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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물고기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최수철 옮김 / 문학동네 / 199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예닐곱 살 무렵에 나는 유괴당했다. 그때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너무 어렸던데다가 그 후에 살아온 모든 나날이 그 기억을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7p)"
거대한 서사, <황금 물고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라일라'라는 한 흑인여성의 가혹했던, 어쩌면 생의 끝자락에 올 축복이었을 그 일생의 시작은 이 작은 고백에서부터다.
유괴당해 한 부잣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던 라일라, 열 살 남짓한 그녀가 가진 것은 완벽한 순수함(무지)와 세상에 대한 막연한 공포다. 비록 주종관계였지만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주던 할머니 '랄라 아스마'가 죽자, 라일라는 자신을 음해하려는 그의 며느리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결국 탈출에 성공한다. 그로부터 열 여덟 차례에 걸친, 평생의 방황과 시련이 계속 되리라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처음 라일라의 세상은 거짓말과 도둑질로 시작되었다. 그 다음은 지식과 교육, 그 다음은 춤과 노래와 성으로 이루어진 쾌락.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그렇게 문명과 인간을 구성하는 여러 특징을 알아가며 라일라는 느낀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한 건 자기자신이라는 것을. 그것을 사람들은 '자유'라고 부른다는 것을.
라일라의 자유에 대한 상징은 대부분 여성성으로 드러나는데, 라일라가 느끼는 모성애와 출산의 성스러움이 여성성의 긍정적인 발현이라면, 라일라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수없는 남성들의 성적 학대는 상대적인 위협으로 느껴진다. 물론 이런 의미는 독자 각자의 몫일 것이다. 나는 이렇게 느꼈지만, 내가 느끼지 못했던 수많은 다른 의미들을 각각의 독자들이 읽어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것이 이 신화적인 이야기의 가장 큰 매력일 것이다. 마지막을 읽으면서 나 역시 '그저 아름다운 이야기'라는 인상이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떠나기 전에 나는 바닷속의 돌처럼 매끄럽고 단단한 노파의 손을 만졌다. 단 한 번만, 살짝, 잊지 않기 위하여. (295p)"
라일라라는 황금 물고기는 어쩌면 그 자신은 그냥 대단찮은 물고기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을 겪으면서 그녀가 느꼈던 세상이 황금빛으로 빛나는 바다가 아니었을까.
절망적으로 아름다웠던 그녀의 비늘에 나의 숨결도 섞여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것이 때로는 거짓말과 위선일지라도, 그녀는 울고 소리지르고 껴안으며 언젠가, 어느 날에 나를 스쳐갈 것이다. 한 마리의 황금 물고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