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깅이 - 청소년을 위한 <지상에 숟가락 하나> 담쟁이 문고
현기영 지음, 박재동 그림 / 실천문학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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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상의 숟가락 하나' - 책을 펼치면 활자에 갖혀있던 제주의 자연이 서서히 눈 앞에 살아난다. 거친 바위, 용연, 초원, 돌담, 나무에 인간의 삶이 담겨있지 않은 것이 없다. 한 생명이 나타나는 소설의 시작처럼 작가는 제주의 자연이 품은 생명력을 한 인간의 성장의 동력으로 그려냈다.  

  '똥깅이' 표지에 쓰인 '청소년을 위한 지상에 숟가락 하나'를 보며 책장에 꽂혀있던 '지상에 숟가락 하나'를 다시 꺼내들었다. 책 마지막 속지에 적어 놓은 짧은 감상이 눈에 띄었다. '똥깅이'의 첫장을 넘기며 궁금했던 것도 그것이었다. 서사성과 서정성이 버무려진, 제주의 자연이 살아있는 듯 느껴지던 그 묘사를 어떻게 청소년용으로 바꿔놓았을까?  

 결론으로 말하자면 그 아름다운 묘사와 이미지들은 그 느낌 그대로 살아있다는 것이다. 참 이상하다. 분명 '지상에 숟가락 하나'보다 가벼운 것 같은데 그 뜨뜻하고 애잔한 느낌은 그대로다. 아마 그것은 이야기의 한 부분을 잘라낸다고 변하는 게 아니라 작가의 필력이 그대로 담기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4.3 항쟁의 학살과 관련된 부분이나 똥깅이와 그 친구들이 성에 눈뜨는 부분은 일부 생략되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4.3항쟁 부분은 아이들이 감당하기 어려워 생략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상에 숟가락 하나'에 비해 가볍고 밝은 느낌이다. 4.3항쟁은 간략한 각주로만 사건에 대해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4.3 관련 내용이 빠진 것은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 역사적인 사건은 이야기를 통한 전달력이 훨씬 더 강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4.3항쟁은 이 소설을 통해 아이들이 궁금증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만족해야 할 듯 하다.

  판형도 한 손에 쏙 들어오고 편집도 아이들이 보기 편하게 시원시원하다. 특히 박재동 화백의 익살맞으면서도 정다운 삽화는 소설의 내용을 유쾌하게 뒷받침하면서도 어른들의 애잔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이 소설에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청소년 소설이지만 서사의 범위가 깊고 풍부하다는 점이다. 4.3 항쟁부터 전후의 혼란기 속에서 겪는 한 인간의 삶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책을 통한 간접체험이라는 교과서적인 이유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책을 읽으며 그 시대의 시공간에 충분히 빠져들게 된다. 또한 60여년을 거슬러 시작되는 이야기지만 요즘 아이들이 느끼는 성장기의 외로움, 모험심, 두려움, 방황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람들 시선 의식하며 괜히 고독한 척 하는 게 어디 그 시대의 유행이던가. 그러니 시공간에 대한 호기심과 성장기의 공감대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다고 해 두자. 물론 성인 독자를 대상으로 출간된 뒤 청소년 소설로 다시 출간되어 그렇다고 하지만 그래도 청소년 독자에게 다가가는 시도로는 좋지 않을까. 어쨌든 요즘 청소년 소설이 지나치게 현재의 상황에만 한정이 되어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는 보편성을 담고 있지 못하다는 걱정을 씻어줄만한 소설이다.  

 또한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그 고통을 거쳐온 제주의 자연을 참으로 섬세하고 유려하게 펼쳐낸 작가의 필체는 '똥깅이'에도 여전히 살아있다. 제주의 자연 속에서 아픔을 고스란히 체험하고 그 체험을 내면화하며 성장한 '똥깅이'가 전혀 어둡고 음울해 보이지 않는 이유도 아마 제주의 자연에 애정을 듬뿍 담아 그려낸 작가의 필체에 있지 않을까.  

 제주 자연 속에 영원히 살아 꿈틀대는 한 인간의 유년의 기억이 다시 눈 앞에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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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소녀 카르페디엠 8
벤 마이켈슨 지음, 홍한별 옮김, 박근 그림 / 양철북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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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남미 과테말라 내전에 관한 소름끼치도록 잔혹한 이야기.     

