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기쁨에게 / 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 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 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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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인은 가난한 사람들, 가난하기 떄문에 슬픔에 짓눌려 사는 사람들, 그러나 들풀처럼 강한 생명력을 지닌 사람들의 절망을 노래하면서, 그들에게 보다 나은 세계가 올 수 있다는 넉넉한 믿음을 갖게 해 주려고 노력했다. 이 작품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슬픔'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기쁨'은 이들을 외면하는 부유한 사람들을 나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