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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 달라고 한다
이지민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4월
평점 :
표지가 걸작인 책이다. 그냥 감각적이고 예쁜 표지라서가 아니라, 책을 읽고난 다음에 느껴지는 여운이 그렇다는 뜻이다.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일상복 차림에 서류가방을 든 여자는, 마치 마리오네뜨처럼 주요 관절마다 실을 매달고 있다. 누군가 움직여주지 않으면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을 것처럼, 여자의 포즈는 위태위태하다. 등엔 날개가 있지만 제 기능을 하기에 날개는 무력해 보이기만 한다. 하늘을 날고 있는 것도 스스로의 의지로 날고 있다기보다, 거대한 손의 검지손가락에 매달려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자가 간절히 잡고 있는 건 '거대한 손'이다. 조형물 같기도 하고, 신적 존재 같기도 한 이 손은, 그리고 저 '줄'은 표지의 바깥에서 그녀를 끌어내린다(또는 끌어올린다). 그러므로 당연하게도 그것들은 운명을 상징한다. 또는 운명보다도 무섭고 거대한 '사회'이거나.
그렇다. 이 책은 '뛰어봤자 벼룩'인 인생들, 바로 우리들의 초상이다.
표제작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 달라고 한다'의 선숙씨는 20대 백수고, '오늘의 커피'의 인옥은 무역회사 경리부에 근무하는 노처녀고, '불륜 세일즈'의 미애는 중년의 전업주부다. 평범해도 너무 평범한 그녀들에게도 그러나 자신들만의 '날개'가 있다.
좋아하는 남자가 다리를 다친 것을 핑계로 그 남자를 집까지 바래다주는 선숙. 친구들에게 말하기 차마 민망한 그녀의 '바래다주기'는 자존심 따위 다 버린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이고 '의지'다. 무역회사 경리부를 그만두고 도시 변두리 작은 골목에서 카페를 운영하려 하는 인옥 역시 그렇다. 소심하고 기댈 곳 없는 노처녀가, 직장도 때려치우고 자신이 가진 전 재산을 탈탈 털어 카페를 차리겠다고 결심했으니, 이 결심 역시 현실에선 '대단한' 수준이다. 중년의 전업주부 미애도 상황은 마찬가지. 젊은 총각을 꼬드겨 낮동안 잠깐의 바람을 피우는 것은 미애에겐 절박하게 가슴 두근거리는 비밀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결국 신은 이 정도의 일탈도 허용하기 싫은가 보다. 선숙은 좋아하던 남자와 맺어지지 않고 '집에 바래다주는 사람'으로만 기억되는 것으로 만족하게 된다. 인옥은 자신이 운영하지 않아야 잘 되는 이상한 커피숍의 사장이 되고, 미애는 동거남(?)과 큰 싸움을 치른 후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게 된다. '대천사'의 주인공 미미도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운 X를 죽일 수 없으며, '키티 부인'의 아저씨도 지긋지긋한 결혼생활을 이어갈 것이다.
어쩌면 나는 오늘 헬로 키티에게 입을 그려줄지도 모르겠다. 늘 '거대한 손'이 우리를 인도하겠지만,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살아야 한다고, 나는 헬로 키티에게 낙서할지도 모른다. 비록 날지 못하지만 그게 내가 가진 '날개'라고 위안하면서. 아직 '날개'가 남아있다는 것에 안도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