'나무소녀'라 불리는 가브리엘라는 숲에서 생명력을 얻고 나무와 함께 성장하는 마야 소녀이다. 하지만 반군과 정부군의 내전이 시작되고  이들의 원시적 공동체적인 삶은 철저하게 유린되고 파괴된다. 우연히 몸을 피한 나무 위에서 소녀는 미국의 지원을 받는 정부군이 마을 사람들에게 가하는 만행을 목격하게 된다. 겨우 멕시코 난민 수용소에 도착하지만 소녀에게는 하루를 생존하기 위한 동물적 본능만 남아 있을 뿐 어떠한 꿈도 희망도 없다. 하지만 이 곳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삶을 발견하게 된다.

생명력과 인간성을 대변하는 '나무소녀'에 비해 정부군은 역겨울정도로 잔혹한 폭력과 파괴본능을 대변한다. 소설 시작 부분에서 등장하는 원주민 마을의 행복한 공동체의 모습에 비해 결말의 난민 수용소 모습은 객관적인 상황으로만 보자면 비극이다. 철저히 유린당한 삶과 파괴된 자연의 모습이 처참하다. 36년간이나 계속된 과테말라 내전을 책 한 권으로 해피엔딩으로 결말짓는 것은 말이 안될 터이다. 다만 다시 나무에 올라 내면의 상흔을 치유할 용기를 얻는 가브리엘라의 모습에서, 폭력으로는 결코 지배할 수 없는 인간의 원형적 삶, 희망에 대한 끈질긴 생명력을 찾을 수 있다.

책을 읽고 아이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내용은 다양하다. 특히 최근들어 쏟아지고 있는 청소년 소설이 지나치게 '지금', '여기'의 문제에만 관심을 두고 있어 다루는 소재들이 다들 비슷하고 좁은 한계가 있다는 지적을 감안할 때, 이 소설은 세계 곳곳에 가해지고 있는 폭력과 인간의 삶에 대한 보편적인 문제를 다루고 고민하게 한다.   

또한 청소년 소설 답게 간결하고 평이한 문장으로 쉽게 읽힌다. 사건의 전개 역시 늘어지지 않고 빠르게 전개 되어 지루하지 않다. 아마 이 책을 읽고 난 아이들은 과테말라 내전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될 것이다.  

  책을 덮고 나서 과테말라 원주민 마을에 가해진 학살과 유린의 현장이 한국 전쟁 중의 양민 학살, 4.3 제주도민 학살과 자연스레 겹쳐졌다. 그것은 여전히 지금까지 미 제국주의가 세계를 지배해온 방식이고 또 여전히 팔레스타인 가자에 가해지고 있는 파괴와 폭력의 모습이다.  

그러니 이 소설을 화두로 전세계적으로 가해지고 있는 미제국주의의 폭력과 야만성에 대해 토론할 수도 있을 듯.  

내가 가브리엘라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선생님이 살해당할 때, 정부군이 마을을 습격하여 만행을 저지를 때, 수용소에서 남을 밀어내야 구호품을 얻을 수 있는 상황에서, 수용서에 남을 것인가 떠날 것인가..) 

과테말라 내전이 일어난 역사적 상황에 대해 알아 보기 (근대 이후 남미를 미국 자본이 어떻게 지배하고 대륙을 착취해왔는지, 남미 국가 곳곳에서 일어난 내전의 배후 세력인 미국이 어떻게 정부군을 지원했는지..)

과테말라 내전에 대하여 

 과테말라 내전은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내전으로, 유엔 발표에 따르면 내전 과정에서 20만 명 이사이 숨지거나 실종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이 지원하는 과테말라의 반민주적 군사 정권에 대항하는 반군의 투쟁으로 시작되었으며, 1996년 반군 세력인 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과 과테말라 정부가 평화협정을 체결하면서 마침내 피로 물든 36년간의 내전이 끝이 났다.  

