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기 / 박성룡 

 

처서 가까운 이 깊은 밤 

처지를 울리던 우뢰소리들도 이젠 

마치 우리들의 이마에 땀방울이 걷히듯 

먼 산맥의 등성이를 넘어가나보다. 

 

역시 나는 자정을 넘어 

이 새벽의 나른한 시간까지는 

고단한 꿈길을 참고 견뎌야만 

처음으로 가을이 이 땅을 찾아오는 

벌레 설레이는 소리라도 듣게 되나보다. 

 

어떤 것은 명주실같이 빛나는 시름을, 

어떤 것은 재깍재깍 녹슨 가윗소리로 

어떤 것은 또 엷은 거미줄에라도 걸려  

파닥거리는 시늉으로 

들리게 마련이지만, 

 

그것들은 벌써 어떤 곳에서는 깊은 우물을 이루기도 하고 

손이 시릴만큼 차가운 개울물소리를 

이루기도 했다. 

처서 가까운 이 깊은 밤 

나는 아직 깨어 있다가 

저 우뢰소리가 산맥을 넘고, 설레이는 발래소리가 

강으로라도, 바다로라도, 다 흐르고 말면 

그 맑은 아침에 비로소 잠이 들겠다. 

 

세상이 유리잔같이 맑은 

그 가을의 아침에 비로소 

나는 잠이 들겠다. 

========== 

'처서'를 제재로 하여 청신한 가을 기운과 그러한 자연에 동화되어 순수한 영혼을 갈구하는 마음을 잘 형상화한 작품이다. 24절기 중의 하나인 처서는 조석으로 제법 신선한 가을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하는 때인데, 시인은 이를 깨끗하고 서늘한 이미지로 담담하게 형상화하였다. 3연에서 다채로운 이미지로 제시되는 가을 벌레 소리들은, 이후 4연에서 맑은 물의 이미지로 바뀌어 강으로 바다로 합해져 흐르게 된다. 이러한 축제가 마무리되면 시적 화자는 비로소 자연과 동화되어 조용히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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