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들면서 편한 것 중의 하나는, 취향이 명확해져서 사소한 일에 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꽤 많은 실패, 시행착오를 반복하다가 결국 알게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 말이다.
카페모카나 카라멜 마끼아또 보다는 아메리카노-조차 배불러서 요샌 자주 에스프레소로 마신다.
CGV보단 아트하우스 모모. 라디오 채널은 93.9.
크로스백 보다는 숄더백. 플레어 스커트보다는 H라인 스커트.
맥주는 레페 브라운, 쏘쥬는 참이슬 후레쉬, 칵테일은 P.S. I love you 뭐 이런 것들.
구두에 대한 내 취향은 이렇다.
굽은 7cm이고, 앞코는 뾰족할 것. 그리고 스웨이드 소재는 피할 것.
결과적으로 신발장엔 색깔만 조금씩 다른 고만고만한 구두들이
얌전히 놓여있긴 하지만, 큰 불만은 없다.
일찍이 한채영은 '꽃남'에서
좋은 구두가 여자를 좋은 곳으로 데려간다나 어쩐다나 하는 말을 남겼으나
내게 구두는,
어쩌면 신고 걸으라고 만든 것이 아닐지도 모르는 형태의 신발인 하이힐과 동의어로,
그것의 역할은 매일같이 나를 싣고 온 서울 시내를 빙글빙글 도는 일이니,
굳이 말하자면 작업화인 셈이다.
매일 신는 하이힐이다보니 내가 7cm 구두를 신고 100m 달리기를 하여도,
20초 안에 들어올 수 있을 것 같다, 는 환상을 갖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않은가.
몇 주 전의 일이다.
외근을 나오는 길에 버스를 탔는데, 이런. 명함이 하나도 없었다.
지난 번에 명함 없이 거래처 갔다가 살짝 곤란한 경험이 있었기에..
집에 잠시 들러 명함을 들고 가기로 결정.
다른 가방 속에 들어있는 명함을 꺼내고,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현관에서
이리저리 구두를 꿰어 신고 나와 부지런히 전철역을 향해 걷고 있었다.
바삐 걷는 와중에,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어, 굽 높이가 살짝 높이가 다른 것 같은데? 굽이 한 쪽만 닳아서 그런가.. '
하고 생각했다.
전철역에 도착하여 플랫폼에 서서 열차가 들어오길 기다리는 동안 발 밑을 내려보았다.
그리고는 풋, 하고 혼자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바짓단 아래로 살짝 구두코가 보였는데, 세상에, 짝이 다른 구두를 신고 있었던 것이다.
한 쪽은 검정색, 한 쪽은 검정에 가깝지만 뭐..약간 광택 있는 짙은 회색.
바지 통이 넓어서 구두가 잘 안보인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랄까.
비슷한 뾰족한 코였지만 한 쪽이 조금 더 뾰족했고,
비슷한 굽 높이였지만 제 짝이 아니니 완벽히 같은 높이는 아니었을테니
걸어오면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던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째. 시간도 빠듯하고, 집에까지 도로 들어가서 짝을 맞춰 신고 나오긴 귀찮으니
그냥 그러고 다닐 밖에. 어쩔 수 없이 하루 종일 짝짝이 구두를 신고 돌아다녔다.
지하철에서, 거래처에서, 그리고 저녁 회의를 위해 들어간 사무실에서..
누군가가 내 짝짝이 구두를 발견하고 웃지 않을까 신경이 쓰였지만..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상담 선생님이 그런 말을 하신 적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나한테 별로 관심 없다고. 괜히 나 혼자 신경 쓰는 것이라고.
내가 연예인 얼굴이 프린트 된 티셔츠를 입고 다닌다 해도,
눈 여겨 보는 사람은 많지 않으며.. 본다 해도 누군지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과연 그런걸까..
짝짝이 구두를 신고 다녔던 하루 종일, 나만 마음 졸였던 것일까? 후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