  내전 기간에 450개 이상의 인디오 마을이 불에 타 사라졌고 수만 명이 학살당했다. 먼저 남자들이, 그 다음 여자들이, 그리고 아이들이 죽음을 당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아이들이 만행을 목격했고 일부는 탈출해서 자신들이 본 것을 증언했다. 미국인 대부분이 이 사건을 그저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치부하고 말지만 미국인들도 책임이 크다. 미국 정부가 과테말라 마을을 습격한 군대를 훈련시키고 무기를 공급했기 때문이다. 

  미군은 의회청문회에서 공산주의에 대항해 싸운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학살을 옹호했지만, 죽은 사람들 대부분이 공산주의가 뭔지도 몰랐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이 이들을 무장시켰다는 것도 거짓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가족과 고향을 지키기 위해 겨우 마체테나 작대기만을 든 채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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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 창비시선 238
문태준 지음 / 창비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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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라는 게 근본적으로 원한이 있어야 돼. 영혼의 상처. 후벼 파서 팔아먹을
상처가 있어야 되는데, 난 너무 평탄하게 살았어.”

  언젠가 주말의 명화 ‘질투는 나의 힘’을 보는데 문성근이 술을 마시다가 말했다. 이불 감고 뒹굴면서 보다가 멈칫했다. 영화 속에서 문학잡지 편집장인 그가 문학과 작가에 대해 많은 말을 하는데 그 중 가장 가슴에 꽂히는 말이다. 지난 번 모임 생각이 났다. 시 창작 교실 작품들을 보면서 선생님들과 나누었던 말들.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건 삶의 절실한 체험 때문일까, 천재적인 상상력과 구성능력 때문일까.

 나는 굴곡 없이 안정된 삶을 살아 온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지만 때론 그런 평범한 삶이 ‘국어교사로서 체험이 결핍된 삶’이라는 콤플렉스로 다가올 때가 있다. 나에겐 영혼의 상처랄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국어교사는 매일 글을 써야 한다는데 문성근이 던진 말 한마디에 나는 ‘백날 써 봐야 귀여니 수준 밖에 안 될지 몰라.’라며 그날 밤을 설쳤다.

 그동안 '맨발'시집은 두세 번을 읽었는데 선뜻 감상문을 쓸 수 없었다. 그래서 매번 가방에 넣어 다니며 전철이나 버스에서 읽고 또 읽고 하느라 시집이 너덜너덜해 졌다. 감상문을 쓸 수 없었던 이유는 가슴에는 와 닿지만 내게 이런 시골의 체험이 없어서라고 생각했다. ‘아, 어쩜 이 순간을 이렇게 관찰해서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 ‘참 평온한 시로구나.’ 생각은 하면서도 그 이상 느껴지지 않는 것이 내게 작가와 같은 시골의 체험이 없어서 라고만 생각했다.

 다음날 지하철에서 ‘영혼의 상처’를 되새기며 문태준의 『맨발』중에서 마음에 와 닿아 표시해 둔 시들을 다시 펴 보았다. 시인에게 영혼의 상처는 어떤 것일까.  


맨발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어물전에 놓인 개조개에서 화자는 자신의 어머니, 혹은 아버지를 떠올렸으리라. 천천히 발을 거두는 모습만큼 천천히 살아온 그의 삶은 결코 명민하지도 않고 약삭빠르지도 않은 삶이다. 움막 같은 집에서 가족을 부양하는, 야망도 꿈도 없이 흘러온, 무능하고 초라한 그의 삶이지만 화자는 그가 살아온 삶에 대해 경건한 자세를 갖고 있다. 맨발로 길에 나서 발이 부르트지만 움막 같은 집에서 위안을 얻는 그의 삶에서 삶의 진정성과 고귀함을 발견해서가 아닐까. 그래서 화자는 죽은 부처의 발을 조문하듯 건드린다. 

