매이면서 

언제 참으로 그 언제 우리 하늘에 

오롯한 태양(太陽)을 모시겠느냐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 

가슴을 쥐어뜯지 않았느냐?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 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 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 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서른여섯 해가 지나갔다. 

 

다시 우러러보는 이 하늘에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 

오는 봄엔 분수(噴水)처럼 쏟아지는 태양(太陽)을 안고 

그 어느 언덕 꽃덤불에 아늑히 안겨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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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간행된 《해방 기념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이다. 이 시는 신석정의 초기시가 보여 주었던 자연 친화적 전원시적 경향, 동화적 분위기를 벗어 버리고, 현실을 열정적이고 역동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어둠과 광명이라는 대립적 이미지를 주축으로 하여, 조국 광복이 되었음에도 좌ㆍ우 이념의 대립과 갈등이 끊이지 않던 혼란스런 상황에서 장차 이루어야 할 조국의 미래상에 대한 소망을 나타낸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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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현 / 박두진 

 

아랫도리 다박솔 깔린 산(山) 너머 큰 산 그 너멋 산 안 보이어, 내 마음 둥둥 구름을 타다. 

 

우뚝 솟은 산, 묵중히 엎드린 산, 골골이 장송(長松) 들어섰고, 머루 다래 넝쿨 바위 엉서리에 얽혔고, 샅샅이 떡갈나무 억새풀 우거진 데, 너구리, 여우, 사슴, 산토끼, 오소리, 도마뱀, 능구리 등 실로 무수한 짐승을 지니인, 

 

산, 산, 산들! 누거 만년(累巨萬年) 너희들 침묵이 흠뻑 지리함 직하매. 

 

산이여! 장차 너희 솟아난 봉우리에, 엎드린 마루에, 확 확 치밀어 오를 화염(火焰)을 내 기다려도 좋으랴? 

 

핏내를 잊은 여우 이리 등속이 사슴 토끼와더불어, 싸릿순 칡순을 찾아 함께 들거이 뛰는 날을 믿고 길이 기다려도 좋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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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후반 일제 암흑기에 씌어진 작품으로, 시대적 제약 때문에 상징법을 사용하여 시적 의미를 드러내고 있으며, 반복과 영탄으로 만들어지는 강렬한 리듬감으로 전망이 불투명한 현실 속에서도 민족의 웅대하고 평화스러운 미래상을 추구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작가가 추구하는 세계인 향현(산)은 대립의 관계가 아닌 화합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곳이며 동경의 이상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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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기쁨에게 / 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 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 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 

정호승 시인은 가난한 사람들, 가난하기 떄문에 슬픔에 짓눌려 사는 사람들, 그러나 들풀처럼 강한 생명력을 지닌 사람들의 절망을 노래하면서, 그들에게 보다 나은 세계가 올 수 있다는 넉넉한 믿음을 갖게 해 주려고 노력했다. 이 작품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슬픔'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기쁨'은 이들을 외면하는 부유한 사람들을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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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서기 / 박성룡 

 

처서 가까운 이 깊은 밤 

처지를 울리던 우뢰소리들도 이젠 

마치 우리들의 이마에 땀방울이 걷히듯 

먼 산맥의 등성이를 넘어가나보다. 

 

역시 나는 자정을 넘어 

이 새벽의 나른한 시간까지는 

고단한 꿈길을 참고 견뎌야만 

처음으로 가을이 이 땅을 찾아오는 

벌레 설레이는 소리라도 듣게 되나보다. 

 

어떤 것은 명주실같이 빛나는 시름을, 

어떤 것은 재깍재깍 녹슨 가윗소리로 

어떤 것은 또 엷은 거미줄에라도 걸려  

파닥거리는 시늉으로 

들리게 마련이지만, 

 

그것들은 벌써 어떤 곳에서는 깊은 우물을 이루기도 하고 

손이 시릴만큼 차가운 개울물소리를 

이루기도 했다. 

처서 가까운 이 깊은 밤 

나는 아직 깨어 있다가 

저 우뢰소리가 산맥을 넘고, 설레이는 발래소리가 

강으로라도, 바다로라도, 다 흐르고 말면 

그 맑은 아침에 비로소 잠이 들겠다. 

 

세상이 유리잔같이 맑은 

그 가을의 아침에 비로소 

나는 잠이 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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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서'를 제재로 하여 청신한 가을 기운과 그러한 자연에 동화되어 순수한 영혼을 갈구하는 마음을 잘 형상화한 작품이다. 24절기 중의 하나인 처서는 조석으로 제법 신선한 가을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하는 때인데, 시인은 이를 깨끗하고 서늘한 이미지로 담담하게 형상화하였다. 3연에서 다채로운 이미지로 제시되는 가을 벌레 소리들은, 이후 4연에서 맑은 물의 이미지로 바뀌어 강으로 바다로 합해져 흐르게 된다. 이러한 축제가 마무리되면 시적 화자는 비로소 자연과 동화되어 조용히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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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 김수영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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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은 우리나라 참여시의 선구자이다. 그는 시를 짓는 것을 온몸으로 밀고 가는 것이라고 피력한 바가 있다. 이 시는 자연물인 눈을 대상으로 하여 부정적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인이 의지와 고뇌를 드러내고 있다. 이 시는 '눈은 살아 있다'와 '기침을 하자'의 형식을 변형시켜 반복적으로 제시하고, 순수한 생명(눈)을 불순한 일상생활(가래)과 대조시켜 현실에 대한 울분을 토로하고 있다. 그 이면에는 순수한 삶을 억압하는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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