   1학기에 수업을 한 「가정」이 떠올랐다. 진도에 쫓겨 참 재미없는 수업을 했었는데 읽기 전에 아이들과 자신의 가정을 떠올리고 그에 대해 글을 쓰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 집은 강변에서 허름한 구멍가게를 한 적이 있었다. 여닫을 때마다 금속이 긁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나는 미닫이 문과 아침 일찍 일을 나가시던 작업복 차림의 아버지, 가게 구석에 놓인 쥐약, 가게 구석에 딸린 어두운 부엌에서 빨래를 하시던 어머니의 한숨이 떠오른다. 생일이 같은 동네 아이의 유치원 생일 파티에 다녀와 투정을 부리던 나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서글픔이 이 시의 개조개의 삶과 닮아있다. 내 이야기를 끝냈을 때 눈물을 훔치는 아이들도 있었으니 내게도 상처가 있다면 있었다. 다만 그것을 확인하기까지가 참 오래 걸렸다. 사람들은 힘든 기억을 빨리 잊고 싶어 하니 말이다. 하지만 영혼의 상처가 있다고 다 시가 써 지면 얼마나 좋을까. 


맷돌

마룻바닥에 큰 대자로 누운 농투사니 아재의 복숭아뼈 같다

동구에 앉아 주름으로 칭칭 몸을 둘러세운 늙은 팽나무 같다

죽은 돌들기리 쌓아올린 서러운 돌탑 같다
가을 털갈이를 하는 우리집 새끼 밴 염소 같다
사랑을 잃은 이에게 녹두꽃 같은 눈물을 고이게 할 것 같다
그런 맷돌을, 더는 이 세상에서 아프지 않을 것 같은 내 외할머니가 돌리고 있다  


  맷돌 하나로 이렇게 진실한 삶의 모습들을 표현해 낼 수 있음이 놀랍다. 투박함, 고단함, 낡음, 설움, 비루함, 생명력, 상처들을 세상의 아픔과 고통을 다 겪어 이제 더 아플 것도 없을 것 같은 그래서 더 서러운 외할머니가 만져주고 있다. 시집 전체에서 모성에 대한 애착을 많이 보이는 작가에게 외할머니는 보다 더 각별한 존재였을 것이다. 내게도 외할머니는 어려서는 약손으로 무엇이든 가능케 하는 존재였고 지금은 지난날의 아픔과 슬픔을 가슴에 동여매고 살아가는 약하고 초라하지만 여전히 그 그늘이 그리운 존재이다. 화자는 수십년 돌려온 맷돌처럼 낡은 외할머니의 손길로 자신의 상처를 치유 받고 싶어 한다. 또 세상의 모든 아픔을 다 겪어 이제는 너무 작고 약해 진 외할머니를 화자 자신이 안아드리고 싶을 것이다.

「맨발」이나 「맷돌」에서 보이듯 그의 시에는 아픔만 있는 게 아니라 아픔을 보듬어 줄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있어서 좋다. 자연에 대해 관찰하고 이를 ‘아’하는 탄성이 나올 정도로 절묘하게 비유를 하면서도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인간의 삶에 대한 성찰과 연민으로 이어가는 것이 좋다. 그래서 삶의 고단함을 표현한 시를 읽으면서도 마음이 따스하고 편안해지는지 모른다.

  그는 낡고 초라한 것들에 대한 상처를 끄집어 내고 있다. 하지만 문태준의 시를 읽으면 그 상처라는 것이 꼭 반드시 가슴이 저리고 설움과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이 아니어도 됨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정서로 보면 그런 감정보다는 그저 밑바닥에 깔려 있다가 아주 가끔 스멀스멀 배어나오는 슬픔이 더 호소력이 있으니 말이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상처라는 것은 낡고 쓰러져가는 시골의 모습이나 유년 시절의 기억들이다. 또한 그 모습을 아름답게 나타낸다.

  그러고 보면 내게도 영혼의 상처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상처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 상처를 후벼 팔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할 뿐. 하지만 꽃, 나무, 돌 들을 보면서 그런 상처를 느낄 수 있다는 게 바로 시인의 감성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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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1-22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은 늘 읽고 평을 하기가 힘든 것 같아요. 저도 맨발을 한 일년전쯤 읽고 아팠다 라는 느낌이 남아있습니다. 저도 작가의 나이가 되면 저리 담담히 아파할 수 있을지요.

푸른날개 2009-01-22 13:08   좋아요 0 | URL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것에 대한 애정과 믿음이 있기에 담담해 질 수 있겠지요. 휘모리님도 세상 낮은 곳에 대한 애정이 많아 보입니다.
 
간절하게 참 철없이 - 2009 제11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창비시선 283
안도현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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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거  


나는 능선을 타고 앉은 저 구름의 독거(獨居)를 사랑하련다  

 

염소떼처럼 풀 뜯는 시늉을 하는 것과 흰 수염을 길렀다는 것이 구름의 흠이긴 하지만,  

 

잠시 전투기를 과자처럼 깨물어먹다가 뱉으며, 너무 딱딱하다고, 투덜거리는 것도 썩 좋아하고  

 

그가 저수지의 빈 술잔을 채워주는 데 인색하지 않은 것도 좋아한다, 떠나고 싶을 때는 능선의 옆구리를 발로 툭 차버리고 떠나는 것도 좋아한다     

 

이 세상의 방명록에 이름 석 자 적는 것을 한사코 싫어하는,  


무엇보다 위로 치솟지 아니하며 옆으로 다리는 쭉 펴고 앉아, 대통령도 수도승도 아니어서 통장의 잔고를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저 구름,     

 

보아라, 백로 한 마리가 천천히 허공이 될 때가지 허공이 더 천천히 저녁 어스름에게 자리를 내어줄 때까지 우두커니 앉아 바라보기만 하는     

 

 

저 구름은, 바라보는 일이 직업이다    

 

혼자 울어보지도 못하고 혼자 밤을 새보지도 못하고 혼자 죽어보지도 못한 나는 그래서 끝끝내,  

 

저 구름의 독거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무심(無心)과 무욕(無慾)에 대한 동경과 찬사. 아름답다. 구름과 같은 삶. 나도 요즘 이런 상태를 꿈꾼다. 불편한 것을 투덜거리긴 하지만 그것 역시 과하지 않고, 인색하지 않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나버리는 것. 다가오는 것, 떠나가는 것 붙잡지 않고 가두려고 하지 않는 무심함과 무욕. 냉정함이 아니라 담담한 마음을 갖고 싶다. 

 

가을의 소원

적막의 포로가 되는 것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 지는 것  


아무 이유 없이 걷는 것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

마른풀처럼 더 이상 뻗지 않는 것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혼자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가을이라는 계절에서 격정과 혼란의 가라앉음, 갈무리를 발견하는 문학작품들이 많다. 하지만 나의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시큰둥하고 별 볼일없는 여름을 보냈더니 뜨거움과 혼돈의 가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쉽게 진정되지 않는 마음, 미움과 연민, 자괴감과 무력감이 온 몸을 휘감는 느낌이다. 아, 그래서 나도 소원이다. 이 시처럼 이렇게 가을처럼 한 해가 저물어 가는 것. 사실 1월에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는 가을의 적막함이 참 슬펐던 것 같다. 시집 귀퉁이에 ‘가을의 이미지가 이리도 슬프다니...’라고 적은 것으로 보아 아마 그랬나보다.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에 밑줄을 그어 놓았는데 그때는 더 이상 그리워할 것도, 애틋함도 남아있지 않는 상태는 추억도 희망도 버리는 것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이 시를 읽으며 ‘제발 좀 이랬으면..’하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사람 마음이 참 변덕스럽긴 하다. 그래도 어쩌랴.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은 ‘적막함’, ‘게으름’, ‘이유 없는 방황’, ‘혼자 울기’, ‘더이상 열정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임을... 하지만 ‘잠자리처럼 임종’은 사양하고 싶은 걸 보니 그래도 아직 버텨낼 힘은 남아 있는 것이겠지.

  지난 가을은 육체적 정신적 공황상태였다.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무언가를 손에 잡은 채로 움직이고 있지만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를 때가 많았다. 누가 나의 상태를 물어보면 ‘모르겠어. 모르겠어.’만 연발했다. 그런 즈음 안도현의 『간절하게 참 철없이』를 읽으며 한결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물론 나를 몹시도 괴롭히던 일들이 어느 정도 해결된 뒤에 읽었기 때문에 그런 효과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주로 시나 소설을 통해 상처를 치유해왔던 나의 특성으로 볼 때 안도현의 시집 역시 그런 효과가 있다고 봐야겠다.

  마치 한 편의 한시처럼 정갈한 이미지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고 할까. 하찮고 소박한 것에서 고귀함을 발견하는 시인의 섬세한 관찰력에 감탄을 하다가도 (「공양」), 그 고귀함을 능청스럽고 익살스럽게 표현하는 시인의 재치에 슬며시 웃음이 나기도 한다. (「독거」) 2부의 음식을 제목으로 한 시들은 푸짐하고 넉넉한 외할머니의 손맛을 떠올리게 한다. 읽는 것만으로도 식욕이 당기는데 그 욕망이 천박하지 않고 푸근하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은 시인이 시 곳곳에 버무려 놓은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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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1-22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집을 읽으면서 왠지 아 안도현도 나이가 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푸른날개 2009-01-22 13:08   좋아요 0 | URL
더 편안해지고 고요해진 느낌? ^^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살아가기
목수정 글, 희완 트호뫼흐 사진 / 레디앙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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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도발적인 제목이다. 그래서 더 끌렸는지 모른다.

이제 서른이 되었다. 이십대의 마지막이라는 어설픈 감상에 사로잡혀 힘겨웠던 스물아홉이 되던 해에 비하면, 서른이 되는 것은 그냥 하루밤이 지나가는 것과 같았다. 친구 말대로 유난떨 것 없이 그냥 나이값해야 하는 새로운 해가 시작된 것 뿐이었다. 다만 스물아홉이 끝날 무렵 몹시도 나를 지치게 했던 관계를 끊어내며 혼란과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래도 아픈만큼 성숙한다는 말이 맞긴 하나 보다. 서른이 되며 나이값을 하느라 그랬을까, 관계를 돌아보며 나의 삶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어서 그랬을까. 

 혼란을 겪으며 그간의 삶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동안 내가 내가 남성중심사회에서 얼마나 조신하고 참한 여성의 이미지를 강요받아왔는지, 그리고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얼마나 나의 욕망을 누르고 살아왔는지 알게 되었다. 그 결과 나는 제도권안에서 어느정도 인정받는 여성이 되었는지는 모르나, 서른이 되어 돌아본 나의 자아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남성 의존적 자아였다. 어쩌면 나를 지치게 했던 그 관계에서 내가 더 당당하지 못하고, 더 결단력있게 행동하지 못했던 것도 나의 불안한 자아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결핍을 채우려 여성심리학, 페미니즘 서적을 찾아 읽다가 만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언제나 일탈을 꿈꾸지만 꿈만 꿀 뿐 틀을 깨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 책의 제목이 상당히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게다가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살아가기' 라니! 이 문장에는 우리 사회의 편견과 제도에 대한 상당한 도전이 담겨 있다. 외국 남자와 팔짱만 끼고 전철을 타도 불편한 시선을 던지는 사회에서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살아가기다. 책을 읽으며 그녀의 도전과 용기에, 여성으로서 남성중심사회에 가하는 날카로운 비판에, 결코 '운동권'이 아니었으나 어느 '운동권'보다 진보적인 그녀의 생각과 행동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장 하나하나에 담긴 세상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은 그녀가 결코 삶을 관념적으로 살지 않았음을, 온몸으로 부딪히고 깨지면서 얻어낸 철학임을 알 수 있었다. 새겨두고 싶은 문장에 표시를 해 두었더니 한 두 군데가 아니다. 

  조금 일찍 이 책을 만났더라면 내 삶이 좀 더 자유롭고 좀 더 혁명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이다. 이 책을 통해 가부장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으로 태어나 어떤 고정관념에도 매이지 않고 내 스스로의 가치와 선택을 믿고 살아가는 것, 그런 삶의 자세에 한 발 내딛을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물론 그녀처럼 국경을 넘어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선택한 것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사회적 제약이나 안락함을 위해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갈망하는 그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그녀가 국경을 넘은 것과 같은 수위의 모험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어느 순간에 나의 선택을 믿을 수 있는 용기를 깊은 곳에 숨겨둔 기분이랄까.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결코 오래된 노래 가사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내 영혼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가치임을 일깨워주었다. 

  또 하나, 진정한 진보란 관념적인 구호를 외칠 뿐 정작 삶에서는 관습과 허위로 일관하는 '운동권'이 아니라 삶의 작은 영역에서부터 진보를 실천하는 '생활 좌파'를 말하는 것이다. 모순 덩어리의 사회를 개혁하는 것은 거친 구호와 단결된 집단의 투쟁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시민 세력의 거대한 힘과 투쟁은 사회를 변혁하는 강한 수단이다. 하지만 그 힘의 원동력은 개인의 삶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대학 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갖고 있는 혼란- 조직을 위해 개인의 취향이나 욕망은 희생되어야 한다는 논리에 대한 불편함-이 이 책을 통해 해소되었다. 

   마지막으로 우리 나라의 문화 정책에 대한 제안이다. 그녀는 문화와 예술이야 말로 공공서비스 영역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전적으로 그녀의 생각에 지지한다. 예술은 인간의 감성을 창조적이고 풍부하게 한다. 감성이 풍부하고 상상력이 충만한 사람의 삶은 물질적인 조건을 떠나서 삶이 여유롭고 풍요롭다. 문화 예술이야말로 건강한 삶,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데 반드시 필요한 분야이다. 의료, 교육은 말할 것 없고 문화 역시 공공 서비스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자본이 문화적 취향마저 획일적으로 강요하는 이 시대에 과연 언제쯤 가능할까.

  책을 읽는 동안 그녀의 용기에 감탄하고 그녀의 시도에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끊임없이 나를 따라다닌 나를 향한 질문 '나는?' 불합리하고 비상식적인 질서라는 것을 알면서도 거대한 구조 속에 순응하며 살아온 '나'에 대한 질문은 답을 찾지는 못했다. 하지만 해답을 찾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다만 답이 있는 곳을 향하도록 방향을 잡게 도와주는 것일 뿐. 혁명적인 삶을 살아갈 용기는 여전히 없다. 하지만 혁명이라는 것이 아주 작고 미약한 것, 내 삶에 대한 도전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생활좌파.

 

'내가 투자한 시간, 투자할 돈, 그렇게 해서 딴 학위가 나에게 확실한 미래를 보장할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더 분명하고 안전한 선택을 매순간 계산해야 한다면, 한 순간도 인생은 나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 불만은 터뜨리고 욕망은 충족시키면서 사는 것이 건강한 삶이다. 그러나 내가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진정한 나의 욕망인지 아니면 모두가 욕망해야 하는 것이라고 정해진 일반적 욕망의 리스트일 뿐인지를 가늠해 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p.100

그 어떤 세월도 또 다른 세월을 위한 볼모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나의 20대, 30대, 40대는 모두 똑같이 소중하고, 나의 모든 시간들에 적당한 노동과 적당한 즐거움을 배분해야 할 의무가 내게 있다. -p.110

가우디의 뛰는 심장이 느껴지는 곳곳에서 뱃속의 칼리에서 말했다.
"그 어떤 고정관념에도 현혹되지 말고 자유롭게, 완전히 너 자신만의 가치와 의지로 선택한 너의 인생을 누리렴." -p.135

최근들어 깨달은 좌와 우에 대한 가장 명확한 정의는 전자는 생명을 지향하고 후자는 죽음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정신의 무한한 자유를 추구하고 모든 살아있는 것들과 조화로운 상생을 꿈꾸며 깨어있는 존재가 좌파라면, 텔레비전 앞에서 일생의 대부분을 보내면서 일찌감치 자신의 영혼을 무덤 속에 파묻고 보수언론의 선동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생태를 파괴하는 것이 발전이라고 믿는 쪽이 우파다. 우파가 가장 싫어하는 좌파의 부류가 생태주의자라는 사실이 어떻게 우연일까. -p. 290

삶을 즐길 줄 모르면 좌파가 아니고, 하면서 신나지 않으면 운동이 아니다. 모든 엄숙주의와 모든 '묻지마 일벌레'들은 결국 위선으로 그 세월을 보답한다. 휴일도 반납하고, 밤잠도 안 자는 파란지붕 집의 사람들이 엄청 사로를 치고 있는 중이다. 당연하다. 사람은 일하는 기계로 태어나지 않았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기계가 될 수 없듯이.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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